“유영 씨, 해외지사에 좀 급한 일이 생겨서 출국해야 할 것 같아요. 같이 못 가줘서 정말 미안해요.”전화 너머 박연준이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에요, 일이 더 중요하죠.”“정말 미안해요, 돌아오면 우리 꼭 제대로 데이트해요!”“알겠어요.”이유영은 아쉬웠지만, 받아들였다. 그래야 박연준이 미안함을 잊고 일어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운전을 이어갔다. 비록 박연준의 부재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나온 이상 혼자라도 일단 즐겨 보기로 했다.잠시 후, 전시장에 도착한 이유영이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고급스러운 외제차 한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이한이 차에서 내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이유영은 얼른 다시 자기 차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뒤에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강이한이 그녀를 불러세웠다.“박연준, 최소 삼 년은 못 돌아올 거야. 함께 전시회 볼 사람 없어져서 아쉽게 됐네?”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설마?”그녀의 뇌리에 좀 전에 박연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해외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 일이 강이한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녀의 분노한 표정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내가 대신 같이 관람해 줄게.”이유영이 매섭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분노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끌어올랐다.“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예상치도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유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해외로 나가게 된 이유가 강이한 때문이라면, 박연준은 어쩌면 상상이상의 위험에 빠질지도 몰랐다. 이유영은 다급한 손길로 박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락은 되지 않았다.“소용없어, 비행기 이미 떠났을 거야.”“너…!”이유영은 분노에 말문이 막혔다. 강이한이 재혼을 제안할 때만해도 그저 잠시 이성을 잃어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는 상
잠시 후, 카페에서 소은지와 만난 이유영은 오늘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들은 소은지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뭐? 박 대표님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나도 모르겠어!”강이한이 무슨 수로 박연준이 청하시를 떠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지금 상황이 이유영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것! 강이한은 진심으로 재결합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소은지는 이유영이 걱정됐다.“은지야, 너도 잠깐 휴직하고 청하시를 떠나 있는 건 어때?”“설마 나한테까지 그러겠어?”소은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은 청하시에서 거의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가 이루자 한다면,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원하는 것을 위해 얼마든지 가혹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이유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지음은 정리됐으니, 이제 너랑만 해결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이혼해준 것도 네가 하도 조르니까 임시방편으로 일단 해준 것 인 것 같아.”“네 말은?”“강이한은 처음부터 널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거야.”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처음부터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고?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린 이유영은, 그 말이 상당히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너 당분간 여기 좀 떠나 있는 게 낫지 않을까?”“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어!”“….”“지금 내가 맡은 일이 한두 개도 아니고, 어떻게 떠나.”홀몸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이유영의 뒤엔 오로라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자리까지 있었다. 당장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럼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네.”소은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이한이 마음먹은 이상,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카페에서 나온 이유영은 머릿속이 온통 소은지가 했던 말들로 가득했다.“한지음은 정리됐으니, 이제 너랑만 해결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이혼해준 것도 네가 하도 조르니까 임시방
이유영은 자신이 크나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수 있는 관계였다면, 지난 생에 불타 죽는 최후를 맞을 일도 없었을 테니!그날 저녁, 순정동.집에 도착하자, 집사가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오늘 많이 늦으셨네요.”“네, 별 일 없었죠?”이유영이 가방을 집사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저녁 식사는 준비되어 있습니다.”손목시계를 보니, 이미 저녁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이유영이 주방으로 걸어가며 집사에게 말했다.“앞으로는 좀 더 늦게 준비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앞으로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정상 퇴근이 어려울 게 뻔했다. 식탁 위엔 정말 간단한 저녁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정국진이 봤다면 또 잔소리를 했겠지만, 이유영은 이것이 가장 편했다. 그녀는 이른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빠듯한 자금으로 어렵게 학업을 마쳤다. 그렇다 보니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식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순간,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밖에 무슨 소란인지 알아봐 주세요.”“네.”집사가 현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갑자기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강이한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호원들이 뒤따라왔다. 현관은 순식간에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장 몸싸움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강 대표님,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저희 아가씨도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이때, 집사가 나서서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유영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팽팽한 분위기가 흘렀다. 여기서 이유영의 명령 한마디면 경호원들은 당장이라도 강이한에게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의 성격이라면 절대로 어떠한 준비도 없이 쳐들어 올 리 없었다. 그는 모험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집사님, 그래도 손님이니까 내버려 두세요.”이유영이 손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제야 경호원들과 집사가 뒤로
강이한이 이유영의 손에서 거의 뺏다시피 젓가락을 가져갔다. 이유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강이한의 뺨을 향한 순간, 반응할 새도 없이 시야가 바뀌었다. 강이한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것이었다. “너무 화내지 마, 응?”“강이한, 죽고 싶어?”이유영은 그나마 자유로운 무릎을 이용해 그의 중심 부위를 가격하려 했지만, 그것마저 제지당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집사와 경호원들이 다급히 달려왔다.“아가씨!”“당장 이거 못 놔?”이유영이 경호원들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을 놓아주기는커녕, 경고하듯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경호원 열 명이 온다 한들,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아?”“….”이유영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과거 그녀가 학생이었던 시절, 소매치기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구해줬던 사람이 강이한이었다. 강이한은 도둑을 2층에서 내동댕이쳐 거의 죽일뻔했다. “단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다들 따라오지 마세요!”이유영이 깊게 숨을 들이쉰 뒤, 결심한 듯 말했다. 모든 것이 그가 재결합을 제안하고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지음의 눈은 이제 희망이 없었다. 이제 강씨 가문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물질적인 지원뿐이었다. 신경 쓸 일을 덜게 된 강이한은 이제 온전히 이유영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이유영은 낮에 소은지가 했던 말이 실감이 났다. 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을 놓아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강이한은 강제로 이유영을 차에 태웠다.“홍문동엔 절대로 안 가!”“다 준비해 놨어.”“강이한,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이유영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소은지와 얘기한 바가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강이한도 차에 올라탔다. 그런 다음 창문을 내린 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이유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었다. “네 의견 따위 중요하지 않아. 넌 오늘부터 홍문동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손을 무시한 채 홍문동으로 들어갔다. 강이한은 그런 이유영의 태도에 화를 내기는커녕 피식 웃으며 뒤를 따랐다. 고용인들이 이유영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모두 처음 보는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전에 있었던 사람들은 강이한이 모두 해고했기 때문이다.식탁엔 이유영이 좋아하는 요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요리들이 나오고 있었다.“어때? 순정동 것보다 낫지?”“겨우 저녁 한 끼에 이렇게까지 해야 해?”그녀는 절약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군다나 회귀를 겪은 후로, 그녀는 습관처럼 과거에 좋아했던 것들을 피하고 다녔다. 음식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 강이한을 증오하며 아이를 밴 채 불길 속에서 죽어가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였었다. 그녀는 이렇게 해서라도 과거의 불행했던 세월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씻겨내고 싶었다. “너 아직 모르나 본데.”강이한이 태연하게 이유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뭘?”이유영은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박연준이면 몰라도, 넌 절대로 이 청하시에서 나갈 수 없어. 그리고….”강이한이 말을 하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너의 그 잘난 삼촌도 물론 이 청하시에 들어올 수 없을 거야.”“….”이유영은 분노를 넘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너 그, 그게 무슨 소리야?”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박연준이 떠올랐다. 박연준도 청하시를 나가게 만들었는데, 정국진이 출입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강이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유영은 절망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적어도 우리 둘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전까진, 아무도 못 올 거야.”강이한이 여유롭게 요리들을 먹으며 말했다. 분노의 폭풍우에 빠진
강이한이 여유롭게 굴면 굴수록 이유영의 분노는 점점 올라갔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유영의 어떤 반응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앞에 그릇을 비운 강이한이 여유롭게 그릇을 집사에게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느긋하니 걸어가 이유영을 품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꽉 끌어안았다. ”이 나쁜 새끼! 당장 떨어지지 못해?”“지금 너한테 선택지가 있는 거 같아? 위기의식이 없네?”“너…!”“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직도 모르겠어? 두 번 다시 이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나 봐?”강이한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안에 가시가 가득 돋아나 있었다. 그는 지금 이유영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유영이 어떤 반격을 하던, 전혀 끄덕없을 것이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한지음의 문제가 남아있었던 예전과 달리, 그는 지금 매우 이성적이었으며 여유가 넘쳤으니까. 그는 앞으로 온전히 이유영에게 신경을 쏟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이 개자식!”이유영은 당장이라도 강이한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의 품에서 발버둥 치는 것밖에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이유영이 겨우 손 한쪽을 빼내 그의 뺨을 후려치려던 순간, 한 발 더 빠르게 강이한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강이한은 도발 하듯 아주 느긋한 태도로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이유영은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내가 그동안 너무 봐줬지?”“너 내가 얼마나 독한지 모르지? 이래봤자….”“원래 아름다운 장미일수록 가시가 더 뾰족한 법이지.”이유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이한이 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모든 것이 소은지가 추측했던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강이한의 손길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이유영은 반항하려 몸을 비틀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어느덧 주변은 두 사람만 남은 채 한산했고, 강이한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집사를 불러 상처를 처리하게 했다. 집사는 화들짝 놀라서 무슨 영문인지 묻고 싶었지만 강압적인 분위기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후, 시욱이 도착했다.“대표님, 부르셨습니까.”강이한은 이유영의 여권과 신분증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유영은 그 모습을 보고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저건 대체 언제 강이한의 손에 들어갔는지 아무런 감도 잡히지 않았다.“가. 열두 시 전에 돌아오는 거 잊지 말고!”이유영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에서 여권을 빼앗았다.강이한의 지시를 받은 이시욱이 그녀를 공항까지 호송했다.그의 감시 하에 이유영은 티켓을 끊고 탑승 수속을 마쳤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탑승구를 나가는 순간 공항 직원이 그들을 막아섰다.“죄송하지만 이유영 씨는 지금 청하시를 떠날 수 없습니다.”“왜죠?”“저희도 이유를 모르겠는데 여권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공항 직원이 공손히 그녀에게 말했다.이유영은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또 강이한이었다.이시욱은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고 다가가서 부축하려고 손을 뻗었다.이유영은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꺼져!”강이한 신변의 심복이었기에 그에게 좋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생각할수록 화가 났다.그는 진심이었다.이시욱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대표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여기 일을 마무리하면 바로 홍문동으로 돌아가라고요.”“꺼져! 꺼지라고!”화가 폭발한 이유영은 자신이 있는 곳이 공항이라는 것도 잊고 목이 터져라 욕설을 퍼부었다.‘진정하자! 진정해야 해!’지금 홍문동으로 돌아가면 당장 칼을 들고 강이한을 찌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이시욱도 강이한의 신변에서 오래 일했기에 이유영이 지금 거의 폭발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이대로 이유영을 홍문동으로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고 판단하고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이시욱이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싫으면 홍문동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봐!”불길함을 느낀 소은지가 그녀를 재촉했다.이유영은 그녀에게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자초지종을 들은 소은지도 치를 떨었다.“젠장! 그 자식 미친 거 아니야?”“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소은지가 물었다.일이 힘들어질 것을 알았지만 이혼까지 한 마당에 강이한이 이토록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어쩌면 이혼도 그가 그냥 홧김에 저질러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건 아닌 것 같아서 그 화를 모두 이유영에게 풀어대는 게 분명했다.“이제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어떡해?”이유영이 울먹이며 말했다.“외삼촌한테도 차마 말하지 못하겠어.”“왜?”소은지가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전남편에게 이토록 시달림을 당하면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당연지사였다.그녀는 부모가 없으니 외삼촌이 곧 친정식구인데 이런 상황에서 외삼촌한테 사실을 숨긴다니 갑갑했다.이유영도 소은지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한숨만 나왔다.“강이한은 지금 미쳐 날뛰고 있어. 한지음을 해결하고 여유가 생기니까 본격적으로 나를 저격하기 시작한 거야. 그 인간 성격에 아마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했을 거야.”그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섣불리 외삼촌한테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혹시라도 더 큰 함정이 외삼촌을 옥죄일까 봐 두려웠다.소은지는 이유영의 뜻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을 품었다.“설마 네 외삼촌인데 그렇게까지 하겠어?”소은지가 느끼기에 강이한은 이유영과의 재결합을 원하고 있었다.그렇다면 정국진은 그가 호감을 사야 할 상대인데 그에게 공격적으로 나갈 이유가 없었다.“그 인간이 워낙 미친 사람이라서 그래.”이유영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생각할수록 화만 치밀었다.그날 밤, 이유영은 밤새 잠에 들 수 없었다.다음 날,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회사로 출근한 그녀의 안색은 안쓰러울 정도로 어두웠다.“대표님.”“무슨 일이죠?”“기업 감사 기관에서 나왔습니다.”“뭐라고요?”그
모이산의 코코넛 주스는 유명해서 파리 수도에서도 판매될 정도였다. 임소미도 피부에 좋다며 코코넛 주스를 즐겨 마셨다.“정말 신선하고 은은한 맛이네!”“원액 그대로라서 그래. 원래 이런 맛이야.”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정말 맛있어.”코코넛 주스의 맛은 확실히 좋았다. 적어도 이제는 익숙해진 맛이었다.예전에는 하얀 색감과 끈적한 질감이 부담스러워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이곳의 코코넛 주스는 맑고 달콤했다. 마치 자연 그대로의 신선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멀리서 강이한과 박연준이 광장 한가운데 펼쳐진 캠프파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제 가야 해?”강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난 먼저 갈게.”박연준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듯했다.“안 가봐?”강이한이 물었다.“여진우가 곁에 있으니까. 이유영은 내가 안 가는 걸 더 좋아할 거야.”박연준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강이한은 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실 박연준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박연준을 마주할 때마다 냉정했고 그의 접근을 극도로 거부하는 태도는 박연준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다행히도 유영이의 곁에는 정씨 가문이 있어.”강이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박연준도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정씨 가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혼자 남겨졌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용감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가 곁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면서도 이유영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념은 확고했다.한 번 넘은 선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듯,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갑옷을 두른 채 자신을 지켜냈다.강이한은 돌아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만약 나와 유영이 사이에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었다면...”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그럼에도 박연준은 이해했다.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강이한은 온 힘을 다해 이유영을 붙잡았을
“나랑 이유영이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미래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포기할게.”강이한은 여진우의 품에 안긴 이유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온전히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다.박연준의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오고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저녁노을은 붉은빛을 띠며 마치 영원히 기억될 것처럼 아름다웠다. 강이한은 저 붉게 물든 노을처럼 이유영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마음 깊이 새겼다.“내가 왜 수술을 내일로 잡았는지 알아?”“...”“나는 해 뜨는 아침의 유영이를 보고 싶었어. 희망 속에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아침 해는 희망을 상징한다.그는 이유영이 희망 속에서 빛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네 곁에 그렇게 오래 있을 동안 그런 모습 한 번도 보지 못했어?”“유영이에겐 절망의 순간들이 너무 많았어.”강이한의 말에 박연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강이한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지난 시간 동안, 이유영은 강이한 곁에서 수많은 절망을 겪었고 그 절망은 결국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그 어떤 상황도 그 절망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내일 수술이 끝나면, 그녀의 미래는 희망으로 채워질 것이며 비로소 진정한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강이한은 떠났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고 우지와 우현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유영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여진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활기찬 분위기가 가득했고 이유영은 모닥불이 뿜어내는 따스한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다.“입 벌려.”옆에서 여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할 수 있어!”“입 벌려!”여진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호해졌다.“...”결국 이유영은 조용히 입을 벌렸고 여진우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구운 고기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고
여진우의 품에 안기자 이유영은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부터 이유영은 이런 안정적인 가족의 따뜻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위로를 받고 있었다.“수술은 언제로 잡혔어?”“내일.”“그러면 여기서 같이 있어 줄게.”“좋아.”여진우가 곁에 있어 준다는 말에 이유영의 불안은 잦아들고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여진우는 이유영을 더욱 꽉 껴안았다.그는 이유영이 겪은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수술이 성공해도 그 고통은 평생 그녀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맞은편 건물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은 나란히 서서 여진우 품에 안긴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눈에는 슬픔과 씁쓸함이 서렸고 목소리는 이미 쉰 듯했다.“나는 유영이의 세상에 나만 있다고 생각했어.”“그래서 평생 너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렇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이유영은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 믿어왔다.하지만 결국, 강이한의 생각은 틀렸다.이유영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강이한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그녀 곁에 가족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상 용서는 거의 불가능했다.“내일 이후로...”박연준은 말을 멈추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내일 이후로 어떻게 될까?내일 이후, 그는 이유영이 견뎌온 그 숨 막히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내일 이후... 박연준, 유영이 곁에는 이제 네가 유일해!”강이한은 진심으로 결심했다.이유영을 떠나 박연준을 우천시로 보냈을 때부터 그는 이미 완전히 결심했다.이유영의 곁에서 떠나기로.“너 정말...”박연준은 불안한 마음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예전부터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 말해왔다.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있었던 걸까?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그는 한때, 이유영과의 관계가 이렇게 변할 거
10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그 10년 동안 그녀와 강이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이유영만이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수많은 달콤한 순간들은 오히려 더 깊은 아픔이 되어 되돌아왔다.“7년의 장기 연애를 거쳐 결혼까지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그런 경우는 드물었다.그녀와 강이한은 그 7년 동안 정말 달콤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고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굳이 말하자면 그 7년 동안 그녀가 겪었던 불쾌한 일은 오직 강씨 가문뿐이었다.하지만 결혼 전 그들의 추억이 모두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결혼하고 나서 많은 것들 이 변했다.“우리가 결혼하게 된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이었다는 걸, 난 상상도 못 했어...”그런데 어떻게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인생에서 청춘은 고작 십 년에 불과하다.자기의 모든 청춘을 강이한에게 바쳤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당연히 견딜 수 없었다.여진우가 물었다.“연서 말하는 거야?”“그래, 연서!”요즘 이유영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심지어 밤의 악몽에서까지 존재했던 이름이었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10년 동안, 나는 그 사람 그림자에 불과했어!”태양처럼 빛나던 소중한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었다.여진우는 위로하려던 말을 다시 한번 억눌렸다. 지금 이유영에게 어떠한 말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결코 박연준과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이한은 그녀에게 가장 빛나는 청춘을 주었고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구원자처럼 나타났다.결국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소중하게 여겼던 청춘은 결국 타인의 그림자에 불과했고 박연준은 그녀의 청춘을 무너뜨린 뒤 지옥으로 끌어냈다.“처음부터 나 혼자 견뎌냈어...”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그녀가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다는 사실이었
이유영은 침묵했다.그저 조용히 앉아 있는 이유영의 모습에 여진우조차도 그녀의 마음속 생각을 알 수 없었다.여진우는 등나무 의자를 끌어 그녀 옆에 앉았다.“파리는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그래서?”“이번에 돌아갈 때, 지난번처럼 그렇지 않을 거야.”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관심이 섞여 있었다.“...”이유영은 지난번을 떠올렸다.그건 엔데스 명우의 사건과 얽힌 일이었다. 사실 그 일은 정씨 가문에서 걱정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엔데스 가문은 정국진이 절대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는 가문이었고 그래서 이유영이 그 일에 휘말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은 현재 박연준과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것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었다.“알겠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어.”잠시 후, 이유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여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알아줘서 다행이야. 아버지는 항상 너를 걱정하고 있어. 모두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그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 씁쓸함이 번져갔다.그녀는 결국 가족들에게 가장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일은 그녀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이런 현실을 깨닫고 이유영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내가 모두를 실망하게 했어!”이 말을 하며 이유영의 가슴은 더욱 괴로웠다.“너는 잘못한 것이 없어.”잘못한 것이 없다고?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로 인해 세 사람의 얽힘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도대체 누가 잘못한 것일까?모든 것을 계산한 박연준이 잘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감정은 계산할 수 없다.강이한의 잘못이 더 클까?그도 당연히 잘못이 있었다.“유영아.”“응?”“오빠 말 들어. 그만 놓아줘!”여진우는 고독해 보이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관심한 목소리로 말했다.증오일까?물론 증오했다!강이한이나 박연준이 그녀에서
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를 곤란에서 구해주는 것은 단순히 너희가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다 연서 때문이잖아!”‘연서’라는 두 글자에서 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박연준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렇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의 분석 속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진 사실처럼 여겨졌다.지금 이유영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고 그와 강이한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모두 연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녀에게 쏟는 모든 마음도 연서에게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박연준, 기억해! 나는 이유영이야!”“...”“내가 받는 너의 호의는 연서에게 전달되지 않아!”이유영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알아, 나도 다 알고 있어!”박연준은 씁쓸한 목소리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사실 알고 있었다.언제부터 알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이미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네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네가 모르길 바랄 뿐이야!”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고 있더라도 이유영은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게 지금의 이유영이다.“아직 할 이야기 더 남았어?”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며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조금 전에 박연준이 이야기하자고 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유영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지금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그의 마음속에는 더욱 깊고 섬세한 아픔이 퍼져갔다.이유영의 웃음 속에 비꼬는 의미가 더욱 강해졌다.박연준은 이유영의 그런 웃음을 보며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그들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숲속 길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여진우였다. 그가 왜 여기에 오게 된 걸까?여진우를 보자 박연준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여진우는 이미 테라스로 올라갔다.이유영은 발소리를 듣고 미
박연준은 이유영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과거에 강이한과 이유영의 삶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했든, 그는 강이한을 변호하고 싶었다.“유영아, 사실은...”“내가 너희들이 연서 때문에 내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유영아!”“텅 비었어!”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격렬한 감정이 이유영의 마음을 휩쓸었고 이유영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상황으로 오게 된 것일까?이유영은 믿을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7년 동안, 그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아?”이유영은 증오가 아닌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하지만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었을까?지금 생각해 보니, 있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아이러니했다.이유영은 비웃으며 말했다.“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한지음이 나타났을 때, 그래서 한지음이 우리의 관계를 건드렸을 때, 나는 너무나 놀랐지.”7년 동안, 강이한은 이유영을 얼마나 사랑했을까?강이한이 이유영의 세상에 나타난 순간부터, 마치 이유영을 수렁에서 끌어올린 것처럼 보였다.그는 이유영의 세상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그 존재가 얼마나 두려운지 아무도 몰랐다.“유영아.”박연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연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은 계속해서 말했다.“그는 매일 나와 함께 저녁을 먹었어. 매일 나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었지. 명절에도 그는 집에 가지 않았어. 그는 내 곁에 있었고 가족이 없었던 나는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어.”그 당시 이유영은 아무것도 없었고 강이한은 강인한 모습으로 이유영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박연준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그는 강이한이 이유영의 세상에서 그런 존재였다는 사실을 몰랐다.“나를 여행에 데려갔어. 내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가 주었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이름만
하지만 이유영은 공기 중의 기운을 감지하고 눈살을 찌푸렸다.우지는 얼굴이 굳어졌다.이유영의 후각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예민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냄새에는 매우 민감했다.우지는 이유영을 위해 옷을 조심스럽게 골라주었다.“아가씨, 다 느끼셨죠?”그렇다. 이유영은 이미 알고 있었고 눈살을 찌푸렸다.우지는 이유영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옷 갈아입혀 줘요.”이유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우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 이유영의 기분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강이한이 왔었고 방에는 그의 향기가 가득했다. 이유영은 그 냄새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왜 온 걸까?아침 식사 자리에서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음식을 정성스럽게 덜어주었다.“수술은 내일이야. 오늘은 맛있게 먹어. 내일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으니까.”수술 전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수술 후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식욕이 없을 것이다.이유영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조용히 식사했고 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말을 멈췄다.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 속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햇살이 좋으니, 햇볕을 좀 쬐자.”박연준은 이유영을 테라스로 데려갔고 따뜻한 햇살이 이유영에게 내리쬐자 이유영의 마음도 좋아졌다.“유영아.”“응.”“얘기 좀 할까?”박연준은 고민하다 이유영에게 말했다.“우리 사이에 할 얘기 없어.”항상 그랬다.박연준이 말을 하려고 하면 이유영은 항상 지친 모습을 보였다.박연준은 많은 말들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내일은 수술 날이었고 박연준은 마음속에 억눌렀던 말들을 터트렸다.“너와 강이한 사이는 정말 이대로 끝인 거야?”더 이상 기회는 없는 걸까?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을 듣자, 이유영은 손을 꽉 쥐었고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반응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의 관계는 명확했다.“그 사람, 어젯밤에 왔어?”“응.”“박연준, 너희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과거의 기억은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아팠다.그래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 모두 직면하기 힘들다. 아름다움과 함께 불행이 동반되기 때문이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과거는 그들에게 너무나도 무거웠고 그 무게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사실 나는...”“연준아!”“...”‘연준아’라는 한 마디가 그의 모든 원망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던가?과거 서주에서 그들은 어떤 존재였던가?만약 그들이 연서 때문에 갈라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서주는 이렇게 되었을까?그들의 연합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고 누구도 그들로부터 비열한 이익을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잘 돌봐줘.”강이한은 오랜 시간 담배를 깊이 들이켠 후,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눌렀다.박연준이 이유영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강이한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안심하고 이유영을 박연준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그와 이유영 사이에는...사람은 너무 진실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진실하게 생각하다 보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받아들일 용기도 잃게 된다.그는 이유영이 자신에게 가진 혐오감을 보았고 그로 인해 얽히고 싶다는 용기조차 잃었다.만약 이유영이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면 그는 그녀의 눈 속에서 자신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뚜렷이 볼 수 있을 것이다.그것들은 그가 그녀의 세계에서 저지른 악행의 증거였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것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그녀의 눈 속에 있는 혐오감은 그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또다시 불편하게 할 수 없었다.“그리고, 유영이를 존중해줘!”강이한은 박연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 박연준이 이유영의 마음속에 들어가길 바랐다. 현재 이유영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 누구도 진심으로 그녀를 대할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정씨 가문도 마찬가지고 그와의 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녀 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