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음이 이유영의 이복동생이었다니, 강서희는 충격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진영숙은 즉시 강이한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연락했다. 잠시 후, 강이한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얼른 거실로 향했다.“빨리 처리해야 해. 너부터 일단 강주로 가 있어!”“알겠어!”강서희는 고분고분 답했지만, 지금 당장 움직일 생각은 없는지 소파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곧이어 뒤를 떠미는 진영숙의 손길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지체하지 말고 바로 가!”“알겠다니까.”강서희가 아쉬운 눈길로 집을 나섰다. 강이한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진영숙은 그런 강이한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한지음, 강주에 가서 살게 할까 해.”진영숙이 앞뒤 설명도 없이 말했다. “갑자기 왜요?”강이한이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넌 이미 알고 있었지? 한지음과 이유영의 사이.”그 말을 들은 강이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영숙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너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니?”“….”“이게 얼마나 큰 일인데, 왜 말을 안 했어!”진영숙이 흥분에 숨을 거칠게 쉬었다. 만약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진영숙이 한지음을 집까지 끌어들이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이 소문이 아직 밖에 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역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면, 강씨 가문은 얼마나 우스워졌을까?“이쯤 되면 한지음이 널 구해준 한지석의 동생이라는 것도 걔가 직접 퍼트린 게 아닌가 싶다. 그래야 우릴 압박해 집으로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강이한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그건 아니에요!”강이한이 단호히 말했다.“그래, 누가 그랬든 지금 중요하진 않지. 일단 한지음은 강주로 보내야 해, 알겠어?진영숙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날카롭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침묵했다. 얼마 전에 이유영과의 다툼에서 그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고 답했었다. 어떻게 눈도 보이지 않는 사람
“유영 씨, 해외지사에 좀 급한 일이 생겨서 출국해야 할 것 같아요. 같이 못 가줘서 정말 미안해요.”전화 너머 박연준이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에요, 일이 더 중요하죠.”“정말 미안해요, 돌아오면 우리 꼭 제대로 데이트해요!”“알겠어요.”이유영은 아쉬웠지만, 받아들였다. 그래야 박연준이 미안함을 잊고 일어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운전을 이어갔다. 비록 박연준의 부재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나온 이상 혼자라도 일단 즐겨 보기로 했다.잠시 후, 전시장에 도착한 이유영이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고급스러운 외제차 한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이한이 차에서 내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이유영은 얼른 다시 자기 차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뒤에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강이한이 그녀를 불러세웠다.“박연준, 최소 삼 년은 못 돌아올 거야. 함께 전시회 볼 사람 없어져서 아쉽게 됐네?”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설마?”그녀의 뇌리에 좀 전에 박연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해외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 일이 강이한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녀의 분노한 표정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내가 대신 같이 관람해 줄게.”이유영이 매섭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분노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끌어올랐다.“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예상치도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유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해외로 나가게 된 이유가 강이한 때문이라면, 박연준은 어쩌면 상상이상의 위험에 빠질지도 몰랐다. 이유영은 다급한 손길로 박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락은 되지 않았다.“소용없어, 비행기 이미 떠났을 거야.”“너…!”이유영은 분노에 말문이 막혔다. 강이한이 재혼을 제안할 때만해도 그저 잠시 이성을 잃어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는 상
잠시 후, 카페에서 소은지와 만난 이유영은 오늘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들은 소은지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뭐? 박 대표님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나도 모르겠어!”강이한이 무슨 수로 박연준이 청하시를 떠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지금 상황이 이유영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것! 강이한은 진심으로 재결합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소은지는 이유영이 걱정됐다.“은지야, 너도 잠깐 휴직하고 청하시를 떠나 있는 건 어때?”“설마 나한테까지 그러겠어?”소은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은 청하시에서 거의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가 이루자 한다면,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원하는 것을 위해 얼마든지 가혹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이유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지음은 정리됐으니, 이제 너랑만 해결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이혼해준 것도 네가 하도 조르니까 임시방편으로 일단 해준 것 인 것 같아.”“네 말은?”“강이한은 처음부터 널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거야.”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처음부터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고?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린 이유영은, 그 말이 상당히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너 당분간 여기 좀 떠나 있는 게 낫지 않을까?”“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어!”“….”“지금 내가 맡은 일이 한두 개도 아니고, 어떻게 떠나.”홀몸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이유영의 뒤엔 오로라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자리까지 있었다. 당장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럼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네.”소은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이한이 마음먹은 이상,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카페에서 나온 이유영은 머릿속이 온통 소은지가 했던 말들로 가득했다.“한지음은 정리됐으니, 이제 너랑만 해결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이혼해준 것도 네가 하도 조르니까 임시방
이유영은 자신이 크나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수 있는 관계였다면, 지난 생에 불타 죽는 최후를 맞을 일도 없었을 테니!그날 저녁, 순정동.집에 도착하자, 집사가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오늘 많이 늦으셨네요.”“네, 별 일 없었죠?”이유영이 가방을 집사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저녁 식사는 준비되어 있습니다.”손목시계를 보니, 이미 저녁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이유영이 주방으로 걸어가며 집사에게 말했다.“앞으로는 좀 더 늦게 준비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앞으로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정상 퇴근이 어려울 게 뻔했다. 식탁 위엔 정말 간단한 저녁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정국진이 봤다면 또 잔소리를 했겠지만, 이유영은 이것이 가장 편했다. 그녀는 이른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빠듯한 자금으로 어렵게 학업을 마쳤다. 그렇다 보니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식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순간,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밖에 무슨 소란인지 알아봐 주세요.”“네.”집사가 현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갑자기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강이한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호원들이 뒤따라왔다. 현관은 순식간에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장 몸싸움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강 대표님,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저희 아가씨도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이때, 집사가 나서서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유영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팽팽한 분위기가 흘렀다. 여기서 이유영의 명령 한마디면 경호원들은 당장이라도 강이한에게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의 성격이라면 절대로 어떠한 준비도 없이 쳐들어 올 리 없었다. 그는 모험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집사님, 그래도 손님이니까 내버려 두세요.”이유영이 손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제야 경호원들과 집사가 뒤로
강이한이 이유영의 손에서 거의 뺏다시피 젓가락을 가져갔다. 이유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 강이한의 뺨을 향한 순간, 반응할 새도 없이 시야가 바뀌었다. 강이한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것이었다. “너무 화내지 마, 응?”“강이한, 죽고 싶어?”이유영은 그나마 자유로운 무릎을 이용해 그의 중심 부위를 가격하려 했지만, 그것마저 제지당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집사와 경호원들이 다급히 달려왔다.“아가씨!”“당장 이거 못 놔?”이유영이 경호원들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을 놓아주기는커녕, 경고하듯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경호원 열 명이 온다 한들,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아?”“….”이유영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과거 그녀가 학생이었던 시절, 소매치기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구해줬던 사람이 강이한이었다. 강이한은 도둑을 2층에서 내동댕이쳐 거의 죽일뻔했다. “단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다들 따라오지 마세요!”이유영이 깊게 숨을 들이쉰 뒤, 결심한 듯 말했다. 모든 것이 그가 재결합을 제안하고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지음의 눈은 이제 희망이 없었다. 이제 강씨 가문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물질적인 지원뿐이었다. 신경 쓸 일을 덜게 된 강이한은 이제 온전히 이유영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이유영은 낮에 소은지가 했던 말이 실감이 났다. 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을 놓아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강이한은 강제로 이유영을 차에 태웠다.“홍문동엔 절대로 안 가!”“다 준비해 놨어.”“강이한,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이유영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소은지와 얘기한 바가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강이한도 차에 올라탔다. 그런 다음 창문을 내린 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이유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었다. “네 의견 따위 중요하지 않아. 넌 오늘부터 홍문동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손을 무시한 채 홍문동으로 들어갔다. 강이한은 그런 이유영의 태도에 화를 내기는커녕 피식 웃으며 뒤를 따랐다. 고용인들이 이유영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모두 처음 보는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전에 있었던 사람들은 강이한이 모두 해고했기 때문이다.식탁엔 이유영이 좋아하는 요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요리들이 나오고 있었다.“어때? 순정동 것보다 낫지?”“겨우 저녁 한 끼에 이렇게까지 해야 해?”그녀는 절약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군다나 회귀를 겪은 후로, 그녀는 습관처럼 과거에 좋아했던 것들을 피하고 다녔다. 음식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 강이한을 증오하며 아이를 밴 채 불길 속에서 죽어가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였었다. 그녀는 이렇게 해서라도 과거의 불행했던 세월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씻겨내고 싶었다. “너 아직 모르나 본데.”강이한이 태연하게 이유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뭘?”이유영은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박연준이면 몰라도, 넌 절대로 이 청하시에서 나갈 수 없어. 그리고….”강이한이 말을 하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너의 그 잘난 삼촌도 물론 이 청하시에 들어올 수 없을 거야.”“….”이유영은 분노를 넘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너 그, 그게 무슨 소리야?”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박연준이 떠올랐다. 박연준도 청하시를 나가게 만들었는데, 정국진이 출입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강이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유영은 절망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적어도 우리 둘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전까진, 아무도 못 올 거야.”강이한이 여유롭게 요리들을 먹으며 말했다. 분노의 폭풍우에 빠진
강이한이 여유롭게 굴면 굴수록 이유영의 분노는 점점 올라갔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유영의 어떤 반응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앞에 그릇을 비운 강이한이 여유롭게 그릇을 집사에게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느긋하니 걸어가 이유영을 품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꽉 끌어안았다. ”이 나쁜 새끼! 당장 떨어지지 못해?”“지금 너한테 선택지가 있는 거 같아? 위기의식이 없네?”“너…!”“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직도 모르겠어? 두 번 다시 이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나 봐?”강이한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안에 가시가 가득 돋아나 있었다. 그는 지금 이유영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유영이 어떤 반격을 하던, 전혀 끄덕없을 것이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한지음의 문제가 남아있었던 예전과 달리, 그는 지금 매우 이성적이었으며 여유가 넘쳤으니까. 그는 앞으로 온전히 이유영에게 신경을 쏟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이 개자식!”이유영은 당장이라도 강이한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의 품에서 발버둥 치는 것밖에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이유영이 겨우 손 한쪽을 빼내 그의 뺨을 후려치려던 순간, 한 발 더 빠르게 강이한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강이한은 도발 하듯 아주 느긋한 태도로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이유영은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내가 그동안 너무 봐줬지?”“너 내가 얼마나 독한지 모르지? 이래봤자….”“원래 아름다운 장미일수록 가시가 더 뾰족한 법이지.”이유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이한이 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모든 것이 소은지가 추측했던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강이한의 손길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이유영은 반항하려 몸을 비틀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어느덧 주변은 두 사람만 남은 채 한산했고, 강이한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집사를 불러 상처를 처리하게 했다. 집사는 화들짝 놀라서 무슨 영문인지 묻고 싶었지만 강압적인 분위기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후, 시욱이 도착했다.“대표님, 부르셨습니까.”강이한은 이유영의 여권과 신분증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유영은 그 모습을 보고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저건 대체 언제 강이한의 손에 들어갔는지 아무런 감도 잡히지 않았다.“가. 열두 시 전에 돌아오는 거 잊지 말고!”이유영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에서 여권을 빼앗았다.강이한의 지시를 받은 이시욱이 그녀를 공항까지 호송했다.그의 감시 하에 이유영은 티켓을 끊고 탑승 수속을 마쳤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탑승구를 나가는 순간 공항 직원이 그들을 막아섰다.“죄송하지만 이유영 씨는 지금 청하시를 떠날 수 없습니다.”“왜죠?”“저희도 이유를 모르겠는데 여권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공항 직원이 공손히 그녀에게 말했다.이유영은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또 강이한이었다.이시욱은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고 다가가서 부축하려고 손을 뻗었다.이유영은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꺼져!”강이한 신변의 심복이었기에 그에게 좋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생각할수록 화가 났다.그는 진심이었다.이시욱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대표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여기 일을 마무리하면 바로 홍문동으로 돌아가라고요.”“꺼져! 꺼지라고!”화가 폭발한 이유영은 자신이 있는 곳이 공항이라는 것도 잊고 목이 터져라 욕설을 퍼부었다.‘진정하자! 진정해야 해!’지금 홍문동으로 돌아가면 당장 칼을 들고 강이한을 찌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이시욱도 강이한의 신변에서 오래 일했기에 이유영이 지금 거의 폭발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이대로 이유영을 홍문동으로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고 판단하고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이시욱이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싫으면 홍문동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
“배준석을 데려와.”배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안과 전문의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자 강이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친분이 있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수술할 때, 강이한이 용성시에 있었는지도 확인해.”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진영숙의 마음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남기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진영숙은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이한이 사라지기 전, 이유영과 함께 우천시에 가서 진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 진영숙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특히 지금 이유영의 눈이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어머니로서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영숙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라면 이유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오늘,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진영숙의 마음은 피가 더욱 아파졌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그 아이는 정말로 강이한을 똑 닮았다....한편 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예기치 않게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긴장감이 맴돌았다.특히 여진우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 이상의 것이었다.소은지는 말없이 찌푸린 눈으로 여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조용히 소은지를 응시했다.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무슨 일이에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소은지 씨도 알고 있죠?”“알아요.”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아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 사람의 10년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걸까? 사랑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은 대체 어디 갔을까?’이유영은 풍산 그룹에서 나오기 전, 진영숙에게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진영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시윤이 방으로 들어섰다.“사모님.”“왜... 도대체 왜...”진영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정은 이미 한계를 넘어 통제 불능 상태였다.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진영숙 곁에 있었던 이들은 예전에 진영숙과 이유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 인과응보라고 여겼다.“이유영에게 다 말했어. 하지만...”진영숙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이한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진영숙은 모두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하지만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강이한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사모님, 작은 사모님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쨌든...”시윤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가 결국 말을 멈추고 진영숙을 바라보았다.과거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진영숙도 이유영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미 모든 대가를 치렀다.하지만 여전히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영이 마냥 이해되지 않았다.‘아무리 미워도 지금 강이한이 사라진 마당에 그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과거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이렇게까지 무심할 일이란 말인가? 강이한은 서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졌다.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냉정한 이유영의 태도에 진영숙은 마음이 아팠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왜 박연준의 사람들조차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