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로라 스튜디오와 계약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던 회사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습니다.”“뭐라?”진영숙은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태도를 바꾸다니! 왜?“지금 거기 관계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제 전화를 피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아요.”진영숙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면서 전화를 피하다니!이번에 그녀는 강이한 쪽 사람을 쓰지 않고 자신과 강현석의 인맥을 빌려 유영과 계약한 회사들에 압력을 가했다.진영숙은 이제 와서 유영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강성건설과 서원그룹을 도와 대형 프로젝트 입찰에 성공하면서 유영의 오로라 스튜디오는 한순간에 명성을 떨쳤다.그래서 유영과의 협력을 위하는 회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이쪽에서 계속 압력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로라 스튜디오는 지금쯤 대박이 났을 것이다.계약을 중지하기로 했던 회사들이 하나 같이 등을 돌렸다는 소식에 진영숙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내가 유영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걸까?진영숙의 두 눈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수화기 너머로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 씨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영 씨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에요.”“부모도 없는 고아를 누가 도와?”유영의 신분을 떠올리자 진영숙은 짜증부터 치밀었다.3년을 세강의 며느리로 살았는데 자신보다 유영의 배경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다.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기는 했다.“또 남자한테 가서 웃음 팔며 사정이라도 했나 보지? 그거 말고 걔를 도와줄 사람이 또 누가 있어?”다만 그 남자들이 하나 같이 유영을 도와주는 상황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로열 글로벌의 정 회장과 이유영 씨 관계가 단순한 애인 관계 같지는 않아서요!”진영숙의 대리인이 말했다.가정이 있는 재벌 회장님이 애인을 밖에 따로 두는 경우는 많았다.하지만 그런 여자들은
진영숙이 유영과 고객사 사이의 유대관계를 끊으려고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아무도 오로라 스튜디오와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다.최근에 유영은 크리스탈 가든의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오로라 스튜디오는 완전히 조민정에게 맡겼다.운영을 맡은 조민정은 디자인팀에 인력을 세 명이나 더 추가했다.유영이 맡았던 강성건설 의뢰는 초안이 나온 뒤로 세부적인 수정은 디자인팀에 넘어갔다.나중에 전반적인 디자인도면이 완성되면 유영이 한번 확인하고 제출하기로 했다.스튜디오는 불과 몇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하면서 그녀의 능력치도 외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물론 유영이 이미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가 되었다는 걸 모르는 진영숙은 어떻게 하면 오로라 스튜디오를 청하시에서 몰아낼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그 시각, 강이한은 사무실에 앉아 조형욱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큰 사모님 쪽에서 요즘 움직임이 부쩍 활발해지셨습니다.”“어머니가?”“둘째 어르신과 손을 잡고 유영 씨를 청하시에서 몰아낼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아요.”조형욱은 더 이상 유영을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그녀에 관한 일을 이야기할 때 어조도 사무적인 어조로 바뀌었다.강이한은 창가에 서서 오가는 차량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이유영을 청하에서 몰아낸다고?”“아마 유영 씨 때문에 회사가 큰 프로젝트를 두 개나 놓치면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엄마의 성격에 대해 강이한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유영이 얌전한 세강의 며느리로 있을 때도 진영숙은 유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며 이혼한 뒤로 유영에 대한 진영숙의 불만과 증오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조형욱은 강이한이 이제 이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을 줄 알고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그런데 뒤돌아선 강이한은 갑자기 차키를 챙기더니 밖으로 향했다.조형욱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 이 시간에 어디로 가시려고요?”“따라올 필요 없어.”돌아오는 건 싸늘한
“그러면 일단 둘이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알아볼게요.”진영숙이 말했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럴 필요 없어요!”강이한이 싸늘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출현에 깜짝 놀랐다. 그는 매번 이상할 정도로 이유영을 언급할 때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혼 후에도 강씨 집안 사람들이 이유영의 얘기를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듯 보였다.“이한아, 난 그저!”진영숙이 강이한을 향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강이한은 현관 옆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 차 키를 던져 넣은 다음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그는 소파에 앉아 짜증스레 다리를 꼰 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나간 뒤, 자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진영숙과 노부인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지금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둘은 말없이 강이한이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담배가 거의 절반 타들어 갈 때쯤,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정국진, 이유영의 외삼촌이에요.”“….”노부인과 진영숙의 얼굴이 동시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진영숙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그게 무슨 말이야?”“들으신 대로예요.”강이한이 진영숙과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말 그대로 정국진은 이유영의 외삼촌, 즉 이유영 어머니의 동생이란 뜻이에요!”그제야 진영숙과 노부인은 말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외삼촌이라고? 친척? 이럴 수가!’“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진영숙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강이한과 이유영은 연애를 7년, 결혼 생활을 3년 했다. 진영숙은 둘이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든 뒷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이유영은 친척 하나 없는 것은 물론, 가진 재산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토록 둘의 관계를 반대했지만
충격적인 소식을 남긴 채, 강이한은 자리를 떠났다.한참 후, 그제야 진영숙과 노부인은 정신을 차렸다.“지금 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라고 했니?”“그러니까, 이게 무슨 일이에요.”“그러니까 그 로열 글로벌 그룹의 정국진?”“그렇다니까요.”진영숙이 머리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이유영이, 이유영이….”노부인과 진영숙 모두 할말을 잃었다.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없던 가족이 튀어나온 건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이유영의 유일한 가족일지도 모르는 존재가 정국진이라니! 게다가 둘은 관계가 아주 끈끈해 보였다. 진영숙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몰랐다.이때 강서희가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곧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진영숙에게 다가갔다.“엄마, 무슨 일이야?”“서희야.”“어?”“….”진영숙은 어떻게 이 사실을 자기 입으로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천애 고아라고 생각했던 이유영이 알고 보니 이 상류사회의 최상위급 존재였다니!“무슨 일이야?”진영숙이 버벅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강서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진영숙은 결국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진영숙 자신도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실을 어떻게 강서희에게 말하겠는가? 누구보다도 이유영에게 적대감을 가졌던 그녀였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지만, 이유영의 신분을 알게 된 이상 예전처럼 대할 수도 또 없었다. 진영숙은 아직 어떤 태도로 이 상황을 맞이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할머니, 엄마 왜 이래?”진영숙이 알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강서희는 타깃을 바꿔 노부인에게 물었다.하지만 노부인 역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그냥 묻지 마.”노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부인 역시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들의 태도를 본 강서희는 분명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이때 진영숙이 생각난 듯 강서희에게 물었다.“지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서희는 깜짝 놀랐다.강서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왕숙을 바라봤다가, 이내 함께한 세월을 떠올리며 표정을 갈무리했다.“아줌마, 앞으로 뒤에서 갑자기 말 걸지 마. 알겠어?”표정은 감췄지만, 목소리까진 숨기진 못한 강서희였다. 하지만 왕숙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도 방금 돌아오셨어요.”“오빠가 또 무슨 말 했어?”강이한이 왔다는 얘기를 들은 강서희는 진영숙과 노부인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짐작했다.‘설마 또 이유영 때문에?’강이한이 이혼했음에도 여전히 이유영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강서희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언가를 하려면 우선 이유영부터 청하시에서 내쫓아야겠다고 강서희는 생각했다. 그래야만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유영과 정국진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나누셨어요.”왕숙은 이유영 편이었으나, 진영숙의 적대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녀를 이름으로 호칭했다. 굳이 여기서 다른 호칭으로 불렀다가 강씨 집안에서의 삶이 피곤해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왕숙이 이유영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 모습에 강서희는 매우 만족했다.“그래서 무슨 관계래?”이유영과 정국진의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강서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머릿속엔 둘은 그저 불륜관계,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강서희는 안 그래도 싫어하던 이유영이 늙은이의 외도 대상이 되었다니, 아주 꼬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왕숙은 강이한 등이 거실에서 나눈 얘기를 모두 들은 상태였다. 이유영이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을 줄은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녀는 들은 대로 모든 사실을 강서희에게 전해주었다.얘기를 듣던 강서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뭐라고?”강서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떠진 눈동자로 왕숙을 바라봤다. 왕숙은 그녀의 표정에 더욱 신나, 기름에 물을 붓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저도 전혀 몰랐다니까요. 어떻게 그동안 말 한마디도 없으셨지?”“
강씨 집안에서 난리 난 반면, 이유영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퇴근하자 정국진이 식탁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3일만 머물 예정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정국진은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오늘 저녁 맛있어 보이네요.”이유영이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하라고 했는데.”정국진이 말했다.“고마워요, 삼촌.”“여기 일도 거의 끝났으니, 내일은 떠나야겠어.”오후에 진영숙 쪽에서 이유영한테 걸었던 모든 것을 철회한다는 얘기를 전달받았다. 강씨 집안에서 그와 이유영의 관계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정국진도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이유영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내일이요?”“응.”“….”“이때까진 네가 걱정돼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말이야.”이유영은 이제 가진 것을 이용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강씨 가문에서 뒤로 물러선 것만 봐도 정국진은 그녀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이유영이 아쉬운 눈빛으로 정국진을 바라봤다.“돌아갈 때가 되긴 했죠.”정국진에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안 그래도 요 며칠 계속 전화가 와 그도 난감한 참이었다. 이때 정국진이 샐러드를 집으며 말했다.“박연준은 어떻게 생각해?”“….”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멈칫했다.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박연준이라니!“좋은 파트너죠.”매우 형식적인 답변이었다. 박연준과는 겨우 업무 때문에 미팅으로 식사 자리 몇 번 한 게 다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일로 만났으니, 이유영은 그것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사무적인 답장에 정국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람 보는 눈도 키워야지.”“프로젝트도 잘 진행되고 있고, 돈도 따박따박 들어오는데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요? 비즈니스적으로 문제없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정국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뭐가 문제예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삼촌이 가르쳐준 대로 했잖아요.”그녀는 틀린 말을
“아니, 이건….”이유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박연준이 좋아하는 음악회야.”정국진이 말했다.“하지만 저는….”이유영은 이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음악회를 고상한 사람들이 기품이나 과시하려고 만든 자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유영은 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정국진의 엄격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알겠어요, 갈게요.”이유영은 굳이 음악회 하나 참석하는 것 때문에 괜한 고집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거 하나 같이 참석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기 때문이다.“그래, 잘 결정했다.”이유영의 답을 들은 정국진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그런데 삼촌, 혹시 박 대표님 집안과 진행하는 사업이라도 있나요?”“왜? 설마 널 팔아서 거래라도 할까 봐?”“그러니까요. 유라나 신경 쓰시지, 왜 자꾸 저한테 이러시냐고요!”파리에 있을 때, 정국진은 여러 번 정유라에게 맞선 자리를 주선했으나 실패했다. 이 사실을 이유영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농담 반, 진담 반의 마음으로 하는 소리였다.그녀의 말을 들은 정국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별 의심 다 한다! 나 너 삼촌이야!”“쳇!”이유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다 널 위해 하는 소리지, 모르겠어? 설마 너 강이한한테 미련이라도 남은 거냐?”“….”“사람 쉽게 안 변한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된다 쳐도, 다음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아? 그땐 어떻게 해결하려고 그래!”“저도 알아요! 누가 강이한테 미련 있어서 이러는 줄 아세요?”이유영이 말했다. 그러나 정국진은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박연준 집안이랑 사업한다고 해도 내가 널 거래로 삼겠니? 내가 그래야 할 정도로 능력 없어 보여?”“….”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그제야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그런 말씀 마세요!”정국진만큼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능력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낀 이유영이 얼른 태도를 바꾸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많은 이들이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이유영도 각별히 주변을 더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이유영이 잘 대처하는 것 같아 정국진은 안심했다.이때 정국진이 다시 식탁 위로 전시 티켓 두 개를 올려놓았다.“이번에 여기서 전시회 두 개가 열릴 거야. 이것도 박연준이랑 같이 가보면 어때?”“뭘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연인이 되기 위해 관심사나 세계관이 같은지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여기서 함께 하는 시간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해.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야 서로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겠니?”음악회는 박연준의 취향이지만, 전시회는 이유영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정국진의 배려를 깨달은 이유영은 크게 감동받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킨 후, 먹먹한 심정을 애써 눌렀다.“삼촌.”“왜? 눈물 날 것 같아?”“아니요. 눈물은 무슨.”“아니면, 말고.”정국진도 젊었을 적 한 인기를 했었던 남자였다. 여자가 감동받으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니 이유영이 아무리 표정을 숨겼다고 해도 정국진이 알아채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는 삼촌으로서 언제나 이유영의 행복을 바랐다.그날 밤, 이유영이 오래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든 것과는 달리, 강이한은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큰 돌덩어리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듯 답답했다. 강이한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을 맞이했다. 이때 진영숙의 전화가 걸려 왔다.“이한아.”“무슨 일이에요?”이유영의 신분을 알게 된 후로, 강이한은 아직 마음 정리를 못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연스레 진영숙을 대하는 태도도 좋지 않았다. 강이한의 불만스러운 태도를 눈치챈 진영숙은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매번 이유영과 연관만 되면 보여온 모습이긴 했으나, 그녀의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지적하기조차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진영숙은 모든 계획을 다시 짜고 장기전으로 돌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