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서희는 깜짝 놀랐다.강서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왕숙을 바라봤다가, 이내 함께한 세월을 떠올리며 표정을 갈무리했다.“아줌마, 앞으로 뒤에서 갑자기 말 걸지 마. 알겠어?”표정은 감췄지만, 목소리까진 숨기진 못한 강서희였다. 하지만 왕숙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도 방금 돌아오셨어요.”“오빠가 또 무슨 말 했어?”강이한이 왔다는 얘기를 들은 강서희는 진영숙과 노부인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짐작했다.‘설마 또 이유영 때문에?’강이한이 이혼했음에도 여전히 이유영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강서희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언가를 하려면 우선 이유영부터 청하시에서 내쫓아야겠다고 강서희는 생각했다. 그래야만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유영과 정국진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나누셨어요.”왕숙은 이유영 편이었으나, 진영숙의 적대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녀를 이름으로 호칭했다. 굳이 여기서 다른 호칭으로 불렀다가 강씨 집안에서의 삶이 피곤해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왕숙이 이유영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 모습에 강서희는 매우 만족했다.“그래서 무슨 관계래?”이유영과 정국진의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강서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머릿속엔 둘은 그저 불륜관계,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강서희는 안 그래도 싫어하던 이유영이 늙은이의 외도 대상이 되었다니, 아주 꼬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왕숙은 강이한 등이 거실에서 나눈 얘기를 모두 들은 상태였다. 이유영이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을 줄은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녀는 들은 대로 모든 사실을 강서희에게 전해주었다.얘기를 듣던 강서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뭐라고?”강서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떠진 눈동자로 왕숙을 바라봤다. 왕숙은 그녀의 표정에 더욱 신나, 기름에 물을 붓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저도 전혀 몰랐다니까요. 어떻게 그동안 말 한마디도 없으셨지?”“
강씨 집안에서 난리 난 반면, 이유영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퇴근하자 정국진이 식탁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3일만 머물 예정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정국진은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오늘 저녁 맛있어 보이네요.”이유영이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하라고 했는데.”정국진이 말했다.“고마워요, 삼촌.”“여기 일도 거의 끝났으니, 내일은 떠나야겠어.”오후에 진영숙 쪽에서 이유영한테 걸었던 모든 것을 철회한다는 얘기를 전달받았다. 강씨 집안에서 그와 이유영의 관계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정국진도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이유영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내일이요?”“응.”“….”“이때까진 네가 걱정돼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말이야.”이유영은 이제 가진 것을 이용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강씨 가문에서 뒤로 물러선 것만 봐도 정국진은 그녀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이유영이 아쉬운 눈빛으로 정국진을 바라봤다.“돌아갈 때가 되긴 했죠.”정국진에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안 그래도 요 며칠 계속 전화가 와 그도 난감한 참이었다. 이때 정국진이 샐러드를 집으며 말했다.“박연준은 어떻게 생각해?”“….”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멈칫했다.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박연준이라니!“좋은 파트너죠.”매우 형식적인 답변이었다. 박연준과는 겨우 업무 때문에 미팅으로 식사 자리 몇 번 한 게 다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일로 만났으니, 이유영은 그것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사무적인 답장에 정국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람 보는 눈도 키워야지.”“프로젝트도 잘 진행되고 있고, 돈도 따박따박 들어오는데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요? 비즈니스적으로 문제없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정국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뭐가 문제예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삼촌이 가르쳐준 대로 했잖아요.”그녀는 틀린 말을
“아니, 이건….”이유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박연준이 좋아하는 음악회야.”정국진이 말했다.“하지만 저는….”이유영은 이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음악회를 고상한 사람들이 기품이나 과시하려고 만든 자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유영은 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정국진의 엄격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알겠어요, 갈게요.”이유영은 굳이 음악회 하나 참석하는 것 때문에 괜한 고집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거 하나 같이 참석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기 때문이다.“그래, 잘 결정했다.”이유영의 답을 들은 정국진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그런데 삼촌, 혹시 박 대표님 집안과 진행하는 사업이라도 있나요?”“왜? 설마 널 팔아서 거래라도 할까 봐?”“그러니까요. 유라나 신경 쓰시지, 왜 자꾸 저한테 이러시냐고요!”파리에 있을 때, 정국진은 여러 번 정유라에게 맞선 자리를 주선했으나 실패했다. 이 사실을 이유영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농담 반, 진담 반의 마음으로 하는 소리였다.그녀의 말을 들은 정국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별 의심 다 한다! 나 너 삼촌이야!”“쳇!”이유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다 널 위해 하는 소리지, 모르겠어? 설마 너 강이한한테 미련이라도 남은 거냐?”“….”“사람 쉽게 안 변한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된다 쳐도, 다음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아? 그땐 어떻게 해결하려고 그래!”“저도 알아요! 누가 강이한테 미련 있어서 이러는 줄 아세요?”이유영이 말했다. 그러나 정국진은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박연준 집안이랑 사업한다고 해도 내가 널 거래로 삼겠니? 내가 그래야 할 정도로 능력 없어 보여?”“….”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그제야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그런 말씀 마세요!”정국진만큼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능력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낀 이유영이 얼른 태도를 바꾸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많은 이들이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이유영도 각별히 주변을 더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이유영이 잘 대처하는 것 같아 정국진은 안심했다.이때 정국진이 다시 식탁 위로 전시 티켓 두 개를 올려놓았다.“이번에 여기서 전시회 두 개가 열릴 거야. 이것도 박연준이랑 같이 가보면 어때?”“뭘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연인이 되기 위해 관심사나 세계관이 같은지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여기서 함께 하는 시간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해.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야 서로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겠니?”음악회는 박연준의 취향이지만, 전시회는 이유영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정국진의 배려를 깨달은 이유영은 크게 감동받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킨 후, 먹먹한 심정을 애써 눌렀다.“삼촌.”“왜? 눈물 날 것 같아?”“아니요. 눈물은 무슨.”“아니면, 말고.”정국진도 젊었을 적 한 인기를 했었던 남자였다. 여자가 감동받으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니 이유영이 아무리 표정을 숨겼다고 해도 정국진이 알아채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는 삼촌으로서 언제나 이유영의 행복을 바랐다.그날 밤, 이유영이 오래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든 것과는 달리, 강이한은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큰 돌덩어리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듯 답답했다. 강이한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을 맞이했다. 이때 진영숙의 전화가 걸려 왔다.“이한아.”“무슨 일이에요?”이유영의 신분을 알게 된 후로, 강이한은 아직 마음 정리를 못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연스레 진영숙을 대하는 태도도 좋지 않았다. 강이한의 불만스러운 태도를 눈치챈 진영숙은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매번 이유영과 연관만 되면 보여온 모습이긴 했으나, 그녀의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지적하기조차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진영숙은 모든 계획을 다시 짜고 장기전으로 돌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진영숙이 옆에서 강서희를 더 변호하려 하자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거부 의사를 읽은 진영숙은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지음을 위한 집, 따로 마련해 뒀어. 도우미들도 고용해 놨으니까, 퇴원하는 대로 그쪽에 머물게 될 거야.”진영숙의 의도는 분명했다. 아무리 한지석한테 목숨의 빚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기까지라는 뜻이었다. 이득이 되지 않은 관계에 이 이상의 소모는 사양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강이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건 어머니께서 알아서 해주세요.”오랜만에 두 모자의 의사가 통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한지음만 퇴원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강이한은 여전히 이유영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그녀가 떠난 후 유독 한지음을 신경 썼다. 그 때문에 진영숙은 혹시라도 강이한이 이번에 반대하고 나설까봐 걱정했었다. 그러나 의도대로 되니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준비를 마친 의사와 간호사가 강이한 등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지음 씨가 강 대표님이 오시기 전엔 절대 붕대를 풀지 않겠다고, 꼭 처음 보는 사람이 강 대표님이셨으면 한다고 하네요.”이 말을 들은 강이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서희는 달랐다. 그녀의 표정이 짜증으로 물들었다.“그럼 가시죠.”강이한이 무심히 말했다.“네, 이쪽으로.”주치의는 그런 그의 태도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로 안내했다. 어둠에 있다가 갑자기 빛에 노출되면 눈에 안 좋았기 때문에 실내는 살짝 어둡게 조정되어 있었다. 진료가 시작되었고, 주치의는 조심스레 붕대를 풀어냈다.“좋아요, 천천히 눈을 떠보세요.”강이한이 병실에 도착했음에도 한지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한지음은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이한 오빠.”“응.”“앞으로 와주면 안 돼요?”한지음이 긴장감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병실에 들어오던 발걸음이 여럿이었던 것을 떠올린 그녀는 이 자리에 강서희도 있을 것임을 직감했다. 눈이
강이한은 계속 손을 흔들며 한지음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의 실루엣조차 보지 못했다. 한지음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 순식간에 병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유 선생!”강이한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안 그래도 얼어붙어 있던 병실 분위기가 더 싸늘해졌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주치의가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다가왔다.“한지음 씨, 지금 뭐가 보이시나요?”“저, 저 어떡해요….”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수술을 받았는데 어째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이 안 가는 것일까? 한지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이한 오빠! 이한 오빠!”한지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이때 강이한이 그녀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나 여기 있어.”따뜻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한지음은 지금 그것만으로 조금 안정이 되었다.“오빠, 나 아무것도 안 보여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요!”한지음이 절박함과 고통으로 얼룩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안 보일까?“유 선생.”강이한의 시선이 의사에게로 향했다. 그의 살벌한 눈빛을 본 의사는 겁먹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그게….”의사는 두려움에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하세요!”강이한이 물었다. 분명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전달받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아악!”한지음이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몇 번이고 눈을 감고 떴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문제없을 거라고 했는데! 어째서!“배 선생님이 수술하지 않았나요? 왜 유 선생님이?”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지금 현실이 그녀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붕대는 풀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암흑 속에서 살고 있었다.한편, 모든 관심이 한지음에게 쏠려 있
“저 이제 다시는 앞을 볼 수 없게 된 건가요?”한지음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진영숙의 시선이 강이한에게로 갔다. 강이한은 재촉하듯 강력한 눈빛으로 주치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 주치의는 큰 돌덩어리를 어깨에 올린 듯, 강한 부담감을 느꼈다. 주치의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병실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지음아.”주치의의 답을 들은 진영숙은 한지음을 위로하려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부정하고 싶은 현실이겠지만, 한지음은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말씀 좀 해주세요! 저 이제 정말 가망이 없나요?”의사가 말이 아닌 고갯짓으로 답한 탓에 답을 듣지 못한 한지음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시 물었다.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는 인생이 되어버리다니, 그럴 수는 없어!“예…”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주치의가 답했다.절망이 고통스럽게 한지음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누가 이런 결과를 예상이나 했겠는가? 모두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다시는 볼 수 없다니!”그녀는 울고 싶었지만, 고장이 나버린 눈은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병실엔 침울한 기운이 가득 돌았다. “얘야,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진영숙이 달래듯 한지음의 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미래에 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한지음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이, 이유영은 더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오전 내내 회의에 치여 결국 정국진이 떠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물론 이유영도 정국진이 이런 것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국진은 이유영이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쓰는 것보단 커리어에 집중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우우웅,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 화면에 박연준의 이름이 떴다. 이유영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만날 때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전에 정국진이 한 말 때문에 이유영은
이유영은 지금 청하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성 커리어우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정국진의 영향까지, 그 누구도 함부로 그녀에 대해 쉬쉬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그녀가 박연준과 함께 식사를 해도 허튼 소문이 퍼질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차 안, 박연준은 정면을 보며 운전을 하고 있었고 이유영은 어색하니 손을 꼼지락대고 있었다.“회장님은 가셨어요?”이때 박연준이 물었다.“네, 가셨어요. 원래 이렇게 오래 있을 일정이 아니었는데, 괜히 저 때문에 더 머무신 거죠.”그녀는 얼마전까지 매섭게 자신을 공격해오던 강씨 집안을 떠올렸다. 비록 그 일은 잘 마무리됐지만, 정국진은 혹시라도 그가 없는 사이에 또 진영숙이 이유영을 괴롭힐까봐 걱정했었다. 진영숙의 성격대로라면 이대로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멀쩡히 잘 사는 걸 두고 볼 리 없을 테니까.“하긴 걱정하실 만하죠.”“제가 왜요?”“딱 봐도 뭔가 연약해 보이잖아요.”“….”이유영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이미지에 가장 큰 몫을 하는 건 역시나 그녀의 신장일 것이다. 작은 키는 사람을 하여금 약자로 보이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강씨 집안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녀를 만만하게 봤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작은 체구였다. 입을 꾹 닫아버린 이유영의 모습을 본 박연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이 작은 체구로 어떻게 강씨 집안이랑 맞선 걸까? 무섭지도 않나?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 앉고 보니 서재욱이 보이지 않았다.“서 대표님 오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이유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기로 했는데, 약속이 잡혔다고 갑자기 못 온다고 연락왔네요.”박연준이 한쪽으로 핸드폰을 살펴보더니 말했다.“그렇군요.”이유영은 이때부터 갑작스레 어색해졌다. 전에 둘이 만났을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강이한을 자극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유영은 다른 생각 따위 할 여유가 없어 자
기다리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강이한, 박연준, 그리고 이유영. 세 사람의 얽힌 관계는 이제 누구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한편, 파리에서는 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강이한은 서주로 돌아갔고 그와 관련된 문서는 점점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도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반산월.남자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가 희미하게 실내를 감싸고 있었다. 소은지는 품에 작은 고양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섰고 그 순간 현우의 묵직한 눈빛이 그녀를 스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자 순간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이 녀석을 꽤 잘 돌본 모양이에요. 아주 잘 자랐네요.”길에서 처음 이 고양이를 주웠을 때는 겨우 갓난 새끼 고양이였다.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작은 생명체였는데 지금은 소은지의 품에서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로 감싸인 작은 생명체로 자라 있었다. 여전히 조그마했지만 이제는 생명의 따뜻함과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소은지는 작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현우의 옆에 앉았다.“작은 동물들은 금세 자라잖아요.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죠.”아이는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다.반면, 동물들은 마음만 쓰면 빠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여줬다.“...”소은지가 아이를 언급하자, 현우는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아이 좋아해요?”현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은지는 잠시 멈칫했다.아이를 좋아하냐고?“좋아한다, 싫어한다로 설명할 수 없어요.”“왜요?”“아마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봐요.”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아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존중과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였다.그러나 소은지가 지금까지 보아온 아이들은 대부분 그보다 더 복잡했다.청하시에서 일하며 소은지는 직업 특성상 아이들과 얽힌 상황을 자주 마주해야 했다.처음엔 서로 사랑하던 부부가 결국 이혼을 앞두고는 지독히 싸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우리, 결혼하자.”이유영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갑자기 말했다.“...”공기가 그 순간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이 남자, 미쳤나 봐.이유영은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볼 수는 없었지만 텅 빈 두 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박연준은 그런 이유영의 눈빛에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이유영은 차갑게 박연준이 있는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무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유영아.”“서주...”서주?“네가 원하는 건 결국 우리 아버지의 지원이야?”지원? 자신이 지금까지 보여온 확신마저 이유영에게는 이익을 위한 계산으로 보인단 말인가?“괜찮아. 세상 모든 일은 사실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려줄게.”“흥!”박연준의 다짐이 이유영에게는 터무니없게만 들렸다.“내가 기회를 줄 것 같아?”이유영은 단호했다.박연준이 자신을 이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싫었다. 그런데 이제 가족까지 이용하려 하다니. 박연준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박연준, 그런 기회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날카롭게 내뱉었다.이유영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이유영의 마음속에 쌓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만약 지금 이유영이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분명 서주로 돌아가 강이한과 박연준을 혼란의 중심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박연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그날, 서재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에게 물었다.“이유영이 시력을 되찾으면, 서주를 가장 먼저 공격할 거야.”이유영은 신씨 가문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신씨 가문이 어떤 관계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신지수가 이유영 편에 선다는 건 그 둘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그런데 서주 자체가 워낙 복잡하니
박연준의 해명은 이유영에게 공허하고 무력하게 들렸다.오늘의 박연준은 이유영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박연준이... 강이한을 두둔하다니.결국 한 여자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으니,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이유영은 이 상황이 비참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유영아, 넌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연준은 내심 괴로워하고 있었다.“그만하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금기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연서의 존재는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수년 동안 안긴 모욕과 같았다.연서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이유영은 자신이 강이한과 박연준의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절감했다.이유영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이유영의 존재는 결국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착각에 불과했다.그것이 바로 이유영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차지했던 자리였다. 가소롭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리.“유영아, 나는 변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어.”“또 무슨 꿍꿍이인지 어떻게 알아?”이유영의 목소리는 억누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의 몸은 이유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순간 굳어버렸다.그 말은 이유영이 박연준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조종하고 계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고 우지와 우현은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현재 식당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시간은 계속 흘러갔다.이유영은 매일 약을 먹고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강이한이 곁에 있었을 때,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사탕을 자연스럽게 입에 넣었었다.하지만 지금은?박연준이 사탕을 내밀어도 이유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이한에게 차가웠던 만큼 박연준에게도
이유영은 사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나는 나를 벌주는 게 아니야. 그냥... 정말로 익숙해진 거야.”고통도 결국 어떤 이에게는 습관이 될 수 있었다.“...”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서주 쪽 상황은 지금 어때?”“강이한은 돌아갔어.”박연준의 대답이었다.강이한이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박연준이 서주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이유영의 눈빛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미워?”그 사람, 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강이한이 정말 미웠다. 그러나 미움에도 강약이 있는 법, 이유영은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겪어야 했다.“미워.”“그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박연준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이유영은 다시 침묵했다.강이한이 죽기를 바랄 정도인가?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그 감정은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었다.그것이 이유영의 강이한에 대한 미움이었다.“뭐가 문제야?”이유영의 말투는 차가워졌다.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강이한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유영에게 너무 무거웠다.“너도 나를 그렇게 미워해?”박연준이 시험 삼아 물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그럼 너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강이한과 박연준에게 그녀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미움뿐이었다.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은 후에도 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이유영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 태도는 냉정했고 그녀의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났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눈에 상처가 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답답함을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강이한이 정국진에게 말했다.염 선생의 조언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고 이유영을 평생 어둠 속에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처리해 이유영의 시력을 회복시키겠다고도 덧붙였다.“자신을 벌하고 있는 거예요.”한참을 침묵하던 정국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임소미는 그 말을 듣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정말 자신을 벌하고 있는 걸까?그렇다.정국진의 말이 맞았다. 강이한은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벌하고 있었다.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려는 그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너무도 무거웠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속죄가 가능할까?...강이한은 떠났다.잠시 후 월이가 임소미의 목을 끌어안고 재잘거리며 들어왔다.“할머니, 아까 모르는 사람이 준 거 안 먹었어요.”“정말 잘했구나.”월이의 말을 들은 임소미의 마음은 더없이 씁쓸했다. 이 모든 것이 강이한이 자초한 일이었고 그의 업보였다. 누구도 그에게 가혹하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그럴까?임소미는 이유영이 평생 월이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그리고 강이한이 오늘 월이를 마지막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임소미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할머니, 엄마는 언제 돌아와요?”월이는 정말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의존은 본능적이었다.“곧 돌아올 거야.”“할머니, 제 아빠는 누구예요?”“...”임소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불편했던 호흡은 월이의 질문을 듣고 더욱 답답해졌다.월이의 아빠는...“월이, 아빠가 보고 싶니?”임소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아빠가 보고 싶냐는 질문에 월이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왜?”“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사랑하지 않는다고?월이가 기억하는 한, 월이의 세상에는 아빠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인 이유영 혼자뿐이었다.아이는 단순했고 이유영의 외로움을
강이한은 아마도 세상에서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을 것이다.세상에 아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이 있을까?그는 지금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아이는 그렇게 경계하며 강이한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 월이는 강이한의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혀 다가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모퉁이를 돌 때, 강이한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놀라서 움찔했다.남자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월이에게 말했다.“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기억해.”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월이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월이가 침묵하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이한은 절망을 느꼈다. 이 모든 고통은 한때 이유영이 홀로 겪었던 것이었다.이제 그 고통이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이유영이 겪었던 아픔이 하나하나 그의 뼛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강이한은 떠났다.한편, 임소미는 조용히 정국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국진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임소미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말했다.이것이 이유영이 항상 수술을 거부했던 이유였다. 이유영은 죽은 사람의 장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은 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그렇게 눈앞이 흐릿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다.살아있는 사람의 것은 정말 구하기 힘들었고 기꺼이 수술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그렇다면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유영은 어떤 수단도 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두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강이한의 말대로 만약 석 달 후에 이유영이 염 선생의 약을 먹고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강이한이 책임지겠다고 했다.이것이 서재에서 정국진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딸이 이렇게 다치고 나서 임소미는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강이한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그가 사라져야만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이유영이 돌아온 이후 몇 년 동안, 강이한이 이유영에게서 벗어나려 얼마나 애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한편으로는 한지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유영에게 집착하며 그녀의 행복을 방해해 왔다.그런 상황에서 엄마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소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이한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뒷마당에서.강이한은 멀리서 나비를 쫓는 아이를 따뜻하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강이한의 마음이 아파졌다.그 아이는 나비를 쫓으며 정말 즐거워 보였다. 이곳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곳인 듯했다.정씨 가문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귀여워하고 아끼고 있었다. 그 아이는 꽤 작은 몸집을 가졌는데 아마 조산 때문일 것이다.“유씨 할머니, 저 잡았어요!”아이가 나비 한 마리를 잡고 기쁜 얼굴로 도우미에게 달려갔다.유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작은 아가씨는 점점 더 빨라졌네요. 나비도 잡을 수 있군요.”“저 정말 대단하죠?”“네, 정말 대단해요.”찬을 받은 아이는 더욱 밝게 웃었다.“유씨 할머니.”“네?”“수박 먹고 싶어요.”“알겠어요. 가져다줄게요.”그 아이는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었다.여기서 그녀는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임소미는 종종 한탄했다. 그 아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서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되었다.그런데도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다.아이는 나비를 놓아주었다.아이는 나비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절대로 해치려 하지 않았다. 수박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유 아주머니가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강이한을 발견한 아이의 눈에는 잠깐의 두려움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강이한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경계심
그런 결과라면...직면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좋겠지만, 만약 그 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영원한 끝을 의미할 것이다.그녀가 원했던 대로 끝이 나는 것이다.그리고 이유영은 그로 인해 기뻐할까?강이한의 곁을 떠나고 싶어 했던 이유영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는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을 느꼈다.하지만 이유영이 떠난다고 해도 강이한은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강이한이 만든 결과였다....강이한과 정국진은 서재에서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서재에서 나올 때, 정국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임소미만 홀에 있었다.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온 모습을 보고 임소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진우를 보내서 이유영을 데려오게 했어요.”여진우를 보내 이유영을 우천시에서 데려오기로 했다?이유영이 거기서 어떻게 지내든지 상관없이, 임소미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설령 요 선생이 거기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치료는 장소에 상관없이 받을 수 있었고 약을 먹는 것 역시 어디서든 상관없었다.“돌아오라고 해!”정국진의 목소리는 다소 무겁게 떨어졌다.“...”임소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정국진을 바라보았다.도대체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나온 후 정국진의 태도가 이렇게 변한 걸까?임소미는 정국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당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집사!”“예, 선생님.”“진우에게 연락해서 우천시로 가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고 해.”“네!”“아니...”임소미는 정국진의 진지한 모습에 화가 나 발을 굴렀다.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왜 갑자기 강이한 편을 드는 것인가?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지 임소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임소미는 본래 차분한 사람이었지만 정국진의 태도에 화가 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그의 뜻을 따르기엔 이유영이 너무 불쌍했다.저번에도 정국진은 강이한에게 기회를 줬지만 그 결과는 참
강이한은 지금 딸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래서 우천시에서 돌아오는 내내 그의 마음은 무겁고 괴로웠다.강이한은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지난 세월 동안 강이한은 이유영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심지어 아이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미 나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서재에서.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강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차가운 빛으로 번뜩였다.“나를 탓하지 마라.”이유영에 관한 이야기였다. 방금 정국진은 강이한에게 이유영과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강이한은 지금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에게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더군다나 정씨 가문의 사람들 모두 이유영을 강이한에게 다시 맡길 생각이 없었고 둘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려 했다.“지금 유영이의 곁에 박연준이 있습니다.”강이한은 약간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이미 불편했던 감정은 강이한의 말에 더 강하게 흔들렸다.“그게 무슨 뜻이야?”정국진은 영리한 사람이라 강이한의 말을 듣자마자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있었음을 눈치챘다.강이한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국진을 바라봤다.“염 선생의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완벽한 희망을 보장할 순 없습니다.”아무리 의술이 뛰어나고 성공 사례가 많아도,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처음 살펴보며 이렇게 말했다.그는 연기로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손상된 눈은 처음이며 지금까지 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가족들이 많은 정성을 들인 덕분이라고 했다.이런 심각한 손상은 신중히 관리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이것이 백산 별장이든 반산월이든, 심지어 황가 국제 그룹의 조명까지도 여러 번 교체한 이유였다. 이유영의 눈에 가장 적합한 빛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바꿔야 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유영의 두 눈은 결국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그날 염 선생이 자신도 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