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진의 세상에서 결혼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었다.그래서 정국진은 애처가로 소문났다.파리에 있는 동안 외부에 유혹도 많았지만 정국진은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다. 그런 사람이니 강이한의 외도는 배신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유영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바랐기에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래. 네가 괜찮다니 나도 안심이야.”정국진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강이한이 유영에게 마음이 남아 있더라도 변하는 건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유영이 그의 감언이설에 흔들리고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그에게 흔들리는 것이었다.유영이 말했다.“저는 외삼촌이 재결합하라고 저를 설득하시려는 줄 알았어요.”조금 전 보였던 정국진의 태도를 보았을 때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자리에서 일어선 정국진이 담담히 말했다.“그 인간이 아직 널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해서 복잡한 여자 관계가 용서되는 건 아니야. 그런 사랑이라면 차라리 버리는 게 나아.”유영은 외삼촌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지난 생에는 이 도리를 깨우치지 못해서 각막을 잃고 불에 타죽는 순간에 와서야 본질을 파악했다.처음에는 단지 한지음의 존재 때문에 실망하고 상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전생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다.“너도 이제 회사의 오너가 되었으니 예전에 운영하던 스튜디오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니?”“계속 해나가야죠.”유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갑작스럽게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가 되면서 인수인계 작업 때문에 바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처음 시작한 사업인 만큼 쉽게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쪽을 동시에 운영하려고?”정국진이 물었다.“일단은 민정 씨한테 운영을 맡길 생각이에요.”조민정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그래서 크리스탈 가든의 내부를 장악하는 동안에 조민정이 스튜디오 일을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그것도 괜찮네.”정국진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세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한지음이 수술실에서 나왔다.강이한은 급기야 배준석을 찾았지만 한지음과 함께 수술실을 나온 사람은 유 선생이었다.“강 대표님.”유 선생이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배 선생은 안에 있어요?”“대표님, 그게….”강이한의 질문에 유 선생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강이한은 대답을 질질 끄는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간호사가 한지음을 병실로 데려갔다.단 둘이 남게 되자 강이한은 싸늘한 목소리로 유 선생에게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죠?”“이번 수술 집도는 제가 했습니다. 배 선생은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외출 중이고요.”“배준석 선생 어디로 갔습니까?”고함에 가까운 강이한의 목소리가 복도를 진동했다.유 선생은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그게… 배 선생이 돌아와서 대표님께 따로 설명드린다고 해서요.”“설명이요?”강이한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그는 애써 치미는 화를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수술 결과는요?”“걱정 마세요. 수술은 아주 성공적입니다.”유 선생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답했다.수술이 성공했다는 얘기에 강이한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돌렸다.그는 복도를 걸으며 배준석에게 분노의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었다.강이한은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한지음의 병실로 향했다.마취가 깨지 않은 한지음은 달게 자고 있었다. 강이한은 붕대를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때, 진영숙도 병실에 도착했다.그녀는 한지음이 한지석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한지음을 딸처럼 보살피기로 했다. 진영숙처럼 이기적인 사람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것이다.“수술은 어떻게 됐니?”진영숙이 작은 소리로 강이한에게 물었다.강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대꾸했다.“성공적이래요.”수술이 성공해서 다행이었다.수술 중에 문제가 생겼더라면 절대 배준석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진영숙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다행이다. 정말 다행
강이한이 병실을 나가자 강서희는 피곤한 기색의 진영숙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엄마도 피곤하면 돌아가지 그래?”진영숙은 아직 자고 있는 한지음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아니야. 여기 있을래. 마취가 깨는 순간이 가장 고통스러울 거야.”“내가 잘 돌볼 수 있어. 엄마 피곤할까 봐 그래.”“지음이 깨는 것만 보고!”진영숙의 단호한 태도에 강서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이렇게나 한지음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맹장수술을 할 때 간병인만 보내고 병실에 한번 찾아온 적 없던 모습이 떠올랐다.진영숙은 항상 강서희를 친딸처럼 아낀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한지음을 대하는 걸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며칠 사이 강이한은 유영을 찾지 않았다.그는 회사 일을 처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고 유영도 마찬가지였다.신제품 출시 시즌이 다가오기에 유영은 공모전을 내고 당첨자의 작품을 신제품으로 출시하기로 했다.유영도 보석 디자인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크리스탈 가든의 스타일은 매우 독특했다. 유행 요소도 고민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살리는 게 관건이었다.그 중에서도 한정판 제품 디자인이 가장 골머리가 아팠다.유영은 인수인계 작업만 해도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정국진은 그녀에게 회사를 맡긴 뒤로 운영에 손도 대지 않았다.대표로 부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전임 대표는 일부 디자이너의 뇌물을 받고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묻어버린 사실이 들통나면서 해임되었다고 했다.“대표님, 이거 좀 보세요.”디자인 팀장이 선별한 원고를 유영에게 건넸다.전임 대표에게 뇌물을 바친 디자이너의 작품도 있었는데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유영이 물었다.“이거 어떻게 된 거죠?”“회장님께서는 다시는 이 디자이너의 작품을 채용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그런데 그 사람 작품이 왜 내 앞에 나타난 거냐고요.”유영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디자인팀 팀장 장정윤은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세강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세강이 또 왜요?”“지금 우리 고객들을 상대로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강이한이 주도한 걸까요?”“아니요. 진영숙 여사랑 그 집 둘째 어르신입니다.”조민정이 서늘한 어투로 답했다.그녀는 심기만 뒤틀리면 권력으로 갑질하는 인간들을 가장 혐오했다.진영숙은 세강 오너 일가의 권력을 행사하여 유영을 청하시에서 몰아내려는 수작이었다.하지만 절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그럼 회장님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고객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다져야죠.”유영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권력놀음? 그건 유영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알겠습니다.”조민정은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유영이 이렇게 하라고 한 이상 그녀도 더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눈을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떠오른 건 강이한과 함께했던 추억들이었다.두 사람이 여기까지 올 줄을 그때는 누가 알았을까?진영숙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공격해 올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려서 눈을 떠보니 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이었다.유영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진 여사님이 어쩐 일이신가요?”“이유영, 네가 빼앗아간 프로젝트를 원상복귀 해놓으면 나도 더 이상 널 공격하지 않을게.”“제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제가 무슨 능력으로 이미 체결한 계약을 원상복귀시켜요?”“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널 이 도시에서 몰아내는 수밖에 없어!”수화기 너머로 진영수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냉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제가 그 사업들을 다 세강에 돌려줄 수는 없지만 청하시에 남아 있을 능력은 충분하네요.”과거에는 매사에 진영숙의 눈치를 보고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했다면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그래?”“그럼요. 두고 보면 알겠죠.”“하, 건방진 것!”“지금의 저는 건방져도 괜찮은 위치에 있거든요.”유영은 한마디도
과거에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이유영 덕분에 어쩌다가 의견 일치를 보았다.왕숙이 다가와서 공손히 물었다.“사모님, 식사 준비 끝났는데 바로 식사하러 가실까요?”“그래.”진영숙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둘째 어르신에게 말했다.“시간 괜찮으시면 식사하고 가세요.”“됐어!”“에이, 그러지 말고 식사라도 하고 가요, 아주버님.”노부인이 위층에서 내려오며 강현석을 만류했다.조금 전 계단 입구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적절한 시기에 내려온 것이었다.한때는 적이었지만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시 뭉치는 일은 재벌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노부인은 진영숙을 지나치며 잘했다는 눈빛을 보냈다.노인은 며느리 진영숙의 처사가 항상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모이는 것도 오랜만인데 식사하고 가요.”“그래요.”평소였다면 노부인이 외척에게 이렇게 신경 써줄 이유는 없었다. 이런 일은 진영숙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었다.테이블에 마주앉은 노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느리를 잘못 들여서 요즘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네요.”“이제 며느리는 아니죠.”강현석이 말했다.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그렇죠. 이한이는 아직 어리니까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요.”진영숙이 바라는 바였다.사실 유영이 세강에 시집온 뒤로 그녀는 어떻게 하면 며느리를 내쫓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진영숙은 아들이 조금 더 신분에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 재혼하기를 바랐다.그리고 3년을 싸운 끝에 드디어 유영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최근 유영이 밖에서 온갖 일들을 벌이지 않았으면 당장 왕래를 끊고 아들 약혼식이나 준비했을 것이다.진영숙은 유영을 곧 청하시에서 몰아낼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이 나이에 어린애한테 화풀이해서 뭐 하나 싶기도 하지만 이유영 걔는 정말 거슬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이한이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는지!”유영이 했던 일을 생각하면 노부인은 치가 떨렸다.노부인도
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로라 스튜디오와 계약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던 회사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습니다.”“뭐라?”진영숙은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태도를 바꾸다니! 왜?“지금 거기 관계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제 전화를 피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아요.”진영숙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면서 전화를 피하다니!이번에 그녀는 강이한 쪽 사람을 쓰지 않고 자신과 강현석의 인맥을 빌려 유영과 계약한 회사들에 압력을 가했다.진영숙은 이제 와서 유영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강성건설과 서원그룹을 도와 대형 프로젝트 입찰에 성공하면서 유영의 오로라 스튜디오는 한순간에 명성을 떨쳤다.그래서 유영과의 협력을 위하는 회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이쪽에서 계속 압력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로라 스튜디오는 지금쯤 대박이 났을 것이다.계약을 중지하기로 했던 회사들이 하나 같이 등을 돌렸다는 소식에 진영숙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내가 유영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걸까?진영숙의 두 눈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수화기 너머로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 씨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영 씨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에요.”“부모도 없는 고아를 누가 도와?”유영의 신분을 떠올리자 진영숙은 짜증부터 치밀었다.3년을 세강의 며느리로 살았는데 자신보다 유영의 배경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다.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기는 했다.“또 남자한테 가서 웃음 팔며 사정이라도 했나 보지? 그거 말고 걔를 도와줄 사람이 또 누가 있어?”다만 그 남자들이 하나 같이 유영을 도와주는 상황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로열 글로벌의 정 회장과 이유영 씨 관계가 단순한 애인 관계 같지는 않아서요!”진영숙의 대리인이 말했다.가정이 있는 재벌 회장님이 애인을 밖에 따로 두는 경우는 많았다.하지만 그런 여자들은
진영숙이 유영과 고객사 사이의 유대관계를 끊으려고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아무도 오로라 스튜디오와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다.최근에 유영은 크리스탈 가든의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오로라 스튜디오는 완전히 조민정에게 맡겼다.운영을 맡은 조민정은 디자인팀에 인력을 세 명이나 더 추가했다.유영이 맡았던 강성건설 의뢰는 초안이 나온 뒤로 세부적인 수정은 디자인팀에 넘어갔다.나중에 전반적인 디자인도면이 완성되면 유영이 한번 확인하고 제출하기로 했다.스튜디오는 불과 몇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하면서 그녀의 능력치도 외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물론 유영이 이미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가 되었다는 걸 모르는 진영숙은 어떻게 하면 오로라 스튜디오를 청하시에서 몰아낼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그 시각, 강이한은 사무실에 앉아 조형욱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큰 사모님 쪽에서 요즘 움직임이 부쩍 활발해지셨습니다.”“어머니가?”“둘째 어르신과 손을 잡고 유영 씨를 청하시에서 몰아낼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아요.”조형욱은 더 이상 유영을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그녀에 관한 일을 이야기할 때 어조도 사무적인 어조로 바뀌었다.강이한은 창가에 서서 오가는 차량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이유영을 청하에서 몰아낸다고?”“아마 유영 씨 때문에 회사가 큰 프로젝트를 두 개나 놓치면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엄마의 성격에 대해 강이한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유영이 얌전한 세강의 며느리로 있을 때도 진영숙은 유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며 이혼한 뒤로 유영에 대한 진영숙의 불만과 증오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조형욱은 강이한이 이제 이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을 줄 알고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그런데 뒤돌아선 강이한은 갑자기 차키를 챙기더니 밖으로 향했다.조형욱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 이 시간에 어디로 가시려고요?”“따라올 필요 없어.”돌아오는 건 싸늘한
“그러면 일단 둘이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알아볼게요.”진영숙이 말했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럴 필요 없어요!”강이한이 싸늘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출현에 깜짝 놀랐다. 그는 매번 이상할 정도로 이유영을 언급할 때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혼 후에도 강씨 집안 사람들이 이유영의 얘기를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듯 보였다.“이한아, 난 그저!”진영숙이 강이한을 향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강이한은 현관 옆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 차 키를 던져 넣은 다음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그는 소파에 앉아 짜증스레 다리를 꼰 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나간 뒤, 자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진영숙과 노부인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지금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둘은 말없이 강이한이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담배가 거의 절반 타들어 갈 때쯤,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정국진, 이유영의 외삼촌이에요.”“….”노부인과 진영숙의 얼굴이 동시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진영숙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그게 무슨 말이야?”“들으신 대로예요.”강이한이 진영숙과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말 그대로 정국진은 이유영의 외삼촌, 즉 이유영 어머니의 동생이란 뜻이에요!”그제야 진영숙과 노부인은 말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외삼촌이라고? 친척? 이럴 수가!’“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진영숙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강이한과 이유영은 연애를 7년, 결혼 생활을 3년 했다. 진영숙은 둘이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든 뒷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이유영은 친척 하나 없는 것은 물론, 가진 재산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토록 둘의 관계를 반대했지만
파리의 혼란과는 달리 용성시는 번화한 도시였다. 만가등불이 밝게 빛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이유영은 물었다.“여기는 어디야?”“용성시.”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용성시이라는 곳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청하시와 너무 멀어서 여행을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용성시의 날씨는 우천시와 완전히 달랐다. 겨울이었지만 날씨가 매우 좋았다.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이유영은 따뜻한 기운을 느꼈고 뒤섞인 꽃향기를 맡았다.용성시는 유명한 꽃 도시였다.이곳에서는 많은 희귀한 꽃과 식물이 생산되었다. 용성시의 기후는 식물이 자라기에 매우 적합했다.“냄새 맡았어?”“응.”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의 대답에 박연준은 더욱 씁쓸해졌다.공항 곳곳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놓여 있었다. 아름다웠고 꽃 도시의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고 오직 감각과 냄새로만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시력을 되찾고 나면 여기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필요 없어.”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언제나 그와 강이한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 했다.만약 눈이 보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들을 떠났을 것이다.지금 이유영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은 그녀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약 눈이 보였다면 절대 그의 곁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그 생각을 하자 박연준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유영도 그 숨 막히는 기운을 느꼈다.결국 그들은 용성시의 모이산에 도착했다.모이산은 박연준 소유의 유명한 숙소였다. 용성시에 여행을 온 사람 중 모이산에 묵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하거나 권력 있는 사람들이었다.이곳은 가격이 매우 비쌌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곳곳에서 나무 향과 꽃향기가 났고 민족적인 특색이 묻어나는 건물은 우지와 우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아가씨, 눈이 보이셨다면 분명 이곳을 좋아하셨을 거예요. 정말 아름다워요!”밤이 되자 모이산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만가등불이 빛나는 모습
겨울의 파리는 날씨가 좋지 않았고 눈이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렸고 지금은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쾅!”소은지는 차에서 내려 차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여진우의 시선과 마주쳤다.온몸에 전율이 흘렀다.여진우는 소은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억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가 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어둑한 눈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익숙함이 느껴졌고 마음속이 세차게 흔들렸다.여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익숙함 때문에 여진우의 시선은 강이한에게 고정되었다.소은지는 여진우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고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아가며 물었다.“유영이는 돌아왔어?”“유영이를 찾는 거야?”여진우의 목소리도 익숙했다.소은지와의 접촉은 많지 않았고 특히 이렇게 어두운 공간에서는 더욱 그랬다. 소은지는 주로 이유영과 함께 있었고 여진우와 마주친 적은 몇 번 없었다.소은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 선생님을 찾아왔어.”소은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그녀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여진우는 한눈에 소은지가 이 시점에 정국진을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소은지는 지금 현우의 아내였고 엔데스 가문은 중요한 시기에 있었다.그러니 소은지의 목적은 분명했다.“들어갈 필요 없어. 그는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말을 듣자, 소은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차가운 외모 아래,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끓어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지금 소은지에게는 정국진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만나봐야 알지 않을까?”소은지는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하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여진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소은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진우의 차가운 옆모습을 바라봤다.말할 것도 없이, 키를 제외하고는 여진우는 이유영과 닮았다. 마치 복사본처럼 똑같았다.그 순간 소은지는 생각했다.만약 강이한과 박연준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다면 이유영은 존재하지 않았을까?혹은 여진우와
서재 안에는 편안함 대신 긴장감이 가득했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정국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다 알아봤어?”“네.”“그 엔데스 가문...”정국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엔데스 가문의 깊은 속셈은 아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정국진은 박연준이 이유영을 파리로 데려오기 전에 우천시에서 이유영과 결혼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엔데스 가문에서 일이 벌어지는 동안, 이유영 곁에 강이한과 박연준이 있었기에 그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엔데스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권력 때문에 결국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송씨 가문은 이미 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너는 용성시로 가.”정국진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여진우에게 말했다.여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용성시에 가라고요?”“유영이에게 연락해야 해. 지금은 중요한 때야.”결국 남자는 여자가 분노에 차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지금 박연준과 강이한에게 분노로 차 있었고 그녀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지막 선이었다. 연서가 나타나면서 이유영은 자신과 강이한의 감정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깨뜨렸다.그런 깨진 감정 속에서 이유영과 엔데스 명우의 과거를 생각하니 정국진은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네, 알았어요.”여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정말 골칫거리였다. 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분노는 대단했고 서주에서 벌어진 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어찌 됐든 이번에 유영이는 엔데스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해.”정국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정국진은 엔데스 가문 때문에 과거에 쓴맛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는 파리에 살면서도 엔데스 가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여하지 않았다.심지어 엔데스 가문과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때로는 가족이 어떠한 친분보다 소중했다. 과거에는 가족이 없었기에 고려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고려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정국진은 임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은 정말...”정국진은 지금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비록 말투는 단호했지만 여린 마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실 그들은 강이한이 이유영의 눈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수술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강이한이 나선 것이다.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정국진과 임소미는 무거운 표정을 서로 마주 보았고 결국 정국진은 임소미에게 말했다.“제가 진우랑 서재에서 얘기할게요.”“그래요.”임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던 임소미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정국진과 여진우가 위층으로 올라갔고 때마침 월이가 밖에서 놀다가 들어왔다.“할머니.”작은 아이는 부드러운 몸으로 임소미에게 안겼다.임소미는 아이를 꼭 껴안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빨리 뛰어다녀. 여자아이는 넘어져서 흉터가 생기면 안 돼.”흉터라는 말이 나오자 임소미는 이유영의 온몸에 있는 상처들을 떠올렸다. 그 상처들은 모두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남긴 상처였고 그녀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의 증거였다.그렇게 생각하니 임소미는 강이한이 각막 수술에 대해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그래, 그건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빚진 것이다.그들의 관계에서 누가 누구를 이용했든, 감정은 결국 그들만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유영은 항상 강이한을 믿었지만 강이한은 결국 그녀의 믿음을 저버렸다.그래서 그들은 지금 이런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할머니.”“응?”“엄마는 언제 돌아와요?”작은 아이는 임소미를 애처롭게 바라봤다.임소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엄마가 보고 싶어?”“네, 너무 보고 싶어요.”강이한에 대한 감정과 달리 아이는 이유영을 매우 좋아했는데 석 달을 보지 못했으니 너무 보고 싶어 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치솟는 순간,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물었다.“우리 파리로 돌아가는 거야?”박연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걱정 마, 널 어디에 넘기려는 건 아니니까.”이유영은 눈살을 찌푸렸다.이 비행기가 파리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유영은 찌푸렸던 미간이 더욱 깊어졌고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수술하러 가는 거야.”“...”수술?파리로 돌아온 이후, 이유영은 피부든 눈이든, 끊임없이 수술이라는 단어와 마주해야 했다.그러나 막상 수술이 현실이 되자, 그녀의 마음속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공기는 정적에 휩싸였다.이유영은 손에 들고 있던 빨대 컵을 힘껏 들이켜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있어?”그녀는 각막에 관해 묻고 있었다.어둠 속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그 희망이 얼마나 희박한지, 세상에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시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닫는다.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시 눈을 뜨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아버지는 여러 번 이유영에게 수술을 제안했지만 이유영은 매번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가장 평범한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기다리는 것,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기준이었다.“응.”박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박연준의 목소리에서 묵직한 기운을 감지하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살아 있는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그건 알고 있지?”“알아.”박연준은 이유영의 신분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의 입장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과의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그럼...”이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고 박연준은 이유영의 텅 비어 있는 눈을 보며 그녀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박연준은 이유영을 한참
우천시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이유영은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작은 몸짓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언제부터 이유영의 작은 변화에도 이렇게 민감해졌을까? 누군가를 깊이 관심하게 되면 다 이렇게 되는 걸까?박연준은 누군가에게 마음이 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예상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웠다.연서를 향했던 감정보다 더 깊고 복잡했다. 분노와 좌절은 전혀 다른 감정이었고 그가 이유영에게 느끼는 것은 오직 좌절과 안타까움뿐이었다.박연준은 목에 두르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풀어 이유영의 목에 감아주었다.그 목도리는 옥색 전통 복장과 어우러져 한층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박연준의 온기가 스며들자 이유영이 느끼던 추위도 서서히 사그라졌다.박연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조금은 따뜻해졌어?”“이러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예전 같았으면 이유영의 이런 차가운 태도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지금은 이미 익숙해진 듯했다.이건 그와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빚진 것이니 어떤 태도로 그들을 대해도 당연한 일이었다.“지금은 춥지 않은 것 같네.”박연준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청석판 길은 매끈하지 않았고 휠체어를 밀 때마다 돌출된 부분이 울퉁불퉁하게 전해졌다. 마치 공예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이었지만 이유영은 불편함을 느꼈다.청석판에서는 특유의 은은한 향이 풍겼다.“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아.”“왜 그렇게 생각해?”“여기가 도심 한가운데잖아? 그런데도 자연의 향기가 가득해.”이유영은 이곳의 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박연준은 말없이 이유영을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씁쓸함이 더욱 짙어졌다.냄새에 대한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고 눈이 보이는 사람조차도 쉽게 느낄 수 없는 감각이 있었다.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세상을 특별한 방식으로 인지하고 있었다.“유영아, 더 이상 애쓰지 마. 응?”박연준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이유영이 애써 괜찮은 척할수록
연서가 없었다면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녀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상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서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달랐다.결국, 그녀는 연서로 인해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휘말렸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었다.“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게 누구인데, 이제 와서 나 자신을 용서하라고?”“...”“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워?”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건 이유영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그들의 단순한 생각이 너무 우스웠고 증오스러웠다.“...”이미 창백했던 박연준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이유영과 강이한,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걸 놓아버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기다림은 언제나 잔인한 법이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대신 꼬박 이틀 동안 강이한의 연락만을 기다렸다.하지만 강이한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한참 후에야 박연준은 문자를 받게 되었다.[예약한 병원으로 데려와.]전에 서재에서 박연준과 함께 예약한 병원이었다.결국 이런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박연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문기원이 방으로 들어왔고 그가 본 박연준은 검은색 긴 코트에 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여전히 깔끔하고 고고한 기품을 풍겼지만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상실감은 감취지지가 않았다.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박연준의 마음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선생님.”박연준은 정신을 차리고 문기원을 바라보았다.그의 눈동자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떼었음에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연준도 아마 느꼈을 것이다. 그와 이유영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이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모든 것을 이유영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기원아.”박연준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용성시로 갈 준비해.”“...”용성시로 가다니, 결국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고 만 것인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몰랐다고는 해도, 그래도 이유영의 딸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박연준이 침묵하자 이유영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뱉었다.“너와 그 사람, 둘 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야!”이미 숨 막힐 듯한 답답함이 가득한 가슴에 이유영의 말은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람은 감정에 휩쓸릴 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다. 과거 연서 사건으로 분노했던 것처럼 지금은 이유영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었다.“사실 네가 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은 나야.”박연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이 박연준이라고? 그는 자신이 증오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실 박연준은 강이한과 마찬가지로 증오스러운 존재였다.“날 알프산에 데려갔을 때,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유영아.”“지금 와서 착한 척하며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려고 하네.”이유영의 말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고 박연준은 그 냉소를 느끼며 가슴이 더욱 아팠다.“넌 그저 한지음을 그 사람 곁에 보냈을 뿐이라고 하며 누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저울이 결정할 거라고 했어.”답답했던 가슴은 이유영의 말에 더욱 아픔으로 퍼져 나갔다.맞다. 박연준은 한지음을 강이한 곁에 보냈을 뿐이었다. 강이한이 왜 한지음을 이유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심지어 한지음의 딸을 이유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는지, 박연준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박연준도 이유영도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한지음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었다.“박연준.”“응?”“네가 아버지라면, 과연 누가 네 아이보다 더 소중할까?”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누가 자기 자식보다 더 중요할까?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답만 존재했다. 누구도 자기 자식을 능가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유영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유영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고 그러니 그녀를…“유영아, 너도 한 번쯤은 스스로를 용서해 줘. 응?”“이온유는 아직도 그 사람 곁에
어둠 속에서 박연준은 담배를 연거푸 피웠지만 가슴속 답답함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 강이한의 번호가 떠올랐다. 곧 신호음이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시간이 됐어.”“언제 돌아올 거야?”두 사람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평온했다.참으로 아이러니했다.지난 몇 년 동안,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엔 언제나 칼날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고 두 사람 사이에 평화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모든 것은 연서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이유영 때문에 잠잠해졌다.하지만 그 평온함은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네가 와서 데려가.”박연준의 말이 끝나자,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고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데려가라고? 박연준은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수술은 내가 할게.”박연준은 전화 너머의 강이한에게 말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공기는 다시 정적에 휩싸였고 박연준은 그 말을 하는 데 온 힘을 다 쓴 듯 강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어둠 속에서 박연준은 차갑고 외로운 기운을 내뿜었다.그는 모든 것을 잘못했다. 단 한 가지, 서주에 대한 인식만은 옳았다.서주는 마치 늪과 같았다. 하지만 그 늪은 결국 그와 강이한을 삼켜버렸고 그는 이유영까지 그 늪으로 끌어들였다.만약 빚을 따진다면… 그와 강이한 중,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박연준이었다.만약 그 음모와 계략이 없었다면 이유영과 강이한은 원래대로 행복했을 거지만 결국 박연준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은 것이다그날 밤,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아침 식탁에는 이유영을 떨리게 했던 쓴 약이 사라졌다.“내가 먹여줄게.”“싫어.”“유영아, 나에게 그렇게 냉정하지 마.”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연준의 감정은 분명히 이상했지만 어디가 이상한지는 이유영도 알 수 없었다.박연준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유영은 아직 어둠에 익숙하지 않았다.그때 박연준은 이유영을 도와주려고 했고 이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