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기증해 주겠다고 합니다." 조형욱의 말에 강이한의 얼굴에 서서히 안도의 빛이 스쳐 갔다. 그 소식은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한지음의 눈과 다리 문제가 그와 이유영의 이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만큼, 해결책을 하루라도 빨리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빨리 청하시로 데려와." 강이한의 말했다.유영이 집을 나간 후 변해버린 그녀와의 관계, 그리고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성격까지,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알겠습니다." 조형욱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는 바로 기증자와의 연결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한지음의 주치의인 배준석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증자만 있다면 한지음이 회복되는 것은 거의 확실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조율하기 위해 조형욱이 자리를 비우자, 강이한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때 강서희한테서 연락이 왔다.“여보세요.”“오빠, 엄마 깨어났어!”한편, 진영숙의 병실에는 강서희뿐만 아니라 유경원도 함께 있었다.강서희는 병실 한쪽에 앉아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유경원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던 탓에, 이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이때 진영숙이 옆에 앉아 있던 유경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역시 딸이랑 며느리가 최고야. 아들내미 있어봤자 쓸모없어.”진영숙이 애정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유경원이 참 마음에 들었다.“어머니.”유경원도 질세라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봤다.“그런데 너의 아빠는 회의 가셨니?”“네, 어머니.”유경원이 예의 바르게 답했다.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 자라서인지 작은 행동 하나에도 기품이 넘쳤다. 진영숙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되짚으며 속으로 계획을 세웠다.“이제 너의 둘 사이,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니? 부모님한께 좀 뵙자고 전해
이유영은 크리스탈 가든이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은 겉모습부터 예술적인 분위기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크리스탈 가든은 보석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우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곳이 로얄 글로벌 그룹 소유였다니, 그제야 이유영은 정국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로비로 들어가자, 굉장히 정중한 분위기를 내뿜는 한 여직원이 그녀를 맞이했다."이유영 님, 맞으시죠?""네, 맞아요.""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이유영은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이곳은 강이한의 회사와 비교해 봤을 때 굉장히 엄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로비 직원조차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굉장히 절제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전용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여직원이 말했다."이유영 님, 위에 기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알겠어요."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이때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밖엔 정장을 입은 또 다른 직원이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이유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회의실 문 앞까지 와 있었다.'왜 날 회의실로 안내했지? 난 삼촌 보러 온 건데.'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려버렸다."들어가시면 됩니다."직원이 회의실 문고리를 잡은 채 말했다.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이유영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심에 앉아 있던 정국진을 바라봤다.그러나 정국진은 엄숙한 표정을 유지할 뿐 답할 기색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평소 일할 때의 모습이었다.“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번에 새로 임명된 이유영 대표이사입니다.”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커다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이유영은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대표이사라니!“축하드려요, 대표님!”옆에 있던 직원이 조용히 이 상황을 상기시켰다. 이유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국진을 바라봤다. 정말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어떻게 말 한마디도 없이! 아
강이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별일 없으면, 저 이만 회사로 돌아가 볼게요.”“거기 서!”진영숙이 노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강이한을 불러 세웠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니, 그녀는 누구보다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비뚤어진 태도를 보일 땐 항상 이유영과 연관되어 있었다.‘역시 아직 이유영을 잊지 못한 거야!’“경원이한테 날짜 잡으라고 말했어. 이제 슬슬 너희 둘 관계도 정리해야 하지 않겠니?”“….”“경원의 아빠가 이 청하시에서 얼마나 입김이 센지 너도 잘 알잖아! 다시 내년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내려면 든든한 뒷백이 필요할 거야!”말을 이어갈수록 진영숙의 목소리는 격양되었다.하지만 강이한은 전혀 미동이 없어 보였다.“하! 여전하시네요, 어머니. 그딴 뒷백 필요 없어요!”강이한은 그 말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을 향해 걸어갔다.이때 뒤에서 진영숙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그래, 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 비겁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확실한 건 없어! 나랑 너의 할머니가 강씨 가문을 어떻게 지켜왔는데!”“….”강이한은 진영숙과 그의 할머니가 어떤 방식으로 강씨 가문을 지켜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강이한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했다. 진영숙도 그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경원이가 얼마나 널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너도 잘 알잖아. 널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기다리는 것보단, 그래도 너만 바라보는 사람이 낫지 않겠니?”사랑하지 않는 여자, 이 말 한마디에 강이한은 큰 충격에 빠졌다.‘이유영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진영숙은 더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강이한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아까보다 몇 배 더 어두워진 얼굴로 병실 밖을 나가버렸다.빠르게 병원을 빠져나온 강이한은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탔다.그는 거의 주머니를 뒤지며 담배를 꺼냈다.이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지금 통화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강이한이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안 믿어지지? 나도 처음엔 헛소문인 줄 알았어. 형도, 크리스탈 가든 알지?”강이한도 당연히 크리스탈 가든을 알고 있었다.청하시 상류사회에서 이 브랜드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매년 새 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모두 예약이 찰 정도로 유명했다. 게다가 크리스탈 가든 모든 디자이너가 세계적으로 유명했는데, 만만치 않은 뒷배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또한 강이한도 직접 이유영에게 이 브랜드 목걸이를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뭔가 잘못 보도된 거 아니야?”“어허, 사람을 뭐로 보고, 사진까지 나왔다니까! 지금 보내줄게!”배준석이 확신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크리스탈 가든이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이유영이 대표가 되었다고 하니 강이한은 믿기 힘들었다. 이유영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해봤자 최근 청하시에 진행된 두 프로젝트뿐이었다. 겨우 그것만으로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 자리에 오른다고? 박연준과 서재욱이 아무리 힘을 써준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이한은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통화를 종료하고 카톡으로 들어갔다. 채팅창을 열어보니 이유영이 한 회의장에서 사람들한테 축하받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크리스탈 가든, 새 대표 임명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보였다.그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번뜩였다.‘하, 참 대단하군!’그런데 이때 또다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서원한테서 온 전화였다.“여보세요.”“나야, 알아냈어.”전화 너머 나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빨리 말해.”강이한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크리스탈 가든 대표 자리가 강이한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영이 그 자리에 앉은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처음 이유영이 집을 나갈 때만 해도 그는 대수로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영이 해봤자 뭘 할 수 있겠는가? 독립도 어려울 거라 여겼었다. 하지만 잠시 그와 떨어져 있는 사이 이유영은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올라가 버렸다. 그녀는
오늘 회의는 이유영의 순발력으로 무사히 마무리되었지만, 이유영은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정국진을 노려보았다.“삼촌!”정말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말 한마디도 없이 자신을 이 상황에 던져놓은 정국진이 원망스러웠다. 살짝 언질이라도 줬더라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사람들 앞에 서서 얼마나 식은땀이 났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미안해, 나도 방법이 없었어.”“아니, 여기 원래 대표는 어디 가고요?”크리스탈 가든 같이 큰 브랜드에 대표가 없었을 리는 없었다. 정국진이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거리며 입을 열었다.“혼자 뒷주머니만 열심히 채우길래, 해고했어.”“….”크리스탈 가든같이 큰 브랜드의 대표를 해고했다는 말을 저토록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정국진밖에 없을 것이다. ‘“전 못해요!”이유영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거의 사고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나온 거였다. 이토록 큰 지점을 무슨 수로 그녀가 맡겠는가? 하지만 정국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지현우를 보내줄게.”지현우는 조민정과 맞먹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비서였다. 이유영은 조민정이 얼마나 대단한 업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겪어본 사람이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는 그 능력,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조민정과 맞먹을 정도로 능력자라니 믿음은 갖지만, 이유영은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저 요즘 정말 바빠요.”이유영이 투덜거리듯 말했다.비록 강이한의 방해로 많은 프로젝트가 어그러졌지만, 이번 동교 프로젝트 등 성공 사례들이 있어 새로운 기업들이 그녀에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사정이었고, 정국진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코웃음치며 말했다.“겨우 그거 가지고 되겠니? 조민정 연봉도 안 나오겠다!”“네?”“조민정이 회사 경력이 짧아서 그렇지, 얼마나 뛰어난지 너도 알 거 아니야?”
이유영은 속으로 놀랐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지? 태양이 서쪽에서 떴나? 정국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강이한이 낯설었다. 어쩌면 이 남자, 좀 변한 걸까? 이유영은 생각했다.“여긴 무슨 일이야?”이유영이 침착하게 강이한에게 물었다.다행히 리셉션 직원들 모두 교육을 잘 받았는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대놓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가끔 힐끔거리기는 했던지라, 살짝 불편함을 느낀 이유영이 강이한을 향해 고갯짓했다. 웬일인지 강이한은 순순히 그녀의 의사에 따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시작은 이유영이었지만,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강이한이 앞장서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이유영, 하지만 방향을 바꾸긴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었다.“무슨 일인데? 나도 차 가져왔으니까 일단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이유영!”이름 단 한마디였으나, 그 속에 담긴 폭풍우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강이한의 눈은 어느새 불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차 타!”그 말과 함께 강이한은 거칠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유영은 잠시 주변을 살핀 뒤 함께 차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아!”이유영의 비명이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너 미쳤어? 멈춰! 멈추라고!”그녀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이한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그는 마치 레이싱 선수처럼 아주 난폭하게 이리저리 차들을 피하며 화풀이하듯 운전했다. “아악!”전방에 큰 트럭과 부딪히기 일보직전, 강이한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감쌌다. 이유영은 긴장과 두려움에 심장이 벌렁벌렁 숨쉬기 힘들 정도로 빨리 뛰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안전벨트만 아니었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친놈처럼 왜 이러지? 설마 나 죽이려고? 내가 뭐 어쩄다고!’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이게 무슨 짓이야!”이유영이 짜증스레 물었다.“날 가지고 노니까 재밌었어?”“….”‘가지고 놀다니?’“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하!”강이한은 차갑게 웃으면서 차에서 내렸다. 그런 뒤, 차 보닛에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적이 흘렀고, 매캐한 담배 연기만이 뿌옇게 둘 사이를 채웠다. 강이한은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고 있는 감정들을 잠재우기 위해 담배를 한 대, 또 한 대 이어서 피웠다. 이유영의 다리가 저려오고 강이한의 발밑에 담배꽁초가 서서히 쌓여갈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내가 오냐오냐 봐주니까, 분수를 모르네. 네가 누구 것인지 잊은 거야?”“무슨 소리 하는 거야!”이유영은 강이한의 이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강이한은 좀 전에 배준석과 나서원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국진이 이유영의 삼촌이라고? 그는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멋대로 둘의 관계를 추측하며 지낸 나날들을 생각하자, 그는 당장이라도 이유영을 목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 “즐거웠어?”강이한이 위험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즐거웠냐니?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 했는데?”“….”그녀의 말을 듣자, 강이한은 겨우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강이한은 이유영이 반응할 새도 없이 빠르게 손목을 낚아채 그녀를 차 보닛 위로 제압해 버렸다. 주변은 고요했고 인기척도 없었다. 지금 강이한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와서 말려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유영은 대립하고 있던 것도 잊은 채 겁에 질려 버렸다.“너,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떨리는 목소리로 이유영이 소리쳤다.이유영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은 강이한은 웃음이 나왔다.“왜? 무서워?”“….”“이런 외진 곳에, 뭔 일이 나도 이상할 거 없지.”강이한이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이유영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그녀는 궁지에 몰린 기분으로 끊임없이 속으로
강이한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이성으론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강이한, 이 개새끼!”이유영이 욕하며 힘껏 저항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이한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그녀를 몰아붙였다.그리고 한참,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갔다. 강이한은 고개를 들어 이유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은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부어 있었다. 기다랗고 하얀 강이한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이유영은 그의 손가락에 분풀이하듯 꽉 깨물었다.찰칵, 이때 핸드폰 카메라 소리가 울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강이한의 반대편 손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소용없었다.“뭐 하는 거야!”“뭐 하는 거라고 생각해?”“강이한!”이유영이 소리쳤다.“내가 너 때문에 본 손해가 얼마인데, 너도 이 정돈 감수해야지?”이유영과 달리 강이한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는 이유영이 이토록 사람을 잘 속이고 교활할 줄은 몰랐다. 한지음도 결국 이유영 때문에 지금 병원 신세를 지고 있지 않은가? 그의 표정을 본 이유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좀 전에 느꼈던 두려움 따위는 잊은 듯, 분노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강이한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채 뺨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는 도리어 이것을 기회로 삼아 그녀를 희롱하듯 손등에 입맞춤했다. 이유영은 뻔뻔한 그의 행동에 치를 떨었다. 그녀는 도무지 오늘 강이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이때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왜 진작 해명하지 않았어?”“뭘?”“너와 정국진의 관계!”“….”그 말을 들은 이유영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다.“하, 내가 왜 해명해야 해?”해명이라, 정말 웃기지 않는가? 해명했다고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강이한은 그래도 그녀를 의심했을 것이다. 이유영은 몸을 일으키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옷을 정리했다.
박연준의 해명은 이유영에게 공허하고 무력하게 들렸다.오늘의 박연준은 이유영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박연준이... 강이한을 두둔하다니.결국 한 여자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으니,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이유영은 이 상황이 비참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유영아, 넌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이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박연준은 내심 괴로워하고 있었다.“그만하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서는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금기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연서의 존재는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수년 동안 안긴 모욕과 같았다.연서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이유영은 자신이 강이한과 박연준의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절감했다.이유영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이유영의 존재는 결국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착각에 불과했다.그것이 바로 이유영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차지했던 자리였다. 가소롭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리.“유영아, 나는 변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어.”“또 무슨 꿍꿍이인지 어떻게 알아?”이유영의 목소리는 억누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의 몸은 이유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순간 굳어버렸다.그 말은 이유영이 박연준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조종하고 계산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고 우지와 우현은 한 발짝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현재 식당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시간은 계속 흘러갔다.이유영은 매일 약을 먹고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강이한이 곁에 있었을 때, 이유영은 강이한이 내민 사탕을 자연스럽게 입에 넣었었다.하지만 지금은?박연준이 사탕을 내밀어도 이유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이한에게 차가웠던 만큼 박연준에게도
이유영은 사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걸까?“나는 나를 벌주는 게 아니야. 그냥... 정말로 익숙해진 거야.”고통도 결국 어떤 이에게는 습관이 될 수 있었다.“...”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서주 쪽 상황은 지금 어때?”“강이한은 돌아갔어.”박연준의 대답이었다.강이한이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박연준이 서주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이유영의 눈빛은 더 어두워져만 갔다.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먼저 말했다.“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미워?”그 사람, 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강이한이 정말 미웠다. 그러나 미움에도 강약이 있는 법, 이유영은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겪어야 했다.“미워.”“그가 죽기를 바랄 정도로?”박연준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이유영은 다시 침묵했다.강이한이 죽기를 바랄 정도인가?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그 감정은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었다.그것이 이유영의 강이한에 대한 미움이었다.“뭐가 문제야?”이유영의 말투는 차가워졌다.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강이한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유영에게 너무 무거웠다.“너도 나를 그렇게 미워해?”박연준이 시험 삼아 물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그럼 너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강이한과 박연준에게 그녀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미움뿐이었다.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은 후에도 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이유영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 태도는 냉정했고 그녀의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났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눈에 상처가 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답답함을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강이한이 정국진에게 말했다.염 선생의 조언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고 이유영을 평생 어둠 속에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처리해 이유영의 시력을 회복시키겠다고도 덧붙였다.“자신을 벌하고 있는 거예요.”한참을 침묵하던 정국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임소미는 그 말을 듣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정말 자신을 벌하고 있는 걸까?그렇다.정국진의 말이 맞았다. 강이한은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벌하고 있었다.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려는 그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너무도 무거웠다. 과연 이런 방식으로 속죄가 가능할까?...강이한은 떠났다.잠시 후 월이가 임소미의 목을 끌어안고 재잘거리며 들어왔다.“할머니, 아까 모르는 사람이 준 거 안 먹었어요.”“정말 잘했구나.”월이의 말을 들은 임소미의 마음은 더없이 씁쓸했다. 이 모든 것이 강이한이 자초한 일이었고 그의 업보였다. 누구도 그에게 가혹하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하지만 정말 그럴까?임소미는 이유영이 평생 월이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그리고 강이한이 오늘 월이를 마지막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임소미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할머니, 엄마는 언제 돌아와요?”월이는 정말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의존은 본능적이었다.“곧 돌아올 거야.”“할머니, 제 아빠는 누구예요?”“...”임소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불편했던 호흡은 월이의 질문을 듣고 더욱 답답해졌다.월이의 아빠는...“월이, 아빠가 보고 싶니?”임소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아빠가 보고 싶냐는 질문에 월이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왜?”“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사랑하지 않는다고?월이가 기억하는 한, 월이의 세상에는 아빠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인 이유영 혼자뿐이었다.아이는 단순했고 이유영의 외로움을
강이한은 아마도 세상에서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을 것이다.세상에 아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이 있을까?그는 지금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아이는 그렇게 경계하며 강이한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 월이는 강이한의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혀 다가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모퉁이를 돌 때, 강이한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놀라서 움찔했다.남자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월이에게 말했다.“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기억해.”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월이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월이가 침묵하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이한은 절망을 느꼈다. 이 모든 고통은 한때 이유영이 홀로 겪었던 것이었다.이제 그 고통이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이유영이 겪었던 아픔이 하나하나 그의 뼛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강이한은 떠났다.한편, 임소미는 조용히 정국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국진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임소미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말했다.이것이 이유영이 항상 수술을 거부했던 이유였다. 이유영은 죽은 사람의 장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은 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그렇게 눈앞이 흐릿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다.살아있는 사람의 것은 정말 구하기 힘들었고 기꺼이 수술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그렇다면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유영은 어떤 수단도 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두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강이한의 말대로 만약 석 달 후에 이유영이 염 선생의 약을 먹고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강이한이 책임지겠다고 했다.이것이 서재에서 정국진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딸이 이렇게 다치고 나서 임소미는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강이한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그가 사라져야만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이유영이 돌아온 이후 몇 년 동안, 강이한이 이유영에게서 벗어나려 얼마나 애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한편으로는 한지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유영에게 집착하며 그녀의 행복을 방해해 왔다.그런 상황에서 엄마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소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이한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뒷마당에서.강이한은 멀리서 나비를 쫓는 아이를 따뜻하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강이한의 마음이 아파졌다.그 아이는 나비를 쫓으며 정말 즐거워 보였다. 이곳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곳인 듯했다.정씨 가문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귀여워하고 아끼고 있었다. 그 아이는 꽤 작은 몸집을 가졌는데 아마 조산 때문일 것이다.“유씨 할머니, 저 잡았어요!”아이가 나비 한 마리를 잡고 기쁜 얼굴로 도우미에게 달려갔다.유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작은 아가씨는 점점 더 빨라졌네요. 나비도 잡을 수 있군요.”“저 정말 대단하죠?”“네, 정말 대단해요.”찬을 받은 아이는 더욱 밝게 웃었다.“유씨 할머니.”“네?”“수박 먹고 싶어요.”“알겠어요. 가져다줄게요.”그 아이는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었다.여기서 그녀는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임소미는 종종 한탄했다. 그 아이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서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되었다.그런데도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다.아이는 나비를 놓아주었다.아이는 나비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절대로 해치려 하지 않았다. 수박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유 아주머니가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강이한을 발견한 아이의 눈에는 잠깐의 두려움이 스쳤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강이한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경계심
그런 결과라면...직면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좋겠지만, 만약 그 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영원한 끝을 의미할 것이다.그녀가 원했던 대로 끝이 나는 것이다.그리고 이유영은 그로 인해 기뻐할까?강이한의 곁을 떠나고 싶어 했던 이유영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는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을 느꼈다.하지만 이유영이 떠난다고 해도 강이한은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강이한이 만든 결과였다....강이한과 정국진은 서재에서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서재에서 나올 때, 정국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임소미만 홀에 있었다.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온 모습을 보고 임소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진우를 보내서 이유영을 데려오게 했어요.”여진우를 보내 이유영을 우천시에서 데려오기로 했다?이유영이 거기서 어떻게 지내든지 상관없이, 임소미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설령 요 선생이 거기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치료는 장소에 상관없이 받을 수 있었고 약을 먹는 것 역시 어디서든 상관없었다.“돌아오라고 해!”정국진의 목소리는 다소 무겁게 떨어졌다.“...”임소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정국진을 바라보았다.도대체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나온 후 정국진의 태도가 이렇게 변한 걸까?임소미는 정국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당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집사!”“예, 선생님.”“진우에게 연락해서 우천시로 가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고 해.”“네!”“아니...”임소미는 정국진의 진지한 모습에 화가 나 발을 굴렀다.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왜 갑자기 강이한 편을 드는 것인가?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지 임소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임소미는 본래 차분한 사람이었지만 정국진의 태도에 화가 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그의 뜻을 따르기엔 이유영이 너무 불쌍했다.저번에도 정국진은 강이한에게 기회를 줬지만 그 결과는 참
강이한은 지금 딸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래서 우천시에서 돌아오는 내내 그의 마음은 무겁고 괴로웠다.강이한은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지난 세월 동안 강이한은 이유영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심지어 아이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미 나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서재에서.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강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차가운 빛으로 번뜩였다.“나를 탓하지 마라.”이유영에 관한 이야기였다. 방금 정국진은 강이한에게 이유영과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강이한은 지금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에게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더군다나 정씨 가문의 사람들 모두 이유영을 강이한에게 다시 맡길 생각이 없었고 둘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려 했다.“지금 유영이의 곁에 박연준이 있습니다.”강이한은 약간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이미 불편했던 감정은 강이한의 말에 더 강하게 흔들렸다.“그게 무슨 뜻이야?”정국진은 영리한 사람이라 강이한의 말을 듣자마자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있었음을 눈치챘다.강이한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국진을 바라봤다.“염 선생의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완벽한 희망을 보장할 순 없습니다.”아무리 의술이 뛰어나고 성공 사례가 많아도,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처음 살펴보며 이렇게 말했다.그는 연기로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손상된 눈은 처음이며 지금까지 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가족들이 많은 정성을 들인 덕분이라고 했다.이런 심각한 손상은 신중히 관리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이것이 백산 별장이든 반산월이든, 심지어 황가 국제 그룹의 조명까지도 여러 번 교체한 이유였다. 이유영의 눈에 가장 적합한 빛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바꿔야 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유영의 두 눈은 결국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그날 염 선생이 자신도 백
강이한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유영은 그의 곁에 없었다.이 사실은 임소미와 정국진의 마음에 깊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에게 있어 강이한이란 사람은 원래부터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은 우천시에 있어요.”우천시?거긴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임소미와 정국진은 우천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살기 좋고 환경이 쾌적한 곳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작 그곳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생판 낯선 그곳에 버려두었다는 말인가?“대체 무슨 속셈이야?”정국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이한에게 다가가며 전례 없이 날카롭고 위협적인 어조로 물었다.강이한은 담담히 대답했다.“염 선생을 찾아냈어요.”염 선생?정국진과 임소미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이름을 두 사람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과거 이유영의 두 눈이 큰 상처를 입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바로 염 선생이었다.하지만 그때 마침 염 선생은 은퇴한 상황이었고 그 뒤로 두 사람을 포함한 누구도 염 선생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그런데 강이한이 지금 염 선생을 찾아냈다는 말인가?그런데도 임소미는 여전히 강이한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이유영이 우천시에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강이한은 왜 이곳에 왔을까?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치료 중이예요. 곧 결과를 알게 될 거예요.”강이한은 무심하게 말했다.강이한의 태도는 어딘가 묘하게 이상했다. 정국진은 이를 간파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강이한은 두 사람을 지나쳐 식탁에 앉아 있는 월이를 바라보았다.아이의 기억은 정말로 짧았다. 강이한을 보자마자 무서워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외쳤던 월이는 지금 강이한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간 임소미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아이의 심리 회복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제 월이의 마음속에는 어떤 두려움도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그만 쳐다봐!”임소미는 본능적으로 강이한의 시선을 막
박연준은 전기봉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곁을 떠났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 박연준이 전달한 내용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러나 강이한에게 주어진 것은 명백히 선택지였다.결국 강이한은 서주와 이유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고 그의 선택은 서주였다.이유영의 가슴 한구석이 답답함에 서서히 조여 왔다.그 느낌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이유영, 넌 참 똑똑해.”박연준이 이유영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내가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너희들이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거야?”이유영의 말투에는 날카로운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정말 그래야만 하는 걸까?강이한에게는 분명히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유영에게도 선택지는 있었다. 그리고 이유영은 그 선택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박연준, 아직도 모르겠어?”이유영은 냉소적으로 말했다.“평생 네 얼굴을 보지 않게 되길 기도해. 그렇지 않으면... 난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몰라.”이유영의 한마디 한마디는 날이 서 있었다.“...”그렇다면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증오하는 걸까?확실히 이번 일로 인해 이유영의 마음속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두 사람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박연준은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유영아!”“날 위해 서주의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말하려고?”이유영의 말투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모든 걸 내려놓았다.박연준이 전기봉의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이게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난 네게 부탁한 적 없어.”이유영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세상엔 네가 준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법은 없어.”결국 박연준이 전기봉의 소식을 강이한에게 전한 것은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었다.박연준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 이유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흔들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