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한지음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강이한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둘의 결혼 생활은 한지음만 문제였던 것이 아니었다. 과거 그녀가 고아라는 이유로 얼마나 강씨 집안에서 무시를 당했던가? 이런 작고 큰 문제들이 모여 결국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인데, 그는 여전히 자각이 없어 보였다.이유영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바라봤다.“우린 그것 말고도 많은 문제가 있었지.”“….”‘전생을 포함해서!’회귀 전과 후, 그들 사이엔 수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이유영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쓰라렸지만,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말에 강이한의 동공이 커졌다. 그제야 무수히 많은 순간과 엇갈림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그는 답을 찾기 위해 헤맸다.그러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 이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 환하게 뜬 삼촌이라는 글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왜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가 알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지금 그녀의 핸드폰 화면처럼!“네, 삼촌.”이유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를 보아도 이성적인 감정이 한 줌도 섞이지 않은, 가족을 대하는 따뜻한 말투였다. “네, 위치 보낼게요.”정국진이 차를 보내겠다고 했는지, 이유영이 답했다. 그리고 나서 둘은 잠시 몇 마디 더 주고받은 후 전화를 끊었다.강이한은 이런 이유영을 그저 옆에서 바라보았다. 통화를 마친 이유영이 담배를 던지며 발로 비벼껐다.“더 할 말 있어?”“뭐?”“없으면 먼저 가. 삼촌이 차 보내주신대.”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그녀는 당당히 강이한 앞에서 삼촌이라는 호칭을 썼다.정신없는 하루였지만, 결국 이유영은 평정심을 잡았다. 이때 머뭇거리던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부탁 하나 해도 돼?”“뭘?”“화풀이는 지음한테 말고, 나한테만 해.”한지음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
한지음 얘기가 나오자 유영은 치가 떨렸다.한지음의 출생의 비밀을 알았을 때, 그녀가 복수를 위해 일부러 강이한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 황당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대체 누가 피해자란 말인가! 굳이 피해자를 따지자면 믿었던 남편에게 배신당한 유영의 어머니가 피해자였으며 남의 가정을 파탄 낸 한지음의 엄마가 가해자여야 맞다.하지만 한지음의 어리석은 복수심으로 유영은 사랑하던 남편을 잃었다.10년을 사랑한 남자는 그녀를 가해자로 지목하며 그녀에게 공개 사과를 강요하고 있었다.유영의 두 눈에서 분노와 실망의 감정을 읽은 강이한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이유영, 넌 한지음을 미워할 자격이 없어.”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한지음보다 더 나빠!”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정국진의 차가 도착하자 유영은 차로 향하며 그에게 말했다.“한지음한테 가서 전해.”그녀는 숨을 고르고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걔 말이 맞았다고. 우리 사이의 게임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이야.”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정국진의 차에 올랐다.한지음이 엄마를 증오해서 모든 분노를 그녀에게 쏟았다면 이미 환생하여 다시 태어난 유영은 그녀의 뜻대로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엄마가 죽기 전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팠다.전에는 엄마가 왜 밤중에 일어나서 슬피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아빠는 충실한 가장이었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믿었다.하지만 엄마의 일생은 한지음의 모친에 의해 망가졌다.그리고 그 딸이 찾아와서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리려 하고 있었다.“가요, 외삼촌.”차에 오른 유영은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힐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홀로 남은 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유영의 차량을 노려보았다.이제 시작이라고?대체 언제면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그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조형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병원으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지음 씨가….”“지음이가 왜?”“
강이한은 음침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아들을 본 진영숙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것 봐! 내가 전부터 그랬잖아! 이유영 걔 진짜 악랄한 애라고!”“엄마 말 안 듣고 굳이 걔랑 결혼하더니 집안 꼴이 대체 이게 뭐야? 걔는 대체 지음이한테 왜 이러는 거야!”진영숙은 유영이 저지른 일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진영숙은 다급히 의사의 팔목을 잡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우리 지음이 어떻게 됐어요?”강이한은 그 자리에 서서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의사를 노려보았다.의사가 말했다.“다행히 일찍 발견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한지음이 수술실 침대에 실려 나왔다.위세척을 금방 마친 터라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지음아, 우리 불쌍한 지음이!”진영숙은 한지음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어머니.”“그래, 아가.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진영숙은 한지음의 손을 꽉 잡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이한 오빠는요?”“이한이 여기 있어.”진영숙은 강이한에게 눈치를 주며 대답했다.강이한은 엄마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한지음에게로 다가갔다.한지음이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오빠. 제가 또….”“지음아!”“왜 저를 살렸어요?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차라리 죽었으면 이런 고통은 안 겪었을 거 아니에요!”한지음이 울며 고함쳤다.진영숙은 한지음이 안타까운 동시에 유영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한지음은 곧 병실로 옮겨졌다.부름을 듣고 병원으로 온 강서희는 한지음을 친딸처럼 챙기는 진영숙을 보자 표정이 굳었다.하지만 진영숙의 눈에는 한지음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이한이가 알아서 다 해결해 줄 텐데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어?”진영숙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일찍 발견해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목숨까지 바쳐가며 강이한을 구해준 한지석에게 죄를 지을 뻔
진영숙은 강서희에게 한지음을 맡기기로 했다.“너 여기서 지음이 두 시간만 봐줘. 엄마 곧 올 테니까. 그리고 휴대폰 절대 지음이 주지 마!”진영숙은 정신이 없어서 자기가 한지음의 핸드폰을 이미 박살냈다는 사실도 깜빡한 모양이었다.강서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겉으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말고 어서 가.”“그래, 너만 믿는다.”진영숙은 흐뭇한 얼굴로 강서희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병실을 나갔다.단 둘만 남게 되자 강서희는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한지음에게 말했다.“너 이유영보다 더 대단한 애였구나. 나 감탄했잖아.”유영은 시집온 뒤로 강이한을 제외한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하지만 한지음은 달랐다.이 집안에 강서희를 제외하고 모두가 한지음을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진영숙은 한지음을 딸처럼 대했다.한지음이 말했다.“지금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지?”싸늘한 말투에 발끈한 강서희가 다가가서 한지음의 귀뺨을 때렸다.“주제도 모르는 년!”원래대로라면 계획했던 일이 끝나면 한지음은 완전히 그들의 세상에서 사라져야 했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배신을 때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강서희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지음을 노려보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너도 참 대단하다. 그러다가 수술 실패하면 어쩌려고 그랬어?”“확신이 있으니까 시작했겠지. 넌 그럴 깜냥도 없잖아.”한지음도 지지 않고 맞섰다.강서희의 얼굴은 완전히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그녀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하, 그렇게 자신만만하다가 수술 실패해서 평생 장님으로 살지나 마.”강서희는 무덤덤한 한지음의 모습을 보자 더 화가 치밀었다.“우리 오빠, 아직 이유영 못 잊은 모양이더라. 너 우리 오빠랑 결혼하려면 좀 더 분발해야겠어!”“말했잖아. 난 그 자리 원한 적 없다고!”“가증스럽긴!”이제 강서희는 한지음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유영을 증오한다고?그건 당연했다. 강서희 본인도 유영을 증오했다. 유영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강이한은 기증자 쪽에 문제라도 생길까 봐 급하게 수술 일정을 잡았다.한지음은 강이한을 향해 손을 뻗었다.남자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물었다.“왜? 뭐 필요해?”강이한의 눈빛에서 약간의 거부감이 스쳤지만 앞을 못 보는 한지음은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그녀가 애달픈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이 암흑에 적응을 해보려고요.”한지음은 남자의 마음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남자의 죄책감을 자극할 수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남자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적응할 필요 없어. 곧 광명을 되찾게 될 거니까.”“정말요?”“그래. 수술 준비는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어.”한지음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앞을 못 보는 나날은 그녀에게도 고역이었다. 영원히 어둠에 갇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는 했다.“제가 정말 앞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사실 두 눈이 멀쩡했을 때도 기증자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혹시 이유영을 설득한 걸까?약간의 기대감이 들었다.강이한이 말했다.“당연하지.”“하지만 사모님은….”한지음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조금 전까지 기뻐하던 얼굴은 죄책감으로 바뀌었다.강이한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어떻게 이렇게 선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했을까?강이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기증자 따로 있으니까 걱정 마.”이유영이 순순히 기증서에 사인할 리 없었다.그의 머릿속에는 매번 각막 기증 얘기가 나올 때마다 미친 사람처럼 발광하던 유영의 얼굴이 떠올랐다.새로운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한지음이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갈까 봐 가슴을 졸였던 그였다.지금 생각해도 정말 숨 막히는 일이었다.반면 한지음은 가슴이 철렁했다.물론 강이한이 보고 있는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사모님이 아니면 기증자가 따로 있어요?”“그래.”“너무 잘됐네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속은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유영을 망가뜨리기
강이한은 진심 어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럴 거야.”그는 한지음 수술만 끝나면 제대로 유영과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그 시각 한지음의 속도 들끓고 있었다.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선한 표정을 유지했다.“가서 좋은 말로 좀 달래주면 금방 풀릴 거예요. 오빠를 사랑하는 분이잖아요.”강이한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정국진이 유영의 외삼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화도 나고 답답했다.대체 언제부터 그녀는 그에게 그리 많은 비밀을 만들기 시작한 걸까?그녀가 지금 소유한 모든 것은 정국진이 준 것이었다. 심지어 정국진은 그녀를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직까지 올려주었다.전에 그는 유영의 업무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여태 능력을 숨겨왔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녀는 관리직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오빠, 무슨 생각해요?”“아무것도 아니야. 왜?”“왜 불렀는데 답이 없어요?”한지음이 서운한 어투로 물었다.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강이한이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이따가 수술 들어가면 모든 게 좋아질 거야. 걱정 마.”“그러니까 사모님이랑….”“나와 그 여자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더 이상 얘기하지 마.”“저는 괜찮아요. 잘 생각해 봤는데 저 때문에 오빠가 가정을 잃는 건 바라지 않아요.”한지음이 말했다.강이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지만 앞을 못 보는 그녀는 느낄 수 없었다.이혼 사실을 떠올리자 강이한은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갑갑했다.처음에는 그녀에게 시간을 주려고 일부러 무시했는데 점점 그녀는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청하시 기업계의 엘리트로 추앙받던 이 남자는 이 순간에 와서야 자신이 전처에게 차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자존심이 상하고 분이 차올랐다.한지음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의료진이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수술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그래요.”강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 선생은 하얗게 질린 배준석의 얼굴을 보고 다가가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배준석은 수술복을 벗어 던지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이 수술, 유 선생이 집도해요.”그 말에 유 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네? 그건 좀….”“환자 상황은 나보다 유 선생이 더 잘 알잖아요. 그리고 이식 수술도 많이 해봤다면서요. 자신 없어요?”“하지만 강 대표님 쪽은….”“시간이 없어요. 하던 대로 하면 돼요!”강이한이 이 수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배준석은 잘 알고 있었다.한지음과 유영 사이에 많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강이한은 되도록이면 유영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배려했다.그래서 한지음이 광명을 회복하는 일은 강이한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배준석은 그의 복잡한 감정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오늘 수술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여 기증자 쪽에 문제가 생긴다면 상황이 얼마나 곤란해지는지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도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강 대표님한테는 뭐라고 설명할까요?”유 선생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세강이 청하시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을 미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그래서 갑자기 자신이 주치의로 집도해야 한다니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각막 이식 수술을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막중한 부담감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무조건 성공해야 하고 실패를 용납할 수 없는 수술이었다.“그건 나중에 내가 돌아와서 설명할게요.”배준석이 겉옷을 입으며 말했다.그는 더 이상 유 선생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유 선생만 남아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배준석은 그와는 입장이 전혀 달랐다.만약 수술이 실패하더라도 강이한이 아끼는 후배였기에 비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수술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유 선생은 벌써 식은땀에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한편, 유영은 정국진의 차를 타고 순정동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최대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업판에 오래 몸담은
정국진의 세상에서 결혼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었다.그래서 정국진은 애처가로 소문났다.파리에 있는 동안 외부에 유혹도 많았지만 정국진은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다. 그런 사람이니 강이한의 외도는 배신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유영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바랐기에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래. 네가 괜찮다니 나도 안심이야.”정국진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강이한이 유영에게 마음이 남아 있더라도 변하는 건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유영이 그의 감언이설에 흔들리고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그에게 흔들리는 것이었다.유영이 말했다.“저는 외삼촌이 재결합하라고 저를 설득하시려는 줄 알았어요.”조금 전 보였던 정국진의 태도를 보았을 때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자리에서 일어선 정국진이 담담히 말했다.“그 인간이 아직 널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해서 복잡한 여자 관계가 용서되는 건 아니야. 그런 사랑이라면 차라리 버리는 게 나아.”유영은 외삼촌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지난 생에는 이 도리를 깨우치지 못해서 각막을 잃고 불에 타죽는 순간에 와서야 본질을 파악했다.처음에는 단지 한지음의 존재 때문에 실망하고 상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전생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다.“너도 이제 회사의 오너가 되었으니 예전에 운영하던 스튜디오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니?”“계속 해나가야죠.”유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갑작스럽게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가 되면서 인수인계 작업 때문에 바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처음 시작한 사업인 만큼 쉽게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쪽을 동시에 운영하려고?”정국진이 물었다.“일단은 민정 씨한테 운영을 맡길 생각이에요.”조민정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그래서 크리스탈 가든의 내부를 장악하는 동안에 조민정이 스튜디오 일을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그것도 괜찮네.”정국진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