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음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편, 순정동에서 이유영은 정국진으로부터 조사 결과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때로는 놀라움, 때로는 분노, 때로는 두려움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마침내 모든 사실을 들은 이유영은 큰 혼란에 빠졌다. 깊은숨을 내쉰 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정국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한지음이 아빠가 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거예요?”“그래.”이유영은 말문이 막혔다.“엄마가 돌아가시게 된 것도 결국 이것 때문이에요?”“그렇지.”이유영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죽음이 아빠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가족을 모두 잃고 남겨진 이유영은 홀로 남겨진 재산으로 학업을 마쳤다. 그녀는 부모님의 사랑을 믿으며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폭풍우처럼 격동하는 그녀의 감정을 앞에 두고, 조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안 그래도 너의 숙모가 알리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했는데, 나는 네 고집을 아니까….”정국진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유영은 너무 어렸고, 별도의 조사가 없었다면 평생 이 진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더 컸다.이유영은 멍하니 정국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는 충격과 혼란이 서려 있었고,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외도한 건 아빠인데. 겨우 엄마가 그 여자한테 따졌다고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마음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정국진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의 대한 남은 이야기를 계속 들려줬다. 그는 이유영이 어차피 직접 조사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기로 결정했다.이유영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상대는 과부였다. 그 과부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
그녀가 깊은 고민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자,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유영아!”“네.”“너무 이 일에 대해 생각하지 마. 내 쪽에서 어떻게 해결해 볼게.”“아니에요!”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정국진이 전한 소식은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그녀는 이러한 개인적인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모든 것을 천천히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준비가 되면, 이유영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해결할 계획이었다.이전까지는 이토록 복잡한 배경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지음을 동생으로 받아들일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한지음과 같은 피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유영은 너무나 역겹게 느껴졌다.이유영은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속으로 치솟는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썼다. “유영아.”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정국진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유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굴이 조금이나마 평정을 되찾은 기색이었다. "괜찮아요." 비록 그녀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정국진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지음은 복수를 계획하며 처음에는 이유영의 엄마를 대상으로 삼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자, 다시 타킷을 이유영에게로 돌린 것이다. “조사한 바에 인하면, 한지음은 성인이 되자마자 곧바로 너의 아버지 재산을 조사했다더라고.”“재산이요?”“그래.”정국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이유영이 기가 찬 듯 웃었다.“혼외자도 상속권을 누릴 수는 있으니까, 그걸로 엄마를 괴롭히려는 심산이었겠죠! 아주 헛다리 짚었네요!”이유영이 어렸을 적,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를 눈치채고 재산 명의를 자신에게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이유영의 부모님 재산은 모두 어머니의 명의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 불행하게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그 모든
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일찍 눈을 떴다. 하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정국진이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잘 못 잤어?” 정국진이 이유영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이유영은 어제저녁에 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되새기며 답했다. 그렇게 놀라운 내용을 하룻밤 사이에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그때 정국진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러니까 너의 숙모가 걱정하지." 그의 목소리에는 이유영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외숙모를 떠올리자 이유영은 마음이 다시 따뜻해졌다. 회귀 전과는 달리, 이제 그녀의 곁에는 정국진과 그의 가족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이유영은 과거와 같은 상황에 다시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느꼈다.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이 정국진에게 말했다. “곧 가셔야죠?”이 말을 들은 정국진이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그러게, 곧 기사가 도착할 시간이네. 너도 같이 가자.”“저요?”“그래.”정국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컵을 쥐고 있던 이유영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청하시는 사방에 눈과 귀가 달린 곳이었고, 그녀는 괜히 새로운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정국진은 오래 머물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로 인해 정국진이 불편한 상황에 휘말릴까 봐 걱정됐다“저는 따로 갈게요.”이유영은 빠르게 사양했다.그녀의 가장 큰 걱정은 우연히라도 강이한과 마주치는 일이었다. 과거 포르쉐와 벤츠를 타고 다닐 때 그와 부딪혀 곤란한 상황에 휘말렸던 경험이 있었다. 만약 오늘 정국진과 함께 있다가 강이한을 만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강이한은 여전히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고, 정국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또 화풀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한편, 정국진은 이유영의 거절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설마 강이한 때문에 그래? 너희 이미 이혼했잖아, 뭐가 걱정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정국진의 호화로운 씀씀이는 여전히 이유영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정국진의 차량이 출발한 뒤 이어진 긴 차량 행렬을 바라보며, 이유영은 머리를 저었다. 그때, 마치 뒤처진 것처럼 보이는 삐까번쩍한 마세라티 한 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유영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좀 평범한 차량으로 바꿔주면 안 돼요?”전과 비교해 더욱 화려해진 차량 앞에 선 이유영은 감탄했다. 강이한의 아내로 있을 때도 그녀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정국진과의 시간을 보내며 그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따라가는 것은 이유영에게는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제가 지금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빠듯할 것 같네요. 내일 처리해 드려도 될까요?”“아….”“오늘 하루만, 네?”“그럼, 딱 하루만이에요!”이유영은 통화를 마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약간 아픈 듯한 느낌에,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이마를 짚었다. 돌아간 그녀는 신속하게 출근 준비를 마쳤지만,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강이한과 마주칠 일은 없겠지?’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강이한이 진영숙의 병문안 때문에 회사에 늦게 도착한 것이다. 결국 옆 건물, 같은 지하 주차장을 공유하고 있던 둘은 마주치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는 이유영의 모습을 발견한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동시에, 이유영도 강이한을 눈에 담았다. 피하고 싶었던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마치 운명의 장난 같았다."또 보네."이유영은 최대한 평온한 척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이혼한 강이한보다 더 화려한 차를 몰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아이러니했다. “또 차를 바꿨나 보네?”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말을 건네며 속에서 치솟는 화를 억누르려 애썼다. "아니, 일이 있어서 잠깐 타고 온 거야." 이유영이 대답했다.'잠깐이라고? 그럼 이런
이유영은 최근에 강이한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를 빼앗은 대가로 치열한 업계 경쟁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청하시의 상류사회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그녀의 회사는 동교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주요 계약에서 손을 떼야 했다. 이유영의 사무실 전화는 그 소식을 전하는 파트너들의 연락으로 오전 내내 멈추지 않았다. “네, 괜찮아요. 이해합니다.”그녀는 모든 전화에 침착하게 대응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유영은 강이한의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되게 하면 되니까!그녀는 통화를 마친 뒤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어시스턴트 한 명이 사무실 문을 노크하며 조심스레 점심시간을 알렸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정국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금 바로 크리스탈 가든으로 와!”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크리스탈 가든은 최근 10년 동안 부유층 여성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보석 브랜드였다. 한때 이유영의 시어머니였던 진영숙이 매년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구매할 정도였으니까.“설마 삼촌, 전에 말했던 로열 글로벌 그룹 지사가 크리스탈 가든이었어요?”“그래, 그러니까 얼른 와!”“알겠어요.”궁금한 건 많았지만, 이유영은 굳이 전화로 더 질문하지 않았다. 정국진의 목소리만으로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통화를 마친 이유영은 사설 탐정한테 받은 자료를 포함해 책상 위 모든 서류들을 깔끔히 정리한 뒤, 조민정에게 연락했다.“사설 탐정 잔금처리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조민정과 통화를 마친 후, 이유영은 직접 차를 몰고 빠르게 크리스탈 가든으로 향했다.이유영이 업무에 몰두하는 동안, 강이한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비서 조형욱이 신속하게 지시를 이행함으로써, 이유영의 사업 파트너 대부분이 그녀를 외면하게 되었다.강이한은 조형욱에게 고의로 눈에 띄게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유영이 이 모든 상황의 배후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그 사람이 기증해 주겠다고 합니다." 조형욱의 말에 강이한의 얼굴에 서서히 안도의 빛이 스쳐 갔다. 그 소식은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한지음의 눈과 다리 문제가 그와 이유영의 이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만큼, 해결책을 하루라도 빨리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빨리 청하시로 데려와." 강이한의 말했다.유영이 집을 나간 후 변해버린 그녀와의 관계, 그리고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성격까지,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알겠습니다." 조형욱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는 바로 기증자와의 연결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한지음의 주치의인 배준석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증자만 있다면 한지음이 회복되는 것은 거의 확실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조율하기 위해 조형욱이 자리를 비우자, 강이한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때 강서희한테서 연락이 왔다.“여보세요.”“오빠, 엄마 깨어났어!”한편, 진영숙의 병실에는 강서희뿐만 아니라 유경원도 함께 있었다.강서희는 병실 한쪽에 앉아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유경원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던 탓에, 이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이때 진영숙이 옆에 앉아 있던 유경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역시 딸이랑 며느리가 최고야. 아들내미 있어봤자 쓸모없어.”진영숙이 애정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유경원이 참 마음에 들었다.“어머니.”유경원도 질세라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봤다.“그런데 너의 아빠는 회의 가셨니?”“네, 어머니.”유경원이 예의 바르게 답했다.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 자라서인지 작은 행동 하나에도 기품이 넘쳤다. 진영숙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되짚으며 속으로 계획을 세웠다.“이제 너의 둘 사이,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니? 부모님한께 좀 뵙자고 전해
이유영은 크리스탈 가든이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은 겉모습부터 예술적인 분위기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크리스탈 가든은 보석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우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곳이 로얄 글로벌 그룹 소유였다니, 그제야 이유영은 정국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로비로 들어가자, 굉장히 정중한 분위기를 내뿜는 한 여직원이 그녀를 맞이했다."이유영 님, 맞으시죠?""네, 맞아요.""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이유영은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이곳은 강이한의 회사와 비교해 봤을 때 굉장히 엄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로비 직원조차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굉장히 절제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전용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여직원이 말했다."이유영 님, 위에 기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알겠어요."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이때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밖엔 정장을 입은 또 다른 직원이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이유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회의실 문 앞까지 와 있었다.'왜 날 회의실로 안내했지? 난 삼촌 보러 온 건데.'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려버렸다."들어가시면 됩니다."직원이 회의실 문고리를 잡은 채 말했다.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이유영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심에 앉아 있던 정국진을 바라봤다.그러나 정국진은 엄숙한 표정을 유지할 뿐 답할 기색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평소 일할 때의 모습이었다.“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번에 새로 임명된 이유영 대표이사입니다.”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커다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이유영은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대표이사라니!“축하드려요, 대표님!”옆에 있던 직원이 조용히 이 상황을 상기시켰다. 이유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국진을 바라봤다. 정말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어떻게 말 한마디도 없이! 아
강이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별일 없으면, 저 이만 회사로 돌아가 볼게요.”“거기 서!”진영숙이 노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강이한을 불러 세웠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니, 그녀는 누구보다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비뚤어진 태도를 보일 땐 항상 이유영과 연관되어 있었다.‘역시 아직 이유영을 잊지 못한 거야!’“경원이한테 날짜 잡으라고 말했어. 이제 슬슬 너희 둘 관계도 정리해야 하지 않겠니?”“….”“경원의 아빠가 이 청하시에서 얼마나 입김이 센지 너도 잘 알잖아! 다시 내년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내려면 든든한 뒷백이 필요할 거야!”말을 이어갈수록 진영숙의 목소리는 격양되었다.하지만 강이한은 전혀 미동이 없어 보였다.“하! 여전하시네요, 어머니. 그딴 뒷백 필요 없어요!”강이한은 그 말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을 향해 걸어갔다.이때 뒤에서 진영숙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그래, 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 비겁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확실한 건 없어! 나랑 너의 할머니가 강씨 가문을 어떻게 지켜왔는데!”“….”강이한은 진영숙과 그의 할머니가 어떤 방식으로 강씨 가문을 지켜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강이한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했다. 진영숙도 그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경원이가 얼마나 널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너도 잘 알잖아. 널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기다리는 것보단, 그래도 너만 바라보는 사람이 낫지 않겠니?”사랑하지 않는 여자, 이 말 한마디에 강이한은 큰 충격에 빠졌다.‘이유영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진영숙은 더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강이한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아까보다 몇 배 더 어두워진 얼굴로 병실 밖을 나가버렸다.빠르게 병원을 빠져나온 강이한은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탔다.그는 거의 주머니를 뒤지며 담배를 꺼냈다.이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지금 통화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소은지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멍 자국과 턱을 스친 붉은 흔적을 본 남기는 조금 전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을 곧장 눈치챘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남기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 괜찮으니까.”“네.”남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걱정이 남아 있었다.이건 시작에 불과했다.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피하려 하고 아무리 그와의 악연을 끊으려 해도 엔데스 가문은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것을.일단 엔데스 명우를 몰아냈지만 이건 단지 서막에 불과했다.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서둘러야 해요.”소은지는 조용히 남기에게 말했다.지금 그녀는 현우의 행방을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 했다.물론 이유영의 말처럼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좋은 소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이곳은 파리다. 이 도시에서 현우는 어떤 존재였던가?이곳은 그가 살아온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잔인하리만큼 차가운 현실을 안겨주고 있었다.누가 보아도 가슴 아픈 상황이었다.“네.”남기는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연미가 반산월로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그녀의 방문은 소은지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요즘 송연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낀 이후로 소은지는 그녀를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고 소은지는 앞에 놓인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히 말을 꺼냈다.“현우 씨가 너한테 말했겠지?”그 말을 하며 소은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송연미를 바라봤다.송연미도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현우 씨는 네가 반산월로 날 찾아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현우는 더 이상 날 만나지 않으려고 해.”송연미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알도 하지 않았다.“내 전화도 받지 않아.
분위기는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우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모든 건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제는 서로의 뺨까지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명우의 웃음이었다.냉담하고 음울한 웃음이었고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잔혹함과 함께 묘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소은지, 잘하고 있어.”그가 비웃듯 말했다.“74호는 감히 하지 못했던 걸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며느리는 해내는구나.”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상반된 두 신분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명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좋아. 아주 좋아.”그가 성큼 소은지 앞으로 다가갔고 흥미로 가득 찼던 눈빛은 이내 사나워졌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고 거칠게 턱선을 문지르며 위협의 기운을 내뿜었다.“지금 이 모습,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소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분질러버릴 듯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흥! 그래?”“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몇 년 동안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을 주며 괴롭혀왔다.그런 그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강했고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명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갈라졌다.소은지는 오늘 엔데스 명우가 끝까지 덮어두려 했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래, 넌 아직도...”명우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은지가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