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이 한지음을 바라보며 말했다.“곧 좋아질 거야. 나 믿지?”곧이라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누가 아는가?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렇게 있는 것도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어둠도 생각만큼 그리 무섭지 않고… 오빠, 저….”“한지음!”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끼어든 강이한, 그는 이런 한지음의 모습이 너무나도 속상했다.“일단, 잘 쉬고 있어.”강이한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가 병실문을 나가기 직전, 뒤에서 한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지금 낮이에요? 아니면 밤이에요?”강이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 상황은 그에게도 너무나 버거웠다. 어둠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한지음을 생각하며, 그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평범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한지음이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은 상황, 그 고통의 크기가 그는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한지음에게 이제 밤과 낮의 차이가 느껴질까? 그런 생각이 들며, 강이한의 마음은 먹먹해졌다. “약속할게, 얼마 남지 않았어. 곧 좋아질 거야.”강이한은 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한지음의 귀에 닿자, 조금 마음의 안정이 되찾아졌다. “오빠만 믿을게요.”한지음은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며 강이한의 감정을 교묘하게 조종했다. 그녀의 계획대로, 강이한은 점차 그녀의 함정에 빠져 뜻대로 움직이게 되었다.강이한은 병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지음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병실 앞에 경호원 두 명을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보도의 출처를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누구든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면, 책임을 피할 수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대표님.”조형욱이 전화 너머에서 답했다.단 몇 분 만에 강이한은 한지음에게 견고한 보호막을 구축했다. 이유영이 위험에 처했을 때보다 훨씬 빠른 행동이었다. 한편, 병실 안에서 한지음은 강이한이 남긴 말을 곱씹고 있었다.
한지음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편, 순정동에서 이유영은 정국진으로부터 조사 결과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때로는 놀라움, 때로는 분노, 때로는 두려움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마침내 모든 사실을 들은 이유영은 큰 혼란에 빠졌다. 깊은숨을 내쉰 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정국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한지음이 아빠가 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거예요?”“그래.”이유영은 말문이 막혔다.“엄마가 돌아가시게 된 것도 결국 이것 때문이에요?”“그렇지.”이유영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죽음이 아빠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가족을 모두 잃고 남겨진 이유영은 홀로 남겨진 재산으로 학업을 마쳤다. 그녀는 부모님의 사랑을 믿으며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폭풍우처럼 격동하는 그녀의 감정을 앞에 두고, 조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안 그래도 너의 숙모가 알리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했는데, 나는 네 고집을 아니까….”정국진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유영은 너무 어렸고, 별도의 조사가 없었다면 평생 이 진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더 컸다.이유영은 멍하니 정국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는 충격과 혼란이 서려 있었고,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외도한 건 아빠인데. 겨우 엄마가 그 여자한테 따졌다고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마음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정국진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의 대한 남은 이야기를 계속 들려줬다. 그는 이유영이 어차피 직접 조사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기로 결정했다.이유영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상대는 과부였다. 그 과부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
그녀가 깊은 고민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자,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유영아!”“네.”“너무 이 일에 대해 생각하지 마. 내 쪽에서 어떻게 해결해 볼게.”“아니에요!”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정국진이 전한 소식은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그녀는 이러한 개인적인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모든 것을 천천히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준비가 되면, 이유영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해결할 계획이었다.이전까지는 이토록 복잡한 배경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지음을 동생으로 받아들일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한지음과 같은 피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유영은 너무나 역겹게 느껴졌다.이유영은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속으로 치솟는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썼다. “유영아.”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정국진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유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굴이 조금이나마 평정을 되찾은 기색이었다. "괜찮아요." 비록 그녀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정국진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지음은 복수를 계획하며 처음에는 이유영의 엄마를 대상으로 삼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자, 다시 타킷을 이유영에게로 돌린 것이다. “조사한 바에 인하면, 한지음은 성인이 되자마자 곧바로 너의 아버지 재산을 조사했다더라고.”“재산이요?”“그래.”정국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이유영이 기가 찬 듯 웃었다.“혼외자도 상속권을 누릴 수는 있으니까, 그걸로 엄마를 괴롭히려는 심산이었겠죠! 아주 헛다리 짚었네요!”이유영이 어렸을 적,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를 눈치채고 재산 명의를 자신에게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이유영의 부모님 재산은 모두 어머니의 명의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 불행하게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그 모든
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일찍 눈을 떴다. 하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정국진이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잘 못 잤어?” 정국진이 이유영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이유영은 어제저녁에 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되새기며 답했다. 그렇게 놀라운 내용을 하룻밤 사이에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그때 정국진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러니까 너의 숙모가 걱정하지." 그의 목소리에는 이유영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외숙모를 떠올리자 이유영은 마음이 다시 따뜻해졌다. 회귀 전과는 달리, 이제 그녀의 곁에는 정국진과 그의 가족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이유영은 과거와 같은 상황에 다시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느꼈다.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이 정국진에게 말했다. “곧 가셔야죠?”이 말을 들은 정국진이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그러게, 곧 기사가 도착할 시간이네. 너도 같이 가자.”“저요?”“그래.”정국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컵을 쥐고 있던 이유영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청하시는 사방에 눈과 귀가 달린 곳이었고, 그녀는 괜히 새로운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정국진은 오래 머물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로 인해 정국진이 불편한 상황에 휘말릴까 봐 걱정됐다“저는 따로 갈게요.”이유영은 빠르게 사양했다.그녀의 가장 큰 걱정은 우연히라도 강이한과 마주치는 일이었다. 과거 포르쉐와 벤츠를 타고 다닐 때 그와 부딪혀 곤란한 상황에 휘말렸던 경험이 있었다. 만약 오늘 정국진과 함께 있다가 강이한을 만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강이한은 여전히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고, 정국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또 화풀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한편, 정국진은 이유영의 거절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설마 강이한 때문에 그래? 너희 이미 이혼했잖아, 뭐가 걱정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정국진의 호화로운 씀씀이는 여전히 이유영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정국진의 차량이 출발한 뒤 이어진 긴 차량 행렬을 바라보며, 이유영은 머리를 저었다. 그때, 마치 뒤처진 것처럼 보이는 삐까번쩍한 마세라티 한 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유영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좀 평범한 차량으로 바꿔주면 안 돼요?”전과 비교해 더욱 화려해진 차량 앞에 선 이유영은 감탄했다. 강이한의 아내로 있을 때도 그녀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정국진과의 시간을 보내며 그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따라가는 것은 이유영에게는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제가 지금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빠듯할 것 같네요. 내일 처리해 드려도 될까요?”“아….”“오늘 하루만, 네?”“그럼, 딱 하루만이에요!”이유영은 통화를 마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약간 아픈 듯한 느낌에,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이마를 짚었다. 돌아간 그녀는 신속하게 출근 준비를 마쳤지만,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강이한과 마주칠 일은 없겠지?’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강이한이 진영숙의 병문안 때문에 회사에 늦게 도착한 것이다. 결국 옆 건물, 같은 지하 주차장을 공유하고 있던 둘은 마주치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는 이유영의 모습을 발견한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동시에, 이유영도 강이한을 눈에 담았다. 피하고 싶었던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마치 운명의 장난 같았다."또 보네."이유영은 최대한 평온한 척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이혼한 강이한보다 더 화려한 차를 몰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아이러니했다. “또 차를 바꿨나 보네?”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말을 건네며 속에서 치솟는 화를 억누르려 애썼다. "아니, 일이 있어서 잠깐 타고 온 거야." 이유영이 대답했다.'잠깐이라고? 그럼 이런
이유영은 최근에 강이한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를 빼앗은 대가로 치열한 업계 경쟁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청하시의 상류사회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그녀의 회사는 동교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주요 계약에서 손을 떼야 했다. 이유영의 사무실 전화는 그 소식을 전하는 파트너들의 연락으로 오전 내내 멈추지 않았다. “네, 괜찮아요. 이해합니다.”그녀는 모든 전화에 침착하게 대응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유영은 강이한의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되게 하면 되니까!그녀는 통화를 마친 뒤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어시스턴트 한 명이 사무실 문을 노크하며 조심스레 점심시간을 알렸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정국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금 바로 크리스탈 가든으로 와!”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크리스탈 가든은 최근 10년 동안 부유층 여성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보석 브랜드였다. 한때 이유영의 시어머니였던 진영숙이 매년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구매할 정도였으니까.“설마 삼촌, 전에 말했던 로열 글로벌 그룹 지사가 크리스탈 가든이었어요?”“그래, 그러니까 얼른 와!”“알겠어요.”궁금한 건 많았지만, 이유영은 굳이 전화로 더 질문하지 않았다. 정국진의 목소리만으로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통화를 마친 이유영은 사설 탐정한테 받은 자료를 포함해 책상 위 모든 서류들을 깔끔히 정리한 뒤, 조민정에게 연락했다.“사설 탐정 잔금처리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조민정과 통화를 마친 후, 이유영은 직접 차를 몰고 빠르게 크리스탈 가든으로 향했다.이유영이 업무에 몰두하는 동안, 강이한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비서 조형욱이 신속하게 지시를 이행함으로써, 이유영의 사업 파트너 대부분이 그녀를 외면하게 되었다.강이한은 조형욱에게 고의로 눈에 띄게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유영이 이 모든 상황의 배후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그 사람이 기증해 주겠다고 합니다." 조형욱의 말에 강이한의 얼굴에 서서히 안도의 빛이 스쳐 갔다. 그 소식은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한지음의 눈과 다리 문제가 그와 이유영의 이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만큼, 해결책을 하루라도 빨리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빨리 청하시로 데려와." 강이한의 말했다.유영이 집을 나간 후 변해버린 그녀와의 관계, 그리고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성격까지,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알겠습니다." 조형욱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는 바로 기증자와의 연결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한지음의 주치의인 배준석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증자만 있다면 한지음이 회복되는 것은 거의 확실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조율하기 위해 조형욱이 자리를 비우자, 강이한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때 강서희한테서 연락이 왔다.“여보세요.”“오빠, 엄마 깨어났어!”한편, 진영숙의 병실에는 강서희뿐만 아니라 유경원도 함께 있었다.강서희는 병실 한쪽에 앉아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유경원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던 탓에, 이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이때 진영숙이 옆에 앉아 있던 유경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역시 딸이랑 며느리가 최고야. 아들내미 있어봤자 쓸모없어.”진영숙이 애정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유경원이 참 마음에 들었다.“어머니.”유경원도 질세라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봤다.“그런데 너의 아빠는 회의 가셨니?”“네, 어머니.”유경원이 예의 바르게 답했다.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 자라서인지 작은 행동 하나에도 기품이 넘쳤다. 진영숙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되짚으며 속으로 계획을 세웠다.“이제 너의 둘 사이,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니? 부모님한께 좀 뵙자고 전해
이유영은 크리스탈 가든이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은 겉모습부터 예술적인 분위기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크리스탈 가든은 보석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우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곳이 로얄 글로벌 그룹 소유였다니, 그제야 이유영은 정국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로비로 들어가자, 굉장히 정중한 분위기를 내뿜는 한 여직원이 그녀를 맞이했다."이유영 님, 맞으시죠?""네, 맞아요.""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이유영은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이곳은 강이한의 회사와 비교해 봤을 때 굉장히 엄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로비 직원조차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굉장히 절제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전용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여직원이 말했다."이유영 님, 위에 기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알겠어요."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이때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밖엔 정장을 입은 또 다른 직원이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이유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회의실 문 앞까지 와 있었다.'왜 날 회의실로 안내했지? 난 삼촌 보러 온 건데.'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려버렸다."들어가시면 됩니다."직원이 회의실 문고리를 잡은 채 말했다.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이유영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심에 앉아 있던 정국진을 바라봤다.그러나 정국진은 엄숙한 표정을 유지할 뿐 답할 기색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평소 일할 때의 모습이었다.“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번에 새로 임명된 이유영 대표이사입니다.”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커다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이유영은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대표이사라니!“축하드려요, 대표님!”옆에 있던 직원이 조용히 이 상황을 상기시켰다. 이유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국진을 바라봤다. 정말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어떻게 말 한마디도 없이! 아
“그때 소군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어.”그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이유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며 설득하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말려도 이유영은 끝까지 버텨냈다.“화상이 심했던 부위는 살을 도려내야 했어. 지금 내 몸에 남아 있는 움푹 패인 흉터들은 그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거야.”“...”“마취를 할 수도 없었어.”마취를 할 수 없었다는 이 말 한마디는 강이한처럼 강인한 사람마저 몸을 떨게 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몸에 남아 있는 흉터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상처의 넓은 면적을 직접 본 그는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사람들이 그러더라. 아이는 여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존재라고. 전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월이를 통해 그 뜻을 알게 됐어.”그때 이유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결심만큼은 굳건했다.이유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조차 어려웠다.“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써도 내 몸 상태 탓에 결국 월이는 조산하게 됐어.”이유영은 마치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유영이 겪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무겁고 가혹하게 느껴졌다.“유영아...”강이한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구멍은 점점 더 조여 오는 듯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알고 있어? 월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과 불안이 시작되었다.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물며 조산아를 키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그러나 그 세 글자는 아무것도 메울 수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단숨에 삼켰다.쓰디쓴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떨리게 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표정과 떨리는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약을 삼킬 때마다 점점 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처마 아래 놓인 흔들의자는 이유영이 특히 애착을 가지는 자리였다.강이한이 말했다.“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들어가자.”“대나무 향이 나.”은은하고 차분한 대나무 향기가 이유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넌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돼.”강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인내심이 담겨 있었다.“비는 언제쯤 그칠까?”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천시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내리는 비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온 후로 비가 그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다음 주 내내 비가 온대.”“...”참으로 기묘한 날씨였다. 어떻게 이토록 비가 쉴 새 없이 내릴 수 있을까?우천시 사람들은 모두 이 기후에 익숙해졌을지 이유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우지 씨에게 수건 잘 말리라고 전해줘. 아침에 보니 수건에서 냄새가 나더라고.”사실 매일 수건을 잘 말리려 했지만 이곳의 습한 기후는 번번이 우지를 난처하게 했다.우지는 매일 정성을 다해 수건을 세탁하고 말렸지만 밤새 뽀송했던 수건도 아침이면 눅눅해지고 냄새가 배어 있었다.결국 매번 건조기에 넣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뽀송하지는 않았다.“알겠어.”강이한은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홍문동에 있었을 때도 이유영은 항상 완벽한 청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유영아.”“응?”“그 아이가 자라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 좀 이야기해 줘.”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졌다.“네가 그걸 알 자격이
“기다려야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했다.“...”이유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맴돌며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은 이어 말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났어. 지금은 우천시에 머무는 게 더 안전해.”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유영은 이전에 엔데스 명우와 얽혔던 적이 있었고 강이한은 이유영이 다시 위험에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었다.지금 정씨 가문은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 어떤 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런 시점에서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험 속으로 돌려보낼 리 없었다.이유영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돌아가셨어?”이유영도 대충 파리 쪽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그 문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엔데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 문제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유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렇다면 우리 집은...”“네 아버지는 신중한 분이니까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야.”강이한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금 이유영이 얼마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강이한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이유영의 얼굴을 살폈다.“그럼, 소은지는?”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 소은지였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얽힌 원한뿐만 아니라 엔데스 현우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엔데스 가문은 이제 완전히 갈라진 듯했고 그 속에서 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은지였다.강이한은 미소를 가장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정말 모든 사람을 걱정하는구나.”이유영은 언제나 타인에겐 따뜻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척 냉정했다.“...”이유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
끝없는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유영의 마음은 서서히 조여 들었다.이유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길고 막막한 나날들이었다.어둠에 갇힌 사람에게 허락된 일은 너무나도 적었다.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을 마주하는 데에는 누구에게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이유영은 지금 그 말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 어둠을 마주할 용기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나를 파리로 돌려보내 줘.”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강이한의 마음은 이미 어둠에 억눌린 상태였는데 이유영의 요구를 듣고 나니 더욱 숨이 막혀왔다.“유영아...”“염 선생님은 훌륭한 의사잖아. 그런데 약을 먹어도 전혀 좋아지는 기미가 없어.”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수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나아질 기미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이유영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막막한지 그대로 드러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들으며 눈에 깊은 고통과 상처가 서렸다.“수술... 생각해 본 적 있어?”만약 정말 수술을 하게 된다면...수술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눈 수술은 다른 수술과 달랐다. 한 번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염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 어쩌면 최소한의 희망은 있었다.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다시 수술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지금 당장 수술을 하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한은 두려웠다. 강이한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유영과 관련된 일이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강이한은 그걸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유영아, 나는 두려워.”강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겁게 말했다.그가 두려운 것은 이유영의 수술이 실패로 끝나는 일이었다.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이유영은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강이한은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현우는 송연미가 소은지를 괴롭혀 왔다고 믿고 있는 걸까?현우는 틀렸다. 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은지는 깊은숨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요?”송연미는 이전에 말했다. 넷째 도련님과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고. 왜 그랬을까? 단순히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송연미는 이런 방식으로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 사이의 연을 끊으려 했다.분명한 사실은, 송연미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넷째 도련님을 완전히 끊어내면서 넷째 도련님을 심각하게 적으로 돌렸다.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지금 현우가 송씨 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그러나 상황은 달랐다.지금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모든 희망을 회장님의 죽음에 걸었었다.그러나 회장님이 떠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졌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현우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예요.”그 사람들의 문제라고? 현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일까?아니면 과거에 소은지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우가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걸까?만약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현우가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소은지는 혼란스러웠다. 현우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 어떻게...”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소은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에게 남긴 심리적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가 보였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소은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요. 소은지 씨는 반산월에 잘 머물기만 하면 돼요. 알겠죠?”현우는 소은지에게 더 이상 많은 걸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
하지만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정말 귀하고도 소중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소은지는 한 걸음 다가서서 현우의 넥타이를 정성껏 매만졌다. 그녀의 숨은 막히듯 답답했고 가슴은 아팠다. 이런 불편함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저는 여전히 예전의 삶이 더 좋아요.”그때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게 망가지기 전의 삶이었다.그때의 소은지는 자유로웠고 거침없었다.소은지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이었고 어떠한 방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 깊은 나락 속에서 이런 절망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소은지 씨!”“엔데스 가문 자체가 심연과 같은 존재예요. 그리고 이 파리도 제게는 심연과 같아요.”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소은지가 이렇게까지 파멸에 이른 건 파리 땅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였다.아프냐고?너무 아팠다.숨이 막히냐고?너무도 답답했다. 예전의 소은지는 한 번도 인생에 이렇게까지 기복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소은지는 조심스레 현우의 넥타이를 정리한 뒤 말했다.“유영이의 세계는 이미 너무 흔들리고 있어요. 유영이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현우는 침묵했고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소은지가 보기에 이유영은 정말 불쌍했다. 이유영은 강이한을 떠나려고 애쓰고 박연준을 떨쳐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하지만,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유영을 얽어맸고 심지어 터무니없는 이유로 이유영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만약 강이한과 박연준이 없었다면, 이유영도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당당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높은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강이한과 박연준 때문에 이유영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지금은 어둠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이유영이 안타까울 뿐이었다.“소은지 씨!”현우의 목소리가 더욱 단호해졌다. 소은지를 바로 보는 현우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현우가 소은지를 지키는 이유가 이유영 때문이라는 건가?“파리를 떠나고 싶어요.”현우의 표정은 굳어졌고 목소리는
결국 송연미는 사람들에 의해 떠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송연미의 눈빛은 무거움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소은지의 마음도 잠시 흔들리고 말았다.그 순간 소은지는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송연미가 차갑고 냉정한 가면 뒤에 감춰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를.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닿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진실이었다.여자의 운명은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특히 자신의 미래조차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현우는 묵묵히 소은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소은지를 놓아주던 현우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현우가 서류를 찢으려는 찰나, 소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잠깐만요.”“...”현우는 동작을 멈추고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는 조용히 다가가 서류를 천천히 빼앗으며 말했다.“어차피 서명해야 할 서류잖아요.”“소은지 씨!”“엔데스 가문의 상황이 어떨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회장님의 죽음조차 이 싸움의 끝을 맺지 못했다는 걸 보면 일이 간단치 않다는 건 분명해요.”소은지는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소은지의 가슴은 짓눌린 듯 아려왔다.현우는 소은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당신...”“엔데스 명우가 지금 당신과 맞서고 있는 거잖아요, 맞죠?”그 말이 떨어지자, 현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소은지는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송연미가 소은지에게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했다.그리고 소은지는 그로 인해 자유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엔데스 회장은 끝내 어떤 결론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가문은 단번에 분열되었고 문서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다. 전기봉은 행방불명 상태였고 나머지 서류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
송연미에게는 더 이상 고귀함도 우아함도 냉정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인내심은 그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지금의 송연미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현우가 돌아왔을 때, 그의 몸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만이 흘렀다. 오늘 장례식에서 벌어진 일이 그 원인이었음은 분명했다.송씨 가문 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기에 송연미가 이곳에 나타난 순간 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두 여자의 생각을 단숨에 현실로 끌어냈다.송연미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았다.현우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오더니 탁자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보자 눈빛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송연미의 가슴은 긴장으로 꽉 조여졌고 소은지의 얼굴도 금세 창백해졌다.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송연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내가 경고했지. 반산월에 오지 말라고.”현우의 말투는 냉혹하기 그지없었다.송연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핏기 없던 송연미의 얼굴은 그의 말에 더욱 하얗게 질려 갔다. 마치 얼어붙은 듯 멍하니 현우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걸까? 오늘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엔데스 가문의 모든 이가 참석했음에도 현우는 소은지를 가지 못하게 했다. 소은지를 보호하기 위해 송연미조차 반산월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인가? 모든 것이 변했다.현우는 이제 소은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은지는 현우에게 이토록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송연미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 안긴 소은지를 보며 송연미의 눈에는 깊은 고통과 실망이 서려 있었다.“이봐.”“일곱째 도련님, 무슨 일입니까?”“넷째 사모님을 집으로 바래다줘.”현우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소은지를 더욱 단단히 품에 안았다.그 무심한 행동이 송연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비수처럼 느껴졌다.숨이 멎을 듯 아팠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버렸
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인지 파리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소은지는 명우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현우와의 관계도 본래부터 경쟁적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소은지의 일이 여섯째 도련님과 엮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가능성이 컸다.“소은지, 넌 무슨 자격으로 현우에게 보호받고 있는 거야?”송연미는 이성을 잃은 듯 소은지를 향해 소리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상호 관계가 현우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여섯째 도련님은 원한을 쉽게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이런 상황 속에서 일은 점점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보호한다고? 소은지를? 현우는 대체 왜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는지,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송연미는 몰랐다. 그러나 송연미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두면 안 됐다.“소은지,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이라도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될까? 나는 이미 그들에게 한 번 해를 입었어. 더 이상 현우까지 그들에게 해를 입게 할 순 없어...”송연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온몸이 떨렸다.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의 결혼에서 받았던 심리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갑자기, 이 여자가 보여주는 히스테리가 그렇게 미워 보이지만은 않았다.송연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너와 여섯째 도련님 사이의 일은 나는 다 알고 있어. 소은지, 여섯째 도련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파리에서 멀리 떠나줘, 안 될까?”송연미의 관점에서는 소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송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는 한, 그건 현우에게도 큰 상처가 될 터였다.“내가 떠난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원한이 사라질 것 같아?”“하지만 네가 현우 곁에 있으면, 여섯째 도련님은 모든 책임을 현우에게 돌릴 거야. 이걸 정말 모른단 말이야? 그들은 이미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