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렴풋이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수님, 이한 형이 술 취해서 형수님 이름만 불러요. 혹시 지금 천상의 소리로 와주실 수 있나요?”수화기 너머로 배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순식간에 잠기가 싹 사라졌다.그녀는 눈을 비비며 짜증스럽게 말했다.“전화 잘못 거셨어요.”그리고 상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이한이 술 취해서 난동을 부린다고 해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이 남자에게 남은 거라고는 깊은 실망감과 배신감밖에 없었다.지난 생에 죽음까지 경험한 그녀에게 그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그가 술 취해서 객사했다고 해도 절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한편, 배준석과 박해준은 강이한을 부축해서 차에 올렸다. 유영과 통화를 마친 배준석은 착잡한 얼굴을 하고 밖에서 바람을 맞았다.“왜 그래?”옆에 있던 박해준이 물었다.“잘못 걸었다고 끊어 버리는데?”배준석은 그제야 둘 사이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게 틀림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분명 이유를 제공한 사람은 강이한 쪽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유영이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나올 이유가 없었다.여자가 한번 돌아서면 남자보다도 더 차갑다더니 유영이 전형적인 예였다.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바로 끊어버리다니.그래도 10년을 함께한 정이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게다가 그는 강이한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잘못 걸었을 리가 없었다.“일단은 홍문동으로 데려가자.”박태준이 말했다.부부 사이의 일에 대해 방관자인 그들이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배준석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둘은 차를 운전해서 강이한을 홍문동까지 데려다주었다. 새로 바뀐 고용인들은 술 취해서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강이한을 보고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잠시 후, 그들 중 한 명이 강이한을 부축해서 침실로 데려갔다.강이한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한지음의 전화였지만 한 번도 받지 않았다.배준석도 그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순식간에 머리가 멍해졌다.응급실이라니!자세히 물어볼 여유도 없이 그는 재빨리 침대를 내려 외투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아래층에 있던 집사는 옷도 안 갈아입고 내려오는 그를 보고 다가가려 했지만 이미 강이한은 냉기를 풀풀 풍기며 밖으로 나가버렸다.강이한에 비해 유영은 간만에 긴 휴식을 취했다. 비록 지난밤에 배준석의 전화 때문에 한번 깨기는 했지만 전화를 끊고는 바로 잠들었다.그녀는 아침 일찍 회사로 나왔다.조민정이 업무 일정을 그녀에게 보고하고 있었다.“박 대표님께서 오후에 동교 개발 현장에 방문할 예정이에요. 시간 나면 같이 가보는 게 좋겠어요.”VIP고객이니만큼 특별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히 가야죠.”조민정이 말하지 않아도 원래 같이 가려고 했었다.조민정이 계속해서 말했다.“새로 들어온 의뢰는 이미 팀원들에게 나눠줬어요. 이번에는 유영 씨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자신감에 찬 말투였다.유영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경영을 배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디자인팀원을 고용할 때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다들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출중한 엘리트들이었기에 간단한 의뢰에서 문제가 생길 수 없었다.“알겠어요.”유영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조민정이 말했다.“인력이 부족해서 채용 공지를 냈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잘 뽑을게요.”“그래요.”하루아침에 스튜디오가 이렇게 바빠질 줄은 몰랐다.전에 직장 경험이 별로 없어서 잘 몰랐는데 작업실을 운영하면서 보니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그래도 정국진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서 의뢰가 끊길 걱정이 없어서 다행이었다.“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나요?”“네. 양 변호사님 만나기로 했어요.”유영이 말했다.강이한이 이혼을 해주겠다고 공표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절차를 진행하고 싶었다.오늘은 변호사를 대동하고 세강그룹에 방문할 예정이었다.합의가 어려운 부분은 다시 협상할 수도 있고 오늘은
조형욱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사모님께서는 현재 강성건설과 협업 관계가 있으니….”그가 난감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공적으로는 유영도 강성건설과 손을 잡은 사람이니 경쟁사인 세강 대표의 사무실에 들어가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였다.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접대실에서 기다리죠.”어디에서 기다리든 상관은 없었다.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히 기다리면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잠시 후, 그가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로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 지금 당신 사무실이야.”“거긴 왜?”강이한은 유영이 좋은 마음으로 사무실까지 찾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이혼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유영이 말했다.“어제 사람들 앞에서 나랑 이혼하겠다고 공표했잖아. 서류에 사인 받으러 왔어. 그래야 당신도 자유로워질 거 아니야.”“자유는 당신이 나보다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은데?”“그렇게 말해도 난 할 말 없어.”“뭐?”강이한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얼마나 그가 싫었으면 아침부터 이혼 서류를 들고 찾아왔을까?그런 생각이 들자 강이한은 가슴 한구석이 쓰리고 아팠다.“그래, 알았어.”한참이 지나 남자가 말했다.수화기 너머로도 그의 분노와 실망이 전해지고 있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피어났다.“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지금은 못 돌아가.”유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병원으로 와. 사인해 줄 테니까.”남자가 차갑게 말했다.유영은 병원 얘기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병원이라는 곳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강이한이 그녀를 병원으로 부를 때마다 깊은 공포마저 느꼈다.“그럼 언제 돌아올 거야?”유영이 물었다.어차피 서류에 사인하는 건 어디서나 가능했기에 굳이 병원까지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왜? 무서워?”“자극해도 소용없어
사랑해서 결혼한 남편과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여자가 안타까웠다.망막을 이혼 조건으로 내걸다니! 그건 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이런 남자를 남편으로 맞은 유영이 안쓰러웠다.그 시각, 강이한의 본가에서도 싸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 아침, 진영숙은 유경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제 일로 사과하려고 전화한 건데, 전화를 받은 유경원의 모친은 돌려서 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한지음 이 나쁜 년이!”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한지음의 등장이 유경원 일가를 불쾌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아직 이혼도 하지 않은 강이한이 와이프와 불륜녀를 둘 다 데리고 가족 행사에 참석한 일은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세강의 세력이 워낙 막강해서 어떻게든 그들과 연을 맺고 싶어하는 가문이 많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아무리 재벌가가 정략결혼을 중시한다지만 딸을 귀하게 키운 집안이라면 당연히 이런 가문에 딸을 시집 보내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진영숙은 유경원의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청하시에서 세강과 비등비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유경원 본인의 조건도 재벌가 며느리가 되기에 완벽했다.그런데 전에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됐어, 엄마. 화 풀어. 저쪽 집안도 너무하네!”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강서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진영숙을 위로하는 척했다.진영숙은 화가 치밀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그쪽에서 잘못한 게 아니야. 다 그 한지음 때문이지!”딸을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면 유경원 모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귀하게 키운 딸을 사생활이 문란한 남자에게 시집 보내기 싫을 것이다.좋은 남편을 만나야 딸이 행복할 수 있다는 건 모든 엄마들이 아는 사실이었다.아들인 강이한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그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대체 한지음 걔를 왜 그렇게 신경 써주는 거야? 그래 봐야 비서실 직원이었을 뿐이잖아. 굳이 이한이
진영숙은 절대 한지음을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안 되겠다. 병원에 다녀와야겠어.”“같이 가, 엄마.”강서희의 두 눈이 간사하게 빛났다.이 판에 한지음을 끌어들인 건 강서희였다. 그랬기에 한지음의 생각에 대해 그녀보다 잘아는 사람은 없었다.이제 유영을 해결했으니 한지음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영숙은 고개를 저었다.“넌 집에 있어. 네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야.”싸우러 가는 현장에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키운 양녀를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다.아주 오래 전부터 진영숙은 나름 최선을 다해 강서희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알았어.”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강서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영숙이 떠난 뒤, 강서희의 입가에 진한 비웃음이 드리웠다.뒤에서 아줌마가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아가씨, 디저트를 새로 만들었는데 드셔보실래요?”“좋죠.”강서희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이 집에서 가장 까탈스러운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강서희였다. 고용인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버럭 화를 내던 그녀였다.하지만 왕숙은 달랐다. 진영숙이 가장 신임하는 고용인이었기에 강서희는 왕숙에게만큼은 예의를 갖춰서 대했다.“맛있네요.”“맛있으면 많이 드세요. 여기 코코넛 밀크도 있어요. 피부에도 좋다잖아요.”“고마워요, 아줌마.”“어서 들어요.”왕숙은 인자한 얼굴로 강서희를 바라보았다.한편, 유영은 씩씩거리며 스튜디오로 돌아왔다.조민정이 다가오며 물었다.“괜찮아요?”“네, 괜찮아요.”괜찮다고는 했지만 사실 속은 이미 뒤집어진 상태였다. 남자의 냉철함을 이미 경험해서 아는 그녀였지만 망막 기증 얘기를 다시 꺼냈을 때 저도 모르게 긴장되고 온몸이 떨려왔다.그 한마디로 인해 그에게 남았던 마지막 미련마저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지난 생에서 그랬듯이 결국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민정 씨.”“네, 듣고 있어요.”“강서희 사생활 좀 조사해 줘요.”만약 강이한이
조민정이 나간 뒤, 유영은 사무실 전화로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강이한의 회사에서 핸드폰을 박살냈을 때 전화가 걸려와서 못 받은 것 같았다.“외삼촌.”수화기 너머로 정국진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아, 한지음 걔 좀 이상해.”“뭐가요?”“둘이 전에 만난 적 없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그 사고가 있기 전까지 유영은 한지음을 만난 적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그럼 다시 확인해 봐야겠구나.”“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유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한지음 걔 일부러 너만 물고늘어지는 것 같은데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그러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납치사건부터 시작해서 여론전, 그리고 망막 기증을 강요하는 것까지 모든 화살이 유영을 겨냥하고 있었다.“제가 그만큼 미운 거겠죠.”어제 한지음을 만났을 때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무언가 느끼는 게 있었다.그래서 일이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히 강이한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이혼만 하면 끝나는 일인데 굳이 망막까지 요구할 필요는 없었어.”정국진이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전화기를 잡은 유영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정국진은 계속해서 말했다.“어쩐지 너한테 보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지난 생에서도 한지음은 끝끝내 유영을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영은 한지음의 동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에는 진짜 접점이 없었는데요.”학창시절에도 그랬고 사회에 나와서도 한지음이라는 인물을 만난 적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알았어. 내가 더 조사해 볼게.”정국진이 말했다.이미 어느 정도 단서는 확보한 상태였다.한지음의 의도를 알았다면 이제 그 동기를 알아볼 차례였다.얼핏 보면 남자를 두고 치정극을 벌인 것 같지만 정말 그랬다면 유영이 이혼을 선언한 순간부터 멈추어야 했다.하지만 한지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줄곧 망막 기증을 빌미로 유영에게 압력을 가
“이대로 상처를 내버려두면 환자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예요.”의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강이한은 귀에 이명이 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말은 그렇게 해도 산 사람에게서 기증을 받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곧 죽을 사람이라고 해도 가족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강이한이 암울한 기분에 빠져 있을 때, 진영숙이 다가와서 의사에게 말했다.“선생님은 먼저 나가 있어요.”“네, 사모님.”의사는 진영숙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왜 이렇게까지 걔를 챙기는 거야?”의사가 자리를 비운 뒤, 진영숙은 다짜고짜 강이한에게 따져 물었다.최근 들어 강이한이 한지음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데 대해 이미 불만이 많았던 진영숙이었다.강이한은 어머니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낫게 해줘야 하니까요.”“그렇다고 네가 친히 나설 이유는 없잖아.”안 그래도 한지음이 거슬리는데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감싸고 돌자 진영숙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아들에게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강이한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어머니는 상관하지 말고 일단 돌아가세요.”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진영숙인데 아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자 점점 더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고 정색하며 말했다.“넌 집으로 돌아가. 차라리 엄마한테 맡겨.”진영숙의 태도는 강경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아들의 행동을 방관할 수 없었다.유경원 모친에게 거절당한 일을 생각하면 한지음을 당장 청하에서 쫓아내도 모자랐다.“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이러세요?”강이한이 싸늘한 눈빛으로 모친을 바라보며 물었다.말투에서 깊은 짜증이 묻어났지만 진영숙은 물러서지 않았다.“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아직도 부족하세요? 엄마는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요?”“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강이한이 버럭 고함을
강이한은 엄마를 바라보며 실망감이 커져만 갔다.언제부터 엄마가 이렇게까지 냉철하게 변했을까? 그가 어렸을 때는 종종 복지센터로 가서 자원봉사도 했었던 사람이었다.강서희는 보육원에 봉사하러 갔다가 입양한 아이였다. 비록 양녀로 들였지만 진영숙은 친딸처럼 그녀를 아껴주었다.“왜 이렇게 변했나요?”한참이 지난 뒤, 강이한이 실망한 어투로 물었다.갑자기 달라진 아들의 태도에 진영숙이 당황했다.분노에 이성을 잃어서 말이 좀 심했던 건데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진영숙은 눈을 질끈 감고 분노를 억눌렀다.그리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이한아, 나도 그 아이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걸 다 네가 떠안을 필요는 없어. 안 그래?”평생 옆에 끼고 살 게 아니면 차라리 관심을 주지 않는 게 나았다.세강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장님을 며느리로 들일 수는 없었다.강이한은 말없이 모친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진영숙이 계속해서 말했다.“너 잊었어? 나랑 네 아버지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세강은 전대 회장이 돌아가고 방계 가족들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겪었다. 집안 싸움에 회사가 공중분해 될뻔한 것을 겨우 살려냈다.강이한이 그만큼 능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그때 진영숙은 다른 가문들과 암암리에 정략결혼을 약속해서 세강의 입지를 다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략결혼이 가져다 주는 이득에 맛을 들였다.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닌가.그래서 강이한이 유영을 데리고 왔을 때 그토록 그녀를 싫어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지음의 존재는 더 받아들일 수 없었다.엄마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강이한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세강이 여기까지 오는데 풍파가 적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고 그가 그룹 경영을 맡으면서 비로소 입지를 튼튼히 다질 수 있었다.“이한아, 엄마도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사람은 멀리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