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철용은 대체 무슨 낯으로 저렇게 마음 편히 그녀의 마음을 받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장소월은 돌아가 옆방에서 잠이 들었지만 깨어났을 땐 원래의 병실로 되돌아와 있었다.그녀는 너무 뜨거운 온도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이었다.몇 번이나 밀어내려 했지만 전혀 밀리지가 않았다.오른손 무명지에 무언가 느껴지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전연우는 그녀가 자고 있을 때 또다시 그 반지를 반대편 손가락에 끼워놓았다.빼내려 힘을 써보니 이번엔 선명하게 느슨함이 느껴졌다.어두운 방 안, 장소월은 그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그녀가 정말 빼내려 하자 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올려놓았다.남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얼른 자. 내일 검사 결과가 나오면 집에 가자.”전연우는 그녀가 반지를 빼지 못하게 막고 싶었다.장소월은 며칠 전부터 전연우의 무명지에 줄곧 반지가 끼워져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디자인은 아주 심플해 장소월에게 준 반지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다.장소월은 더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돌연 그녀의 머릿속에 병원에 들어오던 그 날 기성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전 오랫동안 대표님 곁에서 일해왔습니다. 저는 확실히 온실 속에서만 자란 아가씨가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습니다.”“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대표님에게 백윤서 씨와 결혼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높은 곳으로 도약하고 있는 그분이 하필이면 원수의 딸을 사랑하다니요.”“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표님은 아가씨에게 한 잘못들 모두 갚았다고 생각합니다.”“아가씨가 줄곧 강씨 가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전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강씨 노부인의 죽음은 대표님과 무관합니다. 강영수도 마찬가지고요...”“당시 대표님께선 확실히 강영수 씨가 인씨 가문을 이용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막고자
전연우가 직접 그녀의 무명지에 끼워주었던 반지가 또다시 그녀로 인해 손가락에서 빠져나와 그의 베개 아래에 놓였다. 평소 그는 미세한 움직임에도 경계하며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최근 성세 그룹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쳐야 했다.심지어 전연우까지도 매일 한 시간 전에 출근해 오후 다섯 시 반이 되어서야 퇴근해 병원에 오고 했다.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 일을 처리하는 데에 사용했다. 병실에서의 그는 단 두 가지 모습이었다. 회의를 하고 있거나, 서류를 보고 있거나.장소월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바쁘면 회사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되지 않은가.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고 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가 보다.새벽 여섯 시 반, 아직 밝아오지 않은 어둑한 하늘이었다.기성은이 서류를 가지고 병원에 도착하자 전연우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피곤한 듯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걸어오던 그는 텅 빈 거실을 보고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갔어?”기성은은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었다.“대표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전연우는 불안한 마음에 방으로 다시 돌아가 신분증 등 중요한 문서들이 들어있는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기성은은 대표님이 이토록 화난 걸 보니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 생각했다.그는 몇 초 뒤에야 대표님이 찾는 사람이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설명하려던 순간 전연우는 옆에 있던 의자를 힘껏 걷어찼다.그때, 밖에서 걸어들어온 장소월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왜 또 정신병 발작이야?”그녀는 안으로 들어와 검사 결과 보고서를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이 돌아오자 기성은은 말없이 두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물을 한 컵 따랐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끓어 올랐던 남자의 분노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곧바로 사그라들었다.그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녀
전연우가 정장 호주머니에서 익숙한 반지를 꺼냈다. 장소월은 공포스러운 물건을 보기라도 한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전연우의 강력한 힘이 그녀를 마음대로 하게 놔두지 않았다.“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다시는 빼지 마. 아니면... 그 대가 치러야 할 거야!”“넌 날 협박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뭐야?”전연우는 그녀에게 반지를 깨워준 뒤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내가 요즘 급한 일을 끝내는 동안 얌전히 있어 줘. 그리고 회사 연말 파티에 성세 그룹 미래의 안주인으로서 나와 함께 참석하자.”그의 말을 듣는 그 몇 초의 시간에 장소월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졌다.“너... 너 미쳤어! 송시아랑 같이 가자고 해. 나 부르지 말고!”장소월은 언론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장씨 집안이 건재할 때에도 장해진은 기자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단단히 차단했다.장소월은 학생 때 클럽에 들어갔던 사진이 파파라치에 의해 몰래 찍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장해진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그런 그녀가 하필 전연우의 와이프 신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면...그녀는 상상하기조차 싫었다!전생에선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엔 왜...“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 옆에만 있으면 아무도 너한테 어떻게 하지 못해. 기자회견도 없을 거야.”“난 안 가겠다고 했어.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장소월은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공포에 질려 힘껏 손을 빼내려 한 순간 전연우는 손바닥에서 찌릿함을 느꼈다. 손을 들어보니 장소월의 손톱에 긁혀 피가 조금 나오고 있었다.그가 주먹을 말아쥐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파티는 빠르게 끝날 거야. 넌 그냥 얼굴만 보여주면 돼.”“난 안 가.”장소월의 말투는 더없이 단호했다.하지만 그때가 되면 전연우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데려가고 말 것이다.그녀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남원 별장에 들
대표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기술팀 직원이 말을 이어갔다.“만약 만진 사람이 없다면, 다른 한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전기 코드를 빼 전원이 끊긴 겁니다. 비정상적으로 꺼지면 시스템이 고장 날 수 있습니다. 다시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시스템을 재설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전연우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해보았다.“지금 바로 새 컴퓨터를 가져다 놔. 그리고 임원들에게 연락해 올해 모든 중요한 자료들을 내 메일로 보내라고 해.”기성은은 전연우의 얼굴에서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자 아마 어젯밤 화상회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기성은도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이후 화면이 갑자기 꺼져버렸었다. 장소월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컴퓨터 안엔 수백억이 오가는 계약서들이 들어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몇 번을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님이 저토록 개의치 않아 하는 걸 보니 장소월의 걸작이 틀림없다.그도 그럴 것이 장소월을 제외하고는 대표님의 컴퓨터를 함부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컴퓨터 안 자료들은 만에 하나 잃어버리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기술팀 직원이 나간 뒤, 전연우는 몇 번을 다시 시도해봐도 켜지지 않자 기성은에게 던져버렸다.“가져가서 폐기해.”“네.”기성은이 물었다.“오늘 아침 회의 뒤로 미룰까요?”전연우가 대답했다.“아니.”기성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표 사무실을 나섰다....남원 별장, 장소월이 은경애가 만든 삼계탕을 먹고 있었다.“아가씨, 손이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일하지 말고 푹 쉬세요. 이 삼계탕부터 모두 드시고요.”장소월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일단 거기 놔요. 나중에 마저 먹을게요.”“그건... 그건 안 돼요. 대표님께서 매일 아가씨에게 삼계탕을 만들어주고 다 드실 때까지 꼭 지켜보라고 하셨어요. 아니면 저한테 보너스 안 주시겠다고...”“아가
은경애는 서툰 손길로 핸드폰 버튼을 눌러 장소월이 삼계탕을 먹고 있는 모습을 찍어 전연우에게 보내주었다.“아이고, 아가씨, 정말 너무 예쁘세요. 카메라도 잘 받네요”“다 먹었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돈이 갖고 싶다면 협조해 줄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절대 날 배신하면 안 돼요.”은경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릇을 정리하며 손을 휘저었다.“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전 아가씨 편이에요.”“그냥... 대표님의 돈이 좋을 뿐이에요.”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전연우는 어렵지 않게 은경애를 매수했다. 장소월은 어차피 이 세상엔 한 명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알겠어요. 믿어요. 이만 나가보세요.”장소월은 얼른 그녀를 내보내고 싶었다.“그럼 전 갈게요.”은경애가 나간 뒤.성세 그룹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전연우는 진동 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켰다. 장소월의 영상이 도착해 있었다.기업팀 매니저는 앞에서 발표하다가 상석에 앉은 대표님의 얼굴을 몰래 살펴보았다. 흔치 않은 그의 밝은 얼굴에 사람들은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들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대표님은 이 시퍼런 대낮에 핸드폰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전연우는 카카오톡 친구 추가 화면을 눌러보았다. 아직 상대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지 않은 상태였다.전연우가 준 핑크색 핸드폰은 여전히 장소월의 침대 옆 서랍 안 진동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었다.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고 친구 추가 메시지가 또다시 도착했다.회의가 끝난 뒤.전연우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핸드폰 속 새로 개발한 대화 어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임원들의 시선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기술팀 직원에게로 향했다.“왜 아직도 반응이 없어요?”전연우의 덤덤한 한마디에 사람들은 모두 심장을 부여잡았다.기술팀 임원이 쭈뼛쭈뼛 걸어가 말했다.“대표님, 그건 아직 출시되지 않은 테스트 중인 어플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수정하겠습
남원 별장.장소월은 은경애 한 명만 남겨놓고 모든 도우미들을 내보냈다.은경애가 물 한 컵을 따라 명세진의 앞에 놓아주었다.장소월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현아... 언제부터 없어진 거예요?”명세진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2주가량 지났어요. 그날 밤 현아는 약을 먹고 잠들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군가 현아를 납치해가고 남긴 쪽지를 도우미가 가져왔더라고요. 그때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에선 최선을 다해 찾는다고는 하는데... 아직까지 우린 현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요.”“그 후 돈을 들여 사람을 찾아 알아보니... 우리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강씨 집안... 북경 감옥을 맡고 있는 강지훈이라는 사람이래요. 우리 현아는 어리숙해서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을 당하면 당했지 누군가의 원한을 살 아이는 아니에요.”“대체 현아가 어떻게 그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모르겠어요. 아가씨... 저희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요. 현아를 구할 길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절대 아가씨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예요.”“이렇게 빌게요. 소월 씨, 예전 함께 학교에 다녔던 정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현아를 살려주세요...”“더 지체하다간 현아가 견디지 못하고 목숨까지 잃을까 봐 너무 겁나요. 우리한텐 정말 현아밖에 없어요...”“현아만 찾아주면 앞으로 하라는 거 다 할게요. 노예가 되어서라도 목숨을 구해준 은혜 반드시 갚을게요.”장소월이 말했다.“제가 해볼게요. 현아는 제 친구예요. 절대 모른 척하지 않아요.”그 말에 명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월 씨 같은 친구를 둔 건 현아의 더없는 행운이에요.”“현아도 예전 절 구해준 적 있어요. 그러니 당연한 일이에요.”장소월이 명세진을 배웅해 보낸 뒤 은경애가 말했다.“아가씨, 정말 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거예요? 아가씨한테 불똥이 튈 수도 있어요. 제 생각에... 이번 일은... 전 대표님이 나서야 할 것 같아요.”그렇다.명세진이 강씨 집안을 입에 올렸을 때, 장소월은 이미
장소월은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그러고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미안해요. 잘못 보냈어요.]핸드폰도 배터리가 없어 전원이 꺼졌다.그녀는 충전기를 찾았으나 망가졌는지 핸드폰에 전원을 꽂아도 반응이 없었다.그때 서랍에서 진동이 울렸고 장소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랍을 열었다.전연우가 준 핑크색 핸드폰이었다.장소월은 바로 전원을 꺼버리고 자신의 낡은 핸드폰을 들고 방에서 걸어 나가고는 도우미에게 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저녁 6시.전연우는 마지막 회의를 끝마치고 회의실에서 걸어 나왔다. 핸드폰을 본 순간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 같았다. 핸드폰엔 스팸 메시지와 쓸데없는 부재중 전화 말고는 아무것도 와있지 않았다.“하루 종일 별장에서 뭐 했대?”전연우의 뒤에 서 있던 기성은의 귀에 못마땅한 듯한 대표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연우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회의 서류를 책상에 던져버렸다.기성은이 보고했다.“아가씨는 계속 남원 별장에 계셨습니다. 새 핸드폰은 줄곧 꺼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도우미가 말하기를 아가씨께서 원래 쓰던 핸드폰을 수리 보냈다고 합니다.”그가 선물한 액세서리도 하지 않았고, 5년을 입어온 낡은 옷만 걸치고 있는 그녀다.그 돈...전연우는 그녀가 자신과 조금의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일이 이렇게까지 되니, 전연우는 그녀가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고집할지 궁금하기까지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수리 가게에서 장소월에게 연락했다. 그녀의 핸드폰은 이미 시장에서 도태되어 부품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그 대답을 들었어도 장소월은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다시 돌려달라고 말했다.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기에 핸드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여섯 시 반, 도우미가 저녁 식사를 차렸다.장소월이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늘 같은 시간에 남원 별장에 돌아오던 사람이 오늘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장소월이 말했다.“기다릴 필요 없어요. 밥 먹어요.”은경애가 말했다
이번 생에서도 전연우는 송시아와 함께 있다.그녀에게 있어선 의외도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익숙해진 장면이다.송시아의 등장은 그녀로 하여금 또다시 선명히 되새기게 만들었다. 말끝마다 자신과 결혼하겠다던 남자는 두 번의 생이 지나도록 변한 것 하나 없다.송시아는 그가 살려내고 성장시킨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장소월은 여전히 잘 아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송시아의 그 도발 섞인 오만한 눈동자와 득의양양한 얼굴은 그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장소월, 넌 퇴물이야. 전연우는 두 번의 인생에서 모두 나를 선택했어!’설사 그게 사실이라 해도 장소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당장 전연우가 송시아와 결혼한다고 해도 전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곧바로 별장을 떠나 그녀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그녀는 장해진의 딸이 아니다. 때문에 남원 별장도, 남천 그룹도 모두 그녀의 소유가 아니다.이곳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남는 건 엄마의 사진뿐이었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장소월은 옆쪽 아기방에 들어가 조명을 켰다. 별이는 언제 일어났는지 눈을 뜨고 깜빡이고 있었다. 여태껏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무던히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전혀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 같지가 않았다.그녀는 줄곧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별이는 신기하게도 벌써 철이 든 것 같았다.장소월은 아이를 품 안에 안았다. 별이는 나른히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비비적거렸다.그녀는 살며시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 후 아이가 잠이 들자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서재 안, 전연우는 이제 술이 어느 정도 깨어 있었다.정계 인사들과의 술자리라 거부할 수 없어 조금 술을 마셨는데 또다시 위병이 도졌다.송시아는 다급히 그에게 물을 따라준 뒤, 익숙한 손길로 방 안에 있는 약상자를 찾아오고는 안에서 위장약을 꺼냈다.전연우의 깊은 눈동자가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