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철용은 대체 무슨 낯으로 저렇게 마음 편히 그녀의 마음을 받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장소월은 돌아가 옆방에서 잠이 들었지만 깨어났을 땐 원래의 병실로 되돌아와 있었다.그녀는 너무 뜨거운 온도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이었다.몇 번이나 밀어내려 했지만 전혀 밀리지가 않았다.오른손 무명지에 무언가 느껴지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전연우는 그녀가 자고 있을 때 또다시 그 반지를 반대편 손가락에 끼워놓았다.빼내려 힘을 써보니 이번엔 선명하게 느슨함이 느껴졌다.어두운 방 안, 장소월은 그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그녀가 정말 빼내려 하자 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올려놓았다.남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얼른 자. 내일 검사 결과가 나오면 집에 가자.”전연우는 그녀가 반지를 빼지 못하게 막고 싶었다.장소월은 며칠 전부터 전연우의 무명지에 줄곧 반지가 끼워져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디자인은 아주 심플해 장소월에게 준 반지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다.장소월은 더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돌연 그녀의 머릿속에 병원에 들어오던 그 날 기성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전 오랫동안 대표님 곁에서 일해왔습니다. 저는 확실히 온실 속에서만 자란 아가씨가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습니다.”“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대표님에게 백윤서 씨와 결혼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높은 곳으로 도약하고 있는 그분이 하필이면 원수의 딸을 사랑하다니요.”“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표님은 아가씨에게 한 잘못들 모두 갚았다고 생각합니다.”“아가씨가 줄곧 강씨 가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전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강씨 노부인의 죽음은 대표님과 무관합니다. 강영수도 마찬가지고요...”“당시 대표님께선 확실히 강영수 씨가 인씨 가문을 이용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막고자
전연우가 직접 그녀의 무명지에 끼워주었던 반지가 또다시 그녀로 인해 손가락에서 빠져나와 그의 베개 아래에 놓였다. 평소 그는 미세한 움직임에도 경계하며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최근 성세 그룹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쳐야 했다.심지어 전연우까지도 매일 한 시간 전에 출근해 오후 다섯 시 반이 되어서야 퇴근해 병원에 오고 했다.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 일을 처리하는 데에 사용했다. 병실에서의 그는 단 두 가지 모습이었다. 회의를 하고 있거나, 서류를 보고 있거나.장소월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바쁘면 회사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되지 않은가.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고 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가 보다.새벽 여섯 시 반, 아직 밝아오지 않은 어둑한 하늘이었다.기성은이 서류를 가지고 병원에 도착하자 전연우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피곤한 듯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걸어오던 그는 텅 빈 거실을 보고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갔어?”기성은은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었다.“대표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전연우는 불안한 마음에 방으로 다시 돌아가 신분증 등 중요한 문서들이 들어있는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기성은은 대표님이 이토록 화난 걸 보니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 생각했다.그는 몇 초 뒤에야 대표님이 찾는 사람이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설명하려던 순간 전연우는 옆에 있던 의자를 힘껏 걷어찼다.그때, 밖에서 걸어들어온 장소월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왜 또 정신병 발작이야?”그녀는 안으로 들어와 검사 결과 보고서를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이 돌아오자 기성은은 말없이 두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물을 한 컵 따랐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끓어 올랐던 남자의 분노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곧바로 사그라들었다.그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녀
전연우가 정장 호주머니에서 익숙한 반지를 꺼냈다. 장소월은 공포스러운 물건을 보기라도 한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전연우의 강력한 힘이 그녀를 마음대로 하게 놔두지 않았다.“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다시는 빼지 마. 아니면... 그 대가 치러야 할 거야!”“넌 날 협박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뭐야?”전연우는 그녀에게 반지를 깨워준 뒤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내가 요즘 급한 일을 끝내는 동안 얌전히 있어 줘. 그리고 회사 연말 파티에 성세 그룹 미래의 안주인으로서 나와 함께 참석하자.”그의 말을 듣는 그 몇 초의 시간에 장소월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졌다.“너... 너 미쳤어! 송시아랑 같이 가자고 해. 나 부르지 말고!”장소월은 언론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장씨 집안이 건재할 때에도 장해진은 기자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단단히 차단했다.장소월은 학생 때 클럽에 들어갔던 사진이 파파라치에 의해 몰래 찍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장해진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그런 그녀가 하필 전연우의 와이프 신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면...그녀는 상상하기조차 싫었다!전생에선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엔 왜...“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 옆에만 있으면 아무도 너한테 어떻게 하지 못해. 기자회견도 없을 거야.”“난 안 가겠다고 했어.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장소월은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공포에 질려 힘껏 손을 빼내려 한 순간 전연우는 손바닥에서 찌릿함을 느꼈다. 손을 들어보니 장소월의 손톱에 긁혀 피가 조금 나오고 있었다.그가 주먹을 말아쥐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파티는 빠르게 끝날 거야. 넌 그냥 얼굴만 보여주면 돼.”“난 안 가.”장소월의 말투는 더없이 단호했다.하지만 그때가 되면 전연우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데려가고 말 것이다.그녀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남원 별장에 들
대표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기술팀 직원이 말을 이어갔다.“만약 만진 사람이 없다면, 다른 한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전기 코드를 빼 전원이 끊긴 겁니다. 비정상적으로 꺼지면 시스템이 고장 날 수 있습니다. 다시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시스템을 재설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전연우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해보았다.“지금 바로 새 컴퓨터를 가져다 놔. 그리고 임원들에게 연락해 올해 모든 중요한 자료들을 내 메일로 보내라고 해.”기성은은 전연우의 얼굴에서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자 아마 어젯밤 화상회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기성은도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이후 화면이 갑자기 꺼져버렸었다. 장소월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컴퓨터 안엔 수백억이 오가는 계약서들이 들어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몇 번을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님이 저토록 개의치 않아 하는 걸 보니 장소월의 걸작이 틀림없다.그도 그럴 것이 장소월을 제외하고는 대표님의 컴퓨터를 함부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컴퓨터 안 자료들은 만에 하나 잃어버리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기술팀 직원이 나간 뒤, 전연우는 몇 번을 다시 시도해봐도 켜지지 않자 기성은에게 던져버렸다.“가져가서 폐기해.”“네.”기성은이 물었다.“오늘 아침 회의 뒤로 미룰까요?”전연우가 대답했다.“아니.”기성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표 사무실을 나섰다....남원 별장, 장소월이 은경애가 만든 삼계탕을 먹고 있었다.“아가씨, 손이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일하지 말고 푹 쉬세요. 이 삼계탕부터 모두 드시고요.”장소월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일단 거기 놔요. 나중에 마저 먹을게요.”“그건... 그건 안 돼요. 대표님께서 매일 아가씨에게 삼계탕을 만들어주고 다 드실 때까지 꼭 지켜보라고 하셨어요. 아니면 저한테 보너스 안 주시겠다고...”“아가
은경애는 서툰 손길로 핸드폰 버튼을 눌러 장소월이 삼계탕을 먹고 있는 모습을 찍어 전연우에게 보내주었다.“아이고, 아가씨, 정말 너무 예쁘세요. 카메라도 잘 받네요”“다 먹었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돈이 갖고 싶다면 협조해 줄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절대 날 배신하면 안 돼요.”은경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릇을 정리하며 손을 휘저었다.“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전 아가씨 편이에요.”“그냥... 대표님의 돈이 좋을 뿐이에요.”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전연우는 어렵지 않게 은경애를 매수했다. 장소월은 어차피 이 세상엔 한 명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알겠어요. 믿어요. 이만 나가보세요.”장소월은 얼른 그녀를 내보내고 싶었다.“그럼 전 갈게요.”은경애가 나간 뒤.성세 그룹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전연우는 진동 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켰다. 장소월의 영상이 도착해 있었다.기업팀 매니저는 앞에서 발표하다가 상석에 앉은 대표님의 얼굴을 몰래 살펴보았다. 흔치 않은 그의 밝은 얼굴에 사람들은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들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대표님은 이 시퍼런 대낮에 핸드폰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전연우는 카카오톡 친구 추가 화면을 눌러보았다. 아직 상대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지 않은 상태였다.전연우가 준 핑크색 핸드폰은 여전히 장소월의 침대 옆 서랍 안 진동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었다.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고 친구 추가 메시지가 또다시 도착했다.회의가 끝난 뒤.전연우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핸드폰 속 새로 개발한 대화 어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임원들의 시선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기술팀 직원에게로 향했다.“왜 아직도 반응이 없어요?”전연우의 덤덤한 한마디에 사람들은 모두 심장을 부여잡았다.기술팀 임원이 쭈뼛쭈뼛 걸어가 말했다.“대표님, 그건 아직 출시되지 않은 테스트 중인 어플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수정하겠습
남원 별장.장소월은 은경애 한 명만 남겨놓고 모든 도우미들을 내보냈다.은경애가 물 한 컵을 따라 명세진의 앞에 놓아주었다.장소월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현아... 언제부터 없어진 거예요?”명세진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2주가량 지났어요. 그날 밤 현아는 약을 먹고 잠들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누군가 현아를 납치해가고 남긴 쪽지를 도우미가 가져왔더라고요. 그때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에선 최선을 다해 찾는다고는 하는데... 아직까지 우린 현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요.”“그 후 돈을 들여 사람을 찾아 알아보니... 우리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강씨 집안... 북경 감옥을 맡고 있는 강지훈이라는 사람이래요. 우리 현아는 어리숙해서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을 당하면 당했지 누군가의 원한을 살 아이는 아니에요.”“대체 현아가 어떻게 그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모르겠어요. 아가씨... 저희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요. 현아를 구할 길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절대 아가씨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예요.”“이렇게 빌게요. 소월 씨, 예전 함께 학교에 다녔던 정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현아를 살려주세요...”“더 지체하다간 현아가 견디지 못하고 목숨까지 잃을까 봐 너무 겁나요. 우리한텐 정말 현아밖에 없어요...”“현아만 찾아주면 앞으로 하라는 거 다 할게요. 노예가 되어서라도 목숨을 구해준 은혜 반드시 갚을게요.”장소월이 말했다.“제가 해볼게요. 현아는 제 친구예요. 절대 모른 척하지 않아요.”그 말에 명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소월 씨 같은 친구를 둔 건 현아의 더없는 행운이에요.”“현아도 예전 절 구해준 적 있어요. 그러니 당연한 일이에요.”장소월이 명세진을 배웅해 보낸 뒤 은경애가 말했다.“아가씨, 정말 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거예요? 아가씨한테 불똥이 튈 수도 있어요. 제 생각에... 이번 일은... 전 대표님이 나서야 할 것 같아요.”그렇다.명세진이 강씨 집안을 입에 올렸을 때, 장소월은 이미
장소월은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그러고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미안해요. 잘못 보냈어요.]핸드폰도 배터리가 없어 전원이 꺼졌다.그녀는 충전기를 찾았으나 망가졌는지 핸드폰에 전원을 꽂아도 반응이 없었다.그때 서랍에서 진동이 울렸고 장소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랍을 열었다.전연우가 준 핑크색 핸드폰이었다.장소월은 바로 전원을 꺼버리고 자신의 낡은 핸드폰을 들고 방에서 걸어 나가고는 도우미에게 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저녁 6시.전연우는 마지막 회의를 끝마치고 회의실에서 걸어 나왔다. 핸드폰을 본 순간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 같았다. 핸드폰엔 스팸 메시지와 쓸데없는 부재중 전화 말고는 아무것도 와있지 않았다.“하루 종일 별장에서 뭐 했대?”전연우의 뒤에 서 있던 기성은의 귀에 못마땅한 듯한 대표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연우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회의 서류를 책상에 던져버렸다.기성은이 보고했다.“아가씨는 계속 남원 별장에 계셨습니다. 새 핸드폰은 줄곧 꺼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도우미가 말하기를 아가씨께서 원래 쓰던 핸드폰을 수리 보냈다고 합니다.”그가 선물한 액세서리도 하지 않았고, 5년을 입어온 낡은 옷만 걸치고 있는 그녀다.그 돈...전연우는 그녀가 자신과 조금의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일이 이렇게까지 되니, 전연우는 그녀가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고집할지 궁금하기까지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수리 가게에서 장소월에게 연락했다. 그녀의 핸드폰은 이미 시장에서 도태되어 부품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그 대답을 들었어도 장소월은 별다른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다시 돌려달라고 말했다.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기에 핸드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여섯 시 반, 도우미가 저녁 식사를 차렸다.장소월이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늘 같은 시간에 남원 별장에 돌아오던 사람이 오늘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장소월이 말했다.“기다릴 필요 없어요. 밥 먹어요.”은경애가 말했다
이번 생에서도 전연우는 송시아와 함께 있다.그녀에게 있어선 의외도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익숙해진 장면이다.송시아의 등장은 그녀로 하여금 또다시 선명히 되새기게 만들었다. 말끝마다 자신과 결혼하겠다던 남자는 두 번의 생이 지나도록 변한 것 하나 없다.송시아는 그가 살려내고 성장시킨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장소월은 여전히 잘 아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송시아의 그 도발 섞인 오만한 눈동자와 득의양양한 얼굴은 그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장소월, 넌 퇴물이야. 전연우는 두 번의 인생에서 모두 나를 선택했어!’설사 그게 사실이라 해도 장소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당장 전연우가 송시아와 결혼한다고 해도 전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곧바로 별장을 떠나 그녀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그녀는 장해진의 딸이 아니다. 때문에 남원 별장도, 남천 그룹도 모두 그녀의 소유가 아니다.이곳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남는 건 엄마의 사진뿐이었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장소월은 옆쪽 아기방에 들어가 조명을 켰다. 별이는 언제 일어났는지 눈을 뜨고 깜빡이고 있었다. 여태껏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무던히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전혀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 같지가 않았다.그녀는 줄곧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별이는 신기하게도 벌써 철이 든 것 같았다.장소월은 아이를 품 안에 안았다. 별이는 나른히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비비적거렸다.그녀는 살며시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 후 아이가 잠이 들자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서재 안, 전연우는 이제 술이 어느 정도 깨어 있었다.정계 인사들과의 술자리라 거부할 수 없어 조금 술을 마셨는데 또다시 위병이 도졌다.송시아는 다급히 그에게 물을 따라준 뒤, 익숙한 손길로 방 안에 있는 약상자를 찾아오고는 안에서 위장약을 꺼냈다.전연우의 깊은 눈동자가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