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그 기생오라비가 너한테 그렇게 중요했던 거야?’꽁꽁 얼어버린 손이 겨우 녹아내리자 강지훈은 그녀의 손가락을 펴보았다. 손에 꽉 쥐고 있던 찢어진 사진 조각을 본 순간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모두 창밖에 던져버렸다.“깨어나면 이 죄 반드시 물을 거야.”시내에 거의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온몸은 이제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하지만 열 시간이 넘게 실종된 끝에 겨우 주워온 생명이니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었다.소현아는 머리가 어지럽고 의식이 흐릿했다.“나... 나쁜 자식...”강지훈의 거친 손바닥이 그녀의 이마에 올려졌다.“깼어?”“강지훈 씨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말하지 마.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소현아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도착하고 병실로 옮겨진 뒤, 의사는 그녀에게 해열제를 놓았다.강지훈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언제면 깨어날 수 있어요?”간호사가 말했다.“아가씨의 몸 상태에 달려있어요. 충분히 휴식하면 곧 깨어나실 거예요.”강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흉측한 그의 인상을 보고는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아 곧바로 의료기기들을 들고 병실을 떠났다.부관이 말했다.“소장님, 소씨 집안 쪽에서 실종 신고를 했습니다. 아가씨를 집에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강지훈이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내가 말한 거 안 보냈어?”“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선 단호히 거절하며 아가씨를 보내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내 손에 들어온 순간부터 오직 나만이 소유할 수 있는 애완동물이야. 소씨 집안에 알려줘. 오늘부터 소현아는 소씨 집안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들이 어떤 조건을 요구하든 모든 들어준다고 해.”“네.”서울시 경찰서.소현아가 사라진 시간 동안 소정국은 줄곧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소정국과 명세진은 경찰서에서 답변을 들은 뒤 또다시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경찰서를 나섰다.소정국이 고통스럽게 심정을
그들의 애원에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죄송합니다. 이건 저희가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단 계약서는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마음을 굳히시면 적혀있는 번호로 언제든 전화주세요. 저희 쪽 사람들이 연락드릴 겁니다.“어르신, 사모님, 진지하게 고민해 보십시오.”그들이 나간 뒤, 소정국은 분노에 차올라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하늘이 무서운 줄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라고. 내 딸을 납치해 가둬놓고 저런 황당무계한 말을 지껄이다니.”명세진은 눈물을 닦은 뒤 얼른 그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여보, 흥분하지 말아요. 우리 현아는 복이 많은 아이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소정국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명세진은 재빨리 그의 호주머니에서 심장약을 꺼내 먹였다.소현아의 생사가 명확하지 않은 이때, 소정국마저 쓰러진다면 집안 전체가 허물어 내릴 것이다.“여보, 현아의 그 친구가 찾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정국도 번뜩 장소월의 얼굴이 떠올랐다.“성세 그룹 그 아가씨 말이야? 하지만... 우리에겐 성세 그룹에 연락할 방법이 없어. 어떻게 그 아가씨한테 도움을 청하겠어.”“그리고... 그 아가씨는 이미 한 번 우릴 도와줬는데...”명세진이 말했다.“하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잖아요. 현아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을 찾아가는 거예요.”소씨 가문은 서울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서울에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내로라하는 명문세가이니 말이다.그저 지극히 평범한 집안일 뿐인 그들이 어떻게 성세 그룹에 연락이 닿을 수 있겠는가.그들은 소현아가 좋은 집에 시집가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평안하게 살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들은 소현아가 대체 어떻게 그 염라대왕을 건드렸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소씨 가문에서도 그 사람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마다 모두 입을 닫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서울에서 권세로 유명한 강씨 집안은 별로 없다. 정계에 있는 그 강씨 집안을 제외하면 말이다.강씨 집안과 맞서는 건 그야말
순간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에도 공포스럽게 한기가 내려앉았다.소현아는 걸음을 멈추고 허약하고도 창백한 얼굴을 돌려 공포가 가득 들어있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당신은 노원우와 똑같은 나쁜 사람이에요. 더는 당신과 친구 하기 싫어요.”소현아는 환자복을 입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을 나선 순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침대로 돌아와 누워.”“당신 말 안 들어요! 나 집에 갈 거예요!”소현아가 억울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다가오지 말아요! 가까이 오지 말란 말이에요. 난 이제 당신이 싫어요.”소현아가 그를 피해 구석으로 달려가 옆에 있던 꽃병을 들고 방어했다.“더 가까이 오면 이 꽃병으로 때려버릴 거예요!”강지훈이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저렇게 완강하게 거부하다니. 북경 감옥에서 그에게 들러붙고 싶어 용을 쓰던 애완동물과는 완전히 달랐다.“그거 내려놓고 이쪽으로 와. 네가 잘못한 건 없던 일로 해줄게.”소현아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하지만 종이호랑이 같이 말랑말랑한 그 기세가 강지훈에게 위협이 되기 만무했다. 그에겐 그저 투정을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 내 부모님도 아니잖아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변태! 양아치!”“죽여버릴 거야!”퍽.소현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꽃병을 던져버렸다.강지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꽃병은 그의 귓가를 지나 뒤쪽 벽에 부딪혔다.“애완동물이면 애완동물답게 행동해야지. 현아야... 내가 너한테 너무 잘해주니까 만만해 보여? 그래서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거야?”강지훈은 지금까지 그녀의 객기를 모두 인내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녀는 그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었다.“넌 내 애완동물이야. 너희 집 식구들 모두 내 애완동물이야.”강지훈은 지금 이 순
“강지훈 씨, 저 때리지 말아요. 앞으론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때리면 오랫동안 너무 아파요... 나 맞는 거 싫어요.”소현아는 방 안 구석에서 커튼을 뒤집어쓰고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었다.이성을 잃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강지훈은 이유 모를 노기가 끓어올랐다.소현아는 더는 말도 하지 못하고 벽 안으로 파고 들어가기라도 할 듯 점점 더 구석으로 움츠러들어 갔다.“앞으론 말 잘 들을게요.”“현아는 바보예요. 그러니까 현아랑 싸우지 말아요.”소현아는 급기야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그녀는 심지어 강지훈이 자신에게 왜 화가 났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그녀는 다시는 예전처럼 골방에 갇혀 지내고 싶지 않았다.너무나도 무서웠다.“쾅!”거칠게 닫히는 문소리에 소현아는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현아는 겁에 질린 얼굴로 침대를 바라보았다. 강지훈의 그 흉악했던 모습이 그녀로 하여금 예전 잔혹한 괴롭힘을 당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기다란 채찍이 그녀의 몸에 닿는다.공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말을 듣지 않으면 밥 없어.말을 듣지 않으면 매 맞을 줄 알아.부관이 방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을 보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강지훈이 차에 타고 난 뒤 목적지를 말했다.“북경으로 돌아가.”“네.”한 시간 뒤 차가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강지훈이 사나운 기세를 내뿜으며 음산한 감옥 복도를 걸어갔다.부관은 오랫동안 소장님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었다.마치 몇 년 전 북경 감옥에 발령되었던 그때의 모습 같았다.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리를 휘둘러 문을 쾅 열어젖혔다.무시무시한 소리가 공허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 충격에 천장에 매달려있던 백열등이 대롱대롱 흔들렸다.안에 갇혀 있는 노원우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방금 겨우 잠들었다. 하지만 돌연 들려온 굉음에 깜짝 놀라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그의 눈에 옆에 있는 경찰관 손에서 몽둥이를 빼앗아 자신을 향해 걸어
소현아는 의식을 되찾은 뒤 또 어떤 자극을 받은 듯했다. 오후 간호사가 그녀에게 약을 챙겨주려 병실에 가보니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창가에 텅 빈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간호사는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창가로 달려갔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곳은 무려 15층이다!조심하지 않아 발을 헛디딘다면 뼈까지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간호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며 소리쳤다.“소... 소현아 씨! 뭐 하는 거예요! 빨리 올라와요. 너무 위험해요. 만에 하나 떨어지면 큰일 나요!”소현아는 벽에 걸려있는 철난간을 잡고 있었다. 옆에 박혀 있던 못에 병원복이 걸려 아무리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천진난만한 얼굴로 간호사에게 말했다.“간호사 언니, 와서 저 좀 도와주세요. 옷이 걸렸는데 아무리 잡아당겨도 안 돼요.”간호사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아가씨,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제가 지금 바로 가서 사람을 불러올게요.”그녀는 발 하나만 약간 튀어나온 곳에 디딘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간호사는 곧바로 문밖의 경호원들에게 알렸다. 경호원들은 소현아의 상황을 보고 있음에도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였다. 훈련을 받은 용병들이긴 하지만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15층에서 내려간다는 건 그들 역시 엄두가 나지 않았다.경호원은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총명하지도 않은 어리숙한 저 여자가 어떻게 내려가 저기에 매달려있단 말인가.병원에선 곧바로 강지훈에게 연락했다.강지훈은 자신이 잠깐 나간 사이에 그녀가 또 일을 저질렀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경호원으로부터 소현아의 소식을 들은 강지훈의 이마가 깊게 찌푸려졌다.“정말 죽는 게 두렵지도 않나 보군.”소현아는 사람들이 내려가 자신을 잡아가려 하자 또 어두운 방에 갇혀 매질을 당할까 봐 두려워 조심스레 옆으로 걸어갔
“소현아! 내가 말하고 있잖아!”소현아는 짜증이 끓어올라 고개를 들고 사납게 쏘아붙였다.“귀찮으니까 말하지 말아요. 내려가면 곧바로 집에 갈 거예요.”지금까지 강지훈을 이토록 화나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를 제외하면 말이다.“민재야, 최대한 빨리 헬기 불러.”부관인 주민재가 말했다.“그 일은 전연우 씨한테 부탁해야만 합니다. 성세 그룹부터 여기까지 헬기가 오려면 단 십 분이면 됩니다.”...전화를 받았을 때 전연우는 장소월과 함께 검사실에서 나오고 있었다.기성은은 강지훈의 부하에게서 들은 말을 전연우에게 보고했다.전연우가 말했다.“무슨 상황인지 알아봐.”“네.”환자복을 입고 조용한 복도에 서 있던 장소월의 귀에 소현아의 이름이 들려왔다. 그녀가 전연우에게 물었다.“현아한테... 무슨 일 있어?”전연우가 말했다.“아무것도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기성은은 헬기를 대동하고 병원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벽에 매달려있는 어리석은 그 여자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머리 위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듣고는 강지훈 그 나쁜 놈이 잡으러 온 줄로 알았다.그녀는 급히 아래로 기어가다가 돌연 발을 헛디뎠다. 헬기에서 고리가 내려와 그녀의 옷을 걸지 않았다면 그대로 아래로 추락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기성은은 온 힘을 다해 여자를 위로 끌어올렸다.“이거 놔요. 나쁜 사람.”소현아는 온몸을 퍼덕이며 그에게 저항했다.“소현아 씨, 접니다!”기성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는 안정을 되찾고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기성은 씨예요? 소월이는요? 소월이도 온 거예요?”“아가씨께선 지금 잘 지내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텅 빈 옥상, 소현아가 기성은의 옷을 꽉 부여잡고 말했다.“기성은 씨, 저 집에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저 나쁜 놈이 절 때려서 머리에 혹까지 자랐어요. 저 정말 집에 가고 싶어요.”옥상 문이 벌컥 열리고 강지훈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기성은의 등 뒤에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맞는 건 무서워? 소현아, 너 정말 미친 거야, 아니면 미친 척하는 거야?”강지훈은 말투가 약간 냉랭해졌을 뿐이지만 소현아는 심각하게 겁을 먹고 위축되어 있었다.“전 미친 게 아니라 바보라서 그래요. 강지훈 씨, 잘못했어요. 앞으론 창문으로 나가지 않을게요.”소현아는 이불로 머리를 뒤집어썼다. 밖에서 봐도 이불 속 여자가 바들바들 떨고 있다는 것을 선명히 알 수 있었다.부관이 말했다.“소장님, 아가씨를 계속 이대로 놔두다간 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강지훈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봐.”“일단 아가씨에게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가씨는 지금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전 그놈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집안까지 무너질 뻔한 큰일을 겪었습니다.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충격을 받을 때마다 뇌가 더 심각하게 망가집니다. 더욱이 그 손상은 비가역적이라 다시 회복되지도 못합니다.”“만약 또다시 자극을 받게 된다면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져 진짜 바보가 될지도 모릅니다.”소현아는 누군가 옆에서 자신을 바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고 오히려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맞아요... 현아는 바보예요. 그러니까 바보랑 싸우지 말아요.”엄마가 말했었다. 누군가 그녀를 괴롭히려 한다면 자신이 바보라고 말하라고 말이다. 바보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기에 먼저 말하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부관이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강지훈이 고개를 들었다.“말해!”부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소현아 씨는 외모적인 면에서나 가정환경 면에서나 모두 그리 출중하지 않습니다. 서울엔 소현아 씨보다 훨씬 더 훌륭한 선택지가 많고도 많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소현아 씨를 거두는 건 부담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소장님의 곁을 많은 여자분들이 스쳐
소현아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도망치려고 살며시 문밖을 나섰다.바로 그때, 복도 모퉁이에서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소현아 씨.”소현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기성은 씨? 아까 가지 않았어요?”“이제 안심하세요. 아가씨는 안전합니다.”소현아가 기분 좋은 얼굴로 그에게 걸어갔다.“기성은 씨, 소월이가 날 데려오라고 시킨 거예요?”기성은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괜찮으시다면 제가 병원 밖까지 모시겠습니다.”소현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함께 갈게요.”소현아의 다리 안쪽 흥건해진 천을 본 순간 기성은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아가씨, 제가 잠시 기다릴 테니까 옷부터 갈아입으세요.”소현아는 고개를 숙여 살펴보더니 약간 미안한 듯한 얼굴로 설명했다.“기성은 씨는 그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저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그리고... 이건 엄마가 가르쳐주신 거예요. 오줌을 싸고도 쫓아내지 못하면 똥까지 싸려고 했어요.”기성은은 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아가씨, 소씨 집안은 서울에서 꽤나 명성이 있는 집안이에요. 밖에선 체면을 지켜야 해요.”소현아는 두 검지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하지만 엄마가 이렇게 하면 나쁜 놈을 쫓아낼 수 있다고 하셨단 말이에요.”그토록 무해한 그녀의 모습에 기성은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 아가씨, 제 생각이 짧았네요.”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기성은은 소현아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종래로 보지 못했다.소현아가 옷을 갈아입은 뒤, 기성은은 그녀를 데리고 로즈 가든으로 향했다.“아가씨, 힘드시겠지만 이후 며칠 동안은 외출하지 마세요. 나쁜 놈들이 아가씨를 찾는 걸 포기하면 제가 자연히 집에 모셔다드릴 겁니다.소월이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무조건 그를 신뢰한 소현아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 절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않을게요.”기성은은 그녀에게 열쇠를 건네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