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전체에 농후한 훠궈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예전의 북경 감옥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냄새다.“넌 언제면 좋겠어?”소현아가 말했다.“그럼... 제가 소월이 보러 갈게요! 소월이는 너무 바쁘거든요. 방해하기 싫어요.”소현아가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무언가 떠올랐는지 화제를 돌렸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아기 어떻게 됐는지 얘기했어요? 아직 제 뱃속에 살아있는 거예요?”강지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아기 좋아해?”소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해요.”“그럼 당분간 여기 있어. 의사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몸조리 잘해야 한대.”소현아가 자신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걱정어린 얼굴로 망설이다가 말했다.“하지만 엄마아빠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 집에 가고 싶어요.”“의사 선생님 말씀 안 들으면 배가 계속 아플 거야. 내일 사람을 보내 부모님 모셔오라고 할게. 어때?”“그럼 됐어요. 엄마가 아빠는 심장이 안 좋아서 아무 데나 다니면 안 된다고 했어요.”소현아가 몸을 뒤집어 강지훈의 허리에 지탱하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강지훈 씨, 저 이 집에서 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저 정말 가야겠어요. 마지막으로 3일만 더 있다가 갈 거예요. 아니면 엄마아빠가 정말 걱정하실 거예요.”소현아는 얼른 일어나 앉았다. 훠궈 냄새를 맡으니 뱃속에서 또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또 배고프네.”소현아는 조금 전 약을 먹고 통증이 사라졌는지 또다시 채 먹지 못한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녀는 소월이도 이곳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강지훈은 이미 사람을 시켜 소현아의 뒷조사를 마쳤고 그렇게 소씨 집안 모든 상황에 대해 알게 되었다.강지훈이 말했다.“내일 안에 그 사람을 북경 감옥에 데려와.”“네.”열한 시 반.서재, 섹시한 자태의 도우미가 요염하게 몸을 배배 꼬며 커피를 들고 강지훈에게 다가갔다.“주인님
소현아는 옷장 안에 조그만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갔나?”그녀가 작은 입을 움직인 그 순간, 옷장 문이 돌연 벌컥 열리고 강렬한 빛이 뿜어져 들어왔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목걸이 시계를 꽉 움켜쥐었다.“저... 일부러 본 게 아니에요. 강지훈 씨, 날 때리지 말아요. 다시는 먹을 것 찾으러 아래층에 내려가지 않을게요.”소현아는 옷장의 구석까지 비집고 들어가 머리를 감쌌다.“나와. 너 해치지 않아!”그녀의 모습에 강지훈이 이마를 깊게 찌푸렸다.“약속 지켜야 해요.”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그녀를 보며 강지훈은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비켜줘요.”소현아는 옷장에서 나온 뒤 목걸이 시계를 쥐고 강지훈과 멀리 떨어졌다.소현아가 그의 발밑을 가리키며 말했다.“거기에만 서 있어요. 다가오지 말고.”“안 움직일게.”강지훈은 종래로 이렇게 여자의 말대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소현아는 목걸이 시계를 열어 사진을 확인하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어 그녀가 다시 목에 걸고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미안해요. 강지훈 씨. 정말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그냥 배가 너무 고파서 내려가 먹을 것을 찾으려 했던 것뿐이에요. 두 사람이 그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걱정 말아요... 다음엔 신음소리가 들리면 절대 가까이 가지 않을게요.”“맹세할게요!”소현아는 주먹을 말아쥐고 머리 옆으로 가져갔다. 강지훈에겐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는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있었다.“강지훈 씨, 돌아가 주무세요. 저도 잘 거예요. 피곤해요.” 강지훈의 방은 소현아의 방 바로 옆에 있었다.강지훈이 방으로 돌아간 뒤.침실 안, 여자 한 명이 바닥에 꿇어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주... 주인님!”강지훈이 여자를 힘껏 걷어차 버리고 포악함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닥에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나뒹구는 여자를 쳐다보았다.그녀는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더더욱 잔혹한 처벌이 가해질 거라는 걸 너무나도
“희연아, 내 말 좀 들어봐. 내 계획은 완벽했어. 다 그 멍청이 때문이야. 희연아... 나 살려줘.. 날 이곳에서 꺼내만 준다면 네가 하라는 것 뭐든 할게.”제7 감옥 안, 노원우는 죄수복을 입고 눈앞 예쁘게 꾸민 여자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하고 있었다. 몇 달을 감옥에서 살아온 그는 이제 이곳 생활에 진저리가 나버렸다. 본래 준수했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고 아래턱엔 거뭇한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이제 더는 여자의 흥미를 끌어내지 못하는 형편없는 모양새였다.경호원을 대동하고 온 여자는 선글라스를 걸고 교만하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오늘 경고하려고 온 거야. 아버지께서 재판이 열리는 그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내뱉지 말라고 하셨어. 아니면 네 그 가난뱅이 친척들 또한 너랑 똑같이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너...”노원우는 낯선 사람 대하는 듯한 냉랭한 여자의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아버지께선 네 능력을 마음에 들어 하셨어. 하지만 이제 이용가치가 떨어졌으니 쓸데없이 너한테 힘을 쓸 필요는 없지. 그리고... 겁도 없이 그런 사람을 건드리다니.”그녀는 더이상 그와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선글라스 속 눈을 까뒤집었다.“아니... 이러지 마... 희연아... 너 내 아이 가졌잖아. 이렇게 날 버리면 아이는 아빠 없이 자라게 되잖아.”“아이? 하하하...”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내가 아직도 남겨뒀을 거라 생각해? 노원우, 자기객관화 좀 해.”노원우는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손에 들고 있던 마이크를 유리창에 내던져버렸다. 매정히 떠나는 여자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뒤덮였다.끝났다. 이제 완전히 끝났다.노원우가 경찰과 함께 감옥에 다시 돌아가려던 그때, 검은색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다가왔다. 제7 감옥 경찰은 한눈에 그가 서울 북경 감옥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북경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형수다. 그곳에 발을 들인
또한 그닥 총명하지 못한 소현아는 어느새 모두 잊어버릴 것이다.하지만... 이번에 강지훈은 자신을 과대평가했고, 그녀에게 있어 그 사진의 중요함을 과소평가했다.부관이 올라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반신욕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보고했다.“소장님, 데려왔습니다.”별장은 감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강지훈은 어두운 복도 끝을 힐끗 보고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이어갔다.음침하고 축축한 감옥에 들어가니 조금 전 얼음물을 뒤집어쓰고 정신을 차린 노원우가 앉아 있었다. 그가 반대쪽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를 알아보고 말했다.“여... 여기 어디예요? 왜 날 이런 곳에 데려온 거예요? 당신들은 누구죠?”강지훈이 부관의 손에서 몽둥이를 받아들었다. 그가 휘둘자 노원우의 아우성이 감옥에 울려 퍼졌다.강지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분출하기라도 하는 듯 한 번 또 한 번 몽둥이를 휘둘렀다.머릿속에서 자신에게 강렬히 저항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나 다시는 지훈 씨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난 지훈 씨가 싫어요!”강지훈은 자신이 언제부터 애완동물의 생각을 이렇게나 신경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시간은 어느덧 한 시간 반이 지나 날이 밝아오고 있었고 눈도 그쳤다.강지훈이 분노를 모두 분출했을 때, 십자가에 묶여있던 남자는 이제 모든 힘이 풀려 단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 바닥 전체가 피로 흥건히 물들었다.강지훈이 분부했다.“쉽게 죽게 하면 안 돼.”“네.”강지훈이 감옥을 나가 별장에 도착하자 도우미가 황급히 달려왔다.“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소현아 씨가 없어졌어요.”강지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없어졌으면 나가 찾아!”남자가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왔다.위층에 올라가 복도를 밟을 때까지 강지훈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소현아가 있던 방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한 시간이 넘게 지났으니 방안을 꽉 채웠던 그녀의 체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차디찬 한기만 감돌고 있었다
‘사진 속 그 기생오라비가 너한테 그렇게 중요했던 거야?’꽁꽁 얼어버린 손이 겨우 녹아내리자 강지훈은 그녀의 손가락을 펴보았다. 손에 꽉 쥐고 있던 찢어진 사진 조각을 본 순간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모두 창밖에 던져버렸다.“깨어나면 이 죄 반드시 물을 거야.”시내에 거의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온몸은 이제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하지만 열 시간이 넘게 실종된 끝에 겨우 주워온 생명이니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었다.소현아는 머리가 어지럽고 의식이 흐릿했다.“나... 나쁜 자식...”강지훈의 거친 손바닥이 그녀의 이마에 올려졌다.“깼어?”“강지훈 씨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말하지 마.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소현아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도착하고 병실로 옮겨진 뒤, 의사는 그녀에게 해열제를 놓았다.강지훈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언제면 깨어날 수 있어요?”간호사가 말했다.“아가씨의 몸 상태에 달려있어요. 충분히 휴식하면 곧 깨어나실 거예요.”강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흉측한 그의 인상을 보고는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아 곧바로 의료기기들을 들고 병실을 떠났다.부관이 말했다.“소장님, 소씨 집안 쪽에서 실종 신고를 했습니다. 아가씨를 집에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강지훈이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내가 말한 거 안 보냈어?”“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선 단호히 거절하며 아가씨를 보내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내 손에 들어온 순간부터 오직 나만이 소유할 수 있는 애완동물이야. 소씨 집안에 알려줘. 오늘부터 소현아는 소씨 집안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들이 어떤 조건을 요구하든 모든 들어준다고 해.”“네.”서울시 경찰서.소현아가 사라진 시간 동안 소정국은 줄곧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소정국과 명세진은 경찰서에서 답변을 들은 뒤 또다시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경찰서를 나섰다.소정국이 고통스럽게 심정을
그들의 애원에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죄송합니다. 이건 저희가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단 계약서는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마음을 굳히시면 적혀있는 번호로 언제든 전화주세요. 저희 쪽 사람들이 연락드릴 겁니다.“어르신, 사모님, 진지하게 고민해 보십시오.”그들이 나간 뒤, 소정국은 분노에 차올라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하늘이 무서운 줄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라고. 내 딸을 납치해 가둬놓고 저런 황당무계한 말을 지껄이다니.”명세진은 눈물을 닦은 뒤 얼른 그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여보, 흥분하지 말아요. 우리 현아는 복이 많은 아이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소정국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명세진은 재빨리 그의 호주머니에서 심장약을 꺼내 먹였다.소현아의 생사가 명확하지 않은 이때, 소정국마저 쓰러진다면 집안 전체가 허물어 내릴 것이다.“여보, 현아의 그 친구가 찾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정국도 번뜩 장소월의 얼굴이 떠올랐다.“성세 그룹 그 아가씨 말이야? 하지만... 우리에겐 성세 그룹에 연락할 방법이 없어. 어떻게 그 아가씨한테 도움을 청하겠어.”“그리고... 그 아가씨는 이미 한 번 우릴 도와줬는데...”명세진이 말했다.“하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잖아요. 현아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을 찾아가는 거예요.”소씨 가문은 서울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서울에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내로라하는 명문세가이니 말이다.그저 지극히 평범한 집안일 뿐인 그들이 어떻게 성세 그룹에 연락이 닿을 수 있겠는가.그들은 소현아가 좋은 집에 시집가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평안하게 살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들은 소현아가 대체 어떻게 그 염라대왕을 건드렸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소씨 가문에서도 그 사람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마다 모두 입을 닫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서울에서 권세로 유명한 강씨 집안은 별로 없다. 정계에 있는 그 강씨 집안을 제외하면 말이다.강씨 집안과 맞서는 건 그야말
순간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에도 공포스럽게 한기가 내려앉았다.소현아는 걸음을 멈추고 허약하고도 창백한 얼굴을 돌려 공포가 가득 들어있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당신은 노원우와 똑같은 나쁜 사람이에요. 더는 당신과 친구 하기 싫어요.”소현아는 환자복을 입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을 나선 순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침대로 돌아와 누워.”“당신 말 안 들어요! 나 집에 갈 거예요!”소현아가 억울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다가오지 말아요! 가까이 오지 말란 말이에요. 난 이제 당신이 싫어요.”소현아가 그를 피해 구석으로 달려가 옆에 있던 꽃병을 들고 방어했다.“더 가까이 오면 이 꽃병으로 때려버릴 거예요!”강지훈이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저렇게 완강하게 거부하다니. 북경 감옥에서 그에게 들러붙고 싶어 용을 쓰던 애완동물과는 완전히 달랐다.“그거 내려놓고 이쪽으로 와. 네가 잘못한 건 없던 일로 해줄게.”소현아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하지만 종이호랑이 같이 말랑말랑한 그 기세가 강지훈에게 위협이 되기 만무했다. 그에겐 그저 투정을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 내 부모님도 아니잖아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변태! 양아치!”“죽여버릴 거야!”퍽.소현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꽃병을 던져버렸다.강지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꽃병은 그의 귓가를 지나 뒤쪽 벽에 부딪혔다.“애완동물이면 애완동물답게 행동해야지. 현아야... 내가 너한테 너무 잘해주니까 만만해 보여? 그래서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거야?”강지훈은 지금까지 그녀의 객기를 모두 인내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녀는 그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었다.“넌 내 애완동물이야. 너희 집 식구들 모두 내 애완동물이야.”강지훈은 지금 이 순
“강지훈 씨, 저 때리지 말아요. 앞으론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때리면 오랫동안 너무 아파요... 나 맞는 거 싫어요.”소현아는 방 안 구석에서 커튼을 뒤집어쓰고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었다.이성을 잃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강지훈은 이유 모를 노기가 끓어올랐다.소현아는 더는 말도 하지 못하고 벽 안으로 파고 들어가기라도 할 듯 점점 더 구석으로 움츠러들어 갔다.“앞으론 말 잘 들을게요.”“현아는 바보예요. 그러니까 현아랑 싸우지 말아요.”소현아는 급기야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그녀는 심지어 강지훈이 자신에게 왜 화가 났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그녀는 다시는 예전처럼 골방에 갇혀 지내고 싶지 않았다.너무나도 무서웠다.“쾅!”거칠게 닫히는 문소리에 소현아는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현아는 겁에 질린 얼굴로 침대를 바라보았다. 강지훈의 그 흉악했던 모습이 그녀로 하여금 예전 잔혹한 괴롭힘을 당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기다란 채찍이 그녀의 몸에 닿는다.공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말을 듣지 않으면 밥 없어.말을 듣지 않으면 매 맞을 줄 알아.부관이 방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을 보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강지훈이 차에 타고 난 뒤 목적지를 말했다.“북경으로 돌아가.”“네.”한 시간 뒤 차가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강지훈이 사나운 기세를 내뿜으며 음산한 감옥 복도를 걸어갔다.부관은 오랫동안 소장님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었다.마치 몇 년 전 북경 감옥에 발령되었던 그때의 모습 같았다.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리를 휘둘러 문을 쾅 열어젖혔다.무시무시한 소리가 공허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 충격에 천장에 매달려있던 백열등이 대롱대롱 흔들렸다.안에 갇혀 있는 노원우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방금 겨우 잠들었다. 하지만 돌연 들려온 굉음에 깜짝 놀라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그의 눈에 옆에 있는 경찰관 손에서 몽둥이를 빼앗아 자신을 향해 걸어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