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들어가. 난 바깥에서 기다릴 테니까. 남자가 속옷 가게에 들어갔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비웃음거리가 된단 말이야. 착하지? 난 여기에서 기다릴게. 이 카드 줄 테니까 사고 싶은 거 마음껏 사. 이따가 밤에 한 벌씩 보여주는 것도 잊지 말고.”남자가 말을 마치고는 여자친구의 볼에 살짝 키스했다.그녀는 카드를 보자 요염한 자태를 취하며 환히 웃어 보였다.“진짜 미워 죽겠어. 흥.”남자는 건들거리며 여자의 엉덩이를 힘껏 움켜쥐었다.그 동시에 문 앞에 서 있는 장소월을 보자 남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반짝였다.하지만 그가 한 걸음 떼기도 전에 경호원이 그를 막아섰다.“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더럽게 사납네!”남자는 장소월과 멀리 떨어진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장소월을 힐끗거렸다.“이봐요, 아가씨, 경호원 너무 사나운 거 아니에요?”장소월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는 양아치 같은 말투를 보니 또 어느 집 도련님이겠지.“엄청 차갑게 구네요. 내 말 무시하지 말고 전화번호나 알려줘요. 저녁에 같이 놀래요?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요.”“...”그때, 조금 전 들어갔던 여자가 울며 뛰쳐나왔다. 다리는 절뚝거렸고 얼굴엔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자기야, 얼굴 어떻게 된 거야?”“저 안에 있는 남자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날 희롱하려고 하길래 거부했더니 때렸어! 흑흑흑... 자기야, 꼭 복수해줘야 해!”“대체 어떤 미친 자식이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저놈이야!”여자가 종이가방을 들고나오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를 가리켰다.눈을 희번덕거리며 당장이라도 뒤집어엎을 기세였던 남자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여자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이런 멍청한 여자 같으니라고! 저분은 성세 그룹 전 대표님이야.”전연우의 신분을 들은 여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얼굴을 움켜쥐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장소월은 어려서부터 늘 혼자였다. 때문에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가정이 갖고 싶었다.하여 그녀는 자신의 목마름을 전연우에게서 해결하려고 했었다.하지만 장소월에게 전연우가 지금에 와서야 하는 이 모든 행동은 너무 늦어버린 것들이었다.“마음에 들어?”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밖에 나갈 때 그녀는 이런 것들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옆에 있던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안목이 정말 훌륭하시네요. 이건 최근 유행하고 있는 립스틱인데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요. 아가씨와 너무 잘 어울려요. 바르면 분명 예쁘실 거예요.”전연우는 여자의 물건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너무 서툴러 뚜껑을 여는 것도 세 번이나 시도해서야 겨우 성공했다. 그는 한 손으로 장소월의 얼굴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립스틱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바르려 했다.직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렇게 립스틱을 발라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장소월의 입술이 쭉 내밀어졌다. 촉촉한 입술은 은은한 핑크색까지 띄고 있어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하지만 극강의 소유욕을 지닌 전연우는 다른 여자가 갖고 있는 것이라면 장소월에게도 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라도 어떻게든 구해 장소월의 품에 안겨주고 싶었다.직원이 친절하게 말했다.“대표님, 그렇게 바르는 게 아니에요. 제가 도울까요?”전연우는 그녀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장소월의 입술에 조심조심 립스틱을 발라주었다.얼마 후, 직원이 거울을 가져와 장소월의 앞에 놓아주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의 걸작을 감상하듯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됐어?”전연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네. 이 립스틱 모든 색상 하나씩 다 살게요.”그는 카드 하나를 꺼내 눈도 깜빡하지 않고 몇백만 원을 긁었다.백화점에서 나오니 바깥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금색의 빛이 텅 빈 거리
“가고 싶으면 며칠 후 내가 데려다줄게.”전연우는 비밀번호를 누른 뒤 손잡이를 아래로 당겼다.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장소월이 예전에 쓰던 향수였는데 냄새가 청아하고 달콤했다. 당시 그녀는 조수석에도 이 향수를 놓아두었지만 그 후 전연우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새로 산 가구들도 모두 놓여있었다. 핑크색 소파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집안일은 모두 도우미가 시간 맞춰 와서 할 거야. 넌... 매일 밥 해놓고 내가 오길 기다리면 돼.”방안 인테리어는 그녀의 취향대로 전체적으로 단란하고 따뜻했다. 반면 장소월은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려. 내가 널 위해 작업실을 하나 만들어 두었으니까.”그 작업실은 전연우의 서재 옆방이었는데 큰 창문이 들어서 있어 찬란한 햇볕이 따뜻하게 쏟아지고 있었다.그 외에도 방이 3개 더 있었는데 그들의 안방, 장소월 전용 옷방, 그리고 전연우의 운동방이었다.침실엔 자신도 모르는 상황에서 찍힌 많은 장소월의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그중 한 장은 검은색 셔츠를 입고 두 손을 모은 채 침대에서 잠든 모습이었다. 검은색 셔츠는 허벅지까지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아래로 길고 매끈한 다리가 곧게 뻗어있었다. 이 중 임의로 사진 한 장을 골라도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될 것이다.그녀는 도원촌에 있을 때 전연우에 의해 강제로 찍힌 사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한 장 한 장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장소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 사진들... 다 네가 사람을 보내 몰래 찍은 거야?”전연우의 뜨거운 숨결이 장소월의 목덜미에 뿌려졌다. 그가 등 뒤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느덧 단단한 물건이 그녀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욕망을 분출할 듯한 기세였다.“별로야? 다음엔 사람을 바꿔 다시 찍으라고 해야겠어.”“이 침대에 누워봐. 내가 널 위해 선택한 거야.”3일 동안 그녀와 하지 않았으니 체취를 맡은 순간부터 전연우는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가디건을 벗기
손목의 피가 욕조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야말로 섬뜩한 광경이었다.“소월아,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 알아? 인질은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을 가둔 범죄자와 사랑에 빠진대...”16살의 전연우는 살기 위해 장해진의 밑에서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었다. 그는 한 무리의 남자가 열몇 살의 소녀를 폭력적으로 범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다. 소녀는 돈을 갚지 못해 팔려온 아이였다.마음과 육체에 상처를 입고 정신적으로 붕괴한 뒤 여자아이는 폭력범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경우를 수도 없이 봐왔다.그 후 2주 동안 전연우는 줄곧 로즈 가든에 머물렀다. 출근할 때면 늘 장소월더러 옷을 입혀주고, 넥타이를 매주고, 아침을 만들게 했다.아내가 남편을 위해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감정 없이 냉담하고 기계적이었다. 그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억지로 할 뿐이었다.그녀도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연우가 문 앞에 센서 장치를 설치해 두었기에 그녀가 나서기만 하면 그의 핸드폰에 경보음이 울린다.경호원도 곧바로 달려와 그녀를 돌려보낼 것이다.장소월이 활동할 수 있는 곳은 아파트 단지 내뿐이었고 경호원이 줄곧 먼 곳에서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아래로 내려와 벤치에 앉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가슴을 꽉 메우는 답답함과 불안함이 하루종일 가시지 않았다. 장시간 집에 머무른 탓인 줄 알았으나 이곳에서 한 시간 남짓 앉아있었음에도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이런 느낌이 들 때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장소월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돌연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혹시 그 사람이?장소월에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사실... 그녀는 강영수가 줄곧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년 전.허 교수님과 함께 풍경화를 그리러 파리를 떠나기 일주일 전, 그녀는 생활용품을 사러 마트로 향하고 있었다.늘 지나던
아마 허 교수님도 눈치채지 못하셨을 것이다.장소월은 제운 고등학교로 돌아와 인공 호수 주위를 거닐었다. 호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조각상의 팔은 본래 떨어졌었는데 지금 보니 예쁘게 원상복구 돼 있었다.그녀는 또 예전 강영수가 새겨두었다던 비밀이 생각나 조각상 뒤를 살펴보았다.그 비밀은 바로 그녀의 이름, 장소월이었다.당시 두 사람이 이곳에서 만났을 때, 실은 조각상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장소월을 즐겁게 해주려고 지어낸 강영수의 거짓말이었다.제운 고등학교를 나선 뒤, 장소월은 강영수와 김남주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길옆 LED 전광판엔 두 사람의 결혼 발표 기자회견이 방영되고 있었다.그녀는 이어 서울 대학교로 향했다.허이준, 소현아, 단모연은 모두 함께 서울대에 입학했다.소현아는 서울대 입학 자격을 부당한 방법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얻었다. 장소월이 떠나기 전 자신의 모든 필기를 그녀에게 넘겨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지만, 소현아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또 덜렁거리다가 교실에 교과서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이 건물 아래에 도착해서야 생각나 부랴부랴 다급히 달려 올라가는 것이었다.친구들은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그녀를 재촉했다. 한눈에 봐도 기다리기 싫은 눈치였다.장소월은 낯선 소현아의 친구에게 다가가 말했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내려올 거예요.”친구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소현아가 내려왔을 때 장소월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운동장에 가보니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열정적인 농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허이준과 단모연은 가장 훌륭한 파트너였다. 어디에 가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아안고 있었다.이후... 장소월은 마지막 남은 시간을 이용해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친 뒤 곧바로 비행기 표를 끊고 러시아로 떠났다.그녀가 돌아온 건 다만 한 번이라도 그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떠나고 나면 또 언제 볼
“예전 강씨 집안은 깨끗했던 거 같아?”“자고로 이긴 사람은 왕이 되고 진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이야.”“사모님, 정말 바보가 됐는지, 바보인 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깟 집과 손자의 목숨 중 뭐가 더 중요한지 말이에요.”“제가 듣기로 강씨 집안은 근래 계속 적자라고 하던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네?”“내일이 마지막 날이에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전 이만.”코를 더럽히는 악취에 전연우는 이마를 확 찌푸리고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자리를 떴다.붉은 노을 아래, 길고 곧게 뻗은 그림자가 별장 문밖을 나섰다.고고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던 박순옥은 현재 영락없는 치매 노인으로 전락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실수하기가 일쑤였고 하인의 도움이 없이는 간단한 식사도 문제가 되는 상태였다.도우미가 급히 박순옥에게 깨끗한 옷을 갈아입혔다. 희미한 등불이 비추고 있는 방 안, 드디어 정신을 회복한 박순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가서 강씨 저택 집문서를 갖고 와!”박순옥은 눈을 감고 힘겹게 그 한마디를 꺼냈다. 큰 결단을 내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도우미가 아연실색하며 말했다.“이건 강씨 집안에 남은 유일한 재산입니다. 저택마저 없으면 어떻게...”“강씨 집안의 영혼 같은 이곳이 중요하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손자가 죽어가는 건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죽더라도 내가 먼저 죽는 게 맞아. 내 말대로 해. 당장.”인씨 집안도 그 전씨 놈과 한통속이 되어 강씨 집안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했다.그녀는 혼자의 몸으로 쓸쓸히 커다란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평생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이 집마저 그의 손에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도우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이어 인경아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박순옥이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 망했다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어요. 심유와 함께 있어 줘야 한다는 이유로요. 웃기지 않아요? 친아들 목숨이 위태롭다는 데도 관심조차 없었어요. 심지어 제가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린다고 하더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진짜.”“이 별장 집문서도 그 잡종 놈한테 남겨주려고 지키는 거죠? 제가 모를 것 같아요?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만약 제 아들이 죽는다면 절대 그놈을 살아있게 놔두지 않아요. 영수의 저승 길동무로 던져주고 당신 강씨 집안의 대를 깨끗이 끊어놓을 거예요.”“너너너... 이 짐승보다도 못한 년. 기어이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래?”인경아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엔 당신이 절 벼랑 끝으로 내몰았었죠. 세상사 다 돌고 도는 것 아니겠어요? 영수 소유의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올 거예요. 예전 절 이혼시키기 위해 사사건건 인하 그룹을 압박한 것도 모자라 절 정신병 환자로까지 만들지 않았다면 저도 영수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의 그 파렴치한 행동 때문에 영수는 지금까지도 절 원망하고 있어요. 집안이 이 지경까지 몰락한 건 다 자업자득이에요.”“들어오세요!”인경아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도우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색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아... 아가씨... 원하시던 물건입니다.”“너... 너희들...”박순옥은 도우미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인경아가 한발 앞서 재빨리 물건을 낚아챘다.박순옥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저 울부짖으며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쥘 뿐이었다.“이건 우리 강씨 집안의 물건이야...”인경아가 고개를 숙이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이건 제 아들 영수가 마땅히 가져야 할 물건이에요. 영수는 강씨 집안의 장자이자 후계자이니까요.”“전 그저 영수를 대신해 영수의 물건을 잠시 맡아두는 것뿐이에요.”“전연우가 영수의 목숨으로 협박해도 어머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그 잡종 놈이 돌아오
장소월은 전연우의 손길을 피해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 앞에 자리 잡았다.이어 그녀는 그릇에 밥을 담은 뒤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요즘 연속 며칠 동안 장소월은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아내의 모습이었다.“오늘 반찬이 너무 짜. 다음번엔 소금 조금만 줄여.”“응.”장소월은 밥을 먹으며 무심히 대답했다.실은 그녀는 이 음식들을 직접 요리하지 않았다. 전연우의 퇴근 시간에 맞춰 도우미가 만든 것이다.장소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전연우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나 내일 휴식이야. 같이 등산할래? 듣기론... 청연사가 불경 드리기에 좋다던데.”불경이라고? 이런 말이 전연우의 입에서 나오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장소월이 물었다.“넌 그런 거 안 믿잖아?”전연우는 가시를 바른 뒤 생선 살을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요즘 회사 일 때문에 너랑 있어 주지 못했잖아. 그래서 널 데리고 바람이나 좀 쐬려고.”장소월은 생선에 손도 대지 않고 대답했다.“응.”그녀가 동의한 건 그저 그와 하루종일 이 밀폐된 집안에서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 그 이유 단 하나였다. 전연우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자명한 일이었으니 말이다.몇 마디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에게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그때, 돌연 숨 막힐 듯한 고요함을 깨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화면에 낯선 번호가 떴다.전연우는 눈길도 주지 않고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30초 뒤 또다시 걸려 오자 전연우는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이번엔 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안 바빠?”“내가... 너랑 같이 있어 주니까 좋지 않아?”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전연우 역시 분명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텐데...“넌 언젠가는 인시윤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을 거잖아. 차라리 일찌감치 인시윤에게 돌아가 함께 있는 게 낫지 않아? 난 2주 동안 이곳에서 머물다가 두 사람이 결혼하면 곧바로 허 선생님의 작업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