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허 교수님도 눈치채지 못하셨을 것이다.장소월은 제운 고등학교로 돌아와 인공 호수 주위를 거닐었다. 호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조각상의 팔은 본래 떨어졌었는데 지금 보니 예쁘게 원상복구 돼 있었다.그녀는 또 예전 강영수가 새겨두었다던 비밀이 생각나 조각상 뒤를 살펴보았다.그 비밀은 바로 그녀의 이름, 장소월이었다.당시 두 사람이 이곳에서 만났을 때, 실은 조각상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장소월을 즐겁게 해주려고 지어낸 강영수의 거짓말이었다.제운 고등학교를 나선 뒤, 장소월은 강영수와 김남주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길옆 LED 전광판엔 두 사람의 결혼 발표 기자회견이 방영되고 있었다.그녀는 이어 서울 대학교로 향했다.허이준, 소현아, 단모연은 모두 함께 서울대에 입학했다.소현아는 서울대 입학 자격을 부당한 방법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얻었다. 장소월이 떠나기 전 자신의 모든 필기를 그녀에게 넘겨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지만, 소현아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또 덜렁거리다가 교실에 교과서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이 건물 아래에 도착해서야 생각나 부랴부랴 다급히 달려 올라가는 것이었다.친구들은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그녀를 재촉했다. 한눈에 봐도 기다리기 싫은 눈치였다.장소월은 낯선 소현아의 친구에게 다가가 말했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내려올 거예요.”친구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소현아가 내려왔을 때 장소월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운동장에 가보니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열정적인 농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허이준과 단모연은 가장 훌륭한 파트너였다. 어디에 가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아안고 있었다.이후... 장소월은 마지막 남은 시간을 이용해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친 뒤 곧바로 비행기 표를 끊고 러시아로 떠났다.그녀가 돌아온 건 다만 한 번이라도 그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떠나고 나면 또 언제 볼
“예전 강씨 집안은 깨끗했던 거 같아?”“자고로 이긴 사람은 왕이 되고 진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이야.”“사모님, 정말 바보가 됐는지, 바보인 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깟 집과 손자의 목숨 중 뭐가 더 중요한지 말이에요.”“제가 듣기로 강씨 집안은 근래 계속 적자라고 하던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네?”“내일이 마지막 날이에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전 이만.”코를 더럽히는 악취에 전연우는 이마를 확 찌푸리고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자리를 떴다.붉은 노을 아래, 길고 곧게 뻗은 그림자가 별장 문밖을 나섰다.고고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던 박순옥은 현재 영락없는 치매 노인으로 전락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실수하기가 일쑤였고 하인의 도움이 없이는 간단한 식사도 문제가 되는 상태였다.도우미가 급히 박순옥에게 깨끗한 옷을 갈아입혔다. 희미한 등불이 비추고 있는 방 안, 드디어 정신을 회복한 박순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가서 강씨 저택 집문서를 갖고 와!”박순옥은 눈을 감고 힘겹게 그 한마디를 꺼냈다. 큰 결단을 내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도우미가 아연실색하며 말했다.“이건 강씨 집안에 남은 유일한 재산입니다. 저택마저 없으면 어떻게...”“강씨 집안의 영혼 같은 이곳이 중요하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손자가 죽어가는 건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죽더라도 내가 먼저 죽는 게 맞아. 내 말대로 해. 당장.”인씨 집안도 그 전씨 놈과 한통속이 되어 강씨 집안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했다.그녀는 혼자의 몸으로 쓸쓸히 커다란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평생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이 집마저 그의 손에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도우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이어 인경아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박순옥이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 망했다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어요. 심유와 함께 있어 줘야 한다는 이유로요. 웃기지 않아요? 친아들 목숨이 위태롭다는 데도 관심조차 없었어요. 심지어 제가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린다고 하더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진짜.”“이 별장 집문서도 그 잡종 놈한테 남겨주려고 지키는 거죠? 제가 모를 것 같아요?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만약 제 아들이 죽는다면 절대 그놈을 살아있게 놔두지 않아요. 영수의 저승 길동무로 던져주고 당신 강씨 집안의 대를 깨끗이 끊어놓을 거예요.”“너너너... 이 짐승보다도 못한 년. 기어이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래?”인경아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엔 당신이 절 벼랑 끝으로 내몰았었죠. 세상사 다 돌고 도는 것 아니겠어요? 영수 소유의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올 거예요. 예전 절 이혼시키기 위해 사사건건 인하 그룹을 압박한 것도 모자라 절 정신병 환자로까지 만들지 않았다면 저도 영수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의 그 파렴치한 행동 때문에 영수는 지금까지도 절 원망하고 있어요. 집안이 이 지경까지 몰락한 건 다 자업자득이에요.”“들어오세요!”인경아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도우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색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아... 아가씨... 원하시던 물건입니다.”“너... 너희들...”박순옥은 도우미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인경아가 한발 앞서 재빨리 물건을 낚아챘다.박순옥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저 울부짖으며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쥘 뿐이었다.“이건 우리 강씨 집안의 물건이야...”인경아가 고개를 숙이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이건 제 아들 영수가 마땅히 가져야 할 물건이에요. 영수는 강씨 집안의 장자이자 후계자이니까요.”“전 그저 영수를 대신해 영수의 물건을 잠시 맡아두는 것뿐이에요.”“전연우가 영수의 목숨으로 협박해도 어머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그 잡종 놈이 돌아오
장소월은 전연우의 손길을 피해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 앞에 자리 잡았다.이어 그녀는 그릇에 밥을 담은 뒤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요즘 연속 며칠 동안 장소월은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아내의 모습이었다.“오늘 반찬이 너무 짜. 다음번엔 소금 조금만 줄여.”“응.”장소월은 밥을 먹으며 무심히 대답했다.실은 그녀는 이 음식들을 직접 요리하지 않았다. 전연우의 퇴근 시간에 맞춰 도우미가 만든 것이다.장소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전연우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나 내일 휴식이야. 같이 등산할래? 듣기론... 청연사가 불경 드리기에 좋다던데.”불경이라고? 이런 말이 전연우의 입에서 나오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장소월이 물었다.“넌 그런 거 안 믿잖아?”전연우는 가시를 바른 뒤 생선 살을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요즘 회사 일 때문에 너랑 있어 주지 못했잖아. 그래서 널 데리고 바람이나 좀 쐬려고.”장소월은 생선에 손도 대지 않고 대답했다.“응.”그녀가 동의한 건 그저 그와 하루종일 이 밀폐된 집안에서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 그 이유 단 하나였다. 전연우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자명한 일이었으니 말이다.몇 마디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에게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그때, 돌연 숨 막힐 듯한 고요함을 깨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화면에 낯선 번호가 떴다.전연우는 눈길도 주지 않고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30초 뒤 또다시 걸려 오자 전연우는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이번엔 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안 바빠?”“내가... 너랑 같이 있어 주니까 좋지 않아?”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전연우 역시 분명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텐데...“넌 언젠가는 인시윤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을 거잖아. 차라리 일찌감치 인시윤에게 돌아가 함께 있는 게 낫지 않아? 난 2주 동안 이곳에서 머물다가 두 사람이 결혼하면 곧바로 허 선생님의 작업실
“이 세상 모든 게 네 마음대로 되진 않아. 네가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고 해도 말이야.”“두 집 살림을 차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보다 예쁘고 젊은 여자들이 너랑 놀아줄 테니까.”“더는 날 심심풀이 노리개로 생각하지 마. 난 네 장난감 되는 거 싫어.”“인시윤과의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자식 많이 낳고 오손도손 잘 살아.”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문을 쾅 닫고는 안에서 잠가 버렸다.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에 더는 참지 못하고 침대 서랍에서 약 몇 알을 꺼내 다급히 삼켰다.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어느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이 통증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다렸다.거실 밖 베란다.인시윤으로부터 전화가 십여 통이나 걸려 오고 나서야 전연우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에요. 말해요.”인시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야외 웨딩촬영 일정을 잡아놓으셨어요. 제가 이미 몇 곳을 골라놨는데 혹시 내일 시간 돼요?”그녀는 전연우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내일 시간 없어요.”“하지만 기성은 씨에게 물어보니까 별다른 일정 없다던데요.”인시윤이 말을 이어갔다.“연우 씨, 엄마가 촬영 감독님과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다 모셔두었어요. 거절하지 말아요. 네?”전연우는 곧 꺼질 담배꽁초를 휙 버리며 말했다.“나와 결혼한다는 게 뭘 감내해야 하는 건지 알아요?”“독수공방. 극심한 외로움을 참아내야 해요.”인시윤은 가슴이 저렸다.“난 허울뿐인 이름은 싫어요. 연우 씨의 진정한 아내가 될 거예요. 장소월이 연우 씨 옆에 있는 건 상관없어요. 난 그냥 연우 씨가 시간이 있을 때 몇 번씩 나와 함께 있어 주기만 하면 돼요.”예전 인시윤은 콧대 높고 안하무인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당시 인시윤은 늘 오만한 태도로 전연우를 휘둘렀었다. 반면 지금은 역
그건 전연우가 처음으로 지킨 약속이었다.그날 밤, 전연우는 확실히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줄곧 그녀의 몸을 만지작거렸다.다음 날 새벽, 장소월은 여전히 깊은 잠이 들어있었다. 돌연 하반신에서 통증이 전해졌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장소월은 입술을 꽉 깨물고 그가 욕정 분출을 어서 끝내기를 기다렸다.장소월은 이제 온몸에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버렸다. 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욕실에 들어가 씻긴 뒤 다시 침대에 눕혔다. 장소월은 그대로 잠이 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땐,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무슨 약을 발라주었는지 한숨 자고 나니 근육통 외엔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옷을 입고 힘없이 문밖으로 걸어 나가보니 식탁 위에 전연우가 만든 요리가 놓여있었다.대충 몇 술 뜨고 나니 어느덧 점심 12시가 되었다. 청소하러 온 도우미가 그녀에게 말했다.“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있어 나가야 하니 아가씬 편히 밖에 나가 시간을 보내라고 하셨어요. 이건 대표님께서 남겨주신 현금입니다.”도우미가 돈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족히 몇백만 원은 되어 보였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식사를 이어갔다. 같이 자고 난 뒤 돈을 주다니, 그녀를 술집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건가?순간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청연사.그녀는 예전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러시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간 곳이 바로 청연사였다.그녀가 문을 나서니 경호원이 뒤를 따랐다.차를 타고 청연사를 품고 있는 산자락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니 고풍스러운 대문과 그 위 검은색으로 새겨져 있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몇 년이 지난 지라 당시 봤을 때보다 많이 낡아 있었다.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위로 올라가실 생각이라면 케이블카를 타시죠.”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직접 발로 올라야 부처님도 절 살펴주실 거예요. 걷기 싫으면 절 따라올 필요 없어요.”“아가씨, 대표님께서 조금도 아가씨의 곁에서 떨어져 있지 말라고 분부하셨
그녀의 말대로 걷는다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문드러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장소월은 장장 3시간을 올라 산꼭대기에 도착했다.그곳엔 꽤 많은 사람들이 불경을 드리러 오가고 있었고 주지 스님은 거대한 금색 불상 앞에 서 있었다.장소월은 부처님 앞에 꿇어앉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아니,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가족의 평안?그녀의 유일한 피붙이인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친구...그들은 이미 꿈을 이루고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다.애인...장소월은 이미 죽을 때까지 다시는 결혼이라는 것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렇다!지금 그녀는 혈혈단신이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무슨 소원이 있겠는가?건강?그녀가 언제까지 이렇게 호흡하며 살아가겠는가?“아미타불, 장 시주.”주지 스님이 돌연 입을 열었다.장소월은 깜짝 놀랐다.“절 기억하세요?”“4년 전 이곳에 오셨잖아요. 이번에도 바라는 바가 있어서 오셨나요? 아니면 예참을 하시려는 건가요?”경호원은 그녀에게서 향을 건네받은 뒤 향로에 꽂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망연한 얼굴로 말했다.“그때 전 제 주변 사람들이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빌었어요. 지금 그들은 아주 잘살고 있어요.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요.”“이번엔 온 건 저 자신을 위해 치성을 드리기 위함이었어요. 하지만... 올라오고 보니 전 아무것도 원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어요.”“아미타불, 장 시주께선 소승이 오래전 알던 사람과 정말 비슷하네요. 당시 그 사람은 임신한 몸으로 남편과 아이의 평안을 위해 빌고 또 빌었어요.”“그때 소승이 물었었죠. 왜 자신을 위해선 치성을 드리지 않냐고.”“그 여 시주의 대답도 장 시주와 마찬가지였어요. 두 사람 모두 착하고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에요.”장소월이 호기심에 물었다.“그 이후, 그분은 다시 오셨나요?”주지 스님이 고개를 저었다.“장
청연산 높은 산봉우리에 서 있으니 아름다운 석양이 한눈에 들어왔다.은은한 노을빛이 장소월의 몸을 비추던 그때, 전연우와의 통화를 마친 경호원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아가씨, 대표님께서 하실 말씀 있으시답니다.”장소월이 핸드폰을 받아 귓가에 가져갔다.“무슨 일이야?”“일찍 집에 가. 나 걱정하게 하지 말고. 하산하는 길은 위험하니까 케이블카 타고 내려가. 응? 알겠지?”그 뒤를 이어 인시윤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연우 씨, 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었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이 의상으로만 촬영하면 끝나요.”장소월이 전화를 끄고 핸드폰을 경호원에게 돌려주었다.“이제 돌아가죠.”“아가씨, 케이블카 위치는 이쪽입니다.”하지만 장소월의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이미 날은 어둑해지고 있다. 불과 발끝 아래 길조차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경호원들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전부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장소월의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아가씨, 조금만 쉬시죠. 대표님께서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계속 이렇게 내려가다간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손전등을 환히 비추며 산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얼마 후, 전연우가 어두운 얼굴로 장소월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고 있던 정장을 그녀에게 입혀주었다.“다음에도 또 이러면 집 밖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할 거야.”장소월은 그가 정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이 시간엔 인시윤과 함께 있을 거라 짐작했으니 말이다.전연우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보니 얼음장같이 차가워져 있었다.전연우는 곧바로 그녀를 안고 걸어갔다. 본래 두 시간 정도 걸려야 할 여정이었지만 한 시간이 지나니 산자락에 도착했다.차 문을 열어보니 인시윤이 앉아있었다.장소월을 본 인시윤은 곧바로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주었다.“이거 마시고 몸을 좀 녹여. 이렇게 추운 날씨에 산길은 위험해. 나랑 연우 씨가 걱정 많이 했어.”장소월은 차에 올라타 인시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