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싶으면 며칠 후 내가 데려다줄게.”전연우는 비밀번호를 누른 뒤 손잡이를 아래로 당겼다.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장소월이 예전에 쓰던 향수였는데 냄새가 청아하고 달콤했다. 당시 그녀는 조수석에도 이 향수를 놓아두었지만 그 후 전연우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새로 산 가구들도 모두 놓여있었다. 핑크색 소파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집안일은 모두 도우미가 시간 맞춰 와서 할 거야. 넌... 매일 밥 해놓고 내가 오길 기다리면 돼.”방안 인테리어는 그녀의 취향대로 전체적으로 단란하고 따뜻했다. 반면 장소월은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려. 내가 널 위해 작업실을 하나 만들어 두었으니까.”그 작업실은 전연우의 서재 옆방이었는데 큰 창문이 들어서 있어 찬란한 햇볕이 따뜻하게 쏟아지고 있었다.그 외에도 방이 3개 더 있었는데 그들의 안방, 장소월 전용 옷방, 그리고 전연우의 운동방이었다.침실엔 자신도 모르는 상황에서 찍힌 많은 장소월의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그중 한 장은 검은색 셔츠를 입고 두 손을 모은 채 침대에서 잠든 모습이었다. 검은색 셔츠는 허벅지까지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아래로 길고 매끈한 다리가 곧게 뻗어있었다. 이 중 임의로 사진 한 장을 골라도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될 것이다.그녀는 도원촌에 있을 때 전연우에 의해 강제로 찍힌 사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한 장 한 장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장소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 사진들... 다 네가 사람을 보내 몰래 찍은 거야?”전연우의 뜨거운 숨결이 장소월의 목덜미에 뿌려졌다. 그가 등 뒤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느덧 단단한 물건이 그녀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욕망을 분출할 듯한 기세였다.“별로야? 다음엔 사람을 바꿔 다시 찍으라고 해야겠어.”“이 침대에 누워봐. 내가 널 위해 선택한 거야.”3일 동안 그녀와 하지 않았으니 체취를 맡은 순간부터 전연우는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가디건을 벗기
손목의 피가 욕조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야말로 섬뜩한 광경이었다.“소월아,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 알아? 인질은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을 가둔 범죄자와 사랑에 빠진대...”16살의 전연우는 살기 위해 장해진의 밑에서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었다. 그는 한 무리의 남자가 열몇 살의 소녀를 폭력적으로 범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다. 소녀는 돈을 갚지 못해 팔려온 아이였다.마음과 육체에 상처를 입고 정신적으로 붕괴한 뒤 여자아이는 폭력범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경우를 수도 없이 봐왔다.그 후 2주 동안 전연우는 줄곧 로즈 가든에 머물렀다. 출근할 때면 늘 장소월더러 옷을 입혀주고, 넥타이를 매주고, 아침을 만들게 했다.아내가 남편을 위해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감정 없이 냉담하고 기계적이었다. 그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억지로 할 뿐이었다.그녀도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연우가 문 앞에 센서 장치를 설치해 두었기에 그녀가 나서기만 하면 그의 핸드폰에 경보음이 울린다.경호원도 곧바로 달려와 그녀를 돌려보낼 것이다.장소월이 활동할 수 있는 곳은 아파트 단지 내뿐이었고 경호원이 줄곧 먼 곳에서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아래로 내려와 벤치에 앉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가슴을 꽉 메우는 답답함과 불안함이 하루종일 가시지 않았다. 장시간 집에 머무른 탓인 줄 알았으나 이곳에서 한 시간 남짓 앉아있었음에도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이런 느낌이 들 때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장소월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돌연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혹시 그 사람이?장소월에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사실... 그녀는 강영수가 줄곧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년 전.허 교수님과 함께 풍경화를 그리러 파리를 떠나기 일주일 전, 그녀는 생활용품을 사러 마트로 향하고 있었다.늘 지나던
아마 허 교수님도 눈치채지 못하셨을 것이다.장소월은 제운 고등학교로 돌아와 인공 호수 주위를 거닐었다. 호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조각상의 팔은 본래 떨어졌었는데 지금 보니 예쁘게 원상복구 돼 있었다.그녀는 또 예전 강영수가 새겨두었다던 비밀이 생각나 조각상 뒤를 살펴보았다.그 비밀은 바로 그녀의 이름, 장소월이었다.당시 두 사람이 이곳에서 만났을 때, 실은 조각상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장소월을 즐겁게 해주려고 지어낸 강영수의 거짓말이었다.제운 고등학교를 나선 뒤, 장소월은 강영수와 김남주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길옆 LED 전광판엔 두 사람의 결혼 발표 기자회견이 방영되고 있었다.그녀는 이어 서울 대학교로 향했다.허이준, 소현아, 단모연은 모두 함께 서울대에 입학했다.소현아는 서울대 입학 자격을 부당한 방법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얻었다. 장소월이 떠나기 전 자신의 모든 필기를 그녀에게 넘겨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지만, 소현아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또 덜렁거리다가 교실에 교과서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이 건물 아래에 도착해서야 생각나 부랴부랴 다급히 달려 올라가는 것이었다.친구들은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그녀를 재촉했다. 한눈에 봐도 기다리기 싫은 눈치였다.장소월은 낯선 소현아의 친구에게 다가가 말했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내려올 거예요.”친구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소현아가 내려왔을 때 장소월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운동장에 가보니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열정적인 농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허이준과 단모연은 가장 훌륭한 파트너였다. 어디에 가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아안고 있었다.이후... 장소월은 마지막 남은 시간을 이용해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친 뒤 곧바로 비행기 표를 끊고 러시아로 떠났다.그녀가 돌아온 건 다만 한 번이라도 그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떠나고 나면 또 언제 볼
“예전 강씨 집안은 깨끗했던 거 같아?”“자고로 이긴 사람은 왕이 되고 진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이야.”“사모님, 정말 바보가 됐는지, 바보인 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깟 집과 손자의 목숨 중 뭐가 더 중요한지 말이에요.”“제가 듣기로 강씨 집안은 근래 계속 적자라고 하던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네?”“내일이 마지막 날이에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전 이만.”코를 더럽히는 악취에 전연우는 이마를 확 찌푸리고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자리를 떴다.붉은 노을 아래, 길고 곧게 뻗은 그림자가 별장 문밖을 나섰다.고고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던 박순옥은 현재 영락없는 치매 노인으로 전락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실수하기가 일쑤였고 하인의 도움이 없이는 간단한 식사도 문제가 되는 상태였다.도우미가 급히 박순옥에게 깨끗한 옷을 갈아입혔다. 희미한 등불이 비추고 있는 방 안, 드디어 정신을 회복한 박순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가서 강씨 저택 집문서를 갖고 와!”박순옥은 눈을 감고 힘겹게 그 한마디를 꺼냈다. 큰 결단을 내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도우미가 아연실색하며 말했다.“이건 강씨 집안에 남은 유일한 재산입니다. 저택마저 없으면 어떻게...”“강씨 집안의 영혼 같은 이곳이 중요하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손자가 죽어가는 건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죽더라도 내가 먼저 죽는 게 맞아. 내 말대로 해. 당장.”인씨 집안도 그 전씨 놈과 한통속이 되어 강씨 집안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했다.그녀는 혼자의 몸으로 쓸쓸히 커다란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평생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이 집마저 그의 손에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도우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이어 인경아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박순옥이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 망했다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어요. 심유와 함께 있어 줘야 한다는 이유로요. 웃기지 않아요? 친아들 목숨이 위태롭다는 데도 관심조차 없었어요. 심지어 제가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린다고 하더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진짜.”“이 별장 집문서도 그 잡종 놈한테 남겨주려고 지키는 거죠? 제가 모를 것 같아요?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만약 제 아들이 죽는다면 절대 그놈을 살아있게 놔두지 않아요. 영수의 저승 길동무로 던져주고 당신 강씨 집안의 대를 깨끗이 끊어놓을 거예요.”“너너너... 이 짐승보다도 못한 년. 기어이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래?”인경아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엔 당신이 절 벼랑 끝으로 내몰았었죠. 세상사 다 돌고 도는 것 아니겠어요? 영수 소유의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올 거예요. 예전 절 이혼시키기 위해 사사건건 인하 그룹을 압박한 것도 모자라 절 정신병 환자로까지 만들지 않았다면 저도 영수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의 그 파렴치한 행동 때문에 영수는 지금까지도 절 원망하고 있어요. 집안이 이 지경까지 몰락한 건 다 자업자득이에요.”“들어오세요!”인경아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도우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색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아... 아가씨... 원하시던 물건입니다.”“너... 너희들...”박순옥은 도우미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인경아가 한발 앞서 재빨리 물건을 낚아챘다.박순옥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저 울부짖으며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쥘 뿐이었다.“이건 우리 강씨 집안의 물건이야...”인경아가 고개를 숙이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이건 제 아들 영수가 마땅히 가져야 할 물건이에요. 영수는 강씨 집안의 장자이자 후계자이니까요.”“전 그저 영수를 대신해 영수의 물건을 잠시 맡아두는 것뿐이에요.”“전연우가 영수의 목숨으로 협박해도 어머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그 잡종 놈이 돌아오
장소월은 전연우의 손길을 피해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 앞에 자리 잡았다.이어 그녀는 그릇에 밥을 담은 뒤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요즘 연속 며칠 동안 장소월은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아내의 모습이었다.“오늘 반찬이 너무 짜. 다음번엔 소금 조금만 줄여.”“응.”장소월은 밥을 먹으며 무심히 대답했다.실은 그녀는 이 음식들을 직접 요리하지 않았다. 전연우의 퇴근 시간에 맞춰 도우미가 만든 것이다.장소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전연우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나 내일 휴식이야. 같이 등산할래? 듣기론... 청연사가 불경 드리기에 좋다던데.”불경이라고? 이런 말이 전연우의 입에서 나오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장소월이 물었다.“넌 그런 거 안 믿잖아?”전연우는 가시를 바른 뒤 생선 살을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요즘 회사 일 때문에 너랑 있어 주지 못했잖아. 그래서 널 데리고 바람이나 좀 쐬려고.”장소월은 생선에 손도 대지 않고 대답했다.“응.”그녀가 동의한 건 그저 그와 하루종일 이 밀폐된 집안에서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 그 이유 단 하나였다. 전연우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자명한 일이었으니 말이다.몇 마디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에게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그때, 돌연 숨 막힐 듯한 고요함을 깨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화면에 낯선 번호가 떴다.전연우는 눈길도 주지 않고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30초 뒤 또다시 걸려 오자 전연우는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이번엔 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안 바빠?”“내가... 너랑 같이 있어 주니까 좋지 않아?”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전연우 역시 분명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텐데...“넌 언젠가는 인시윤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을 거잖아. 차라리 일찌감치 인시윤에게 돌아가 함께 있는 게 낫지 않아? 난 2주 동안 이곳에서 머물다가 두 사람이 결혼하면 곧바로 허 선생님의 작업실
“이 세상 모든 게 네 마음대로 되진 않아. 네가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고 해도 말이야.”“두 집 살림을 차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보다 예쁘고 젊은 여자들이 너랑 놀아줄 테니까.”“더는 날 심심풀이 노리개로 생각하지 마. 난 네 장난감 되는 거 싫어.”“인시윤과의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자식 많이 낳고 오손도손 잘 살아.”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문을 쾅 닫고는 안에서 잠가 버렸다.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에 더는 참지 못하고 침대 서랍에서 약 몇 알을 꺼내 다급히 삼켰다.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어느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이 통증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다렸다.거실 밖 베란다.인시윤으로부터 전화가 십여 통이나 걸려 오고 나서야 전연우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에요. 말해요.”인시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야외 웨딩촬영 일정을 잡아놓으셨어요. 제가 이미 몇 곳을 골라놨는데 혹시 내일 시간 돼요?”그녀는 전연우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내일 시간 없어요.”“하지만 기성은 씨에게 물어보니까 별다른 일정 없다던데요.”인시윤이 말을 이어갔다.“연우 씨, 엄마가 촬영 감독님과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다 모셔두었어요. 거절하지 말아요. 네?”전연우는 곧 꺼질 담배꽁초를 휙 버리며 말했다.“나와 결혼한다는 게 뭘 감내해야 하는 건지 알아요?”“독수공방. 극심한 외로움을 참아내야 해요.”인시윤은 가슴이 저렸다.“난 허울뿐인 이름은 싫어요. 연우 씨의 진정한 아내가 될 거예요. 장소월이 연우 씨 옆에 있는 건 상관없어요. 난 그냥 연우 씨가 시간이 있을 때 몇 번씩 나와 함께 있어 주기만 하면 돼요.”예전 인시윤은 콧대 높고 안하무인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당시 인시윤은 늘 오만한 태도로 전연우를 휘둘렀었다. 반면 지금은 역
그건 전연우가 처음으로 지킨 약속이었다.그날 밤, 전연우는 확실히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줄곧 그녀의 몸을 만지작거렸다.다음 날 새벽, 장소월은 여전히 깊은 잠이 들어있었다. 돌연 하반신에서 통증이 전해졌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장소월은 입술을 꽉 깨물고 그가 욕정 분출을 어서 끝내기를 기다렸다.장소월은 이제 온몸에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버렸다. 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욕실에 들어가 씻긴 뒤 다시 침대에 눕혔다. 장소월은 그대로 잠이 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땐,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무슨 약을 발라주었는지 한숨 자고 나니 근육통 외엔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옷을 입고 힘없이 문밖으로 걸어 나가보니 식탁 위에 전연우가 만든 요리가 놓여있었다.대충 몇 술 뜨고 나니 어느덧 점심 12시가 되었다. 청소하러 온 도우미가 그녀에게 말했다.“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있어 나가야 하니 아가씬 편히 밖에 나가 시간을 보내라고 하셨어요. 이건 대표님께서 남겨주신 현금입니다.”도우미가 돈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족히 몇백만 원은 되어 보였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식사를 이어갔다. 같이 자고 난 뒤 돈을 주다니, 그녀를 술집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건가?순간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청연사.그녀는 예전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러시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간 곳이 바로 청연사였다.그녀가 문을 나서니 경호원이 뒤를 따랐다.차를 타고 청연사를 품고 있는 산자락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니 고풍스러운 대문과 그 위 검은색으로 새겨져 있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몇 년이 지난 지라 당시 봤을 때보다 많이 낡아 있었다.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위로 올라가실 생각이라면 케이블카를 타시죠.”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직접 발로 올라야 부처님도 절 살펴주실 거예요. 걷기 싫으면 절 따라올 필요 없어요.”“아가씨, 대표님께서 조금도 아가씨의 곁에서 떨어져 있지 말라고 분부하셨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
밤늦도록 격렬하게 몸을 섞은 후, 송시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품에 안겨 침대에 내려놓아졌다. 몸에는 얇은 담요 한 장만 덮여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지쳐버린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텅 빈 반산 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송시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잠들어있는 것처럼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잘생기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쓸어내렸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마저 희미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송시아는 자연스럽게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관계를 맺은 뒤에도 송시아는 지금처럼 그의 잠든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전연우는 너무나도 예민했기에 아무리 피곤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바로 깨어났다. 때문에 지금처럼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연우는 출중한 능력 외에도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많은 여자를 홀리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지금의 그이든, 50대 중년의 전연우이든, 그는 늘 성숙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지배자의 풍모와 아우라를 지녔고, 그와 같은 사람은 서울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송시아는 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박 두 번의 삶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그에게 쏟았다. 그와 함께 다시 일어섰고, 그가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그 누가 전연우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서울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국회의원들마저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 전연우가 가진 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송시아는 방 안에 어지럽게 흩어진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
“의사 선생님... 선생님...” 송시아는 가득 흥분한 채 의사를 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달려와 전연우를 진찰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환자분 상처는 아주 잘 아물고 있습니다. 아까 정말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반응이 있었다면, 신경이 스스로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곧, 혹은 예정보다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송시아는 환희가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좋은 소식이었다. 송시아는 전연우의 침대에 앉아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조금 묻히고는 그의 옷을 걷고 이미 아문 상처에 발랐다. “연우 씨, 이 팔찌 장소월이 준 거 맞지? 서철용이 당신에게 한 말 전부 다 들은 거야?” “당신도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나서 장소월을 보고 싶겠지?” “당신들은 날 너무 얕잡아 봤어.” “당신의 흉터... 없어지지 않도록 몸에 남겨둬야겠어. 이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평생 잊지 못하게 말이야.” 송시아가 그에게 쓰는 연고는 최고급이라 시중에서 개당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다. 흉터 제거뿐 아니라 상처 회복도 빠르게 해준다. 그녀는 휴지를 꺼내 연고를 닦아냈다. 그때 송시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송 대표님, 그 팔찌는 비슷한 디자인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닷가 쪽에서 파는 팔찌는 거의 다 흡사한 유형이거든요. 완전히 똑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마지막 3초를 남기고 연결되었다. 송시아가 말했다. “전연우는 곧 깨어날 거예요. 이직 준비는 다 됐어요? 이랑 씨 마음만 굳건하다면, 내가 꼭 민아와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게 할게요. 마음이 변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신씨 집안은 나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니까.” 신이랑이 물었다. “성세 그룹 주식은 왜 팔았어요? 뭘 하려는 거죠?” 송시아는 한쪽 팔을 가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전 나중에 갈 거예요. 거긴 아주 안전한 곳이에요.” 도우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사모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군병원 아래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운전기사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흰색 장갑을 끼고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배은란은 딸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민용 씨, 나 혼자 가는 거 무서워. 같이 가자, 응?” 서철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이 끝나면 금방 너한테 갈게. 네가 가는 곳은 내 스승님과 사모님의 댁이야. 그분들은 평생을 의학에 헌신하셨고, 자녀가 없어서 날 친아들처럼 여기셨어. 너에게도 잘해주실 테니까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그분들은 분명 너 좋아하실 거야.” 배은란은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거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차에 올라탔다. “그럼 꼭 빨리 나한테 와야 해.” “그래.” 점차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서철용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배은란, 이건 내가 너한테 진 빚이야.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땐 진짜 서민용이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게. 완전한... 서민용을 너에게 돌려줄게!’ 그날 밤, 서민용은 분명히 죽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 서철용이 그를 지옥에서 구출해 냈다. 다만, 그의 상황은 아직도 좋지 않다. 여전히 스승님의 병원에 누워 연명 치료만 받고 있을 뿐이다. 전연우 외에, 지금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바로 서민용이다...배은란이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면, 서철용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배은란은 정신과 약을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기억도 천천히 회복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반산 별장. 송시아는 바로 그 소식을 들었다. “쯧,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서 형수를 얻
전연우가 어떻게 성세 그룹 주식 매각을 허락할 수 있지? 혹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건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 파도가 넘실거리며 해안에 부딪히고 있었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해초와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머리를 질근 묶고는 조개껍데기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손에 들고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장소월 앞으로 걸어와 유창한 러시아어를 말했다. 이곳은 외딴곳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예쁜 언니, 이 목걸이 선물로 줄게요.” 전설에 따르면, 예전 이곳은 황량한 사막이었는데, 신의 딸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아 이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물을 찾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었고, 그 후 바다가 되어 이 해역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에선 조개껍데기와 소라를 신의 은총을 받은 물건이라고 믿고 있다. 이걸로 만든 장신구를 선물하면 상대방이 신의 축복과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주는 것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외에 남녀가 서로에게 프러포즈 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휴대폰에 서철용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난번에 보낸 팔찌, 전연우가 아주 좋아하네요. 수고했어요.] 장소월은 그의 상황을 묻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 메시지를 지웠다 썼다 반복했다. 시간이 꽤 오래 흘렀는데도 전연우에 대한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유일한 소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유튜브 계정에서 올린 결혼식 다음 날 그녀와 전연우가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영상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떤 소식도 없었다. 이곳에 머무른 이후로 그녀의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편안하지 못했다. 산장 신혼 방에서 칼날을 전연우의 가슴에 꽂아 넣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시뻘건 피를 온몸에 뒤집어썼었다. 그날 밤 손바닥에 스며든 붉은 피는 아무리 씻어도 도저히 지워낼 수가 없었다. 장소월은 한참을 갈등하다가 휴대폰을 들어 한마디 물었다. [그 사람은 괜찮나요?] 어린 소녀가 말했다. “언니, 나랑 같이 놀러
기성은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을 했다면, 전연우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잔혹한 그의 출신이 늘 발목을 잡았다. 모든 사람의 출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성은도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자신만의 아픈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의 과거는 그저 과거라는 단어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소민아가 정말로 기성은과 함께하려 한다면, 그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그들 손으로 직접 극복해야 할 것이다. 소민아는 이 난관을 스스로 떨쳐내고 성장해야 한다. 그녀가 지금처럼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면,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전혀 몰랐다. 송시아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대표 사무실. 소민아는 결국 송시아와 직접 대면하여 분명히 따져 묻기로 했다. 송시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회사 경영이 좀 힘들어서 누군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뭐 문제 있어?”소민아가 말했다. “전 대표님은 곧 깨어나실 거예요. 지금 이 행동은 회사를 망치는 거예요.”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팔려고 내놓은 주식은 내가 갖고 있던 거야. 문제 있어?” “혹시 다른 일 없으면, 언니랑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당신을 보면, 입맛이 뚝 떨어져요.” 소민아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송시아가 한 말은 단 한 글자도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대체 왜 주식을 팔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중, 마케팅팀 직원 몇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민아는 구석에 서 있었던지라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저 다음 주부터 연차 시작이에요. 외국에 다녀올 생각인데, 지유 씨는요? 연차 다 썼어요?” “아직이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너무 짜증 나요!” 그 순간 소민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