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야 할 질문이야. 너랑 송시아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날 이곳에 가두고 기생 취급하면서 농락하면 만족감이라도 들어? 응?”전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장소월이 냉랭하게 시선을 피했다.“송시아는 네 사람이야. 난 송시아를 당해낼 능력이 없어. 앞으론 네 사람을 잘 간수하길 바라. 다시는 미친 듯이 사람을 물고 늘어지게 하지 마.”전연우가 말했다.“내가 송시아한테 너에게 사과하라고 할게.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풀릴지 얘기해봐. 뭐든 다 동의할 수 있어.”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돌리고 시선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장소월은 힘껏 그의 따귀를 내리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 난 네가 역겨워.”“날 놔달라고 하면 허락해줄 거야? 아니면 더는 할 얘기 없으니까 나가. 나 잘 거야.”장소월은 이불 속으로 들어간 뒤 얼굴까지 덮어썼다. 더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전연우와 송시아가 한 침대에서 뒹구는 화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이 시간 전연우에게 구속까지 당하니, 장소월은 자신 또한 흙탕물에 몸을 흥건히 적신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장소월은 이제 도망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일 지도 모른다. 적어도 고통은 없을 테니 말이다.“푹 쉬어. 내일 다시 올게.”전연우는 자리에서 일어서 방을 나서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병원에서 며칠 치료를 받고 나니 장소월의 몸은 거의 모두 회복되었다.그날 일이 있고 난 이후, 송시아는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장소월은 입원 병동 로비에 앉아 햇볕 쪼임을 하고 있었다. 인시윤이 어느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오늘 날씨 참 좋아. 그렇지?”장소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꾹꾹 담아왔던 그 질문을 꺼냈다.“그 사람은 잘 지내?”인시윤은 장소월이
“서현이한테 들었는데 요즘 작업실에 안 나간다면서?”장소월은 등 뒤에서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손등을 꼬집었다. 함부로 손을 움직이지 말라는 의미였다.“죄송해요. 선생님. 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선배님한테 얘기한다는 걸 깜빡했어요.”“어디가 아픈데?”“그냥 열이 조금 났어요. 내일이면 퇴원할 거예요.”“요즘 비가 자주 내리니까 따뜻하게 입고 다녀. 건강이 제일 중요하잖아.”“네. 선생님. 알겠습니다.”장소월은 허태현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를 밀어내고 싶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병실엔 다른 사람들도 있어.”“안 볼 거야.”“나 너무 불편해. 놔 줘.”전연우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붓기는 많이 가라앉았고 약간의 자국이 남아있는 것 외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4년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백옥같이 투명하고 하얀 피부가 반짝이고 있었다.그의 거친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옷 속 피부를 어루만졌다. 장소월이 이마를 찌푸린 채 그를 쏘아보았다.“선 넘지 마.”전연우는 그녀의 감정 따위 무시해버리고 손을 잡고 밥상 앞으로 걸어가고는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자신은 그 옆에 앉았다.“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먹어봐.”“언제 서울로 돌아갈 거야? 다른 할 일 없어?”장소월은 입맛이 없어 밥알 몇 개를 깨작거리고는 고개를 숙였다.“시간을 내어 너랑 함께 있어 주려고 왔잖아.”“필요 없어.”장소월은 곧바로 그 한 마디를 내뱉었다.“하지만 난 그러고 싶어.”장소월은 그와 계속 같은 파리 하늘 아래 머물 걸 생각하면 짜증이 몰려왔다.“심심하면 다른 일이나 알아봐.”장소월은 반 그릇 정도 먹고 난 뒤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소파에 가 복잡한 얼굴로 책을 읽었다.머릿속에 이상했던 인시윤의 말이 맴돌았다. 왜 서울에 와 보라고 한 걸
전연우가 허리를 굽혀 조금 전 장소월의 책에서 떨어져나온 사진을 주웠다.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이어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송시아에게로 향했다.“내 허락 없이는 병원에 오지 말라고 말했잖아.”전연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늘한 기운이 또다시 병실에 감돌았다.송시아는 전연우가 자신에게 손을 대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장소월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렇게 걱정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장소월 한 명 따위는 내가 관심을 쏟을 가치도 없으니까요. 지금 제가 찾아온 건 장소월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에요!”“나랑 했던 약속 잊으면 안 돼요!”“나야말로 연우 씨 미래의 조강지처란 말이에요! 이대로 놔두다간 당신이 영혼까지 잃어버리게 될까 봐 온 거예요.”전연우가 말했다.“내 일에 간섭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연우 씨! 오늘 저 여자를 따라 나간다면 난 회사 주식을 거두어들일 거예요. 지금 손에 쥔 모든 것이 누가 가져다준 건지 잊었어요?”송시아가 그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또다시 그녀를 무시해버린 채 자리를 떴다.송시아는 너무나 많이 바뀌어버린 이번 생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백윤서도 죽지 않았고, 장소월도 전연우와 결혼하지 않았다. 이런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 역시 그런 걸로 전연우를 협박하고 싶지 않았다.전연우는 아무런 협박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그를 협박하는 사람을 모두 없애버리고 만다.하지만 그런 건 무섭지 않았다. 송시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건 그녀의 전연우가 이젠 저번 생에서 사랑했던 그 전연우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지금의 전연우는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도 낯설었다.전생에서 전연우는 장소월에게 조금의 친절함도, 조금의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저번 생에서의 일이 똑같이 이번 생에서도 반복되어야만, 그는 자신의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걸까?백윤서는 죽어야 마땅하다!인시윤도 그녀의 앞에 나타나서는
장소월은 입술이 따끔거림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그의 흔적을 씻어냈다. 전연우는 일부러 이러는 걸까...장소월은 일을 시작하기 전 화장실에 갔다. 거울을 비춰보니 입술에 상처가 생겨 있었다.손으로 살짝 만져보니 통증에 저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개도 아니고...목에 남아있는 키스 마크는 이미 파운데이션으로 가렸다.그때,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서현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냉담한 얼굴로 장소월을 힐끗 쳐다본 뒤 손을 씻고는 인사 한마디 없이 장소월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장소월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현에게 자신을 향한 적의가 있음을 감지했다. 두 사람은 같은 작업실에 있었지만, 서현은 별로 그녀와 접촉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업무가 있을 때 빼고는 종래로 먼저 그녀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장소월도 얼른 정리하고 작업실로 돌아갔다.문을 열어보니 자료를 잔뜩 안고 있는 박원근과 마주쳤다.“소월아, 너 병원에 있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네. 괜찮아져서 예정보다 빨리 퇴원했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괜찮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옆에서 복사를 마친 주시윤이 장소월의 상처를 보고는 말했다.“너 입 왜 그래? 어제 약혼자와 뜨거운 밤이라도 보냈어?”장소월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사실 저 4년 전에 이미 파혼했어요. 이젠 약혼자 없어요.”“뭐라고?”누군가 깜짝 놀라며 지른 소리 때문에 작업실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장소월에게로 향했다.장소월이 그 말을 꺼내기 전 다들 화창한 오늘 날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장소월은 그들에게 더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 오해 때문에 소문이 일파만파 커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작업실이 몇 초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주시연이 얼른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제가 먼저 파혼하자고 한 거예요. 우린 별다른 일 없이 합의하고 헤어졌어요.”설명을 마친 장소월이
장소월은 초안을 모두 그린 뒤 사진을 찍어 의뢰인의 메일에 보냈다.잠깐 쉬는 시간, 장소월은 어깨를 두드리며 정수기 앞으로 가 물 한 컵을 받았다.핸드폰을 켜고 시간을 보니 저녁 7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연이어 문자를 보내왔다.장소월은 대충 훑어보고는 전원을 꺼버렸다.30분 뒤, 상대 회사로부터 별문제가 없다는 답장을 받았다.장소월은 초안에 색을 입힐 준비를 시작했다.그녀가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어깨에 무언가 부딪혔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길 똑바로 보고 다녀.”장소월은 곧바로 사과했다.8시 30분이 되자 작업실 사람들이 속속 퇴근했고 그녀 혼자만 남게 되었다.10시 반, 피곤해진 장소월은 책상에 엎드려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돌연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낀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남자의 날카로운 턱선을 본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뭐 하는 거야. 이거 놔.”“내가 오지 않으면 여기에서 자려고 했어?”전연우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나 아직 안 끝났어.”“내일 계속해도 되잖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나 가방 정리해야 하니까 기다려.”전연우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장소월은 물건을 가지러 작업실로 돌아갔다. 의외로 서현도 아직 퇴근 전이었다.그녀가 쭈뼛거리자 전연우가 말했다.“얼마나 더 가져가야 해?”장소월은 아직 절반 정도 작업이 남았기에 집에 돌아가 계속 그리려는 생각이었다.그녀는 전연우의 뒤를 따라 밖에 나가 차에 올라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의도를 알아챈 장소월은 다급히 거절했다.“나 혼자 할 수 있어.”장소월이 안전벨트를 맸다.전연우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호텔에 도착하자 장소월은 그와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전연우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거 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장소월은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센서등이 번쩍이고 있는 긴급 계단 통로.장소월이 벽에 기댄 채 거대한 그림자에 깔려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코끝을 맞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계단에서 해볼까?”희미하게 빛나는 센서등이 전연우의 서늘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더 부드러웠다. 장소월은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에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가 노기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전연우, 이러지 마. 사람이 올 거야.”전연우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아가, 딱 한 번만, 응?”장소월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보니 가슴이 꽉 막혀왔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날 괴롭히지 않겠다고 했잖아.”전연우가 한 손으로 벽을 짚고 고개를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온몸을 마비시킬 듯한 전류가 찌릿찌릿 전해졌다. 야릇한 분위기가 복도에 만연했다.이곳에서 하겠다고?미친놈.장소월은 오늘 치마를 입었다. 어쩌면 모두 다 그의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머물게 된 이후부터 그녀의 옷장엔 온통 각양각색의 롱 원피스거나 스커트로 채워졌는데 모두 종아리 절반 정도까지 오는 기장이라 다리가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 시간, 그는 짐승 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그의 강력한 힘에 눌려 장소월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막고 있으니 손바닥으로 뜨거운 온도가 전해졌다. 그의 체온은 끊임없이 올라갔고 그의 눈동자는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그럼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문지르기만 할게.”“싫어! 악!”장소월이 반응하기도 전에 전연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시선 아래, 그의 허리 위에 치마를 헤치고 나온 장소월의 두 다리가 올려졌다. 그 위험한 자세에 장소월은 넘어질까 봐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목을 잡았다.“나쁜 놈! 뭐 하는 거야! 빨리 내려와!”엘리베이터에 가까운 곳이라 혹여 누가 들을까 두려워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전연우
장소월은 척추가 마비되는 것 같아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85층에 갓 도착한 그때, 돌연 비상계단 문이 벌컥 열렸다.“선생님, 아가씨,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시면 됩니다.”장소월은 이마를 찌푸렸다. 정말 사람이 올 줄이야.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당장이라도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전연우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이 사람이 이런 걸 좋아해서요.”그는 장소월의 치마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이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그가 살짝 몸에 힘을 주며 움직였다.장소월은 깜짝 놀라며 괴로운 얼굴로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 바람에 전연우는 아랫도리에서 통증을 느꼈다.장소월은 순간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의 어깨에 완전히 기댔다.그 행동은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지게 했다. 필경 그녀가 주동적으로 가까이 다가온 건 너무나도 오랜만이었으니 말이다.그녀는 그의 허리에 올렸던 다리에 힘을 풀었다.“이제 똑똑해졌네?”전연우는 그녀의 엉덩이를 톡 두드렸다.장소월은 그 틈을 타 그의 몸에서 뛰어내리고는 얼른 도망쳤다.전연우는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바지를 정리한 뒤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장소월은 방키를 찾으려 호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이내 그녀에겐 방키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느긋하게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장소월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고개를 휙 돌리고 옷을 정리했다.그때 옆방 문이 열리더니 기성은과 송시아가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상의하고 있는 듯했다.기성은이 말했다.“대표님.”전연우가 대답했다.“응.”송시아는 차가운 눈으로 장소월을 쳐다보았지만, 장소월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못마땅한 듯한 송시아의 얼굴을 보니 복수를 한 것 같은 쾌감이 느껴졌다.저번 생 장소월이 전연우의 아내였을 때, 송시아는 그녀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앞에서 전연우와의 친밀감을 과시했다.이제 입
프랑스의 야경은 국내의 야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88층에서 내려다보니 수많은 조명이 저마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반면 남자의 눈빛은 저 하늘에 걸려있는 달보다도 더 차가웠다.전연우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뒤 자욱한 연기를 내뿜었다. 송시아가 다가와 분노에 씩씩거리며 남자에게 따져 물었다.“이건 내가 두 번째로 당신에게 고개 숙이는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연우 씨,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송시아는 다시 태어나 그를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 올려놓은 뒤 그보다 0.1퍼센트 더 많은 주식을 쥐고 있으면 그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모든 일은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듯했다.전연우는 장소월에게 매달리고 있는 반면, 송시아는 매일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그녀는 전연우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는 사다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전연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얼굴은 백윤서와 비슷했지만, 윤서에게선 송시아와 같은 사람을 짓누르는 포스는 없다. 하지만 송시아의 일 처리 방식이 그와 비슷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일적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없다면 송시아는 그에게 있어 분명 꽤 괜찮은 선택이다.전연우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간섭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여자가 자신의 앞에 나서 억압하고 옥죄는 건 더더욱 못 견뎌 한다.“우린 일 이야기만 할 수 있어. 개인적인 일은... 네가 무슨 자격으로?”“난 연우 씨 미래의 와이프예요. 이래도 자격이 부족해요?”송시아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부부가 모순이 생겨 부부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자욱한 연기가 그의 어두운 눈동자를 감쌌다. 그는 손가락으로 툭툭 재를 떨어뜨리고는 말했다.“내가 너와 결혼할 거라는 거 어떻게 확신해?”“연우 씨, 지금 가진 부와 명예 누가 줬는지 잊었어요? 예전 나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