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장소월은 아니었다.“송시아 씨는 오빠 정부잖아.”장소월은 그 말을 할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전연우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장소월은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내가 자궁을 적출당했다고 해서 오빠 멋대로 몇 번이고 날 가지고 놀 수 있는 건 아니야.”“난 사람이야. 오빠 장난감이 아니라. 나도 아프다고.”“내가 실컷 시달리다가 죽으면 그제야 만족하겠어?”전연우는 확신하듯 말했다.“넌 그러지 않을 거야.”장소월이 말했다.“그렇게 될 거야.”“오빠도 알다시피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잖아.”“오늘 내게 손을 댄다면 내일... 오빠가 마주하게 되는 건 온전치 못한 시체일 거야.”“88층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도 안 아프겠지.”장소월의 우울증은 한 번도 완치된 적이 없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자유와 동경의 하늘이 그녀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만약 언젠가 날개가 뜯겨서 그에게 감금된다면 전생과 똑같아질 것이다.그러면 사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냥 똑같이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장소월의 말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전연우는 문을 박차고 떠났다.그제야 불안이 해소됐다. 장소월은 자신이 목숨으로 그를 위협하면 전연우가 한발 물러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언젠가 전연우는 그녀에게 타협을 강요하며 그녀를 독점하려 할 것이다.옆방에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조용해졌다. 송시아는 복도 밖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운을 여미고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가 백허그했다. 그녀는 그의 등에 뺨을 붙이며 말했다.“그 여자 찾아가지 마요. 나 질투 난단 말이에요.”“연우 씨는 나만의 것이어야 해요.”“난 연우 씨가 원하는 건 뭐든 줄 수 있어요. 아이도 낳아줄 수 있어요.”전연우의 눈빛에서 한기가 감돌았다.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이가 아닌가?장소월은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몸을 돌린 전연우는 새까만 눈동자로 송시아를 지긋이 바라봤다.“내가 원하는 게 아이라는 걸 어떻
전연우가 또 무슨 미친 짓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방문이 열리자 문을 억지로 부순 사람은 톱을 들고 떠났다.장소월은 잠이 덜 깬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섹시한 쇄골 사이에 반달 모양의 아름다운 주얼리가 드리워졌다. 장소월은 무덤덤한 눈빛이었다.“또 뭘 하려는 거야?”전연우는 침대맡 서랍에 약병 하나가 놓인 걸 보았다. 그걸 들어서 보니 수면제였다. 그러니까 장소월이 지금까지 잔 이유는 수면제를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여러 명의 조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전연우 씨, 이분 괜찮아 보이시는데...”전연우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일단 나가 있어요.”방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장소월은 전연우의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온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멀쩡한 문을 부수다니.전연우가 커튼을 열자 눈 부신 빛이 안으로 들어왔고 장소월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면서 눈을 감았다.“지금이 몇 신 줄 알아?”풀어헤쳐진 긴 머리카락이 장소월의 얼굴을 가렸다. 햇빛을 받은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얘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오빠가 날 여기 가뒀는데 내가 자는 것 빼고 뭘 할 수 있겠어?”그녀에게서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장소월은 마치 당장이라도 시들 것 같은 장미꽃 같았고, 힘없이 축 처진 꽃잎은 언제라도 시들 것만 같았다.장소월은 다시 누웠다. 그러나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연우가 다시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옷 입어. 나랑 같이 내려가서 밥 먹자.”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영문 모를 분노가 불타올랐다.장소월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진짜 오빠라도 된 것처럼 아빠를 대신해 날 가르치려 들지 마.”장소월은 자기 손을 빼내면서 비아냥댔다.“내게 오빠는 영원히 한낱 강간범일 테니까.”전연우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문까지 박살 낸 걸 보면 어젯밤 했던 말이 효과가 있는 듯했다. 전연우는 그녀가 방 안에
“전연우 씨.”송시아는 세련된 숄과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큐빅이 가득 박힌 가방을 들고 있었다. 널따란 호텔 로비에서 그녀가 가장 눈에 띄었다.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전연우의 모습에 송시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전연우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송시아를 못 본 척 지나쳤다.호텔 측에서 곧 기사를 보내 두 사람을 병원으로 모셨다. 차 안에서 장소월은 갑자기 온몸이 추졌워다. 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가 얇은 담요를 가져와서 덮어준 뒤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추워.”전연우는 식은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괜찮아. 이제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문뜩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그건 평생 겪어본 적 없는 당황스러움이었다.병원에 도착한 뒤 장소월은 수액을 맞다가 눈을 떴다.징크스 의사가 말했다.“드디어 깼네요.”“소월 씨 남자 친구는 병원비 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요. 소월 씨, 소월 씨 남자 친구는 소월 씨 상태를 알고 있나요? 지금 상태가 너무 심각해요.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아야 해요. 지금 의료 수준으로는 치료할 수 있어요.”징크스는 장소월의 주치의였다.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병원에 온 것이었는데 전연우가 자신을 이 병원으로 데리고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장소월은 힘없는 손으로 징크스의 가운을 붙잡았다.“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말아 줄래요? 부탁이에요.”징크스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설득했다.“소월 씨, 소월 씨는 반드시 입원해서 치료받아야 해요. 소월 씨는 제 환자잖아요. 전 소월 씨를 책임져야 한다고요.”장소월이 말했다.“그럴게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돼요. 조금만 더 시간을 줄래요?”“정말 못 말리네요. 소월 씨, 소월 씨 몸이니까 잘 보살펴야 해요.”“고마워요.”장소월은 손을 놓았다.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전연우가 장소월의 상태를 물었을 때, 징크스는 그녀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를 숨기고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얘기했다.“기혈이 부족하고
“...”전연우는 침묵했다. 인정하기라도 한 듯 말이다.장소월은 뒤에 있던 베개를 그의 얼굴에 던졌다.“진짜 역겨운 변태 새끼. 짐승만도 못한 새끼.”장소월이 욕해도 전연우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바닥에서 베개를 주운 뒤 먼지를 털어서 그녀의 등 뒤에 놓아주었다.“의사 선생님이 너무 흥분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대표님, 죽 사 왔습니다.”기성은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그리고...”“소월 씨, 오랜만이에요.”기성은의 뒤에 인시윤이 있었다. 그녀는 과일바구니를 들고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인시윤은 전연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걸 발견했다.“연우 씨가 소월 씨를 찾았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프랑스까지 찾아와봤어요. 소월 씨가 무사한 걸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인시윤이 언제 왔는지, 조금 그들이 나눈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장소월은 곧바로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사실 은근히 거리를 두었다.사실 장소월은 인시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전연우가 좋은지 말이다.그러나 그녀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었다.아이까지 있는데 안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너무 급하게 와서 가져온 게 없네요. 그래서 밑에서 과일 좀 샀는데 먹을래요? 내가 사과 깎아줄게요.”장소월은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미안해요, 미리 연락도 안 하고 와서. 조금 놀랐겠어요. 혹시 쉬는 데 내가 방해한 건 아니죠?”“아뇨.”장소월은 그녀가 병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굳어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침대 옆에 앉아있는 전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인시윤은 전연우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장소월이 기억하기로 인시윤은 아주 대범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인시윤에 대한 장소월의 기억은, 인시윤이 빨간 머리를 했을 때 멈춰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인시윤은 긴 머리를 잘라서 단발이었다. 홍콩 영화에서나 볼 법한 스타일에 옷차림마저도 정숙한 것이 사람이 완전히 달
장소월은 확실히 배가 고팠다. 그가 나타나서부터 몇 번이나 끼니를 걸렀기 때문이다.그래서 지금 위가 아플 정도였다.장소월은 결국 억지로 죽 한 그릇을 비워야 했다. 지금은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하고 싶었다.전연우는 사과를 깎아서 먹이려고 했는데 갑자기 코피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움직이지 마.”장소월이 코피를 닦으려는데 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그는 장소월을 부축해 고개를 들어 올리게 한 뒤 휴지로 그녀의 가슴팍을 닦아줬다. 옷에도 피가 묻은 것이다.“... 또 뭘 먹은 거야? 왜 코피가 나?”장소월은 대답하지 않았다.전연우는 바삐 돌아쳤다. 그는 호출 벨을 눌러서 간호사를 부른 뒤 이불을 바꾸고 링거를 들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매번 코피를 흘릴 때마다 장소월은 온몸에 힘이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이 사람이 정말 전연우일까?예전의 그는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전연우가 이번에 그녀와 잘해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들은 이제 불가능했다.장소월은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또 잠이 쏟아졌다.저항할 수도 없었고 또 피곤했다.전연우는 그녀를 세면대 위에 앉힌 뒤 깨끗한 타올에 물을 묻혀 그녀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줬다.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하는 모습은 마치...모든 일을 끝냈을 때, 간호사도 침대 정리를 마쳤다. 장소월은 조용히 침대 위에 누웠다. 그녀는 이미 잠든 상태였다.전연우는 침대 옆에 서서 휴지로 손을 닦은 뒤 쓰레기통에 버렸다.“깨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요.”간병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오후에는 회의가 있어 병원에 있을 수가 없었다.성세 그룹 해외 지사.기성은이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주변에 사람들이 없자 기성은은 곧바로 잘못을 인정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인시윤 씨가 제게 연락해서 대표님 스케줄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전연우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면서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이번 달
“송 비서님, 대표님이 의사 선생님 제외하고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송시아는 병실 문 앞에서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혔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책임을 다하는 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너무 융통성 없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건 안 좋아요. 뒤늦게 내 탓 하지는 말아요. 난 전연우 씨 곁의 사람이니까. 날 봤으면 대표님을 본 것과 똑같다고 생각해야 할 거예요. 오늘 전연우 씨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고 해도 난 꼭 들어가려고 했을 거예요.”문 앞의 두 경호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떠나시기 전 특별히 당부했었습니다. 절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요. 이건 저희 직책이니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송 비서님.”“정말 충직한 개네요.”송시아가 비아냥댔다.그녀는 팔짱을 두르고 도도하게 턱을 들며 말했다.“그러면 안에 들어가서 전해요.”“송시아가 만나려 한다고.”경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경호원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약을 먹고 있던 장소월은 갑자기 들리는 발소리에 깜짝 놀라서 서둘러 약을 숨겼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전연우가 아닌 걸 확인한 그녀는 안도했다.“무슨 일이죠?”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송 비서님께서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 이름은 장소월에게 악몽이나 다름없었다.장소월이 대답했다.“아무도 안 만날 거니까 돌아가라고 하세요.”말을 마치자마자 송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 씨, 우리 그래도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잖아요. 왜 아직도 이렇게 날 무서워하는 거죠?”경호원이 말했다.“송 비서님,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장소월은 이불을 꽉 쥐었다. 심장이 떨렸다. 그녀는 옆에 있는 경호원을 보고 말했다.“괜찮아요. 일단 나가 있어요.”“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송시아는 마치 승자처럼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녀는 일부러 걱정하는 척하면서 이불을 끌어 올려 줬다.“지금은 우리 둘뿐이니까 시치미 뗄 필요 없어요. 그냥 터놓고 얘기하죠. 장소
“환자분, 어디가 불편하신가요?”장소월이 부르르 떨며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나가세요!”“얼굴이...”“나가라고 했어요!”전연우는 회의가 끝난 뒤, 호텔로 바로 향하지 않고 저녁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갔다.오늘은 밸런타인데이다.종업원이 붉은색 장미를 들고 와 두 사람 앞에 놓아주었다.전연우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오늘 병원에 갔었어?”송시아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고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를 보며 말했다.“내가 장소월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무서워요?”그녀가 빨간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방긋 웃었다.“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저에겐 원칙이 있다는 걸요. 누가 먼저 절 건드리지 않으면 저도 나서지 않아요. 이번엔 장소월이 무례한 말을 했기 때문에 작은 벌을 내렸을 뿐이에요.”“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기껏해야... 연우 씨가 며칠 더 달래줘야 하겠죠.”전연우의 눈동자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때렸어?’“뭐. 그렇죠.”송시아는 부인하지 않았다.“물론 사심도 담겨 있었어요. 그러니까 누가 전생에서 우리 부부 사이를 갈라놓으래요? 그 정도도 많이 봐준 거예요.”전연우가 손을 들자 옆쪽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연주를 멈추었다. 이어 그는 정장 호주머니에서 팁 몇 장을 던져주고는 지갑을 다시 넣었다.“너한테 너만의 규칙이 있듯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분명히 말했었잖아. 일이 똑똑히 밝혀지기 전엔 혼자 찾아가지 말라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송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연우 씨, 우리 두 사람이야말로 한편이에요. 어찌 됐든 장소월은 외부인일 뿐이고요.”“그것 또한 네가 장소월을 때린 이유가 되기엔 충분하지 않아.”전연우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이번이 마지막이야.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장소월을 때린 복수 내가 해줄 거야.”송시아는 멀어져가는 사람을 보며 손을 짚고 일어섰다.“지금 당신이 가진 건 모두 내가 준 거잖아요. 거기 서요!”전연우는 고개도 돌리지
장소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야 할 질문이야. 너랑 송시아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날 이곳에 가두고 기생 취급하면서 농락하면 만족감이라도 들어? 응?”전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장소월이 냉랭하게 시선을 피했다.“송시아는 네 사람이야. 난 송시아를 당해낼 능력이 없어. 앞으론 네 사람을 잘 간수하길 바라. 다시는 미친 듯이 사람을 물고 늘어지게 하지 마.”전연우가 말했다.“내가 송시아한테 너에게 사과하라고 할게.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풀릴지 얘기해봐. 뭐든 다 동의할 수 있어.”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돌리고 시선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장소월은 힘껏 그의 따귀를 내리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 난 네가 역겨워.”“날 놔달라고 하면 허락해줄 거야? 아니면 더는 할 얘기 없으니까 나가. 나 잘 거야.”장소월은 이불 속으로 들어간 뒤 얼굴까지 덮어썼다. 더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전연우와 송시아가 한 침대에서 뒹구는 화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이 시간 전연우에게 구속까지 당하니, 장소월은 자신 또한 흙탕물에 몸을 흥건히 적신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장소월은 이제 도망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일 지도 모른다. 적어도 고통은 없을 테니 말이다.“푹 쉬어. 내일 다시 올게.”전연우는 자리에서 일어서 방을 나서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병원에서 며칠 치료를 받고 나니 장소월의 몸은 거의 모두 회복되었다.그날 일이 있고 난 이후, 송시아는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장소월은 입원 병동 로비에 앉아 햇볕 쪼임을 하고 있었다. 인시윤이 어느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오늘 날씨 참 좋아. 그렇지?”장소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꾹꾹 담아왔던 그 질문을 꺼냈다.“그 사람은 잘 지내?”인시윤은 장소월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