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내일 전시회에 가기 위해 짐을 싸러 20평짜리 2인실 숙소에 들어갔다. 경제 상황을 고려해 친구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리사는 내일 파티 준비로 바빠 늦은 시간에야 돌아온다.점심을 대충 해결한 뒤 집 안 청소를 시작해 저녁 6시까지 바삐 돌아쳤다. 그녀는 힘든 일이 생기면 몸을 혹사시켜 잡생각을 떨쳐버리는 습관을 아직도 갖고 있었다. 거실이 차근차근 말끔히 정리되었다.6시, 장소월은 슈퍼에 가 저녁 식사 재료를 준비했다.그녀는 반찬 몇 개를 만들어 먹은 뒤 남은 것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리사가 그녀가 만든 요리를 좋아하고 장소월도 야식을 먹는 걸 즐기니 리사가 돌아온 뒤 같이 먹으면 좋을 것이다.어느덧 하루가 지나가고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았다.그녀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뒤 수면제 두 알을 삼키고 잠에 들었다.그때, 개인 전용 비행기 안.기성은은 프랑스에서 전해온 소식을 받자 곧바로 전연우에게 보고했다.“프랑스 쪽에 의뢰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사한 결과 영상 속 사람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날 확실히 예술 아카데미 사람들이 룩셈부르크 공원에 왔었다고 합니다. 이건 파리 예술 아카데미에서 보내온 올해 졸업생 명단입니다. 그중 아가씨의 이름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아가씨는 4년 동안의 학비를 모두 장학금으로 해결하셨다고 합니다.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요.”“이건 아가씨의 파리 주소와 연락처예요.”전연우는 기성은에게서 장소월과 관련된 자료를 받았다. 모두 그녀가 최근 몇 년간 해왔던 학교와 일상생활 자료였다. 성적란엔 크고 작은 많은 수상 내역이 적혀 있었다.나머지는 파파라치가 찍은 장소월의 사진이었다. 한 장은 화실에서 하얀색 목폴라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내리뜨리고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창밖 햇살이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니 시간이 멈춘듯한 평온한 느낌이 깃들었다.다른 한 장은 그녀가 얇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가방을 메고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인행도 양쪽엔 오동나무가 무성하게 자
전연우는 이제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그럼에도 왜 아직도 장소월을 찾으려 한단 말인가.지금의 전연우는 장씨 가문과 상관없는 사람이다. 장소월의 존재가 없다 하여 전혀 문제 될 게 없다.설사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전연우는 털끝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그저 전연우가 자신을 밀어 넣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장소월의 귀국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 테니 말이다.8시간의 비행시간을 거친 뒤 전용 비행기가 7성급 소피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측에선 VIP 대우로 깍듯이 그들을 대접했다. 전연우는 이곳 호텔의 최대 주주였기 때문이다.방에 들어가자 호텔 지배인이 입장권 한 장을 가져왔다.“대표님께서 원하셨던 전시회 입장권입니다. 시간은 점심 12시, 아직 3시간이 남아있네요. 저희가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해두었습니다.”“대표님, 이쪽으로...”기성은은 옆에서 일을 보고했다.“파티를 마친 뒤 이곳에서 2주 정도 머무를 겁니다. IT기업 몇 군데에서 저희와 협력하기를 원한다고 연락을 취해와 모레 시간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선 경매 파티도 있습니다.”전연우는 컵 안 물을 마시고 말했다.“일정을 반년으로 연장해.”기성은은 화들짝 놀랐다.“반년이라고 하셨습니까? 시간이 너무 깁니다. 국내 회사 일도...”“내 말대로 해.”기성은이 고개를 숙였다.“네.”장소월 한 명 때문에 돌연 일정을 모두 바꾼다고?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렸다.“에취!”액자를 닦고 있던 장소월이 연속 몇 번 재채기를 했다.눈꺼풀이 점점 더 빨리 떨려왔고 심장박동도 점점 더 거세졌다.박원근이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힘들면 집에 돌아가요 나, 서현이 시윤이 세 명이면 충분하니까.”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저 할 수 있어요.”점심, 전시회가 시작되었다.장소월은 손님 접대 임무를 맡았다. 유창한 언어로 각계 유명 인사들에게 그림을 소개했다.쉬는 시간, 주시윤이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진짜 이해가 안 돼. 허 교수님은 왜 장소월만 수제자로
허태현과 전시회관 관장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들 옆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쓴 남자가 검은색 지팡이를 짚고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허태현이 그에게 장소월을 소개하자, 루이스 관장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장소월 씨, 허 교수님한테 말 많이 들었어요. 아주 천재적인 화가라고 하더라고요. 이건 내 명함이에요. 앞으로 화실을 차리는 데에 자금이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해요.”루이스가 유창하지 않은 한국어로 말했다.장소월은 허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루이스의 명함을 받았다.장소월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과찬이십니다. 전 천재가 아닙니다. 그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조금 더 노력할 뿐입니다.”루이스가 웃으며 말했다.“장소월 씨 정말 겸손하네요. 난 이미 소월 씨의 작품을 봤어요. 수준이 대단하던데요.”“감사합니다...”허 교수는 전시회장을 완전히 그녀에게 맡겼다. 인터뷰가 잡혀 있어 가봐야 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이 자리를 떴다. 장소월은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이제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장소월은 2층 전시회장으로 올라갔다. 2층엔 유럽풍 작품들이 걸려있었는데 모두 서현 등 세 사람의 작품이었다. 반면 장소월의 입상했던 작품은 모두 1층에 자리했다.2층은 아주 조용했다. 장소월은 커피 세 잔을 들고 걸어가던 중 세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한 명도 올라오지 않는데 우리 그냥 돌아가자. 아래층 VIP들은 소월이 한 명으로 충분할 거야. 소월이는 이뻐서 참 좋겠어. 운이 좋으면 돈 많은 남자를 잡아 사모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교수님은 우리가 못생겨서 창피하신 거야. 호텔에 돌아가 게임이나 할까?”“주시윤, 너 양심 있어? 방금 그 말 소월이가 들으면 얼마나 실망하겠어. 허 교수님은 이번 전시회를 위해 4년을 준비했어. 세계 각지 절경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험을 무릅썼는지 몰라? 소월이는 교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한 번도 우리한테 불평불만을 쏟은 적이 없어. 사막에서 죽을 뻔했
복도에 나타난 그림자를 본 주시윤은 도둑이 제 발 저린 양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서 장소월에게 다가가 커피잔을 받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이런 일을 왜 네가 해. 교수님이 아래층에서 손님을 접대하라고 했는데 왜 올라왔어?”장소월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선생님은 인터뷰가 있어서 가셨어요. 선배님들이 저 대신 아래로 내려가 보실래요? 업계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잖아요. 저 잠시 후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해요. 이곳은 선배님들에게 부탁드릴게요.”주시윤이 말했다.“또 아르바이트하러 가려고? 너 올해 상 많이 받아서 상금도 꽤 받았잖아. 왜 아직도 그런 일을 하는 거야?”장소월이 받은 상금은 확실히 프랑스에서 몇 년 지내기에 충분한 금액이다. 주시윤의 예상을 빗나간 대답이 장소월의 입에서 나왔다.“그 돈은 모두 기부했어요.”세 사람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미쳤어?”장소월은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 갈 준비해야 해야 하니까 얼른 내려가세요. 아래층엔 아직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남아 계세요. 선배님들, 이런 기회 놓치지 마세요.”서현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불편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좋은 사람인 척 위선 떨지 마. 지금 우리한테 교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유세라도 부리는 거야? 누가 알아? 네가 무슨 더러운 방법으로 교수님의 마음을 샀는지!”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직된 분위기가 2층을 뒤덮었다.그때, 전시회관 아래층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은 힘든 마음에 관여하지 않고 곧바로 휴게실로 향했다.박원근이 멀어져가는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주시윤이 했던 장소월을 좋아하냐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가 서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서현아, 너 말이 심했어.”말을 마친 뒤 그는 주시윤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전시회장에 어떤 대단한 인물이 등장했는지, 사람들은 그림도 보지 않고 그 사
“선생님, 제가 소개해드릴게요.”서현이 용기 내 걸어와 진지한 얼굴로 전연우에게 말했다.“이 그림을 보세요. 교수님께선 이 그림에 ‘생기’라는 이름을 지으셨어요. 이건 저희가 열대우림 깊숙한 곳에서 담은 경치예요. 여기에 그려져 있는 나무 한 그루, 풀 하나... 모두 당시 보았던 생생한 모습 그대로예요.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숲속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죠. 하지만 사실... 당시 저희가 머물렀던 이곳은 정말 위험했어요...”모든 사람들이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숨을 죽인 채 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겪어온 경험을 이야기하니 마치 판타지 모험 속을 거닐고 있는 듯했다.“우린 총알개미도 만났어요. 처음엔 잘 알지 못했으나 알고 보니 독성이 가장 큰 10대 동물 중 하나더라고요. 개미의 일종인데 멀리서 보면 벌 같았어요. 하지만 단단하고 힘 있는 머리와 날카롭고 독을 지닌 꼬리를 갖고 있었죠.”이어 서현은 그들이 우림에서 마주했던 모든 일들을 상세히 얘기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들과 혼비백산해 정신을 잃을 뻔했던 일들까지 모두 말이다.기성은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오랫동안 장소월의 행적을 찾지 못한 이유가 바로 허 교수님 팀과 함께 다녔기 때문이었다.서현은 그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위험과 좌절을 겪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했다. 전연우는 그렇게 서현으로부터 장소월이 지난 4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듣게 되었다.그 경험은 일반인에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전연우는 예전에 주방에서 칼조차 잡지 못했던 아가씨가 그런 고생을 하고도 안전히 돌아왔다는 걸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전연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약간 조롱 같기도 했다.잔뜩 부풀린 이야기거나 황당하게 지어낸 소설일 것이다.하지만 그건 전연우에게 상관없는 일이었다.“제가 알기론 허 교수님에겐 학생이 4명 있어요.”주시윤이 곧바로 말했다.“저희들의 후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장소월이요.”기성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정말
장소월은 확실히 직원 통로로 빠져나갔다. 그녀 역시 단 한걸음 차이로 위험을 빗겨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마이바흐 세단이 전시회장을 떠나던 그때, 장소월은 마침 코너를 돌아 달리는 차와 등졌다. 하여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했다.전연우는 파리에 도착한 뒤 쉬지도 못하고 밥만 대충 먹은 채 달려왔다. 그럼에도 간발의 차이로 늦었을 줄이야.전연우가 눈을 질근 감았다.“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어?”기성은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제가 보낸 사람들이 아파트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가씨가 돌아가시면 곧바로 연락할 겁니다.”“그래.”전연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4년이라는 시간도 견뎌왔건만, 짧은 이 몇 분을 기다리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는 미친 듯이 장소월이 보고 싶었다.조용했던 차 안에 전연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돌려. 아파트로 가자.”“하지만 저흰 약속이...”“취소해.”“네.”기성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30분 뒤, 전연우는 장소월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보잘것없이 낡아 있었는데 적어도 지은 지 4, 50년은 되어 보였고 치안도 좋지 않았다.기성은이 문을 두드렸으나 답이 없었다.“아가씨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조금 기다리시죠.”전연우는 고개를 숙여 발아래 붉은색 매트를 쳐다보았다. 고급스러운 검은 구두로 매트를 밟아보니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기성은이 곧바로 허리를 숙여 매트를 옮겼다.“열쇠입니다! 대표님, 어떻게 아셨어요?”전연우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문 열어.”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녀의 습관을 알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덜렁이여서 학생증, 은행카드 등을 잃어버리기가 일쑤라 몇 번이나 다시 만들었는지 모른다.이후 전연우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카드로 만들어 열쇠고리에 걸어주었다.하지만 그녀가 집 열쇠마저 잃어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도우미가 집에 없었던 그 날, 그녀는 또 수업 땡땡이를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미 독촉 전화를 세 개나 받고 들어온 기성은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대표님, 파티가 시작된 지 30분이나 지났습니다. 이제... 정말 가야 합니다.”전연우는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까지 보고 난 뒤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다.4년 동안의 경험이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 있었다. 남자는 그중 한 페이지를 찢어 기성은에게 건넸다.“이걸 서울 강씨 집안에 보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거대한 크루즈 위에서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무대 위엔 유혹적인 옷을 입은 여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세계적인 유명 연예인이거나 톱모델들이었다. 남자들은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술잔을 부딪치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장소월은 주방에서 디저트를 만들었다. 처음 그녀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기에 면접을 볼 자격도 갖추지 못했었다. 만약 그녀가 출중한 요리 실력으로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지 않았다면 결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대부분 주방일을 맡았다. 가끔씩 시간을 내 조금씩 프랑스어를 익혔고 이젠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이곳 주방장인 후크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소월 씨는 정말 나의 행운의 여신이에요. 소월 씨가 아니었다면 너무 바빠 미쳐버렸을 거예요. 정말 다행이에요.”장소월이 배시시 웃으며 접시를 받았다.“이런 두둑한 일당을 받을 기회는 저에게도 흔치 않은 거예요.”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장소월이 매달 남은 돈 모두를 보육원에 기부하기 때문에 경제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가면을 쓴 리사가 디저트 존을 채울 디저트를 가지러 들어왔다.“오늘 사람이 진짜 많아. 다들 네가 만든 디저트가 맛있다더라. 내가 나가기만 하면 가져다 달라고 성화야. 소월아, 나 이제 진짜 나가기 싫어.”주방 유니폼이 없으니 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검은색 종업
장소월은 손을 씻은 뒤 물을 털어냈다.“전 잠깐 쉬고 올게요. 멀미가 좀 나서요.”“그래요.”그녀가 가고 싶어 하지 않자 후크도 강요하지는 않았다.후크가 종업원과 함께 나갔다.앨리스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론 포크를 전연우의 앞에 내밀었다.“맛보세요. 이건 그쪽 한국 음식이니까 먹어본 적 있을 거예요.”전연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절한 뒤 하얀색 요리사 유니폼을 입은 건장한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주방장님 오셨어요. 앨리스 씨.”그를 본 앨리스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한국인인 줄 알았어요.”후크가 말했다.“확실히 한국에서 온 미녀분이 만든 거예요.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쉬러 가는 바람에 제가 오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연우 씨, 어디 가요?”장소월은 속이 메슥거렸다. 처음엔 괜찮았으나 멀리 나갈수록 파도가 거세져 울렁이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화장실에서 속에 있는 걸 모두 토해낸 뒤 세수를 하고 밖에 나갔다.조명이 망가졌는지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복도에서, 장소월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머리에서 모자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운 뒤 그녀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녀가 허리를 펴고 보니 여자가 남자 한 명을 끌고 어두운 구석으로 가고 있었다.여자의 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 정말 크죠. 갖고 싶지 않아요? 연우 씨?”장소월이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심장을 짓누르기라도 한 듯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연우?오랫동안 보지 못해 희미해졌던 그 사람의 모습이 순간 선명해졌다.아니... 전연우일 리가 없다!서울에 있는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나겠는가!장소월은 애써 자신을 안심시켰다.“앨리스 씨, 이거 선 넘는 거예요.”남자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찰나, 장소월은 화들짝 놀라며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였다.장소월은 그 순간 머리가 백지장같이 새하얘졌다.누군가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려와서야 장소월은 간신
전연우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리샬이 태블릿을 들고 전연우의 병실 침대로 다가와 말했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그 지역에 들어가신 후 신호가 사라졌습니다.”전연우는 눈을 감고 침대에 기대앉았다.“오늘은 그만하면 됐어. 나가봐.”“알겠습니다.”그가 가까이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그녀는 더 깊숙이 몸을 숨길 것이다. 그녀가 시내로 발을 디딘 순간, 즉시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소월아, 7일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시간이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와 함께 떠나야 할 거야.’강지훈은 전연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원에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본 순간, 서늘했던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강지훈은 흥미로운 듯 의자에 앉았고, 뒤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이렇게 엉망인 모습은 처음 보네요. 어때요? 버림받은 기분이?”“아, 참. 그 여자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소용없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 여자 당신과 함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요. 설사 돌아간다 해도,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여자를 옆에 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많은 돈을 생판 남에게 물려줄 리는 없을 테고.”“당신한테 어울리는 여자 소개해 줄까요? 당신한테 아기를 낳아줄 여자 말이에요.”강지훈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바보 하나랑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워?”강지훈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밖에 있던 간호사가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고 제지하러 들어가려 했지만, 문밖의 경호원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들의 허리에 찬 총을 본 그녀는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강지훈은 다시 반격했다. “내 여자는 내 아이를 둘이나 가졌어요. 전연우 씨... 당신 여자는 어때요?”전연우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강지훈을 쏘아보고
“알겠습니다.”이미 정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위장할 필요가 없으니, 전연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곁으로 데려왔다. 별이는 얼굴 분장을 지웠지만, 분홍색 드레스는 여전히 입고 있었다.“네가 여자아이였다면, 엄마가 떠나는 게 더 어려웠을까?”별이는 순수한 눈빛으로 전연우를 빤히 바라보며 옹알이를 했다.“엄... 엄마...”전연우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말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이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전연우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강용은 주변 길에 꽤 익숙했던지라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무인 구역에 도착했다. 액셀을 끝까지 밟고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강용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소현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토할 것 같은 충동을 참았다.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힘들면 나한테 기대서 좀 자.”“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흐어엉... 소월아, 나 강지훈한테 잡혀가기 싫어.”장소월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우리 이제 안전해.”강지훈에게 이 지역의 경찰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기와 탄약을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곳에는 강지훈만의 인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소현아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즉시 도시 전체를 포위하여 그녀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봉쇄 직전, 강용이 모는 차가 딱 30초, 간발의 차이로 그곳을 빠져나왔던 것이다.강지훈은 소현아가 묵었던 호텔을 찾아갔다. 스위트룸 안, 침대에 던져진 임부복 드레스와 머리맡에 놓인 소현아의 사진이 보였다. “멍청한 년, 그깟 사람 하나 못 잡고, 뭐 하는
소현아는 규영과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제 이름은 김소단이에요.”규영은 즉시 소현아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미경아, 빨리 주인님 모셔와. 현아 아가씨 찾았어.”소현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아아아... 나쁜 사람. 빨리 이거 놔요.”“살려주세요! 임신부를 납치하려고 해요!”“미경아, 빨리 와... 아가씨, 더는 도망가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단 말이에요. 주인님은 아가씨를 잊지 않으셨어요.”“난 당신 몰라요. 놔줘요!”아무리 용을 써도 규영을 뿌리칠 수 없자, 소현아는 그녀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규영은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현아 아가씨...”소현아는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재빨리 도망쳤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침 강용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조심해. 뛰지 마.”“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소현아는 체형이 약간 통통한 데다 평소에 운동도 부족했던지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소현아가 다급히 말했다.“큰일 났어... 소월아, 강지훈이 나 찾으러 왔어. 방금 쇼핑몰에서 규영이랑 마주쳤어.”“흐흑... 소월아, 강지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현아는 너희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전연우 하나로도 모자라 이제 강지훈까지 나타나다니. 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다행히 전연우는 강용이 풀어놓은 수면제를 먹고 기절한 상태라 당분간은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강지훈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연우보다 상대하기 훨씬 어려운 인물이었다. 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용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해?”강용이 말했다.“지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