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김남주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전에 둘이 싸우고 냉전을 할 때도 먼저 사과하는 사람은 언제나 강영수였다.여자가 무릎을 꿇던 순간, 강영수는 확실히 마음이 약해졌다.그녀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고집스레 말했다.“누가 우리 모자 생사에 관여하래? 이미 약혼도 했으면서, 약혼녀가 알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랑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겠어?”남자는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에 몰두했다.“저번에 우리 집에서 내 부인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누구더라? 내 앞에서 연기할 필요 없어.”여자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혁이만 아니었다면 나라고 강씨 가문에 가고 싶은 줄 알아? 가서 네 할머니 눈치 보면서? 어차피 여태까지 넌 아이를 돌본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모른 척해도 돼. 길옆에 세워 줘.”강영수는 매서운 눈으로 싸늘하게 말했다.“아이 양육권은 이미 변호사에게 계약서 작성하라고 했어. 넌 나 못 이겨. 법원도 양육권을 정신병 있는 어머니에게 판결하지 않을 거야.”김남주는 차갑게 웃었다.“그래서, 소월이보고 혁이를 키우라고 할 생각이야? 혁이가 모르는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고? 강영수, 나 아직 안 죽었어! 정신병이 뭐 어때서? 그러는 넌? 너도 미친 인간이잖아!”여자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그는 확실히 미치광이가 맞았다.김남주는 그를 보면서 입가에 이상한 미소를 짓더니 유유히 말했다.“지금 혁이 상황이 그때 너랑 똑같다는 걸 모르겠어?”“소월이는... 바로 그때의 심유고. 심유가 어떻게 너희 집을 망쳤는지 잊지 마!”“닥쳐!”강영수는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여자는 아이를 안고 있다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고, 재빨리 아이의 머리를 감쌌다.“내 말이 틀렸어? 그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잘못이라면 네 할머니가 했겠지. 그렇게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우린 헤어지는 일도 없었고 혁이도 이런 일을 겪지 않았어.”“소월이는 지금도, 앞으로도 절대 심유가 아니야. 넌 영원히 소월이를 이길 수 없어. 너처럼 눈에 온통 계산으로 가득 차지
대체 왜?혁이는 그녀가 낳은 그녀의 자식이다. 무슨 근거로 소월이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김남주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이번 생에는 절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간호사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처량한 울음소리를 듣고 가슴이 오싹해졌다. 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만약 강영수가 데려온 사람이 아니라면, 병원에서는 진작 경찰에 신고 했을 것이다.박순옥은 아이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차를 타고 달려왔다.원래 고열감기에 시달리던 혁이는 갑자기 백혈병이 발견되었다. 병원에서는 맞는 골수를 찾느라 바빴다.강영수가 바로 이 아이와 골수가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과 골수가 일치할 확률이 높았다.그는 거절하지 않고, 당일 밤 바로 수술에 동의했다.그들은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고, 불청객 김남주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순옥은 두려움에 떨며 두 부자의 평안을 위해 기도했다.“어르신, 안심하세요. 수술 성공 확률이 높으니 대표님은 아무 일 없을 겁니다.”“일단 소월에게 알리지 마.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 아이 성격이라면 당장이라도 귀국할 거야.”그렇지 않으면 혁이의 일은 숨길 수 없을 것이다.강영수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두 사람은 가까스로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일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당분간 외부에 공개할 수 없었다.박순옥은 걸어오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얼굴빛이 차갑게 굳어졌다.“네가 여긴 왜 왔어?”김남주는 수술실 문에 표시된 수술 중이라는 글자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녀가 사라진 며칠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소 야윈 모습이었다.“혁이는 제 아들이니 당연히 와야죠. 어르신이 절 막을 권리 없어요.”박순옥은 콧방귀를 뀌었다.바로 이때, 진봉의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는 조용한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소월 아가씨!”휴대폰 너머 장소월은 호텔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에는 이불커버를 들고, 어깨에
수술은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두 사람 상태는 모두 안정되었다.강영수가 깨어났을 땐 날이 밝아있었다.침대 옆에서 그를 간호하고 있던 진봉이 강혁의 상황을 보고했다.“제때에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아이는 이미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수술 후 3개월 정도 뒤면 완전히 회복된다고 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3개월이면... 마침 장소월이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다.강영수가 연신 몇 번 기침했다. 그가 침대 아래로 내려오려고 하자 진봉이 곧바로 그를 제지했다.“대표님, 아직은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열흘은 걸려야 회복되실 수 있습니다.”“소월이는... 연락 왔었어?”장소월을 떠올리자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건 이 일을 설명해야 한다는 불안감이었다. 아이의 일은 그야말로 거대한 폭발력을 지닌 시한폭탄과도 같았다.진봉이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말했다.“수술이 끝나기 한 시간 전 전화가 왔었습니다. 대표님께선 회사의 급한 일을 처리하고 계신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설사 아신다고 해도 소월 아가씨는 이해해주실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양육권만 가져오면 소월 아가씨와 예전처럼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강영수는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낯빛이 창백했다. 이마 앞 잔머리가 검은색 깊은 눈동자를 뒤덮었다. 그 속에 내려져 있는 어둠은 한참이 지나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그는 장소월에게 숨기는 것이 구경 맞는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문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남주가 어두워진 표정을 가리며 손에 전기 포트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깨어났구나. 혁이 일은 고마워. 병원비는 내가 최대한 갚을게. 이건 내가 만든 곰탕이야. 의사 선생님께서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더라고.”김남주는 말을 마친 뒤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 강영수를 힐끗 쳐다보고는 더는 머물지 않고 병실에서 나갔다.“김남주 많이 변했네.”예전의 그녀는 안하무인으로
야건 업소 룸 안.두 쌍의 남녀로 이루어진 카드 테이블 위, 전연우와 서철용이 서로 다른 편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전연우의 앞엔 가득 쌓인 칩이 놓여있었는데 모두 서철용으로부터 따온 것이었다.“강영수 때문에 남원에서도 쫓겨났으면서 하나도 화가 나지 않나 봐? 오히려 신나 보이는데?”전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 판, 또 한 판, 서철용은 지니고 있던 1억 원의 돈을 거의 모두 잃고 말았다. 속수무책으로 계속 지기만 하니 슬슬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짜증이 몰려와 담배라도 피우고 싶었으나 눈앞 도련님이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탓에 억지로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정말 이상한 일이다. 전연우와 카드를 치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니 말이다.바로 그때, 문밖 종업원이 문을 열었다.황유나가 온 것이다. 그녀의 눈에 야한 옷차림으로 서철용의 몸에 딱 붙어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의 눈에 못마땅함이 스쳐 지나갔다.“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요?”서철용의 예쁜 눈동자에 흥미로운 미소가 물들었다.“이쪽으로 와서 카드 좀 받아줘요. 마침 화장실에 가려던 참이었어요.”황유나는 전연우도 이곳에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전연우는 늘 청렴하고 점잖은 상류 인사인 척 자신을 위장했다. 보아하니 지금은 가면을 벗어던진 듯 셔츠 단추도 몇 개 풀렸고 넥타이도 마음대로 풀어져 있었다.서철용에게도 그의 이런 모습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하여 그는 지금까지 전연우가 가면을 쓴 모습에 익숙해져 예전 자신이 파렴치한 양아치였단 사실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다.황유나를 본 전연우는 카드를 내려놓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일부러 와서 날 역겹게 하려는 거야?”주어가 황유나인지, 서철용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장소월과 똑 닮은 황유나의 그 얼굴은 서철용이 직접 칼을 들어 빚어낸 것이니 말이다.장소월이 해외로 나간 이 타이밍에 황유나가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황유나가 분노하며 전연우에게 따져 물었다.“누가 역겹다는 거예요? 난 아직
서철용은 흥미를 잃고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이어 두 여자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품에 안겼다.황유나는 분노에 차올라 샤넬 가방을 들어 올려 서철용을 향해 휘둘렀다. 그가 손으로 마구마구 날아오는 가방을 막으며 말했다.“이런 미친 짓 좀 그만해요.”그 목소리엔 약간의 노기도 담겨 있었다.황유나는 서철용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날 이렇게 모욕하기 위해 부른 거예요? 내가 당신 노리개인 줄 알아요?”서철용이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뻗어 옆쪽 여자를 끌어안았다.“노리개요? 전 그런 뜻이 없었어요. 황유나 씨도, 저도, 우리 모두 어른이잖아요. 가볍게 즐기자는 것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 말아요.”“그냥 저번 일에 책임지고 싶지 않다고 말해요. 그거 알아요? 그건 제...”그녀는 차마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반면 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뭐요? 처음이라고요? 알겠어요.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많은 여자들이 저한테 처음이라고 하던데 내가 일일이 다 책임져야 하나요?”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린 다 성인이에요. 그 봉건적인 사상 좀 바꿔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원해서 한 거잖아요.”황유나는 자신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던 남자가 천하의 파렴치한 양아치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녀가 분노에 부들부들 떨며 힘껏 그의 따귀를 내리쳤다.“서철용, 이 나쁜 자식. 날 모욕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서철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네. 기다리고 있을게요.”그녀가 떠나려 몸을 돌리자 남자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저었다.저녁 10시 반.전연우가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가는 길, 돌연 빨간색 마세라티 한 대가 앞을 막아섰다.아무리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도 2억짜리 차량의 속도는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검은색 아우디 차량에 선명한 상처가 생겨났다.반쯤 내린 창문으로 천천히 담뱃불을 붙이는 전연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빨간색 스포츠카 안에서 매혹적인 옷차
인시윤은 그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살기를 보았다. 순간 그가 정말 자신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똑똑히 알아둬요. 난 고상한 군자가 아니에요. 누군가 내 일에 간섭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요. 이후...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음 날의 태양을 보지 못할지도 몰라요.”전연우는 인시윤이 숨이 막혀 정신을 잃으려던 순간, 손에 힘을 풀었다.“컥컥컥...”인시윤이 가슴을 부여잡고 거칠게 호흡하며 허리를 굽히고 연신 기침했다.인시윤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떠나가는 그를 쳐다보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나 차에 올라타고는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았다.하지만 이번엔 놓쳐버리고 말았다.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넓디넓은 공항에서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당시 장소월이 그에게 매달릴 땐 관심 한 번 주지 않은 전연우이다. 하지만 장소월이 이미 강씨 집안의 예비 며느리가 된 지금, 오히려 그녀를 만나지 못해 안달이다.인시윤은 전연우의 목적이 장소월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다급히 파리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하지만 이것마저 전연우의 계획일 거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이미 왔던 길로 돌아간 전연우에게 기성은이 전화를 걸었다.“인시윤 씨가 파리행 비행기 표를 샀습니다. 아마 12시간 뒤 출발할 겁니다.”“알았어.”전연우가 남원 그룹 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 인시윤은 줄곧 전연우를 만날 기회만 노렸다. 심지어 종일 전연우를 미행하기까지 했다.장해진은 그에게 집에 들어와 살기를 요구했다. 그가 남원 별장에 도착했을 땐 깊은 밤,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강만옥은 긴 시간 동안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린 듯했다.전연우가 차 키를 현관 선반에 놓아두었다.강만옥은 장해진이 해외에서 사 온 과일 말랭이를 씹으며 무료한 태교 영상을 보고 있었다.“몇 달이 지나면 이 아이는 지울 수 없게 돼. 내가 아무리 네 복수의 도구라고 해도
파리 예술 아카데미의 수업은 빼곡한 일정으로 안배되어있어 그리 쉽지 않았다. 장소월은 매일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잠을 자는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어렵게 얻은 해외 연수 시간을 대부분 수업하는 데에 사용했다.학교를 마치고 나면 늘 강영수와 통화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허 교수님은 자주 학생들을 데리고 미술 경기에 참가하러 나가시는지라 평소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 외엔 만날 수 없었다.장소월은 호텔에 돌아오면 방안에만 박혀 있었다. 가끔씩 국내 소식을 찾아보기도 했다.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돌연 화면에 떠오른 기사가 그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남천 그룹에 관한 내용이었다.기사를 열어보니 선명한 색감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남천 그룹이 강한 그룹에 인수되다.남천 그룹 대표였던 전연우는 능력 부족이란 이유로 해고당했고, 현재 강한 그룹 기업부 책임자 추강휘가 남천 그룹 지휘봉을 잡았다고 한다.강한 그룹 내부 정보에 따르면 남천 그룹이 강한 그룹에 합병된 원인은 전임 대표 전연우가 프로젝트 완공 시간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그 후과는 남천 그룹은 200억 원의 손해배상을 떠안았고 책임자는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프로젝트를 제때에 완수하기 위해선 강한 그룹 산하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서울시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이 일은 여전히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장소월은 그 기사를 읽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전연우는 해고당했다. 직위를 박탈 당했다는 건 앞으로 장씨 집안 회사인 남천 그룹에 어떤 짓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장소월은 순간 머릿속이 또렷해졌다. 전연우는 아버지가 키운 가장 믿어 의심치 않는 후계자이다.이번 일로 아버지가 받을 충격은 꽤나 클 것이다.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분명 그녀에게 연락해 강영수에게 부탁하라고 할 것이다.하여 연락을 받지 않기 위해 곧바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전연우의 능력이라면 남천 그룹이 아니라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
그녀와 전연우가 결혼식을 준비하던 그 날 말이다.차가 막혀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공항에 도착했다. 주시윤은 그녀를 데려다준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공항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에 올랐다.서울에 도착하려면 8시간가량 걸린다. 때문에 빨라도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병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그때 전연우도 장소월의 귀국 소식을 들었다.엘리트 개인 병원.장해진이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를 단 채 VIP 전용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심장박동은 정상이었으나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장해진의 치료를 맡은 주치의는 서철용이었다.서철용이 차분한 얼굴로 전연우에게 장해진의 상황을 알려주었다.이어 검사 보고서를 쓰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장소월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한 거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내가 널 너무 얕잡아봤어.”전연우가 물었다.“깨어나려면 얼마나 걸려?”서철용이 웃으며 펜을 내려놓고는 다리를 꼬았다.“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말이다. 장해진이 어떻게 되길 원해? 너한테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지.”전연우가 몸을 돌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서철용을 훑어보고는 말했다.“내가 장씨 집안을 무너뜨리는 걸 너도 바라는 거지? 내 손을 빌려 장씨 집안을 해치우려고?”“하지만 내가 알기론 장씨 집안과 넌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던데.”두 사람 모두 서로를 떠보고 있었다. 다들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라 자신의 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상대의 핸들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서철용은 확실히 전연우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다.서철용의 눈동자에 차가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마. 난 장소월이 아니야.”그가 전연우의 옆을 지나쳐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너한테 진 빚만 청산하고 나면 내 도움을 받는 게 이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원한이 있든 없든 이것만 기억해. 장씨 집안을 망가뜨리는 일이라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