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혁이는 그녀가 낳은 그녀의 자식이다. 무슨 근거로 소월이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김남주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이번 생에는 절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간호사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처량한 울음소리를 듣고 가슴이 오싹해졌다. 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만약 강영수가 데려온 사람이 아니라면, 병원에서는 진작 경찰에 신고 했을 것이다.박순옥은 아이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차를 타고 달려왔다.원래 고열감기에 시달리던 혁이는 갑자기 백혈병이 발견되었다. 병원에서는 맞는 골수를 찾느라 바빴다.강영수가 바로 이 아이와 골수가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과 골수가 일치할 확률이 높았다.그는 거절하지 않고, 당일 밤 바로 수술에 동의했다.그들은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고, 불청객 김남주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순옥은 두려움에 떨며 두 부자의 평안을 위해 기도했다.“어르신, 안심하세요. 수술 성공 확률이 높으니 대표님은 아무 일 없을 겁니다.”“일단 소월에게 알리지 마.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 아이 성격이라면 당장이라도 귀국할 거야.”그렇지 않으면 혁이의 일은 숨길 수 없을 것이다.강영수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두 사람은 가까스로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일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당분간 외부에 공개할 수 없었다.박순옥은 걸어오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얼굴빛이 차갑게 굳어졌다.“네가 여긴 왜 왔어?”김남주는 수술실 문에 표시된 수술 중이라는 글자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녀가 사라진 며칠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소 야윈 모습이었다.“혁이는 제 아들이니 당연히 와야죠. 어르신이 절 막을 권리 없어요.”박순옥은 콧방귀를 뀌었다.바로 이때, 진봉의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는 조용한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소월 아가씨!”휴대폰 너머 장소월은 호텔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에는 이불커버를 들고, 어깨에
수술은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두 사람 상태는 모두 안정되었다.강영수가 깨어났을 땐 날이 밝아있었다.침대 옆에서 그를 간호하고 있던 진봉이 강혁의 상황을 보고했다.“제때에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아이는 이미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수술 후 3개월 정도 뒤면 완전히 회복된다고 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3개월이면... 마침 장소월이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다.강영수가 연신 몇 번 기침했다. 그가 침대 아래로 내려오려고 하자 진봉이 곧바로 그를 제지했다.“대표님, 아직은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열흘은 걸려야 회복되실 수 있습니다.”“소월이는... 연락 왔었어?”장소월을 떠올리자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건 이 일을 설명해야 한다는 불안감이었다. 아이의 일은 그야말로 거대한 폭발력을 지닌 시한폭탄과도 같았다.진봉이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말했다.“수술이 끝나기 한 시간 전 전화가 왔었습니다. 대표님께선 회사의 급한 일을 처리하고 계신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설사 아신다고 해도 소월 아가씨는 이해해주실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양육권만 가져오면 소월 아가씨와 예전처럼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강영수는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낯빛이 창백했다. 이마 앞 잔머리가 검은색 깊은 눈동자를 뒤덮었다. 그 속에 내려져 있는 어둠은 한참이 지나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그는 장소월에게 숨기는 것이 구경 맞는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문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남주가 어두워진 표정을 가리며 손에 전기 포트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깨어났구나. 혁이 일은 고마워. 병원비는 내가 최대한 갚을게. 이건 내가 만든 곰탕이야. 의사 선생님께서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더라고.”김남주는 말을 마친 뒤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 강영수를 힐끗 쳐다보고는 더는 머물지 않고 병실에서 나갔다.“김남주 많이 변했네.”예전의 그녀는 안하무인으로
야건 업소 룸 안.두 쌍의 남녀로 이루어진 카드 테이블 위, 전연우와 서철용이 서로 다른 편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전연우의 앞엔 가득 쌓인 칩이 놓여있었는데 모두 서철용으로부터 따온 것이었다.“강영수 때문에 남원에서도 쫓겨났으면서 하나도 화가 나지 않나 봐? 오히려 신나 보이는데?”전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 판, 또 한 판, 서철용은 지니고 있던 1억 원의 돈을 거의 모두 잃고 말았다. 속수무책으로 계속 지기만 하니 슬슬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짜증이 몰려와 담배라도 피우고 싶었으나 눈앞 도련님이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탓에 억지로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정말 이상한 일이다. 전연우와 카드를 치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니 말이다.바로 그때, 문밖 종업원이 문을 열었다.황유나가 온 것이다. 그녀의 눈에 야한 옷차림으로 서철용의 몸에 딱 붙어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의 눈에 못마땅함이 스쳐 지나갔다.“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요?”서철용의 예쁜 눈동자에 흥미로운 미소가 물들었다.“이쪽으로 와서 카드 좀 받아줘요. 마침 화장실에 가려던 참이었어요.”황유나는 전연우도 이곳에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전연우는 늘 청렴하고 점잖은 상류 인사인 척 자신을 위장했다. 보아하니 지금은 가면을 벗어던진 듯 셔츠 단추도 몇 개 풀렸고 넥타이도 마음대로 풀어져 있었다.서철용에게도 그의 이런 모습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하여 그는 지금까지 전연우가 가면을 쓴 모습에 익숙해져 예전 자신이 파렴치한 양아치였단 사실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다.황유나를 본 전연우는 카드를 내려놓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일부러 와서 날 역겹게 하려는 거야?”주어가 황유나인지, 서철용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장소월과 똑 닮은 황유나의 그 얼굴은 서철용이 직접 칼을 들어 빚어낸 것이니 말이다.장소월이 해외로 나간 이 타이밍에 황유나가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황유나가 분노하며 전연우에게 따져 물었다.“누가 역겹다는 거예요? 난 아직
서철용은 흥미를 잃고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이어 두 여자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품에 안겼다.황유나는 분노에 차올라 샤넬 가방을 들어 올려 서철용을 향해 휘둘렀다. 그가 손으로 마구마구 날아오는 가방을 막으며 말했다.“이런 미친 짓 좀 그만해요.”그 목소리엔 약간의 노기도 담겨 있었다.황유나는 서철용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날 이렇게 모욕하기 위해 부른 거예요? 내가 당신 노리개인 줄 알아요?”서철용이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뻗어 옆쪽 여자를 끌어안았다.“노리개요? 전 그런 뜻이 없었어요. 황유나 씨도, 저도, 우리 모두 어른이잖아요. 가볍게 즐기자는 것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 말아요.”“그냥 저번 일에 책임지고 싶지 않다고 말해요. 그거 알아요? 그건 제...”그녀는 차마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반면 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뭐요? 처음이라고요? 알겠어요.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많은 여자들이 저한테 처음이라고 하던데 내가 일일이 다 책임져야 하나요?”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린 다 성인이에요. 그 봉건적인 사상 좀 바꿔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원해서 한 거잖아요.”황유나는 자신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던 남자가 천하의 파렴치한 양아치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녀가 분노에 부들부들 떨며 힘껏 그의 따귀를 내리쳤다.“서철용, 이 나쁜 자식. 날 모욕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서철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네. 기다리고 있을게요.”그녀가 떠나려 몸을 돌리자 남자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저었다.저녁 10시 반.전연우가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가는 길, 돌연 빨간색 마세라티 한 대가 앞을 막아섰다.아무리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도 2억짜리 차량의 속도는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검은색 아우디 차량에 선명한 상처가 생겨났다.반쯤 내린 창문으로 천천히 담뱃불을 붙이는 전연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빨간색 스포츠카 안에서 매혹적인 옷차
인시윤은 그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살기를 보았다. 순간 그가 정말 자신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똑똑히 알아둬요. 난 고상한 군자가 아니에요. 누군가 내 일에 간섭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요. 이후...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음 날의 태양을 보지 못할지도 몰라요.”전연우는 인시윤이 숨이 막혀 정신을 잃으려던 순간, 손에 힘을 풀었다.“컥컥컥...”인시윤이 가슴을 부여잡고 거칠게 호흡하며 허리를 굽히고 연신 기침했다.인시윤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떠나가는 그를 쳐다보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나 차에 올라타고는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았다.하지만 이번엔 놓쳐버리고 말았다.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넓디넓은 공항에서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당시 장소월이 그에게 매달릴 땐 관심 한 번 주지 않은 전연우이다. 하지만 장소월이 이미 강씨 집안의 예비 며느리가 된 지금, 오히려 그녀를 만나지 못해 안달이다.인시윤은 전연우의 목적이 장소월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다급히 파리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하지만 이것마저 전연우의 계획일 거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이미 왔던 길로 돌아간 전연우에게 기성은이 전화를 걸었다.“인시윤 씨가 파리행 비행기 표를 샀습니다. 아마 12시간 뒤 출발할 겁니다.”“알았어.”전연우가 남원 그룹 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 인시윤은 줄곧 전연우를 만날 기회만 노렸다. 심지어 종일 전연우를 미행하기까지 했다.장해진은 그에게 집에 들어와 살기를 요구했다. 그가 남원 별장에 도착했을 땐 깊은 밤,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강만옥은 긴 시간 동안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린 듯했다.전연우가 차 키를 현관 선반에 놓아두었다.강만옥은 장해진이 해외에서 사 온 과일 말랭이를 씹으며 무료한 태교 영상을 보고 있었다.“몇 달이 지나면 이 아이는 지울 수 없게 돼. 내가 아무리 네 복수의 도구라고 해도
파리 예술 아카데미의 수업은 빼곡한 일정으로 안배되어있어 그리 쉽지 않았다. 장소월은 매일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잠을 자는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어렵게 얻은 해외 연수 시간을 대부분 수업하는 데에 사용했다.학교를 마치고 나면 늘 강영수와 통화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허 교수님은 자주 학생들을 데리고 미술 경기에 참가하러 나가시는지라 평소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 외엔 만날 수 없었다.장소월은 호텔에 돌아오면 방안에만 박혀 있었다. 가끔씩 국내 소식을 찾아보기도 했다.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돌연 화면에 떠오른 기사가 그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남천 그룹에 관한 내용이었다.기사를 열어보니 선명한 색감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남천 그룹이 강한 그룹에 인수되다.남천 그룹 대표였던 전연우는 능력 부족이란 이유로 해고당했고, 현재 강한 그룹 기업부 책임자 추강휘가 남천 그룹 지휘봉을 잡았다고 한다.강한 그룹 내부 정보에 따르면 남천 그룹이 강한 그룹에 합병된 원인은 전임 대표 전연우가 프로젝트 완공 시간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그 후과는 남천 그룹은 200억 원의 손해배상을 떠안았고 책임자는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프로젝트를 제때에 완수하기 위해선 강한 그룹 산하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서울시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이 일은 여전히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장소월은 그 기사를 읽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전연우는 해고당했다. 직위를 박탈 당했다는 건 앞으로 장씨 집안 회사인 남천 그룹에 어떤 짓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장소월은 순간 머릿속이 또렷해졌다. 전연우는 아버지가 키운 가장 믿어 의심치 않는 후계자이다.이번 일로 아버지가 받을 충격은 꽤나 클 것이다.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분명 그녀에게 연락해 강영수에게 부탁하라고 할 것이다.하여 연락을 받지 않기 위해 곧바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전연우의 능력이라면 남천 그룹이 아니라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
그녀와 전연우가 결혼식을 준비하던 그 날 말이다.차가 막혀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공항에 도착했다. 주시윤은 그녀를 데려다준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공항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에 올랐다.서울에 도착하려면 8시간가량 걸린다. 때문에 빨라도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병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그때 전연우도 장소월의 귀국 소식을 들었다.엘리트 개인 병원.장해진이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를 단 채 VIP 전용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심장박동은 정상이었으나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장해진의 치료를 맡은 주치의는 서철용이었다.서철용이 차분한 얼굴로 전연우에게 장해진의 상황을 알려주었다.이어 검사 보고서를 쓰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장소월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한 거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내가 널 너무 얕잡아봤어.”전연우가 물었다.“깨어나려면 얼마나 걸려?”서철용이 웃으며 펜을 내려놓고는 다리를 꼬았다.“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말이다. 장해진이 어떻게 되길 원해? 너한테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지.”전연우가 몸을 돌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서철용을 훑어보고는 말했다.“내가 장씨 집안을 무너뜨리는 걸 너도 바라는 거지? 내 손을 빌려 장씨 집안을 해치우려고?”“하지만 내가 알기론 장씨 집안과 넌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던데.”두 사람 모두 서로를 떠보고 있었다. 다들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라 자신의 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상대의 핸들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서철용은 확실히 전연우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다.서철용의 눈동자에 차가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마. 난 장소월이 아니야.”그가 전연우의 옆을 지나쳐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너한테 진 빚만 청산하고 나면 내 도움을 받는 게 이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원한이 있든 없든 이것만 기억해. 장씨 집안을 망가뜨리는 일이라면
전연우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지만 장소월은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은? 왜 혼자 온 거야?”장소월은 머뭇거리며 차에 올라타지 않았다.“장씨 집안의 심각한 일이야. 의부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이 외부에 새어나가게 해서는 안 돼. 또 너 한 명이 돌아오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와야겠어? 왜 그렇게 오빠를 무서워하는 거야?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침략적이고도 소유욕이 가득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본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연우가 직접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약혼식 후 장소월은 전연우와 마주친 적이 없다. 대표직을 박탈당했음에도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시간 끌지 말고 빨리 타!”전연우의 태도가 급속도로 바뀌었다. 가느스름하게 뜬 그의 눈에 경고의 눈빛이 번뜩였다.장소월은 조심스럽게 그를 경계하며 결국 차에 올라탔다.전연우가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그녀는 재빨리 안전벨트를 맸다.“내가 할 수 있어.”전연우의 입꼬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호선을 그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다.“머리 잘랐어?”장소월은 애써 덤덤한 척 그의 시선을 피하고는 무심히 말했다.“너무 길어서 잘랐어.”사실 그녀는 그저 건조한 날씨 때문에 머리끝이 갈라져 아주 조금 잘랐을 뿐이다. 전연우가 이토록 세심할 줄이야.그가 이럴수록 장소월은 더더욱 소름이 돋았다.“앞으론 자르지 마.”그가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장소월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이 간섭하는 거 아니야? 이건 내 머리카락이야. 운전이나 해.”“그래.”전연우가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고요한 바다에 집채 같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마냥 그의 눈동자에 살기가 일렁였다.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고 공항을 떠났다.이 시간 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