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런 얘기를 논하는 건 너무 이르지 않아요?”“회사에 급한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강영수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더니, 또 멈추어 냉랭하게 김남주를 보았다.“충고하는데, 강씨 집안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외부인은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김남주는 그를 쫓아갔다. 그녀는 분명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강영수는 왜 돌아오지 않을까?진짜 아이도 낳지 못하는 장소월보다 더 못한 것일까?만약 그렇다면,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겪은 그 많은 고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절대 이렇게 포기할 수 없었다.강영수의 부인 자리는 원래 그녀의 것이었다.무슨 근거로 후발주자의 몫이란 말인가?그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강영수가 절반 목숨으로 장소월을 얻었다고 했다.하지만 그때 강영수는 분명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녀에게 매달렸었다. 지금 그녀가 돌아왔지만...“좋아, 나도 싫고 아이도 싫단 말이지! 강영수, 평생 후회하게 해줄게!”강영수는 차가운 눈동자를 살짝 기울이더니 차갑게 내뱉었다.“좋을 대로.”승용차 장난감을 놀고 있던 아이는 강영수가 가려는 걸 보고, 손에 들고 있던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도 버리고 짧은 다리로 쫓아와 울부짖었다.“아빠, 혁이 떠나지 말아요.”“혁이는 아빠 없이 살 수 없어요.”강영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문 앞까지 쫓아온 아이가 넘어졌는데도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노부인은 얼른 자신의 손자를 일으켜 세웠다. 피부가 벗겨진 금쪽같은 손자를 보고는 더욱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얼른 치료해줘.”아주머니는 아이를 안고 말했다.“네, 어르신.”“흑흑흑, 엄마. 아빠가 저 싫대요.”거실에는 온통 아이의 울음소리로 가득했고, 아무리 달래도 멈추지 못했다.김남주는 아이를 번쩍 들고 가버렸다.노부인은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거기 서. 내 손자 데리고 어디 가려는 거야?”여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상의할 여지가 없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죠. 혁이는 내가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온 김남주는 혁이의 상처를 간단히 치료해주었다. 울다가 지친 아이는 힘이 빠져 바로 잠들었다.강혁은 강렬한 추위에 잠에서 깨어났다.“엄마, 뭐 해요?”욕실에서 김남주는 아이의 머리 위로 냉수를 뿌리고 있었고, 강혁은 추워 욕조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여자는 한 손으로 눌러버렸다.“엄마, 혁이 추워요.”강혁은 추워 온몸을 벌벌 떨었다. 얼어서 새파랗게 된 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김남주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혁아, 조금만 참아. 엄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곧 널 보러 올 거야. 앞으로 우리 가족은 함께 살 수 있고 혁이도 곧 아빠가 생길 거야.”아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혁이는 엄마 말 잘 들을 거예요.”“착하네 우리 혁이. 이따가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줄게.”“좋아요!”객실 종업원이 또 얼음 한 바구니를 더 가져다 욕조에 쏟아 넣었다.“엄마, 혁이 너무 아파요.”“조금만 참아.”30분 후, 김남주는 차가운 욕조에서 아이를 안아 올렸고, 물도 닦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창문을 향해 소파에서 자게 했다.깊은 밤, 강혁은 열이 39도까지 올라갔다. 온몸은 화로처럼 뜨거웠고 이미 혼수상태에 빠졌다.김남주는 아이를 데리고 한밤중에 병원으로 향했고 의사는 곧바로 해열 주사를 놓았다.아침 여섯 시에야 강혁의 상황은 호전되었고, 간호사가 말했다.“열이 내렸으니 아래층에 가서 병원비를 지급하시고 오후에 퇴원 절차 밟으시면 돼요.”“네, 감사합니다.”간호사는 그녀가 좀 낯이 익었지만, 정확히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간호사가 병실을 나간 후, 김남주는 표정이 다시 싸늘해지더니 아직 링거를 꽂고 있는 아이를 매섭고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엄마를 탓하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영수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꼴은 절대 눈 뜨고 볼 수 없어. 원래 내 자리를 찾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김남주는 그대로 병실을 떠났고, 불쌍한 아이만 혼자 남게 되었다. 시간은
강영수는 뜨거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장 회장님,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소월이 앞에서 장인어른이라고 부르는 정을 생각해서, 한 가족인 회장님을 위한 결정이에요. 남천 그룹이 강한 그룹 계열사가 되는 건 나쁜 점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 남천의 연간 수익은 100억 정도이지만 앞으로 강한 그룹 계열사가 된다면 연간 수입이 적어도 600억은 되겠죠. 이 600억은 강한 그룹에게 그저 자투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에요.”“그리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희는 어떤 이유로든 남천 그룹의 결정에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장 회장님은 여전히 그 위치에 계시면 됩니다. 하지만... 대표 자리는 교체해야 할 것 같네요.” 장해진은 화가 나서 관자놀이에 핏줄이 터질 정도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웃고 있었다.“강 대표님, 요 몇 년 동안 전 대표가 회사 실적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는 회사 전 직원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표를 바꾼다면 수중에 있던 프로젝트들은...”“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따로 사람을 파견해 인수인계하겠습니다. 물론... 회장님께서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추천하셔도 되고요.”“참, 듣자 하니 최근 남천 그룹에 자금 구멍이 나서 은행에서도 대출을 미루고 있다고 하죠? 회장님께서 키운 후계자는 실력이 좀 부족한 것 같네요. 회사에 위기를 초래한 사람을 이참에 해고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죠. 아니면 앞으로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어요.”강영수는 덤덤하게 장해진을 바라보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회장님도 아마 제 뜻을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계약만 체결하면 강한은 남천에 거대한 이익을 줄 뿐만 아니라 회수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따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수표를 드리죠.”“소월이와 제 결혼식에서 전 꼭 장인어른을 뵙고 싶거든요.”남성 부지 개발이 예상대로 완료되지 않으면 남천 그룹에게는 열 배의 위약금이 부과된다. 만약 위약금을 배상할 수 없다면 장해진은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가까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전연우는 장해진을 따라 룸에서 나왔다.“날짜를 잡아 네 신분을 대외적으로 발표할 생각이다. 오랫동안 내 옆에 있었으니 이제 정식으로 발표해야 괜한 말들이 나오지 않는 법이지.”“그러면 강 대표도 널 경계하지 않을 거다.”“네.”전연우의 눈에는 한 줄기 매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이 정도 일도 못 하면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술 좀 마시면 될 것을 어디서 고고한 척하고 있어? 여긴 직장이지, 제삿집이 아니야! 그 반반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네까짓게 천하일성에 와보기나 보겠어?”엘리베이터 끝 복도에서 뚱뚱한 매니저가 웨이터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송시아는 매니저에게 이마를 쿡쿡 찔리면서도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엘리베이터에서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는 차분한 분위기의 잘생긴 남자를 보았을 때, 그녀의 눈은 계속 그에게 향했고, 귓가에서 들려오는 꾸지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전연우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고,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송시아는 흠칫 놀랐다. 그에게서 익숙하면서도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불과 몇 초 만에 그녀의 시선을 끈 남자는 이미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매니저는 정신이 딴 데 팔린 송시아를 보고는 또 머리를 쥐어박으며 욕했다.욕설이 끝나자 송시아는 테이블을 치우러 갔고, 그녀와 함께 룸서비스를 들어간 직원이 다가와 위로했다.“시아 씨, 괜찮아요? 매니저님이 심하게 말했어요?”송시아는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얼른 치우고 제시간에 퇴근하죠.”“그래요.”천하일성은 24시간 영업했고 3팀이 교대로 일했다. 이 테이블을 치우고 나면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에 알바를 더 많이 뛰어야 학비를 낼 수 있고, 대학에 다닐 돈이 생긴다.하늘은 원래 불공평한 법이다. 여기서 부자들이 하룻밤에 소비하는 금액은, 아마 그녀가 평생을 벌어도 벌지 못할 돈이었다.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얻는 것들
“지금 아이 상황이 많이 안 좋아요. 더 이상 지체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어요.”“지금까지 병원비가 정산되지 않아서 병원의 규정에 따라 더 이상 아이에게 약을 줄 수 없습니다.”김남주가 또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몰라 강영수는 차갑게 말했다.“전화 잘못 거셨어요. 저는 아이 아버지가 아닙니다.”말을 마친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옆에서 전화 내용을 듣고 있던 진봉도 잠자코 있었다.보아하니,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김남주가 돈이 없어 아이를 병원에 두고 도망간 모양이다. 확실히 그녀가 할법한 행동이었다.하지만 아이는 죄가 없다. 이대로 놔두다가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노부인이 가장 신경 쓰는 건 강씨 가문의 핏줄이다. 만약 소월 아가씨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김남주에게는 추호의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직원 식당으로 들어가려던 강영수는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넌 회사에 있어. 내가 가볼게.”“네.”강영수는 액셀을 밟고는 곧바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병원에 도착한 남자는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김남주는 머리에 거즈를 두른 아이를 안고 병원에서 쫓겨났고, 경비원은 비닐봉지에 있는 약도 버렸다.“이건 병원 규정입니다.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어떻게 수술을 해줍니까? 당장 나가세요!”김남주는 아이를 안고 무릎을 꿇은 채 울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제발 살려주세요.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에요. 돈은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볼게요.”“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이봐요, 계속 소란 피워도 아무 소용없어요. 요즘 누가 돈도 없이 진료를 받아요? 요 며칠 입원비용은 저희 나 선생님께서 대신 지급하셨어요.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저희도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어요.”김남주의 어깨에 엎드린 강혁의 작은 얼굴은 이미 탈수증상이 심해 보였다. 며칠 사이에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엄마, 나 죽어요? 혁이 너무 아파요. 아프면 아빠가 혁이 보러 온다고 했잖아요? 아빠 왜 안 와요? 혁이 아빠 보고 싶어요!”강영수
차에서 김남주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전에 둘이 싸우고 냉전을 할 때도 먼저 사과하는 사람은 언제나 강영수였다.여자가 무릎을 꿇던 순간, 강영수는 확실히 마음이 약해졌다.그녀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고집스레 말했다.“누가 우리 모자 생사에 관여하래? 이미 약혼도 했으면서, 약혼녀가 알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랑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겠어?”남자는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에 몰두했다.“저번에 우리 집에서 내 부인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누구더라? 내 앞에서 연기할 필요 없어.”여자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혁이만 아니었다면 나라고 강씨 가문에 가고 싶은 줄 알아? 가서 네 할머니 눈치 보면서? 어차피 여태까지 넌 아이를 돌본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모른 척해도 돼. 길옆에 세워 줘.”강영수는 매서운 눈으로 싸늘하게 말했다.“아이 양육권은 이미 변호사에게 계약서 작성하라고 했어. 넌 나 못 이겨. 법원도 양육권을 정신병 있는 어머니에게 판결하지 않을 거야.”김남주는 차갑게 웃었다.“그래서, 소월이보고 혁이를 키우라고 할 생각이야? 혁이가 모르는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고? 강영수, 나 아직 안 죽었어! 정신병이 뭐 어때서? 그러는 넌? 너도 미친 인간이잖아!”여자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그는 확실히 미치광이가 맞았다.김남주는 그를 보면서 입가에 이상한 미소를 짓더니 유유히 말했다.“지금 혁이 상황이 그때 너랑 똑같다는 걸 모르겠어?”“소월이는... 바로 그때의 심유고. 심유가 어떻게 너희 집을 망쳤는지 잊지 마!”“닥쳐!”강영수는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여자는 아이를 안고 있다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고, 재빨리 아이의 머리를 감쌌다.“내 말이 틀렸어? 그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잘못이라면 네 할머니가 했겠지. 그렇게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우린 헤어지는 일도 없었고 혁이도 이런 일을 겪지 않았어.”“소월이는 지금도, 앞으로도 절대 심유가 아니야. 넌 영원히 소월이를 이길 수 없어. 너처럼 눈에 온통 계산으로 가득 차지
대체 왜?혁이는 그녀가 낳은 그녀의 자식이다. 무슨 근거로 소월이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김남주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이번 생에는 절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간호사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처량한 울음소리를 듣고 가슴이 오싹해졌다. 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만약 강영수가 데려온 사람이 아니라면, 병원에서는 진작 경찰에 신고 했을 것이다.박순옥은 아이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차를 타고 달려왔다.원래 고열감기에 시달리던 혁이는 갑자기 백혈병이 발견되었다. 병원에서는 맞는 골수를 찾느라 바빴다.강영수가 바로 이 아이와 골수가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과 골수가 일치할 확률이 높았다.그는 거절하지 않고, 당일 밤 바로 수술에 동의했다.그들은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고, 불청객 김남주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순옥은 두려움에 떨며 두 부자의 평안을 위해 기도했다.“어르신, 안심하세요. 수술 성공 확률이 높으니 대표님은 아무 일 없을 겁니다.”“일단 소월에게 알리지 마.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 아이 성격이라면 당장이라도 귀국할 거야.”그렇지 않으면 혁이의 일은 숨길 수 없을 것이다.강영수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두 사람은 가까스로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일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당분간 외부에 공개할 수 없었다.박순옥은 걸어오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얼굴빛이 차갑게 굳어졌다.“네가 여긴 왜 왔어?”김남주는 수술실 문에 표시된 수술 중이라는 글자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녀가 사라진 며칠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소 야윈 모습이었다.“혁이는 제 아들이니 당연히 와야죠. 어르신이 절 막을 권리 없어요.”박순옥은 콧방귀를 뀌었다.바로 이때, 진봉의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는 조용한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소월 아가씨!”휴대폰 너머 장소월은 호텔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에는 이불커버를 들고, 어깨에
수술은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두 사람 상태는 모두 안정되었다.강영수가 깨어났을 땐 날이 밝아있었다.침대 옆에서 그를 간호하고 있던 진봉이 강혁의 상황을 보고했다.“제때에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아이는 이미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수술 후 3개월 정도 뒤면 완전히 회복된다고 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3개월이면... 마침 장소월이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다.강영수가 연신 몇 번 기침했다. 그가 침대 아래로 내려오려고 하자 진봉이 곧바로 그를 제지했다.“대표님, 아직은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열흘은 걸려야 회복되실 수 있습니다.”“소월이는... 연락 왔었어?”장소월을 떠올리자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건 이 일을 설명해야 한다는 불안감이었다. 아이의 일은 그야말로 거대한 폭발력을 지닌 시한폭탄과도 같았다.진봉이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말했다.“수술이 끝나기 한 시간 전 전화가 왔었습니다. 대표님께선 회사의 급한 일을 처리하고 계신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설사 아신다고 해도 소월 아가씨는 이해해주실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양육권만 가져오면 소월 아가씨와 예전처럼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강영수는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낯빛이 창백했다. 이마 앞 잔머리가 검은색 깊은 눈동자를 뒤덮었다. 그 속에 내려져 있는 어둠은 한참이 지나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그는 장소월에게 숨기는 것이 구경 맞는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문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남주가 어두워진 표정을 가리며 손에 전기 포트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깨어났구나. 혁이 일은 고마워. 병원비는 내가 최대한 갚을게. 이건 내가 만든 곰탕이야. 의사 선생님께서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더라고.”김남주는 말을 마친 뒤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 강영수를 힐끗 쳐다보고는 더는 머물지 않고 병실에서 나갔다.“김남주 많이 변했네.”예전의 그녀는 안하무인으로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
소민아도 고모의 말씀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미 뼈에 사무치게 경험해봤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기성은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그와 함께하지 않을 수도 없다.예전 회사에서는 시끄럽게 다투기가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그에게 벌컥 화를 내며 영원히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소리치곤 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이미 자신의 모든 마음과 몸을 그에게 맡겼다는 것을.그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다. 앞으로 그 어떤 험난한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예전처럼 그의 옆에서 비서로 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지금 생각해보니, 예전엔 가장 싫어했던 일들을 지금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다.기성은 씨,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예요?3년 뒤면 돌아올 거라고 약속했었잖아요. 기성은 씨는 날 속였어요.할 수만 있다면, 당신과 함께 과거로 돌아가 화도 내지 않고 다정히 잘 지내고 싶어요.명세진이 말했다. “요즘 서울은 너무 흉흉해. 앞으로 밖에 나갈 때 조심해야겠어. 하, 현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 그 바보 같은 놈이 혹시나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소민아는 명세진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신매매를 하던 암시장 유흥업소 세 곳이 경찰에 발각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대량의 금지된 마약 물품이 발견되었고, 면북으로 팔려갈 뻔한 백여 명의 여자들이 구조되었다고 한다.사진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운전기사는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 했지만, 결국 남운 국경 수비대에 붙잡혔다. 마지막으로 밝혀진 정보로는 약물에 완전히 중독되어 몰래 면북 지대로 넘어갈 계획이었다고 한다.그 아래에는 한 소녀가 길거리에서 납치를 당했는데, 경찰이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장기가 적출된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곧이어 휴대폰에 면북 범죄 조직 사이에서 싸움이 발생했고, 납치된 사람들이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
명세진이 말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결혼인데, 결혼식을 안 하다니 말이 안 돼. 남들이 알면 비웃을 거야.”신이랑의 입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그가 확연히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 뭐든 민아 씨 뜻에 따를 거예요.”“이게...”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명세진 역시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결혼식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양가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식사 자리는 빼놓을 수 없지.”소민아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이미 다음 달로 식사 약속을 잡아놨어요. 그때 아빠 엄마랑 같이 오세요.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하죠.”“그래... 너랑 이랑이 둘 다 괜찮으면, 고모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너희 둘이 알아서 결정해.”“참, 민아야, 혹시 현아한테 요즘 전화해 본 적 있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매일 집에 전화했을 텐데, 요즘 들어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 게다가...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해 봐도 통화가 안 돼.”소민아가 말했다. “오는 길에 이미 전화해 봤는데 연결이 안 됐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바쁜 일이 있는 거겠죠.”명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만, 현아 몸 상태가 걱정돼. 애가 혹시나 병이 더 악화되면 우리까지 못 알아보게 될까 봐.”소민아는 명세진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어떻게든 현아 언니랑 연락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그래, 오늘 쉬는 날이면 여기서 자고 가. 마침 빈방도 있잖아.”소민아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명세진과 함께 뒷마당을 산책했고, 신이랑은 회사에서 돌아온 소정국과 거실에서 장기를 두었다.소민아가 명세진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넌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혹시 다퉜어?”“민아야, 결혼은 평생을 좌우하는 일이
“혹시 나한테 불평하는 거야?”강지훈은 돌연 발작이라도 하듯, 제 몸 위에 있던 여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점점 더 기고만장해지는군!”천효연은 풀썩 주저앉았지만, 상처 입거나 괴로운 기색은 전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요염하게 몸을 비틀며 두 무릎으로 기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유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을 벌려 남자의 손가락을 천천히 빨아들였다. 남자의 눈에서 분노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행동은 더더욱 과감해졌다. 혀를 움직여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강지훈은 허리 아래 매혹적인 자태의 여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천효연 같은 여자는 전문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훈련을 받는다. 태생적으로도 요물과 같아서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모든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고 사로잡는다.강지훈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채, 엄청난 크기의 물건을 그녀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천효연은 입을 벌려 온몸으로 받아들였다.몇 번이고 반복되는 거칠기 그지없는 행위...마침내 절정에 이르자, 천효연은 마치 처음 경험해본 황홀한 맛인 듯 몽롱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혀를 내밀어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강지훈은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에 바로......소민아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소현아는 전화벨이 울린 지 3초 안에 빠르게 받곤 했었는데 말이다.신이랑은 손에 선물을 든 채 그녀를 위로했다. “불안하면 나랑 같이 가봐요.”소민아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런 곳은 한 번 가본 것만으로도 충분해요.”그녀는 지난번 북경 감옥에 갔을 때,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데다 깊은 산속을 뚫고 가야 하는 곳이라 일반적인 차는 전혀 드나들지 않는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끔찍한 소문들이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미경이 말했다.“현아 아가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효연 아가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송시아보다도 훨씬 나아요. 그 여자는 별장에 오자마자 왕이라도 된 듯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시켰잖아요.”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요.”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주사는 석 달에 한 번씩 맞는 것으로, 뇌의 핏덩이를 녹여준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북경 감옥은 밤이 되면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고, 가끔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오곤 했다.사방이 막혀 있는 격투장 안, 강지훈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내려와 부관이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링 위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숨통이 끊겨 있었다.이건 북경 감옥의 규칙이었다. 이긴 자는 다시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다.강지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소식이 없어?”부관이 묻지 않아도 소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장님,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마침 소장님이 조사하고 있는 일도 그쪽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합니다.”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나?강지훈은 손에 든 물건을 던져 버리고 검은색 군복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사무실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했고, 벽엔 부자연스러운 그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건 소현아가 이곳에 왔을 때 그린 그림이었다.강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관이 라이터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전화 안 왔어?”부관이 대답했다.“얼마 전 감옥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탈옥을 시도한 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연 아가씨가 돌아온 탓에 현아 아가씨가 주인님의 총애를 잃게 된 걸까? 주인님의 여자 교체 속도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효연 아가씨를 제외하고 주인님이 진심으로 마음을 쏟았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들은 늘 새로운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현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해서 심통을 부리며 주인님과 싸우기 일쑤였다.어쩌면 그녀에게 싫증이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현아 아가씨는 결국 주인님에게 버려진 듯하다.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도 없다. 주인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효연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만약 어르신께서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애써 그녀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현아가 수술대에 실려 간 뒤, 주인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규영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래야만 소현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현아의 머리에 주사기 바늘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정맥에 주사했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주사 안 맞을 거예요! 이거 놔요!”규영과 미경은 소현아의 팔다리를 누르며 안심시켰다. “현아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요.”집에 간다는 말을 듣자 소현아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약물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주변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규영이 물었다. “이 약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요셉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됐어요.”소현아의 뱃속 아기에게 조금의 문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