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는 윤서에게 혈기를 보양하는 한약을 먹이고 삼십 분이나 달랜 후 병실 밖에 나왔다.시간이 너무 늦었는지라 그는 병원에서 하룻밤 쉬고 내일 돌아갈 생각이었다.연우는 밖으로 걸어가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고요하고 어두운 베란다에서 야경을 보며 손으로 바람을 막고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는 입에 넣어 한 모금 마셨다.“후.”연기를 내뿜었다.담배를 절반 정도 피웠을 때 철용이 진단서를 들고 찾아왔다.“시간을 더 끌면 팔 년 전에 윤서에게 했던 최면 효과가 다 떨어질 거야. 이번에 정서 기복이 큰 게 바로 윤서 속마음이 반사된 거야.”“만약 마음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면 네가 주시하지 않았을 때 또 오늘 같은 일을 벌일 수 있어.”담배의 니코틴은 마음속의 응어리를 많이 녹여주었다. 담배 성분은 사람을 중독되게 한다. 하지만 연우에겐 그렇지 않았다.그는 중독된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갖고 싶을 때 갖지 못한다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고 뼛속까지 짜릿한 아픔이 도졌다. 하지만 갖는다면 이런 느낌은 순간 절정에 달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끊기 어려운지 말이다. 그런 고통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들게 했고 그는 그런 어둠 속에서 몇 년 동안 혼자 버텨온 것이다.“이 몇 년 동안 내가 윤서에 대한 보호는 이미 넘쳐났어. 성인도 됐으니, 모든 일을 내가 대신 결정해 주는 건 옳지 않아.”연우는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이런 말을 내뱉었다.철용은 라이터로 이 진단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진단서가 불에 조금씩 삼켜져 나중에 잿더미로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이 둘만 만나면 모두 어둠 속에 먹힌다.“이런 결정을 한 거 두 번 다시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처음은... 그가 장소월에게 마음이 없다고 했을 때였다.하지만 전연우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어둠 속에서 살기 적합한 사람 같았다. 빛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음침하게 한없이 비뚤어지면서 말이다.또 마치 은하수
팔 년 전, 서울은 그저 허름하고 낡은 도시에 불과했다. 거리엔 양아치들이 가득했고 사회가 혼란스러웠다.그날 사건은 목격자도 없었고 CCTV도 없었다.하지만... 이 팔 년 동안 연우는 포기하지 않고 증거를 찾기에 힘썼다.윤서더러 출국하라고 한 건 천식 말고도 그녀가 모든 것을 잊고 새로 출발하기를 바라서였다.“아악!”윤서는 목구멍을 찌르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연우가 병실에 들어갔을 땐 윤서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끌어안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몽롱한 시선으로 말했다.“오빠... 오빠 어디 갔어요?”윤서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렸다.연우는 반쯤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그의 목소리는 마치 마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윤서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한참이 지나자 그녀는 제법 진정되었다. 연우의 몸에 풍기는 옅은 담배 냄새를 맡으며 그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오...오빠... 아까 엄청 무서운 악몽을 꿨어요. 너무... 너무 무서워요. 꿈에서 난 피투성이로 됐는데 진짜 너무 아팠어요.”“오빠를 찾으러 갔는데, 근데... 어떻게 찾아도 오빠가 보이지 않았어요. 원장 엄마가... 오빠가 나 버린 거래요.”“꿈일 뿐이야. 진짜가 아니야.”연우는 그녀의 옆에 있는 커튼을 거두었다. 그러자 빛이 병실에 비쳤다.“날이 밝았어. 오빠가 퇴원 절차 밟고 널 데려다줄게.”윤서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그의 옷을 꼭 쥐고 있었다.“하지만 그 꿈은 마치 진짜 벌어진 일 같았어요. 너무 무서워요.”연우는 윤서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품에서 떨고 있는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윤서가 진정됐을 무렵, 안색은 꽤 좋아졌다. 그녀는 조용히 연우의 손을 잡고는 그와 함께 병원에서 나갔다.조수석에 앉은 후, 연우는 그녀에게 안전띠를 매주었다.차는 평온하게 가든 아파트에 도착했다.땅바닥의 핏자국은 연우가 직접 처리했다. 꼬박 하루 동안 힘들게 보낸 후 그는 네시간만 자고 다시 회사에 갔다.오 아주머니가 아직 병원에서 약물치료를 받고
소현아는 또 소월에게 우유 하나를 주었다.“소월아, 꼭 힘내! 네가 시험 끝내면 우리가 데리러 올게. 저녁에... 큰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어!”단모연은 차창에 손을 얹고 소월을 향해 흔들었다.“결과가 어떻든 나랑 허이준은 꼭 널 올해 수능 수석으로 만들 거야. 시장님께서 직접 너에게 상장을 수여하도록 말이야. 힘내!”허이준은 다른 말 대신 그냥 두 글자만 말했다.“힘내.”그들이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소월은 몸을 돌려 시험장에 들어가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도화지에 손이 닿는 순단, 소월은 최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필을 들었다.저번 생에도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자신의 그림 실력을 검증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긴장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참 좋아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그렇게 반대했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만히 그림을 그렸다.그 후... 강영수랑 함께 하고 나서부터 그 누구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소월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두 시간 동안의 스케치, 드로잉 등등을 완성한 후, 시험을 마치고나니 시간은 이미 많이 지났다.여섯 시 반, 소월은 시험장에서 나왔다.현아는 예전처럼 그녀를 향해 달려오며 흥분된 목소리로 소월의 이름을 불렀다.“소월아... 소월아... 소월아...”“시험 어땠어? 괜찮아?”소월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내 생각엔 꽤 잘 쳤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아.”단모연은 한쪽 팔을 소월의 어깨에 두르면서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 이제 축하하러 갈까? 마침 잘됐네. 우리 한동안 제대로 놀지 못했잖아.”소월은 시간을 한눈 보았다.“아, 어쩌지. 난 가봐야 할 것 같아.”단모연: “쯧쯧. 아직 결혼식 올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단속하니 원...”소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걱정되었나 봐. 우리 다음에 함께 놀자.”현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으면서 소월의 핸드폰을 들
저녁, 허이준이 해산물 구이 가게를 예약했다.가게가 위치하여 있는 대학가는 야시장이 열려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지금은 때마침 바닷가재 철이라 맥주와 함께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단모연이 말했다.“우리 밖에 나가서 먹을까?”소현아가 대답했다,“좋아. 난 상관없어.”장소월도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처음 길거리 음식을 먹었던 건 강용과 함께 보냈던 작년 그믐날이었다. 하지만 당일 밤 곧바로 설사 때문에 고생을 했었다.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장소월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최대한 조금 먹을 수밖에 없었다.네 사람이 밥상 하나에 둘러앉았다.허이준과 단모연은 한눈에 봐도 처음 온 것 같지 않았다. 곧바로 쟁반 하나를 갖고 가 익숙하게 원하는 구이 재료를 와구와구 담았다. 장소월은 얼마 먹지 못할 것이니 조금만 담았다.네 사람은 추가로 바닷가재 4킬로를 주문했고, 단모연은 맥주 한 상자를 들고 가 자리에 앉았다.“너희 여자애들은 마시지 마. 나랑 이준이만 마실 거야.”장소월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마당 안 몇십 개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시끌벅적 떠들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너희들 여기 자주와?”단모연이 대답했다.“자주는 아니고 가끔씩만 와. 우리 이준 남신께선 피아노 수업과 아르바이트로 스케줄이 꽉 차 있어 학교가 아니면 보지도 못한다니까.”허이준이 밀크티 두 잔을 소현아와 장소월에게 나누어 주었다.“내 마음대로 대충 샀어. 먹어봐.”장소월이 말했다.“고마워... 이거 밀크티야? 나 아직 이거 못 먹어봤어.”소현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못 먹어봤다고? 거리에 널리고 널린 게 밀크티 가게인데 어떻게 못 먹어봤을 수가 있어. 그럼 빨리 마셔봐. 난 너무 좋아해서 하루에 몇 잔이나 마셔.”“자. 내가 빨대를 꽂아줄게.”소현아가 익숙한 손길로 포장을 뜯고 빨대를 꽂고는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난 외출을 별로 안 하거든. 아버지께서 반대하셔서 이런 야시장에 온 것도 이번이 두 번째야.”단모연이 탄식을 내뱉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장소월에게로 향했다.장소월이 대답했다.“응. 떠났어.”소현아가 물었다.“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야?”소현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번 강용은 농구를 칠 때 그녀의 손에서 막대 사탕 하나를 빼앗아갔었다. 며칠 후 그녀에게 새로 하나 사주겠다고 했으나 지금까지도 미동조차 없다.“나도 몰라. 강용 어머니의 병 치료가 끝나면 아마 돌아오겠지.”단모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걔가 간 이후로 우리 이준이가 고달파졌어. 책상 서랍에 편지가 가득 쌓여있다니까. 그 소녀들을 피하기 위해 수업에도 별로 안 들어와.”30분이 지나고 8시가 막 지난 시간, 장소월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화기애애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분위기가 단번에 조용히 가라앉았다.장소월이 핸드폰 화면 속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나 끝났어. 학교 문 앞으로 나 데리러 오면 돼.”“...”“그래. 기다릴게. 조심히 와.”간단한 몇 마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난 이제 가야겠어.”단모연이 말했다.“우리가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그다음에 현아를 집에 데려다주면 돼.”소현아가 곧바로 손을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택시 타고 가면 돼.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희들을 귀찮게 할 수 없어.”단모연이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여자아이가 혼자 택시를 타는 건 위험해. 오늘 차를 몰고 나왔으니까 같이 가자.”장소월도 그녀에게 말했다.“허이준의 차를 타고 가. 아니면 나 걱정돼.”소현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허이준은 마침 차를 학교 문 앞에 세워두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돌연 머지않은 곳 어딘가에서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풀숲에서 갈기갈기 찢긴 옷을 입고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남자 한 명이 힘겹게 달려 나왔다. 남자는 다리 한쪽까지 잘려있었는데 아직도 피가 흐르는 걸 보니 잘린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살려주세요. 누가 절 죽이려고
전연우가 별장에서 이런 일을 저지른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종래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한 사람을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다.장소월은 처음엔 너무 무서워 눈물까지 흘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어느덧 점차 무덤덤해졌다.그는 처음부터 이렇듯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행했다. 그 손에 묻은 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만약 그가 언젠가 서울의 패권을 잡게 된다면 그 자리는 수많은 시체를 쌓아 올려 올라가게 된 것일 것이다.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대부분의 기억이 흐릿해졌다. 반면 이 복면을 쓴 사람에 대한 기억은 뚜렷했다. 그는 전연우의 수하인 강지훈이라는 사람이다하지만 전연우가 그를 찾은 시간은 3년 후가 아니었던가? 왜 벌써?설마... 모든 일이 앞당겨져 일어나는 건가?장소월은 당황스러움과 걱정에 휩싸였다. 그런 감정이 왜 생겼는지 알 순 없었지만 말이다.전생의 일은 결국 바뀌지 않는다는 건가? 당시의 운명을 바꾼다고 해도 언젠가는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죽어야 할 사람은 역시나 죽게 된다!그럼 그녀는?전생의 삶이 되풀이되어 또다시 천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진무현은 뒤로 물러서며 손의 칼을 꼭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의 몸 전체는 두려움에 휩싸여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가까이 오지마... 오지마... 난 잘못한 게 없어. 사람 잘못 봤어.”강지훈이 손에 쥐고 있던 몽타주를 들여다보았다.“아니, 내가 오늘 찾을 사람은 너 맞아.”소현아는 곧 눈물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울먹였다.“우리 얼른 가자. 나 너무 무서워.”장소월이 생각에 잠겨 있을 그때, 돌연 비명소리가 귀를 때렸다.“소월아, 조심해!”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누군가에 의해 저만치 밀려났다.허이준이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남자가 소현아를 감싸 안은 뒤 칼로 목을 겨누고 있었다.진무현이 말했다.“다가오지 마. 경고하는데 조금만 더 오면 이 여자 죽여버릴 거야.”장소월이 소리쳤다.“현아야!”
“강지훈, 저 여자 끌어내.”강지훈은 이어폰으로 명령을 들었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장소월이 말했다.“그 아이보다 제 몸값이 더 높아요. 전 장해진의 딸이니까요. 그러니까 현아는 놔줘요.”소현아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소월아... 난...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그러니까 오지 마.”“너 저놈들과 한패였구나.”진무현이 원수 보듯 장소월을 쏘아보며 오싹한 웃음을 지었다.“좋아! 네가 와! 허튼짓을 부렸을 때 그 후과가 무엇일지는 잘 알겠지?”“안 돼... 소월아, 안 돼!”장소월이 그녀를 안심시켰다.“괜찮을 거야. 현아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게 내가 놔두지 않아.”그때 전연우가 소리쳤다.“강지훈!”모든 사람들이 장소월에게 주목하고 있을 때 강지훈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여자가 죽으면 대표님의 약점도 사라지게 됩니다. 전 그 누구도 대표님의 위협이 되지 못하게 할 겁니다.”“날 배신한 후과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진무현은 8년 전 백윤서를 범한 한 무리의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당시 전연우는 백방으로 그를 찾았으나 결국엔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오늘 강지훈의 손에 잡혔고, 때마침 우연히 장소월이라는 기회를 거머쥐게 된 것이다.진무현이 말했다.“좋아. 네가 와. 허튼짓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등 뒤에 서 있는 허이준과 단모연에게 눈빛을 보냈다.단모연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장소월이 가까이 다가가자 진무현도 손에 힘을 풀었다. 두 사람이 교환되는 찰나, 복면을 쓴 강지훈이 돌연 입을 열었다.“아가씨의 체면을 봐서 오늘은 이만 물러간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게 좋을 거야. 다시 우리한테 잡히는 날은 오늘처럼 운이 좋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뒤 강지훈은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차, 사람들... 모두 빠른 시간 안에 자취를 감추었다.진무현이 소현아를 놔주고는 돌연 칼을 들고 장소월을 향해 달려갔다.“죽어!”탕!
어느 은밀한 지하실.강지훈이 바닥에 꿇어앉아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있었다. 그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가슴팍의 통증을 견뎌내고 있었다.그가 다시 일어서려 바닥에 팔을 짚었으나 허리를 채 펴기도 전에 전연우의 발이 또다시 그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강지훈은 더는 일어서지 못하고 지하실 구석에 나뒹굴었다. 입에선 검붉은 피까지 뿜어져 나왔다.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오늘 어찌 된 영문인지 전연우가 7, 8년 만에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이렇게나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말이다.이런 상황에선 그 누구도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지 못한다.전연우가 오만한 얼굴로 강지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다음은 없어.”그의 몸에서 위험하기 그지없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그때, 마른 몸집의 남자 한 명이 전연우에게 달려와 보고했다.“진무현이 죽었습니다.”전연우가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누가 죽였어?”남자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잘은 모르겠지만 강씨 가문의 차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진무현이 아가씨를 해치려는 그 순간, 한 명이 총으로 진무현의 머리를 쏴 죽였습니다.”지금은 예전처럼 혼란한 때가 아니다. 길 한 가운데서 사람에게 총을 쏘는 일은 강씨 가문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할 것이다.“강씨 집안에서 우리에게 이 일을 추궁하면 어떻게 하죠? 또한... 어르신께서 아가씨가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걸 아신다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에요.”전연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내가 해결할 거야. 나머지 둘은 찾았어?”부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그중 한 명은 저희한테 쫓기다가 차에 치어 절벽 아래로 떨어졌으니 아마 죽었을 겁니다. 다른 한 명은 듣기론 미얀마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쪽 조폭 세력과 결탁해 있어 저희들이 손을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계속 사람을 시켜 감시해.”“네.”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진무현이 왜 하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