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연은 남원별장에 도착했고 공교롭게도 남원별장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안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런 결과가 올 거라고 오부연은 생각지 못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전화도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오부연은 알지 못했다. 위층 방안에는 장소월이 있었고 반응을 해주지 않은 것뿐이었다.지금 장소월의 상태는 문밖을 나갈 상황이 아니었다.마찬가지로 전연우도 방안에서 그녀의 행동 하나까지 감시하고 있었다. 장소월은 똑같이 숨어있었기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일은 한두 마디 말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전연우는 머플러 하나를 가져와 그녀의 몸에 둘렀다.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목 주변에는 누가 한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선명한 키스 마크가 있었다.장소월은 연한 색의 니트를 입고 있었고 헐렁한 목 주변으로 인해 보드라운 어깨가 드러났다. 남자의 살짝 거친 손이 여자의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그 사람은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머리를 숙여 그녀의 입에 키스했고 장소월은 표정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거야? 아니면 오빠와 어울리지 않는 거야? 백윤서 언니가 나와 오빠가 만난걸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봤어? 우리 사이의 일이 새어나가길 바라지 않는다면 여기서 그만해.”옷무새를 정리하고 전연우를 밀어낸 그녀는 그 길로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전연우는 찰떡처럼 붙어와서 그녀를 안고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서재로 갔다. 전연우는 장소월을 무릎 위에 앉힌 상태로 안고 있었다.“뭐 하는 거야? 난 방으로 갈 거야.”전연우는 그녀의 허리를 움직일 수 없게 꽉 끌어안았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 주면 나가게 해줄게. 아니면 여기서 그냥 할 거야.”전연우의 한마디에 장소월은 조용해졌다. 전연우는 메일로 온 문서들을 처리했고 온통 러시아어로 된 문서들을 장소월은 하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심심해 보이는 장소월을 보고 전연우는 책상 위의 책장에서 책을 하나 가져와 그녀에게 주었다.“
욕을 하려고 입을 벌리는 그때, 책상 위에 있던 전연우의 전화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슬쩍 쳐다본 화면에는 ‘윤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백윤서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장소월은 전연우가 바로 일어나서 전화를 받을 줄 알았다. 전화를 받을 때 항상 옆에 사람을 두지 않는 전연우의 습관을 장소월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저번 생에 그의 아내로 있을 때에도 장소월은 항상 자리를 피해주어야 했다.지금의 장소월도 그러기를 원했다. 같은 공간에 그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전연우는 전화를 받지 않을 생각으로 전화기를 힐끗 쳐다보고 말았다.“안 받아?” 장소월은 모른 척 물어보며 책을 넘겼다. 전화기는 십몇 초 동안 울리다 끊겼고 이내 두 번째 벨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전연우는 전화기를 들었고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슬쩍 풀어지는가 싶을 때 장소월은 엉덩이를 들어 일어나려 했다. 의자가 슬쩍 뒤로 밀려난 전연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잡아 앉혔다. 그로 인해 그녀는 몸 전체가 그의 품에 갇히게 되었다. “한 번만 더 움직이면 다음에는 어디도 못 가게 줄을 묶어 여기에 둘 거야. 얌전히 있어. 이것만 처리하고 갈 거야.”전연우는 전화기를 들고 귀에 가져다 댔다.“무슨 일 있어?”전화기로 흘러나오는 백윤서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오빠, 오늘 오빠랑 점심 같이하려고 회사에 갔는데 성은 오빠가 회사에 없다고 했어요.”“응, 학교에서 왔다 갔다 불편한데 앞으로는 회사로 찾아오지 말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나 해.”그 말을 들은 백윤서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오빠, 기억 안 나요? 저 이번 시험에 통과돼서 수능 시험 치지 않아도 돼요. 바로 대학 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학업에 관한 일은 바쁘지 않다는 말이에요. 앞으로 날마다 오빠와 같이 밥 먹고 싶어요. 요새 집에 오는 것도 적어지고 오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불쌍하게 말하는 백윤서의 말투가 전화기로 들려왔다.“나 지금 일이 있어서 바빠, 할 말 있으면 돌아가서 다시 하자.”“오
그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녀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로 올 일도 없었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그녀가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가 수면제를 먹었을 때 그녀를 안고 화장실로 가서 토해내게 했고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을 때 그녀를 위해 밥을 해주고 억지로 먹여주었다. 더더욱 그녀가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하지 않아도 충분한 일까지 찾아서 했다.만약 전연우는 그녀가 그를 좋아하지 않을 때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에게 마음이 생겼다면 저번 생에 그녀가 했던 모든 일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저번생에 그렇게나 그를 좋아했는데, 마지막에는 비굴하게 빌면서까지 그가 자신을 한번 봐주기를 원했는데 결국 그녀한테 온건 뭐였던가?장소월이 떠난 후 서재에서는 큰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 척했다. 전연우가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낸단 말인가,도대체 그가 뭐라고!홀로 돌아온 장소월은 전화선을 연결하고 인테리어 회사를 찾아 출입문을 새로 주문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잠금장치를 구매했다.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밖에서 열리지 않는 그런 잠금장치로.냉장고에서 그가 사 온 물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쓰레기통에 넣었다. 모두 기성은이 가져온 물건이었다. 약을 넣은 일이 있고 난 뒤로 장소월은 다시는 전연우의 어떤 물건도 건드리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장소월은 문을 닫았다. 자신이 순간 방심해서 은경애를 돌려보낸 것이 잘못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전연우가 들어올 기회는 없었다. 아까 장소월이 한 얘기에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그의 앞에서 이런 자포자기의 말을 할 때면 장소월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통쾌함을 느꼈다. 분명히 여태껏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인데. 오부연은 병원으로 돌아왔다.“죄송합니다. 큰 도련님, 남원별장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 소월 아가씨도 거기에 없는 것 같습니다.”병실 침대에 앉아 있던 강
새로운 도어락으로 교체한 뒤 전연우는 며칠 동안 나가지 않았다. 마치 남원별장에서 계속 살 것처럼 말이다.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고 계속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장소월은 아래층으로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그를 보기 위해 내려가더라고 바로 돌아섰다.온경애가 돌아와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오늘은 주말이기에 학교도 휴식했다.백윤서도 남원별장으로 돌아왔다.식탁에 앉으니 온경애는 이미 그릇과 젓가락을 두 세트 더 꺼냈다.백윤서가 말했다.“연우 오빠 요즘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요? 나도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래요.”전연우는 젓가락을 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온경애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아가씨께서 외부인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전연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고 온경애는 겁이 나서 목을 움츠렸다.“저도 아가씨의 뜻을 전한 겁니다.”백윤서가 전연우를 힐끗 보며 말했다.“연우 오빠, 소월이가 언제까지 이럴까요? 담임 선생님이 나한테 소월이가 학교에 다시 나오도록 설득하라고 하셨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차례 시험이었을 뿐인데 다시 학교에 가면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 1반은 학습 진도가 빨라서 학교에 계속 나가지 않으면 따라잡을 수 없을 거예요. 오빠가 소월이 잘 설득해 줘요. 계속 이렇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네 일에나 신경 써. 소월이는 내가 설득할 테니까. 밥 먹고 일찍 돌아가.”백윤서는 전연우가 자기를 내쫓을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가도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오늘 온 것도 전연우와 장소월이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온 것이었다. 이제야 겨우 그의 여자 친구가 되었다. 장소월이 전연우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연우 오빠, 난 오빠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내가 밥도 챙겨주고 청소도 해줄게요.”“말 들어. 며칠 지나면 나도 돌아갈 거야. 소월이 아픈데 혼자 집에 있
“아가씨,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전화하겠습니다.”아이고 이제부터 온경애가 여기서 혼자 지내야 할 텐데 조금 무서웠다.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서는 앞에 있는 반찬을 먹었고 그녀가 자기 앞을 지나가자, 손에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밤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장소월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서 사는 게 좋으면 그냥 줄게요.”이후에 그가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그녀와는 상관없었다.전연우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강씨 가문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전연우에게는 강씨 가문과 대적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오 집사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다. 강씨 가문에서 오 집사의 지위는 꽤 높을 불은 장소월도 예상하지 못했다. 외부에서도 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장소월이 집에서 한 달 동안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콩쿠크에서 그린 그림이 상을 탔고 그녀에게는 꽤 좋은 시작이었다.그녀는 오랫동안 배터리가 없었던 핸드폰을 충전했다. 부재중 전화가 엄청나게 많았다. 핸드폰을 켰을 때 제일 처음 받은 전화가 강씨 집안에서 온 전화였다...부재중 전화에는 외국에서 온 전화도 있었다.그 핸드폰 번호는 낯설었지만, 그 번호로 된 이메일 주소를 찾았다. 메일에 외국에서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러시아 거리 광장에서 비둘기들이 빵을 먹고 있는 사진, 또 다른 사진에서는 비둘기가 그의 허벅지에 앉아 있었다. 그가 예쁜 손으로 비둘기에게 빵을 먹여주고 있었다.비록 얼굴이 보이는 사진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녀는 이것이 강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가 떠난 지 사흘 뒤부터 계속해서 사진들이 메일로 왔었다.장소월은 그와 어떠한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화만 너머로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고마워’라는 말을 했다.그 때문에 그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강씨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도우미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강영수
테이블 위에는 갓 달인 팥죽이 놓여 있었다.사모님 앞에는 절반 정도 드시고 남긴 팥죽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내가 다시 오라고 한 이유가 뭔지 알아?”사모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장소월은 얇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습니다.”사모님이 물었다.“지금 영수에 대한 마음이 어떠니? 계속 만날 생각이야? 만약 영수한테 식망했다면 이 할미는 널 탓하지 않는다. 우리도 억지로 널 붙잡지 않을 거야. 네가 영수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것도 넌 이미 자기의 생각을 정리했고 모든 걸 이해했다는 뜻이잖니. 이 할미는 그 하나만으로도 네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모든 여자가 너처럼 이성적인 건 아니란다. 하지만 네가 너무 이성적이기에 영수는 냉정하다고 느꼈을 거야. 가끔은... 억지를 부려도 괜찮아. 바꿔 말하면 영수도 네가 그러길 바란 거야. 네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겠지. 네가 조금이라도 성질을 부리면 자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잖니.”사모님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이 할미한테 말해 봐. 너도 영수를 좋아했었니?”장소월은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진지한 감정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일은 오 집사님이 조금 말해주셨습니다. 저도 입장 순서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영수에게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사모님은 웃으면서 그냐의 손등을 토닥였다. 간곡하게 말했다.“사실 네가 강씨 집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난 첫눈에 마음에 들었어. 나에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투명한 거울이 있단다.”“이 할미는 돌려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 속셈이 있는 사람은 바로 알아볼 수 있어. 너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강씨 집안에 오기 전에 난 너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했었다. 네가 장씨 집안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야심이 가득한 오빠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강씨 집안으로 온 것도 기댈 곳을 찾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단다. 그 점은 네가
사실 그녀도 아직 기껏해야 학생일 뿐이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한 것들은 또래들보다 훨씬 많았다.이 나이에는 공부하면서 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오히려 자기보다 3, 4살 많은 성인을 달래줘야 한다.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운명이 걱정을 달고 사는 것인 듯하다.장소월은 위층 방에 가서 노크했다.퍽!알 수 없는 물건이 문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에 장소월은 깜짝 놀라서 손에든 약을 떨어트릴 뻔했다.“꺼져.”“정말... 나 들어가면 안 돼?”방안이 몇 초 동안 조용해졌다. 장소월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향해 달려와 껴안았다. 장소월의 몸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네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나 숨 막혀.”강영수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제야 장소월은 몇 번 숨을 쉬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며칠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 그는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턱에 난 거뭇거뭇한 수염에 충혈된 눈을 한 채 다크서클이 진해진 모습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장소월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쓰다듬었다.“아파?”강영수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네가 와서 이제 아프지 않아.”불쌍한 말투는 강용과 똑같았다.“내가 약 발라줄게.”“응.”갈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장소월은 필요한 약들을 찾아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아프면 말해. 살살할게.”“응.”그의 시선은 계속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장소월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제야 그가 자기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깨달았다.장소월은 그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상반신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장소월은 상처가 감염될
장소월은 물컵을 가져다가 침대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내가 돌아오든 안 오든 너 혼자 잘 챙겨야 해. 네 몸은 네 거니까.”그녀가 손을 내려놓으려 할 때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잖아. 그거 지금도 유효해?”장소월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내가 돌아오길 원한다면 돌아올게…”사실 두 사람 사이에 평등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고개를 숙여야 하는 쪽이다.그녀가 돌아온 이유는 사모님 때문뿐만 아니라 더욱이는 아버지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어젯밤에 전연우와 아버지가 통화한 내용을 전부 다 들었다.그 내용은 만약 그녀가 강씨 집안에 시집가지 못하면 그녀는 상품처럼 취급되어 다른 사람한테 보내질 텐데 될수록 전연우에게 도움 되는 쪽으로 되게 말이다.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장해진의 친딸은 자신인데 왜 아버지는 전연우에게 더 신경 쓰는지 이상했다.장소월은 이렇게 변하려 노력하고 더 잘하려 하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장소월이 그 통화내용을 들었을 때 그녀 마음속의 냉기가 팔다리와 몸 전체에 퍼졌다. 그녀의 가치는 고작 장씨 집안의 결혼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녀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그녀의 처지는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다.또한 장소월은 이 집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만약 그녀가 도망친다고 해도 아버지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전연우가 자신한테 무슨 짓을 하든 막을 수 없다.그날밤 그가 비를 맞으면서 남원별장에 온 이유는 오직 그녀 때문이었는데, 이것만으로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었다.그를 본 순간 장소월의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지금 그녀는 선택할 자격도 전혀 없었다.“소월아… 너도 알겠지만 난 네가 기쁘게 돌아오는 걸 바랐어. 이번에… 난 절대 너를 놓지 않을 거야.”장소월은 고개를 숙여 서로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그녀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전연우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리샬이 태블릿을 들고 전연우의 병실 침대로 다가와 말했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께서 그 지역에 들어가신 후 신호가 사라졌습니다.”전연우는 눈을 감고 침대에 기대앉았다.“오늘은 그만하면 됐어. 나가봐.”“알겠습니다.”그가 가까이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그녀는 더 깊숙이 몸을 숨길 것이다. 그녀가 시내로 발을 디딘 순간, 즉시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소월아, 7일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시간이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와 함께 떠나야 할 거야.’강지훈은 전연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원에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본 순간, 서늘했던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강지훈은 흥미로운 듯 의자에 앉았고, 뒤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이렇게 엉망인 모습은 처음 보네요. 어때요? 버림받은 기분이?”“아, 참. 그 여자 찾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소용없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 여자 당신과 함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요. 설사 돌아간다 해도,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여자를 옆에 둔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 많은 돈을 생판 남에게 물려줄 리는 없을 테고.”“당신한테 어울리는 여자 소개해 줄까요? 당신한테 아기를 낳아줄 여자 말이에요.”강지훈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바보 하나랑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워?”강지훈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밖에 있던 간호사가 안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고 제지하러 들어가려 했지만, 문밖의 경호원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들의 허리에 찬 총을 본 그녀는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강지훈은 다시 반격했다. “내 여자는 내 아이를 둘이나 가졌어요. 전연우 씨... 당신 여자는 어때요?”전연우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강지훈을 쏘아보고
“알겠습니다.”이미 정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위장할 필요가 없으니, 전연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곁으로 데려왔다. 별이는 얼굴 분장을 지웠지만, 분홍색 드레스는 여전히 입고 있었다.“네가 여자아이였다면, 엄마가 떠나는 게 더 어려웠을까?”별이는 순수한 눈빛으로 전연우를 빤히 바라보며 옹알이를 했다.“엄... 엄마...”전연우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말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이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전연우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강용은 주변 길에 꽤 익숙했던지라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무인 구역에 도착했다. 액셀을 끝까지 밟고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강용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소현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토할 것 같은 충동을 참았다.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힘들면 나한테 기대서 좀 자.”“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흐어엉... 소월아, 나 강지훈한테 잡혀가기 싫어.”장소월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우리 이제 안전해.”강지훈에게 이 지역의 경찰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기와 탄약을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곳에는 강지훈만의 인맥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소현아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즉시 도시 전체를 포위하여 그녀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봉쇄 직전, 강용이 모는 차가 딱 30초, 간발의 차이로 그곳을 빠져나왔던 것이다.강지훈은 소현아가 묵었던 호텔을 찾아갔다. 스위트룸 안, 침대에 던져진 임부복 드레스와 머리맡에 놓인 소현아의 사진이 보였다. “멍청한 년, 그깟 사람 하나 못 잡고, 뭐 하는
소현아는 규영과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제 이름은 김소단이에요.”규영은 즉시 소현아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미경아, 빨리 주인님 모셔와. 현아 아가씨 찾았어.”소현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아아아... 나쁜 사람. 빨리 이거 놔요.”“살려주세요! 임신부를 납치하려고 해요!”“미경아, 빨리 와... 아가씨, 더는 도망가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단 말이에요. 주인님은 아가씨를 잊지 않으셨어요.”“난 당신 몰라요. 놔줘요!”아무리 용을 써도 규영을 뿌리칠 수 없자, 소현아는 그녀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규영은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현아 아가씨...”소현아는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재빨리 도망쳤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침 강용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장소월과 마주쳤다. 장소월이 말했다. “현아야, 조심해. 뛰지 마.”“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소현아는 체형이 약간 통통한 데다 평소에 운동도 부족했던지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소현아가 다급히 말했다.“큰일 났어... 소월아, 강지훈이 나 찾으러 왔어. 방금 쇼핑몰에서 규영이랑 마주쳤어.”“흐흑... 소월아, 강지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현아는 너희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전연우 하나로도 모자라 이제 강지훈까지 나타나다니. 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다행히 전연우는 강용이 풀어놓은 수면제를 먹고 기절한 상태라 당분간은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강지훈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연우보다 상대하기 훨씬 어려운 인물이었다. 장소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용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해?”강용이 말했다.“지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