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어락으로 교체한 뒤 전연우는 며칠 동안 나가지 않았다. 마치 남원별장에서 계속 살 것처럼 말이다.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고 계속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장소월은 아래층으로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그를 보기 위해 내려가더라고 바로 돌아섰다.온경애가 돌아와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오늘은 주말이기에 학교도 휴식했다.백윤서도 남원별장으로 돌아왔다.식탁에 앉으니 온경애는 이미 그릇과 젓가락을 두 세트 더 꺼냈다.백윤서가 말했다.“연우 오빠 요즘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요? 나도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래요.”전연우는 젓가락을 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온경애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아가씨께서 외부인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전연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고 온경애는 겁이 나서 목을 움츠렸다.“저도 아가씨의 뜻을 전한 겁니다.”백윤서가 전연우를 힐끗 보며 말했다.“연우 오빠, 소월이가 언제까지 이럴까요? 담임 선생님이 나한테 소월이가 학교에 다시 나오도록 설득하라고 하셨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차례 시험이었을 뿐인데 다시 학교에 가면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 1반은 학습 진도가 빨라서 학교에 계속 나가지 않으면 따라잡을 수 없을 거예요. 오빠가 소월이 잘 설득해 줘요. 계속 이렇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네 일에나 신경 써. 소월이는 내가 설득할 테니까. 밥 먹고 일찍 돌아가.”백윤서는 전연우가 자기를 내쫓을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가도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오늘 온 것도 전연우와 장소월이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온 것이었다. 이제야 겨우 그의 여자 친구가 되었다. 장소월이 전연우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연우 오빠, 난 오빠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내가 밥도 챙겨주고 청소도 해줄게요.”“말 들어. 며칠 지나면 나도 돌아갈 거야. 소월이 아픈데 혼자 집에 있
“아가씨,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전화하겠습니다.”아이고 이제부터 온경애가 여기서 혼자 지내야 할 텐데 조금 무서웠다.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서는 앞에 있는 반찬을 먹었고 그녀가 자기 앞을 지나가자, 손에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밤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장소월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서 사는 게 좋으면 그냥 줄게요.”이후에 그가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그녀와는 상관없었다.전연우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강씨 가문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전연우에게는 강씨 가문과 대적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오 집사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다. 강씨 가문에서 오 집사의 지위는 꽤 높을 불은 장소월도 예상하지 못했다. 외부에서도 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장소월이 집에서 한 달 동안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콩쿠크에서 그린 그림이 상을 탔고 그녀에게는 꽤 좋은 시작이었다.그녀는 오랫동안 배터리가 없었던 핸드폰을 충전했다. 부재중 전화가 엄청나게 많았다. 핸드폰을 켰을 때 제일 처음 받은 전화가 강씨 집안에서 온 전화였다...부재중 전화에는 외국에서 온 전화도 있었다.그 핸드폰 번호는 낯설었지만, 그 번호로 된 이메일 주소를 찾았다. 메일에 외국에서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러시아 거리 광장에서 비둘기들이 빵을 먹고 있는 사진, 또 다른 사진에서는 비둘기가 그의 허벅지에 앉아 있었다. 그가 예쁜 손으로 비둘기에게 빵을 먹여주고 있었다.비록 얼굴이 보이는 사진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녀는 이것이 강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가 떠난 지 사흘 뒤부터 계속해서 사진들이 메일로 왔었다.장소월은 그와 어떠한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화만 너머로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고마워’라는 말을 했다.그 때문에 그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강씨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도우미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강영수
테이블 위에는 갓 달인 팥죽이 놓여 있었다.사모님 앞에는 절반 정도 드시고 남긴 팥죽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내가 다시 오라고 한 이유가 뭔지 알아?”사모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장소월은 얇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습니다.”사모님이 물었다.“지금 영수에 대한 마음이 어떠니? 계속 만날 생각이야? 만약 영수한테 식망했다면 이 할미는 널 탓하지 않는다. 우리도 억지로 널 붙잡지 않을 거야. 네가 영수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것도 넌 이미 자기의 생각을 정리했고 모든 걸 이해했다는 뜻이잖니. 이 할미는 그 하나만으로도 네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모든 여자가 너처럼 이성적인 건 아니란다. 하지만 네가 너무 이성적이기에 영수는 냉정하다고 느꼈을 거야. 가끔은... 억지를 부려도 괜찮아. 바꿔 말하면 영수도 네가 그러길 바란 거야. 네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겠지. 네가 조금이라도 성질을 부리면 자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잖니.”사모님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이 할미한테 말해 봐. 너도 영수를 좋아했었니?”장소월은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진지한 감정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일은 오 집사님이 조금 말해주셨습니다. 저도 입장 순서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영수에게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사모님은 웃으면서 그냐의 손등을 토닥였다. 간곡하게 말했다.“사실 네가 강씨 집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난 첫눈에 마음에 들었어. 나에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투명한 거울이 있단다.”“이 할미는 돌려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 속셈이 있는 사람은 바로 알아볼 수 있어. 너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강씨 집안에 오기 전에 난 너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했었다. 네가 장씨 집안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야심이 가득한 오빠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강씨 집안으로 온 것도 기댈 곳을 찾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단다. 그 점은 네가
사실 그녀도 아직 기껏해야 학생일 뿐이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한 것들은 또래들보다 훨씬 많았다.이 나이에는 공부하면서 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오히려 자기보다 3, 4살 많은 성인을 달래줘야 한다.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운명이 걱정을 달고 사는 것인 듯하다.장소월은 위층 방에 가서 노크했다.퍽!알 수 없는 물건이 문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에 장소월은 깜짝 놀라서 손에든 약을 떨어트릴 뻔했다.“꺼져.”“정말... 나 들어가면 안 돼?”방안이 몇 초 동안 조용해졌다. 장소월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향해 달려와 껴안았다. 장소월의 몸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네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나 숨 막혀.”강영수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제야 장소월은 몇 번 숨을 쉬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며칠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 그는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턱에 난 거뭇거뭇한 수염에 충혈된 눈을 한 채 다크서클이 진해진 모습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장소월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쓰다듬었다.“아파?”강영수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네가 와서 이제 아프지 않아.”불쌍한 말투는 강용과 똑같았다.“내가 약 발라줄게.”“응.”갈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장소월은 필요한 약들을 찾아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아프면 말해. 살살할게.”“응.”그의 시선은 계속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장소월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제야 그가 자기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깨달았다.장소월은 그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상반신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장소월은 상처가 감염될
장소월은 물컵을 가져다가 침대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내가 돌아오든 안 오든 너 혼자 잘 챙겨야 해. 네 몸은 네 거니까.”그녀가 손을 내려놓으려 할 때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잖아. 그거 지금도 유효해?”장소월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내가 돌아오길 원한다면 돌아올게…”사실 두 사람 사이에 평등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고개를 숙여야 하는 쪽이다.그녀가 돌아온 이유는 사모님 때문뿐만 아니라 더욱이는 아버지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어젯밤에 전연우와 아버지가 통화한 내용을 전부 다 들었다.그 내용은 만약 그녀가 강씨 집안에 시집가지 못하면 그녀는 상품처럼 취급되어 다른 사람한테 보내질 텐데 될수록 전연우에게 도움 되는 쪽으로 되게 말이다.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장해진의 친딸은 자신인데 왜 아버지는 전연우에게 더 신경 쓰는지 이상했다.장소월은 이렇게 변하려 노력하고 더 잘하려 하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장소월이 그 통화내용을 들었을 때 그녀 마음속의 냉기가 팔다리와 몸 전체에 퍼졌다. 그녀의 가치는 고작 장씨 집안의 결혼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녀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그녀의 처지는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다.또한 장소월은 이 집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만약 그녀가 도망친다고 해도 아버지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전연우가 자신한테 무슨 짓을 하든 막을 수 없다.그날밤 그가 비를 맞으면서 남원별장에 온 이유는 오직 그녀 때문이었는데, 이것만으로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었다.그를 본 순간 장소월의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지금 그녀는 선택할 자격도 전혀 없었다.“소월아… 너도 알겠지만 난 네가 기쁘게 돌아오는 걸 바랐어. 이번에… 난 절대 너를 놓지 않을 거야.”장소월은 고개를 숙여 서로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그녀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장소월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너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남원별장에서 가져와야 할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내가 오집사한테 가져오라고 할게.”“아니야. 챙길 것도 없어. 여기에 모든 게 다 있잖아. 중요한 물건은 대부분 전에 있던 월세방에 넣어 두었어.”장소월이 다가와서 링거를 맞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는데, 약간 차가웠다.“춥지 않아? 내가 가서 핫팩 가져올게.”“그냥 나랑 여기 있어.”“그래.”장소월은 대답하고 부드럽게 그의 손을 이불 안에 넣어주었다.“뭐 좀 먹을래? 위가 좋지 않은데 공복에 링거를 맞으면 속이 불편할 거야.”말이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도우미였다.“도련님, 소월 아가씨... 뭐 좀 드세요. 사모님이 죽을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어요.”마침 타이밍이 맞았다.장소월이 말했다.“들어와요.”도우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장소월은 도우미가 두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큰 죽 그릇을 들고 왔지만 숟가락과 작은 그릇은 하나밖에 없는 것을 발견했다.“여기 놓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네, 소월 아가씨,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장소월은 도우미에게 핫팩을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도우미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직접 그에게 죽을 먹여주었다.그녀는 여전히 전과 똑같이 무슨 일을 하든 그를 자상하게 돌보아 주었다.강영수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넌 분명히 열여덟 살 밖에 안 됐는데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차분해. 조급해하는 것도 없고 무슨 일이 있든 항상 이렇게 침착한 것 같아...”그는 한숨을 쉬고 이어서 말했다. “사실 내 앞에서는 모든 걸 참을 필요 없어. 나한테 화를 내도 돼... 그렇게 하면 네가... 나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강영수가 더 이상 먹지 않는 것을 본 장소월은 죽을 옆으로 치우고 휴지를 꺼내 그의 입을 닦
연예 뉴스 헤드라인.「얼마 전, 관계자는 강한 그룹 대표가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자 장씨 가문의 아가씨가 슬픔 때문에 시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자퇴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오늘 강한 그룹 대표가 직접 운전해서 장씨 가문 아가씨를 학교에 보내준 것이 포착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강천 뉴스」김남주는 손에 든 신문을 반으로 찢고 힘껏 구겼다. “가짜야, 모두 다 가짜야. 영수가... 그럴 리 없어! 다른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어! 강영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좋아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지난 며칠 동안 김남주는 강천에서 강영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며칠만 지나면 그가 예전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그녀가 떠나 있을 때 행방을 조금만 알려주기만 하면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를 찾으러 온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 강영수는 벌써 5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김남주는 설명을 듣고 싶어 휴대폰을 들었는데, 그녀가 누른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였다.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김남주는 갑자기 눈이 번뜩이며 테이블 위의 모든 것을 쓸어 던지고 처참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영수야, 넌 평생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네가 그랬잖아, 우리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이 순간 김남주는 미친 사람 같았다.그녀는 다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전화를 끊자 다른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상대방은 말을 하지 않았다.김남주가 먼저 말했다.“이번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수를 완전히 내 소유로 만들어야겠어요.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렇게 할 거예요.”상대방은 차갑게 말했다.“너의 목숨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거였어. 그런데 이번엔... 도와줄게. 난 어떤 대가도 필요 없지만 내가 말하는 대로 해줘야겠어...”“좋아요. 약속할게요.”김남주는 조
전연우는 알릴 듯 말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왠지 모르게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기운이 더 차가워진 듯했다.초기에는 광산물 사업에 의존해서 돈을 벌다가 무슨 수단을 썼는지 후에 유전을 얻어서 몸값이 미친 듯이 올랐다. 해외에서 서울로 이민을 온 후 본전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본전 만으로도 그는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돈을 아무리 써도 재산을 탕진할 리는 없었다.전연우가 말했다.“말로 하는 건 쓸데없어!”황준엽은 한줄기의 희망을 본 듯 전연우 발 옆으로 기어갔다. 그는 지금 일어날 수가 없었다.“토지 소유권 문서를 줄게요. 아니면... 재산 양도 서류도 돼요. 당신이 나를 여기서 꺼내줄 수만 있다면 앞으로 평생 모자라지 않을 돈을 준다고 보증할게요.”“그 조건은 확실히 끌리긴 한데...”전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내려 그를 쳐다봤다.“하지만 난 그렇게 욕심이 많지 않아요. 나는 당신 명의의 모든 유동 자산과 석유 광산 주식의 70 %를 원합니다. 부동산을 포함해서요.”순간 황준엽의 눈이 커졌고 그는 갑자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이 전씨 놈아! X발, 내가 만만하냐. 네가 뭔데! 넌 내 옆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개에 불과했어. 내가 남해 땅을 개발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으면 네 프로젝트는 그냥 쓰레기가 될 거였어.”전연우는 화를 내지 않고 무덤덤하게 손수건을 꺼내 몸에 튄 황준엽의 침을 닦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황준엽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일어났다.“거기 서! 좋아... 동의할게. 그런데 내가 여기서 나가면 날 도와 다시 회사를 일으켜야 해.”전연우는 돌아서서 한 단어를 내뱉었다.“당연하지.”“성은아.”기성은은 걸어 들어와서 손에 든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모두 세 가지 서류였다.하나에는 회사의 주식 26%, 황준엽이 갖고 있는 나머지 0.1%의 주식이 적혀 있었는데, 이 무식만으로도 연간 배당금이 몇 억은 되기 때
송시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목적을 달성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나 경호원에게 말했다.“퇴원 준비해요.”경호원이 말했다.“송 대표님, 간호사가 대표님은 상처가 아물기 전엔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송시아는 아랫배를 만지며 빙그레 웃었다.“이 고비만 넘기면 나도 한동안 푹 쉬어야겠어요.”“알겠습니다.”저녁 12시 커다란 승합차 안, 송시아는 누워있는 남자와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어떤 곳에 도착했다. 핸드폰 신호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곳이었다.천 명은 족히 담을 수 있을 것 같이 커다랗고, 쥐 죽은 듯 고요한 그곳 별장 안은 의료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 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인 주치의 또한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주위엔 높디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전연우를 가두기 위해 만든 새장 같았다.안방은 수영장 하나도 담을 수 있을 만큼 드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연우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의사는 그의 손등에 다시 링거 바늘을 꽂고 있었다.하루 종일 바삐 돌아친 탓에 송시아도 많이 피곤했던지라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옷을 벗고는 반신욕을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우유를 마시며 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얼마 후,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그녀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남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다가왔다.송시아는 매끄러운 긴 다리를 뻗어 눈앞의 남자를 도발했다.“여기 찾지 못할 줄 알았어요.”“나한테 누군가를 찾는 건 아주 간단한 거라고 했잖아.”송시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내가 알아봐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건 알려줄 수 없어. 너희들 사이 일엔 끼어들지 않을 거야. 난 그냥 네 뱃속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 내 대를 잇게만 하면 돼.”송시아는 씁쓸한 얼굴로 컵 안
송시아는 전연우의 손을 잡고 그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팔찌에 손을 댄 순간, 행동을 멈추고 느긋하게 그의 옆에 앉아 핸드폰으로 팔찌 사진을 찍고는 저장되지 않은 누군가의 번호에 전송했다.[이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봐 줘요.]이어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전연우 씨, 지금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연우 씨가 깨어났을 땐 성세 그룹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전생에서 당신은 날 망가뜨렸어요. 이번엔 내가 당신의 모든 걸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 거예요. 그래야 내가 더 쉽게 당신을 통제할 수 있잖아요.”“당신은 권력을 너무 욕심낸 탓에 제일 중요한 걸 잃은 거예요.”소민아는 회사에 돌아간 뒤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서 선생님이 대표님은 곧 깨어나실 거라고 했어요. 기성은 씨도 이제 돌아오는 거 맞죠?]쨍그랑.컵이 깨지는 소리에 소민아가 고개를 돌렸다. 신이랑이 일어나 유리 조각을 주우려하자 그녀는 급히 다가갔다.“움직이지 말아요. 다쳐요.”하지만 신이랑의 손가락은 이미 유리 조각에 찢어져 있었다. 소민아는 휴지로 그의 손가락을 감쌌다.“왜 그래요? 집에 돌아온 뒤로 쭉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았어요.”신이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른 한 손은 소민아에게 잡혀 있었다.“난 괜찮아요. 요즘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래요.”소민아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신이랑이 결혼 때문에 복잡해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솔직히 이게 더 좋은 상황 아니에요? 이랑 씨는 내 상사고, 우린 친구잖아요. 이랑 씨... 난 무슨 이유로든 지금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아요.”신이랑은 자신의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바람 좀 쐬러 나갈게요.”급히 나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언가 회피하는 것 같았다.늘 차분했던 신이랑은 평소와는 달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발코니에서 주먹을 꽉 말아쥐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으스러지는 듯한 두통이 또다시 밀려오기
“됐어. 너 같은 냉혈한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호주머니에서 조개껍질 팔찌를 꺼냈다.“너 지금 모든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 알아.”“전연우, 기억해. 깨어나면 소월 씨한테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예전 네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해.”“소월 씨는 줄곧 강영수의 죽음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긴 거야. 하지만... 이건 기억해야 해, 소월 씨는 너에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는 거. 소월 씨에겐 감정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지금 강영수는 죽지 않고 잘 살아 있어.”“네가 계속 고집부리면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너한텐 영원히 소월 씨를 잃어야 하는 처벌이 내려질 거야.”“소월 씨가 성까지 바꾸고 강영수와 결혼하면 넌 어떻게 할까!”서철용은 전연우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반지를 끼고 있는 무명지가 살짝 움직였다. 서철용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이제야 조급해졌어? 지금까지 뭐 하다 이제야 온 거야!”소민아가 일정을 말하기 시작한 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이자 소민아는 바로 일어섰다.“서 선생님, 대표님은 어떻게 됐어요?”“뭐 어떻겠어요. 당연히 식물인간 상태죠. 하지만 이번 달 안엔 깨어날 거예요.”소민아는 활짝 웃어 보였다.“그래요? 정말 잘됐네요.”서철용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신이랑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 언제 결혼해요? 나한테도 청첩장 보내는 거 잊지 말아요.”그 말에 신이랑과 소민아의 사이는 더 어색해졌다.소민아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서 선생님, 오해예요.”서철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내가 찾아가지 않았는데 제 발로 왔네요?”송시아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민아와 이랑 씨 결혼 청첩장은 내가 직접 보내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서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까
병원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뒤, 소민아가 쭈뼛거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변장 안 해도 돼요? 송시아의 사람들이 알아봐도 괜찮은 거예요?”“그 생각을 민아 씨만 한 것 같아요?”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병원에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아래에서 감시하던 놈이 이미 송시아한테 보고했을 거예요.”소민아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왜 부르셨어요?”서철용은 습관적으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두 사람과 같이 와서 놀려고요.”“뭐라고요? 서 선생님, 지금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장난을 쳐요!”서철용은 무언가 의미가 담긴 듯한 눈빛으로 신이랑을 쳐다보았다. 소민아 약시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가니 경호원들이 당장이라도 서철용을 잡아 누를 듯 위풍당당한 기세로 걸어왔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는 아무도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경호원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민아 아가씨,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그냥 잠깐 들를 일이 있어서요. 우리 셋이 같이 온 거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며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눈빛을 보냈다.경호원 한 명이 막아서려 했으나, 다른 경호원이 그를 제지했다.순조롭게 경호원들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병실 문 앞까지 도착한 뒤, 서철용은 걸음을 멈추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내 수호신 두 명이 이렇게까지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됐어요! 이젠 문 앞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저기!”소민아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문은 쾅 하고 닫혀버렸다.그녀가 옆에 있는 신이랑을 보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대체 왜 우릴 불러놓고 들어오지도 말라는 걸까요?”신이랑이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민아 씨가 있어서 송시아가 서철용을 건드리지 못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제야 서철용의 의도를
소민아는 옆에 앉아있는 신이랑을 보고는 말했다.“저 지금 이랑 씨와 같이 있어요.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에요. 무슨 일이세요?”“잘됐네요. 엘리트 개인 병원으로 와요.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바로요.”“참, 서 선생님, 왜 제가 전화를 걸면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뚜뚜뚜...”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소민아는 씁쓸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랑 씨, 우릴 왜 오라고 하는 걸까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가서 들어보죠.”“그래요.”마침 두 차가 함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다. 서철용이 차에서 내리자 소민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 선생님.”“걸으며 얘기하죠.”서철용은 소민아 옆에 있는 신이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신이랑은 서철용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두 사람 중간에 서 있던 소민아는 전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누군가 몰래 송시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송 대표님, 저희에게 감시하라고 시켰던 그 사람 나타났어요. 소민아와 신이랑과 함께요. 신이랑은 저희가 손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성세 그룹.대표 사무실 안, 송시아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무심히 돌리고 있던 펜도 손에서 내려놓았다.“이번 일에 동원한 사람들이 꽤 많네. 넌 계속 거기에서 지켜봐, 무슨 일을 하는지.”‘서철용, 감히 내 구역에 제 발로 기어들어와? 지금은 몸을 사리며 몰래 숨어있어야 하잖아.’서울 전체를 손바닥 안에 넣고 장악하는 기분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송시아는 창가로 걸어가 바닥에서 오가는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전연우 씨... 전생에서 장소월까지 버리고 이 자리에 오르려 한 이유가 있었네요.’‘전생에서 이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고 해도 결국엔 장소월을 잃고 말았어요.’‘역시 하느님은 공평해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게 만들죠.’전
“사리 분별 못 하는 그 자식한테 보내온 거지 뭐. 그놈이 빨리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짓말까지 만들어내 소월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서울까지 보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배은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가서 씻고 일찍 쉬어. 아기는 깨우지 마. 방금 잠들었어.”젖을 먹던 아이가 품 안에서 잠들자 배은란은 옷을 정리하고 아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철용은 잠들어있는 아이를 안아 옆 아기 침대에 눕혔다.“그럼 난 씻으러 갈게. 쉬어.”“괜찮아. 민용 씨 올 때까지 기다릴게.”서철용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나 밤에 자료 좀 봐야 해. 착하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그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병실 안에 별도로 간병인 실이 있어 요즘 서철용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에게 자신을 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배은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천천히 짙어져 갔다.서철용은 옆방에 들어간 뒤 침대에 누워 신발도 벗지 않고 손을 눈 위에 올려놓고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켰다. 배은란은 상처가 80% 정도 회복되었지만 아직 통증이 있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벽을 짚고 그의 옆까지 다가가 조심스레 신발과 옷을 벗겼다. 서철용은 정말 피곤했는지 꽤나 큰 움직임에도 깨지 않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서철용은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눈을 감고 더듬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귀 옆에 가져갔다.“여보세요. 누구시죠?”“철용이니? 네가 보낸 사람 이제 깨어났어.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 시간 날 때 한 번 와보지 않을래?”서철용은 왼쪽 팔에서 저림을 느껴 손을 움직이며 옆쪽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이불 속에 사람 한 명이 더 누워있었다
“내가 그렇게 흉측해 보여?”“난...”여자의 몸이든, 남자의 몸이든 서철용에겐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은란은 다르기 때문에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 혼자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서철용의 배은란에 대한 감정은 그녀와 서민용이 결혼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줄곧 그녀를 빼앗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었다.하여 갖은 방법을 대어 서민용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자신을 서민용으로 여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 심지어 최면을 한 뒤에도 서민용을 놓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서철용은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제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모두가 인정하는 실력 있는 의사인 서철용이었지만, 지금 배은란의 상황은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가 계속 몸을 돌리지 않자 배은란은 슬픔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했어.”그녀는 눈물을 닦고는 서철용의 손을 툭 쳐냈다.“내 몸에 더러운 게 자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피하는 건데!”“아기는 보면서 왜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 거야.”“민용 씨, 우리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를 하지 않았는지 알기나 해?”서철용이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엔 아무 데도 안 가고 너랑 같이 있을게. 응?”그가 배은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럼 연구원은?”“몇 개월 휴가 냈어. 그동안 계속 너랑 집에만 있을 거야.”배은란의 감정은 그제야 천천히 안정되었다.서철용이 이런 결정을 한 건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아까 누가 민용 씨 앞으로 왔다면서 택배 가져왔어. 상세한 주소도 안 쓰여있고, 이름도 없었어. 내가 책상 위에 놓아뒀어.”배은란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까 봐 열어 보지 않았다.서철용이 열어보니 지극히 일반적인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가 들어있었다.배은란이 물었다.“진짜 예뻐. 이거 어디에서 보내온 거야?”서철용은 조개껍데기
송시아가 분노가 가득 실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참혹했던 기억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아무도 내가 예전에 어땠는지 상관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집중돼 있거든요.”“이 큰 서울을 뒤엎는 것도 내 한 마디면 충분해요.”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요염한 얼굴에 송시아에 대한 가소로움이 가득 찼다.“정말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송시아 씨... 당신이든 전연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그 어디에도 계속 한쪽으로만 기우는 저울추는 없거든요.”송시아는 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떨어진 낙엽을 툭툭 걷어찼다.“됐어요. 그 말은 연우 씨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난 말할 것도 없죠.”“오늘 여기에 온 건 서 선생님한테 경고하기 위함이에요. 숨고 싶으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최대한 깊이 숨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을 제외하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거든요.”“아, 참! 그리고 당신 와이프... 당신도 와이프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건 원하지 않죠?”“서민용은 이미 죽었잖아요. 만약 내가 사실을 알려준다면 당신 와이프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서철용의 눈동자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송시아 씨,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면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아요?”그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 화면을 본 순간 송시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여기엔 송시아 씨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다 녹음되어 있어요.”“이것도 다 송시아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 만약... 은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가 저지른 일이든 모두 당신부터 의심할 거예요.”“은란이나 아이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난 당신이 예전 업소에서 나체로 춤을 추던 영상, 그리고 소민아와의 관계까지 모두 세상에 퍼뜨리고 서울 한복판 전광판에 생중계할 거예
하지만 서철용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짧게 몇 마디 보내곤 했다.수술이 끝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군병원.아래층 정원, 도우미가 남자아이를, 서철용이 여자아이를 안고 있고, 배은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답장 안 해?”최근 서철용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 빈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는 연구원의 소식을 놓칠까 봐 핸드폰 알림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 며칠 동안 연락을 해온 건 연구원이 아니라 소민아였다.서철용은 핸드폰을 꺼내 소민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이 귀찮은 여자한테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어.”성세 그룹.사무실 안, 소민아가 또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좀 구해주세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차단 표식이 떴다.배은란 역시 서철용이 다른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저번 수술을 마치고 온 날 배은란은 깜짝 놀랐었다. 그가 너무 피곤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잠들어 있었다. 배은란은 자신도 수술 회복기였지만,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막지 못했어요.”그 불청객을 봤음에도 서철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송시아가 어느새 나타나 도우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이가 아빠와 엄청 닮았네요. 서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송시아의 불순한 눈빛을 본 서철용은 간호사에게 배은란과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 꽤 많이 변한 것 같네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사람은 원래 다 변해요. 왜 그렇게 아내분을 급히 보내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