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어락으로 교체한 뒤 전연우는 며칠 동안 나가지 않았다. 마치 남원별장에서 계속 살 것처럼 말이다.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고 계속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장소월은 아래층으로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그를 보기 위해 내려가더라고 바로 돌아섰다.온경애가 돌아와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오늘은 주말이기에 학교도 휴식했다.백윤서도 남원별장으로 돌아왔다.식탁에 앉으니 온경애는 이미 그릇과 젓가락을 두 세트 더 꺼냈다.백윤서가 말했다.“연우 오빠 요즘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요? 나도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래요.”전연우는 젓가락을 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온경애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아가씨께서 외부인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전연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고 온경애는 겁이 나서 목을 움츠렸다.“저도 아가씨의 뜻을 전한 겁니다.”백윤서가 전연우를 힐끗 보며 말했다.“연우 오빠, 소월이가 언제까지 이럴까요? 담임 선생님이 나한테 소월이가 학교에 다시 나오도록 설득하라고 하셨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차례 시험이었을 뿐인데 다시 학교에 가면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 1반은 학습 진도가 빨라서 학교에 계속 나가지 않으면 따라잡을 수 없을 거예요. 오빠가 소월이 잘 설득해 줘요. 계속 이렇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네 일에나 신경 써. 소월이는 내가 설득할 테니까. 밥 먹고 일찍 돌아가.”백윤서는 전연우가 자기를 내쫓을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가도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오늘 온 것도 전연우와 장소월이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온 것이었다. 이제야 겨우 그의 여자 친구가 되었다. 장소월이 전연우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연우 오빠, 난 오빠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내가 밥도 챙겨주고 청소도 해줄게요.”“말 들어. 며칠 지나면 나도 돌아갈 거야. 소월이 아픈데 혼자 집에 있
“아가씨,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전화하겠습니다.”아이고 이제부터 온경애가 여기서 혼자 지내야 할 텐데 조금 무서웠다.전연우는 고개를 숙이고서는 앞에 있는 반찬을 먹었고 그녀가 자기 앞을 지나가자, 손에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밤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장소월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서 사는 게 좋으면 그냥 줄게요.”이후에 그가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그녀와는 상관없었다.전연우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강씨 가문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전연우에게는 강씨 가문과 대적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오 집사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다. 강씨 가문에서 오 집사의 지위는 꽤 높을 불은 장소월도 예상하지 못했다. 외부에서도 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장소월이 집에서 한 달 동안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콩쿠크에서 그린 그림이 상을 탔고 그녀에게는 꽤 좋은 시작이었다.그녀는 오랫동안 배터리가 없었던 핸드폰을 충전했다. 부재중 전화가 엄청나게 많았다. 핸드폰을 켰을 때 제일 처음 받은 전화가 강씨 집안에서 온 전화였다...부재중 전화에는 외국에서 온 전화도 있었다.그 핸드폰 번호는 낯설었지만, 그 번호로 된 이메일 주소를 찾았다. 메일에 외국에서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러시아 거리 광장에서 비둘기들이 빵을 먹고 있는 사진, 또 다른 사진에서는 비둘기가 그의 허벅지에 앉아 있었다. 그가 예쁜 손으로 비둘기에게 빵을 먹여주고 있었다.비록 얼굴이 보이는 사진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녀는 이것이 강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가 떠난 지 사흘 뒤부터 계속해서 사진들이 메일로 왔었다.장소월은 그와 어떠한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화만 너머로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고마워’라는 말을 했다.그 때문에 그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강씨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도우미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강영수
테이블 위에는 갓 달인 팥죽이 놓여 있었다.사모님 앞에는 절반 정도 드시고 남긴 팥죽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내가 다시 오라고 한 이유가 뭔지 알아?”사모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장소월은 얇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습니다.”사모님이 물었다.“지금 영수에 대한 마음이 어떠니? 계속 만날 생각이야? 만약 영수한테 식망했다면 이 할미는 널 탓하지 않는다. 우리도 억지로 널 붙잡지 않을 거야. 네가 영수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것도 넌 이미 자기의 생각을 정리했고 모든 걸 이해했다는 뜻이잖니. 이 할미는 그 하나만으로도 네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모든 여자가 너처럼 이성적인 건 아니란다. 하지만 네가 너무 이성적이기에 영수는 냉정하다고 느꼈을 거야. 가끔은... 억지를 부려도 괜찮아. 바꿔 말하면 영수도 네가 그러길 바란 거야. 네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겠지. 네가 조금이라도 성질을 부리면 자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잖니.”사모님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이 할미한테 말해 봐. 너도 영수를 좋아했었니?”장소월은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진지한 감정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일은 오 집사님이 조금 말해주셨습니다. 저도 입장 순서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영수에게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사모님은 웃으면서 그냐의 손등을 토닥였다. 간곡하게 말했다.“사실 네가 강씨 집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난 첫눈에 마음에 들었어. 나에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투명한 거울이 있단다.”“이 할미는 돌려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 속셈이 있는 사람은 바로 알아볼 수 있어. 너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강씨 집안에 오기 전에 난 너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했었다. 네가 장씨 집안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야심이 가득한 오빠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강씨 집안으로 온 것도 기댈 곳을 찾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단다. 그 점은 네가
사실 그녀도 아직 기껏해야 학생일 뿐이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한 것들은 또래들보다 훨씬 많았다.이 나이에는 공부하면서 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오히려 자기보다 3, 4살 많은 성인을 달래줘야 한다.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운명이 걱정을 달고 사는 것인 듯하다.장소월은 위층 방에 가서 노크했다.퍽!알 수 없는 물건이 문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에 장소월은 깜짝 놀라서 손에든 약을 떨어트릴 뻔했다.“꺼져.”“정말... 나 들어가면 안 돼?”방안이 몇 초 동안 조용해졌다. 장소월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향해 달려와 껴안았다. 장소월의 몸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네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나 숨 막혀.”강영수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제야 장소월은 몇 번 숨을 쉬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며칠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 그는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턱에 난 거뭇거뭇한 수염에 충혈된 눈을 한 채 다크서클이 진해진 모습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장소월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쓰다듬었다.“아파?”강영수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네가 와서 이제 아프지 않아.”불쌍한 말투는 강용과 똑같았다.“내가 약 발라줄게.”“응.”갈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장소월은 필요한 약들을 찾아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아프면 말해. 살살할게.”“응.”그의 시선은 계속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장소월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제야 그가 자기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깨달았다.장소월은 그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상반신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장소월은 상처가 감염될
장소월은 물컵을 가져다가 침대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내가 돌아오든 안 오든 너 혼자 잘 챙겨야 해. 네 몸은 네 거니까.”그녀가 손을 내려놓으려 할 때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잖아. 그거 지금도 유효해?”장소월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내가 돌아오길 원한다면 돌아올게…”사실 두 사람 사이에 평등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고개를 숙여야 하는 쪽이다.그녀가 돌아온 이유는 사모님 때문뿐만 아니라 더욱이는 아버지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어젯밤에 전연우와 아버지가 통화한 내용을 전부 다 들었다.그 내용은 만약 그녀가 강씨 집안에 시집가지 못하면 그녀는 상품처럼 취급되어 다른 사람한테 보내질 텐데 될수록 전연우에게 도움 되는 쪽으로 되게 말이다.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장해진의 친딸은 자신인데 왜 아버지는 전연우에게 더 신경 쓰는지 이상했다.장소월은 이렇게 변하려 노력하고 더 잘하려 하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장소월이 그 통화내용을 들었을 때 그녀 마음속의 냉기가 팔다리와 몸 전체에 퍼졌다. 그녀의 가치는 고작 장씨 집안의 결혼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녀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그녀의 처지는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다.또한 장소월은 이 집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만약 그녀가 도망친다고 해도 아버지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전연우가 자신한테 무슨 짓을 하든 막을 수 없다.그날밤 그가 비를 맞으면서 남원별장에 온 이유는 오직 그녀 때문이었는데, 이것만으로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었다.그를 본 순간 장소월의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지금 그녀는 선택할 자격도 전혀 없었다.“소월아… 너도 알겠지만 난 네가 기쁘게 돌아오는 걸 바랐어. 이번에… 난 절대 너를 놓지 않을 거야.”장소월은 고개를 숙여 서로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그녀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장소월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너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남원별장에서 가져와야 할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내가 오집사한테 가져오라고 할게.”“아니야. 챙길 것도 없어. 여기에 모든 게 다 있잖아. 중요한 물건은 대부분 전에 있던 월세방에 넣어 두었어.”장소월이 다가와서 링거를 맞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는데, 약간 차가웠다.“춥지 않아? 내가 가서 핫팩 가져올게.”“그냥 나랑 여기 있어.”“그래.”장소월은 대답하고 부드럽게 그의 손을 이불 안에 넣어주었다.“뭐 좀 먹을래? 위가 좋지 않은데 공복에 링거를 맞으면 속이 불편할 거야.”말이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도우미였다.“도련님, 소월 아가씨... 뭐 좀 드세요. 사모님이 죽을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어요.”마침 타이밍이 맞았다.장소월이 말했다.“들어와요.”도우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장소월은 도우미가 두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큰 죽 그릇을 들고 왔지만 숟가락과 작은 그릇은 하나밖에 없는 것을 발견했다.“여기 놓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네, 소월 아가씨,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장소월은 도우미에게 핫팩을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도우미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직접 그에게 죽을 먹여주었다.그녀는 여전히 전과 똑같이 무슨 일을 하든 그를 자상하게 돌보아 주었다.강영수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넌 분명히 열여덟 살 밖에 안 됐는데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차분해. 조급해하는 것도 없고 무슨 일이 있든 항상 이렇게 침착한 것 같아...”그는 한숨을 쉬고 이어서 말했다. “사실 내 앞에서는 모든 걸 참을 필요 없어. 나한테 화를 내도 돼... 그렇게 하면 네가... 나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강영수가 더 이상 먹지 않는 것을 본 장소월은 죽을 옆으로 치우고 휴지를 꺼내 그의 입을 닦
연예 뉴스 헤드라인.「얼마 전, 관계자는 강한 그룹 대표가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자 장씨 가문의 아가씨가 슬픔 때문에 시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자퇴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오늘 강한 그룹 대표가 직접 운전해서 장씨 가문 아가씨를 학교에 보내준 것이 포착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강천 뉴스」김남주는 손에 든 신문을 반으로 찢고 힘껏 구겼다. “가짜야, 모두 다 가짜야. 영수가... 그럴 리 없어! 다른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어! 강영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좋아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지난 며칠 동안 김남주는 강천에서 강영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며칠만 지나면 그가 예전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그녀가 떠나 있을 때 행방을 조금만 알려주기만 하면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를 찾으러 온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 강영수는 벌써 5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김남주는 설명을 듣고 싶어 휴대폰을 들었는데, 그녀가 누른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였다.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김남주는 갑자기 눈이 번뜩이며 테이블 위의 모든 것을 쓸어 던지고 처참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영수야, 넌 평생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네가 그랬잖아, 우리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이 순간 김남주는 미친 사람 같았다.그녀는 다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전화를 끊자 다른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상대방은 말을 하지 않았다.김남주가 먼저 말했다.“이번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수를 완전히 내 소유로 만들어야겠어요.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렇게 할 거예요.”상대방은 차갑게 말했다.“너의 목숨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거였어. 그런데 이번엔... 도와줄게. 난 어떤 대가도 필요 없지만 내가 말하는 대로 해줘야겠어...”“좋아요. 약속할게요.”김남주는 조
전연우는 알릴 듯 말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왠지 모르게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기운이 더 차가워진 듯했다.초기에는 광산물 사업에 의존해서 돈을 벌다가 무슨 수단을 썼는지 후에 유전을 얻어서 몸값이 미친 듯이 올랐다. 해외에서 서울로 이민을 온 후 본전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본전 만으로도 그는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돈을 아무리 써도 재산을 탕진할 리는 없었다.전연우가 말했다.“말로 하는 건 쓸데없어!”황준엽은 한줄기의 희망을 본 듯 전연우 발 옆으로 기어갔다. 그는 지금 일어날 수가 없었다.“토지 소유권 문서를 줄게요. 아니면... 재산 양도 서류도 돼요. 당신이 나를 여기서 꺼내줄 수만 있다면 앞으로 평생 모자라지 않을 돈을 준다고 보증할게요.”“그 조건은 확실히 끌리긴 한데...”전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내려 그를 쳐다봤다.“하지만 난 그렇게 욕심이 많지 않아요. 나는 당신 명의의 모든 유동 자산과 석유 광산 주식의 70 %를 원합니다. 부동산을 포함해서요.”순간 황준엽의 눈이 커졌고 그는 갑자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이 전씨 놈아! X발, 내가 만만하냐. 네가 뭔데! 넌 내 옆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개에 불과했어. 내가 남해 땅을 개발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으면 네 프로젝트는 그냥 쓰레기가 될 거였어.”전연우는 화를 내지 않고 무덤덤하게 손수건을 꺼내 몸에 튄 황준엽의 침을 닦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황준엽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일어났다.“거기 서! 좋아... 동의할게. 그런데 내가 여기서 나가면 날 도와 다시 회사를 일으켜야 해.”전연우는 돌아서서 한 단어를 내뱉었다.“당연하지.”“성은아.”기성은은 걸어 들어와서 손에 든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모두 세 가지 서류였다.하나에는 회사의 주식 26%, 황준엽이 갖고 있는 나머지 0.1%의 주식이 적혀 있었는데, 이 무식만으로도 연간 배당금이 몇 억은 되기 때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