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너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남원별장에서 가져와야 할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내가 오집사한테 가져오라고 할게.”“아니야. 챙길 것도 없어. 여기에 모든 게 다 있잖아. 중요한 물건은 대부분 전에 있던 월세방에 넣어 두었어.”장소월이 다가와서 링거를 맞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는데, 약간 차가웠다.“춥지 않아? 내가 가서 핫팩 가져올게.”“그냥 나랑 여기 있어.”“그래.”장소월은 대답하고 부드럽게 그의 손을 이불 안에 넣어주었다.“뭐 좀 먹을래? 위가 좋지 않은데 공복에 링거를 맞으면 속이 불편할 거야.”말이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도우미였다.“도련님, 소월 아가씨... 뭐 좀 드세요. 사모님이 죽을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어요.”마침 타이밍이 맞았다.장소월이 말했다.“들어와요.”도우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장소월은 도우미가 두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큰 죽 그릇을 들고 왔지만 숟가락과 작은 그릇은 하나밖에 없는 것을 발견했다.“여기 놓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네, 소월 아가씨,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장소월은 도우미에게 핫팩을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도우미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장소월은 직접 그에게 죽을 먹여주었다.그녀는 여전히 전과 똑같이 무슨 일을 하든 그를 자상하게 돌보아 주었다.강영수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넌 분명히 열여덟 살 밖에 안 됐는데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차분해. 조급해하는 것도 없고 무슨 일이 있든 항상 이렇게 침착한 것 같아...”그는 한숨을 쉬고 이어서 말했다. “사실 내 앞에서는 모든 걸 참을 필요 없어. 나한테 화를 내도 돼... 그렇게 하면 네가... 나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강영수가 더 이상 먹지 않는 것을 본 장소월은 죽을 옆으로 치우고 휴지를 꺼내 그의 입을 닦
연예 뉴스 헤드라인.「얼마 전, 관계자는 강한 그룹 대표가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자 장씨 가문의 아가씨가 슬픔 때문에 시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자퇴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오늘 강한 그룹 대표가 직접 운전해서 장씨 가문 아가씨를 학교에 보내준 것이 포착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강천 뉴스」김남주는 손에 든 신문을 반으로 찢고 힘껏 구겼다. “가짜야, 모두 다 가짜야. 영수가... 그럴 리 없어! 다른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어! 강영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좋아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지난 며칠 동안 김남주는 강천에서 강영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며칠만 지나면 그가 예전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그녀가 떠나 있을 때 행방을 조금만 알려주기만 하면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를 찾으러 온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 강영수는 벌써 5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김남주는 설명을 듣고 싶어 휴대폰을 들었는데, 그녀가 누른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였다.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김남주는 갑자기 눈이 번뜩이며 테이블 위의 모든 것을 쓸어 던지고 처참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영수야, 넌 평생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네가 그랬잖아, 우리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이 순간 김남주는 미친 사람 같았다.그녀는 다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전화를 끊자 다른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상대방은 말을 하지 않았다.김남주가 먼저 말했다.“이번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수를 완전히 내 소유로 만들어야겠어요.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렇게 할 거예요.”상대방은 차갑게 말했다.“너의 목숨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거였어. 그런데 이번엔... 도와줄게. 난 어떤 대가도 필요 없지만 내가 말하는 대로 해줘야겠어...”“좋아요. 약속할게요.”김남주는 조
전연우는 알릴 듯 말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왠지 모르게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기운이 더 차가워진 듯했다.초기에는 광산물 사업에 의존해서 돈을 벌다가 무슨 수단을 썼는지 후에 유전을 얻어서 몸값이 미친 듯이 올랐다. 해외에서 서울로 이민을 온 후 본전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본전 만으로도 그는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돈을 아무리 써도 재산을 탕진할 리는 없었다.전연우가 말했다.“말로 하는 건 쓸데없어!”황준엽은 한줄기의 희망을 본 듯 전연우 발 옆으로 기어갔다. 그는 지금 일어날 수가 없었다.“토지 소유권 문서를 줄게요. 아니면... 재산 양도 서류도 돼요. 당신이 나를 여기서 꺼내줄 수만 있다면 앞으로 평생 모자라지 않을 돈을 준다고 보증할게요.”“그 조건은 확실히 끌리긴 한데...”전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내려 그를 쳐다봤다.“하지만 난 그렇게 욕심이 많지 않아요. 나는 당신 명의의 모든 유동 자산과 석유 광산 주식의 70 %를 원합니다. 부동산을 포함해서요.”순간 황준엽의 눈이 커졌고 그는 갑자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이 전씨 놈아! X발, 내가 만만하냐. 네가 뭔데! 넌 내 옆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개에 불과했어. 내가 남해 땅을 개발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으면 네 프로젝트는 그냥 쓰레기가 될 거였어.”전연우는 화를 내지 않고 무덤덤하게 손수건을 꺼내 몸에 튄 황준엽의 침을 닦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황준엽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일어났다.“거기 서! 좋아... 동의할게. 그런데 내가 여기서 나가면 날 도와 다시 회사를 일으켜야 해.”전연우는 돌아서서 한 단어를 내뱉었다.“당연하지.”“성은아.”기성은은 걸어 들어와서 손에 든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모두 세 가지 서류였다.하나에는 회사의 주식 26%, 황준엽이 갖고 있는 나머지 0.1%의 주식이 적혀 있었는데, 이 무식만으로도 연간 배당금이 몇 억은 되기 때
다음 날 아침.신문의 모 구석 모퉁이에 황준엽이 감옥을 탈출하려 독을 먹었다가 그 양을 조절하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가 실렸다.시끌벅적 붐비는 거리에선 회사원들이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들의 손엔 모두 같은 신문이 쥐어져 있었지만 그 기사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오늘은 금요일이다. 장소월은 평소보다 비교적 늦게 일어나 밖에 나가지 않았다.도우미는 편지함에서 오늘 아침 신문을 가져와 강영수의 습관대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교복을 입고 오렌지 주스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장소월이 신문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그때, 도우미가 말했다.“도련님.”강영수가 소매 단추를 잠그며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길고 곧게 뻗은 모습이 늘 그렇듯 매력적이었다.“학교에 돌아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내가 좋은 과외선생님을 붙여줄게. 집에서 공부해도 똑같아.”“괜찮아. 집에만 박혀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황준엽의 사망 기사를 읽은 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마음의 동요 또한 없었다. 그저 그의 죽음이 조금 의아할 뿐이었다. 그는 예전 호텔에서 강영수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오늘 신문을 통해 그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강영수가 사람을 시켜 손을 쓴 건가?아니, 그는 전연우가 아니다. 장소월은 곧바로 생각을 떨치려 손을 휘저었다.그녀는 강영수에게 다가가 그의 넥타이핀을 정리해 주었다. 다이아몬드 테두리에 중심에 박혀있는 붉은색 보석, 그리고 가슴팍까지 늘어뜨린 순금 체인까지... 모두 남자의 고귀함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강영수가 장소월의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그의 시선이 탁자 위 신문에 닿자 낯빛이 어두워졌다.“아니야. 오늘 학교에 나가자마자 시험이 있어서 걱정하고 있었을 뿐이야. 성적이 잘 안 나올까 봐 좀 무섭네.”강영수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너무 스트레스
소현아가 손에 딸기 바구니를 들고 연속 장소월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그녀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반가움에 너무 빠르게 달렸는지 앞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장소월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기다려주었다.“오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아까부터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우리 집에서 심은 딸기를 먹어봐.”장소월이 입을 열려고 한 순간 딸기 하나가 입안으로 들어왔다.“고마워. 맛있네.”소현아는 장소월에게 달라붙어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에서 쫑알거렸다. 수업 시간이 끝나기만 하면 곧바로 그녀를 찾아왔다. 소현아는 장소월과 만나는 것 외엔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걸까?장소월은 앞만 보고 길을 걸어갈 뿐, 소현아와 대화를 나눈 적은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소현아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더 위험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연우는 이미 소현아로 그녀를 협박한 적이 있다. 때문에 그녀는 감히 그 어떤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장소월은 아무도 자신의 약점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강영수는 그녀가 시야 속에서 사라진 뒤에야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저 여자는 어느 집 아가씨야?”진봉이 대답했다.“소씨 가문입니다.”“어느 소씨 가문?”진봉이 말했다.“저도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요, 노부인께서 목축업 쪽 전문가를 찾아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공교롭게도 소월 아가씨의 옆에 계신 친구분의 부친이셨어요.”강영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화가 났음에도 내색하지 못하고 애써 참아내는 소월이의 모습은 처음 봐. 저 친구는 내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네.”진봉이 말했다.“대표님, 소월 아가씨 친구분의 뒷조사를 해볼까요? 아가씨한테 접근한 목적이 불순한 것일까 봐 걱정됩니다.”“그럴 필요 없어. 소월이도 그 정도 분별은 할 수 있을 거야.”만약 장소월이 정말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까처럼 화를 삼키진 않았을 것이다.또한 요즘 연속 며칠 동안
남천 그룹.대표 사무실에 들어온 기성은은 전연우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옆쪽으로 물러섰다.남자의 길고 가는 눈엔 냉정함이 깊이 배어있었고 온몸에선 얼어붙을 듯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기성은은 핸드폰 너머 백윤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녀가 당황스러움과 무서움에 울부짖었지만 전연우는 그저 차갑고도 퉁명스럽게 쏘아붙일 뿐이었다.“넌 알 필요 없어.”“연우 오빠, 오빤 변했어요. 난 점점 더 오빠가 무서워져요.”이어 핸드폰에선 통화 연결음만 들려왔다.전연우가 핸드폰을 놓고 몸을 돌렸다.“무슨 일이야?”기성은이 보고했다.“강씨 집안에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저희도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전연우는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손깍지를 껴 무릎에 올려놓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강영수가 정말 뭘 알아낸다면 대표님께서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전연우의 입꼬리가 은은히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에선 의미를 알 수 없는 광이 뿜어져 나왔다.“난 도리어 그 자식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걸. 이번 일은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넌 나가봐.”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학교.함께 식당에서 걸어 나오던 장소월과 소현아는 눈물범벅이 된 채 위층에서 달려내려오는 백윤서와 마주쳤다.그녀는 장소월을 힐끗 보고는 이내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장소월의 눈에 백윤서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들어왔다.전연우와 통화를 한 건가?전연우를 제외하고는 백윤서를 울릴 사람은 없다.소현아가 조심스레 물었다.“윤서 왜 저러는 거야?”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월아, 우유 마셔.”소현아가 호주머니에서 우유 두 병을 꺼내 장소월의 손에 쥐여주었다. 장소월은 도통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소현아는 아예 장소월의 간식 담당이라도 된 것처럼 서랍에 간식거리를 잔뜩 챙겨두었다. 모두 장소월이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장소월이 수업하려 교실에 들어가려고 한 순간 복도 끝 누군가가 그녀를
장소월이 대답했다.“솔직히 해외에 나가는 건 강용한테 나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나도 왈가왈부할 수 없어. 강용이 나한테 해준 게 많다는 거 알아. 반드시 천천히 보답해 줄 거야. 그리고 친구로서 나도 강용이 새로운 곳에서 잘 적응하고 살아 나가길 바라.”“강영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난 너희들과 어울려선 안 돼. 강용에 관해 이야기하면 더더욱 안 되고. 영수는 이미 날 위해 충분히 양보했어. 더 이상 영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강용이 떠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난 너희들에게 분명 다시 만날 날이 올 거라는 걸 믿어.”“또한 강용도 그곳에서 잘 지낼 거야.”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생각과 입장이 있다. 누군가는 강용을 쫓아낸 강영수를 지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강영수도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가족과 친구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사람일 뿐이다.모든 인연엔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오부연이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제 강영수의 옆엔 그녀 한 사람밖에 없다고 말이다.강용과 심유가 해외로 떠난 그날, 강일주는 분노하며 강영수의 따귀를 때렸다.그 후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다.다른 누구도 아닌 강영수의 아버지가 말이다...어쩌면 강용 모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두 사람에게 더 강한 가족애를 느꼈을지도 모른다.강일주는 강영수 역시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강영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강한 그룹도 짊어져야 한다.다른 사람의 눈엔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차마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은 곳에 군림하고 있는 강영수이다.하지만 그들은 강영수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강영수도 사람을 필요로 한다.그녀는 여전히 그날 밤 자신의 품속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강영수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조명은 꺼져있었지만 그녀는 강영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충분히 상상해 낼 수 있었다.“이제
그때 방시연이 장소월에게 말했다.“그날 강용과 설채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 강용이 고열 때문에 찬물로 샤워를 했을 뿐이야. 넌 두 사람이 무언갈 했다고 오해했겠지.”허철도 말을 보탰다.“맞아. 강용은 그 밤중에 너한테 쫓겨나 우리한테 연락했어. 그래서 우리가 강용을 병원에 데려다줬었어.”확실히 장소월에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설명을 듣고도 그녀는 너무나도 평온했다.설채윤이 주먹을 꽉 말아쥐고 말했다.“맞아! 하지만 상관없어. 나한테 이별을 말하지 않았으니 아직 우린 연인이야.”“장소월, 너도 너무 방심하진 마. 너와 강영수도 오래가진 못할 테니까.”그녀가 말을 마친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자리를 떴다.지극히도 침착한 장소월의 모습을 본 방시연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넌 하나도 화가 안 나는 것 같아.”장소월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내가 왜 화내야 하는데?”방시연은 피식 웃기만 할 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다들 돌아가고 장소월 한 사람만 남았다. 그녀도 교실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뗐을 때, 하얀색 셔츠를 입고 이어폰을 목에 건 매끈한 몸매의 소년이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허이준이 목을 긁적였다.“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었어.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니야.”안으로 돌아간 뒤 장소월은 한결의 부름으로 교무실에 갔다. 한결이 성적표를 꺼내며 말했다.“이 성적에 대해 나한테 설명할 말 있어?”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없어요.”“선생님도 너의 사생활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넌 어쨌든 내 학생이니까 조언 한마디 할게. 감정은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야. 선생님은 네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아주 작은 시험이라도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법이야. 너한테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이번엔 반을 옮기지 마. 대신 앞으론 공부에 집중해야 해.”“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백윤서에게 물어봐. 윤서가 네 언니 맞지?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