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하는데 나한테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이미 영수에게 연락했어. 아마 곧 올 거야.”“소월아, 김남주가 돌아왔어. 강영수가 아직도 너한테 신경이나 쓸 것 같아?”“그럼 넌? 백윤서한테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거야? 오빠...”그 마지막 두 글자를... 장소월은 입술을 꽉 깨물고 간신히 내뱉었다. 남자의 가슴팍을 애써 밀어내던 그녀는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담배 향을 맡았다. 담배 끊었다고 하지 않았나?그 말은 전연우의 입도 다물게 했다.“내가 예전에 널 좋다고 따라다닐 땐 날 쳐다보지도 않았었잖아. 이제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전연우...”장소월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너 설마 날 좋아하게 된 거야?”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장소월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뜨겁게 키스했다.“장소월, 네 생각 그대로야!”그의 목소리 또한 더욱 거칠어졌다.“하지만... 김남주가 돌아오고, 강영수가 날 떠난다고 해도 너와 난 절대 안 돼. 만약 날 한낱 노리개로 생각한다면 난 확 죽어버릴 거야...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너에게서 벗어날 거라고.”장소월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 한 글자 한 글자는 전연우의 마음속에 비수처럼 박혀버렸다.남자는 이어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코끝이 맞닿았다.“장소월, 아직도 모르겠어? 넌 평생 날 벗어나지 못해.”전연우는 폭력적으로 그녀를 침대로 밀쳤다. 이어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얼굴을 움켜쥐고는 키스를 퍼부었다. 순간 장소월의 옷 거지들이 침대 밑으로 연이어 떨어졌다.“이거 놔, 으악. 날 놔줘...”장소월은 온 힘을 다해 그를 향해 발길질했다. 그 틈을 타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알몸을 감쌌다. 그녀의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흘러내렸다.아까 침대에 놓여있던 속옷도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장소월은 참혹한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그녀는 전연우의 잔인함을 얕잡아봤다. 아무리 눈물로 애원해도 전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강제로 조금 전의 그 속옷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얇은 속옷은 이미 흥건히 젖어있었다.전연우는 투명하고 찐득한 그 액체를 장소월에게 보여주고는 그녀의 하얀 가슴에 발라놓았다.“원해? 빌어. 그럼 해줄게.”장소월은 오늘 절대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장소월의 온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옷을 모두 다 벗고 알몸으로 앉아있은 지 30분이 지나니 입술까지 하얗게 질렸다.전연우는 참아왔던 욕망을 거칠게 분출하며 그녀에게 한 번 또 한 번 연이어 오르가즘을 선사했다. 이와 동시에 그녀의 아랫배에서 통증이 밀려왔다.이어 그녀는 자세를 바꾸었다. 전연우는 그녀의 두 손으로 벽을 지탱하게 하고는 두 다리 사이로 자신의 물건을 밀어 넣었다.마지막 신음 소리와 함께 장소월은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풀리자 장소월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시간은 이미 새벽 3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욕실에서 나온 뒤 단추를 잠그며 냉담한 얼굴로 널브러진 여자를 쳐다보았다.“일어나서 옷 입어!”그녀가 미동도 하지 않자 전연우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흐르는 검붉은 피에 닿았다.장소월이 신음했다.“너무 아파.”남자는 곧바로 간단히 피를 닦아낸 뒤 코트로 그녀의 몸을 감싸고는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잠이 깬 서철용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리며 말했다.“너 미쳤어? 이 야밤에 무슨 전화야.”전연우는 종래로 이런 공포감은 느껴본 적이 없다.그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 걸까.그는 검사실에 들이닥쳤다. 일반적인 경우 검사실은 환자 가족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으나 서철용은 전연우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은밀한 곳의 검사는 전연우가 직접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전연우는 극도의 짜증이 몰려왔다.“장소월, 난 분명히 말했어. 이건 시작일 뿐이라고.”“만약 네가 그따위 동정심으로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바꾸지 못한다면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겠어?”그가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싫어! 내 몸에 손대지 마!”장소월이 분노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그때, 서철용이 문을 두드렸다.“두 사람 잠시 싸움을 멈춰요. 전연우, 할 말 있으니까 나와.”전연우는 그녀를 힐끗 보고는 병실을 나갔다. 서철용은 손에 들고 있던 장소월의 검사 기록을 보여주었다.“장소월이 예전에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는 거 알고 있었어?”전연우가 말했다.“그게 뭔데?”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르는 것이 틀림없다.“우울증 환자는 약물로 마음을 안정시켜야 해. 아니면...”그때 간호사 한 명이 돌연 소리를 질렀다.“서 선생님, 저길 보세요. 환자분 뛰어내리려고 해요.”장소월은 의자를 밟고 창가에 올라가 있었다.전연우는 곧바로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서철용은 냉담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이렇게 빨리 포기할 줄은 몰랐다.'장소월... 넌 강영수를 곁에 둔다고 해도 전연우를 벗어날 수 없어.네가 경험한 건 전연우가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든.'결정적인 순간, 전연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곳은 15층이라 떨어지면 의심의 여지 없이 목숨을 잃는다.장소월은 절망이 가득 남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우울증 환자의 자살 충동은 이렇듯 아무런 징조도 없이 생겨난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생각한다.자살이라는 두 글자는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악마처럼 달콤하게 유혹한다.장소월도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통제하고 또 통제했다. 하지만 행동은 그녀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장소월은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혼자 걷더라도 한
장소월이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자 고건우는 조급함에 안절부절못했고 소현아는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며 학교 문 앞에서 간절히 기다렸다.학교 쪽에서 연락을 받고 강영수가 학교에 도착했다. 그 역시 조금 전에야 장소월이 또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강영수는 이번 시험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며칠 밤을 새우며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말이다.이 일은 장해진도 놀라게 만들었다.장해진은 불법적으로 정보를 사고파는 지하 정보 조직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손을 씻고 그쪽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아 큰 힘을 휘두르진 못하는 상태였으나 강영수가 찾고 있다는 것을 알리니 30분도 채 되지 않아 소식을 받았다.장해진이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강 대표님, 안심하세요. 소월이는 어젯밤 도원촌에 놀러 갔다가 조금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요. 지금은 연우가 보살피고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강영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병원이라고요? 소월이가 왜 병원에 있는 건데요!”강영수의 등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진봉은 소월 아가씨는 이번엔 절대 쉬이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시험은 15분 뒤면 끝이 난다.장소월은 낮은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그녀의 시선 속에 링거병이 들어왔다.아직 죽지 않은 건가?그녀는 마지막 순간 전연우가 자신을 끌어당겼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론 정신을 잃고 말았다.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강영수를 본 것 같았다.강영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내가 너무 늦었어.”그의 목소리는 환각이 아니었다. 강영수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차가운 체온까지 느껴졌으니 말이다.장소월은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괜찮아.”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바라보았다. 약간 눈이 부셨다.“요즘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할게...”강영수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그녀에
전연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윤서는 장소월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도 기성은에게 물어 안 것이었다. 어젯밤 전연우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백윤서는 시험을 마치고 병원에 왔다가 굳게 닫힌 방문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그때 마침 그곳에 온 서철용과 몸이 부딪혔다. 그 바람에 서철용이 손에 쥐고 있던 검사 차트가 모두 바닥에 흩어지며 떨어져 버렸다.백윤서가 당황하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그 중엔 장소월의 CT도 있었다.서철용이 말했다.“괜찮아요. 다 내가 제대로 잡지 못한 탓이에요.”그가 허리를 굽혀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줍기 시작했다.그때, 종이 하나가 장해진의 발밑에 날아갔다. 그가 주워 살펴보니 자궁 척출 동의서였고 전연우의 사인까지 그려져 있었다. 장해진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움켜쥐었다.“어르신?”장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상대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해지게 만들었다. 서철용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서철용은 강영수에게도 장소월의 상태를 알렸다.“대표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과로 때문에 자궁 수술 자국이 파열된 거예요. 이젠 지혈되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약만 주의해 드시면 돼요. 그리고.... 장소월 씨의 기분도 각별히 신경 써 주세요. 예전 검사 기록에서 심각한 우울증을 알았다는 것을 봤거든요. 오늘 우울증이 극에 달해 자살 시도까지 했어요.”진봉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진봉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고, 서철용은 병실로 돌아갔다.진봉이 강영수에게로 다가갔다.“조사를 마쳤습니다. 어젯밤 소월 아가씨는 강용을 찾으러 도원촌에 갔습니다. 심유 씨의 고질병이 깊어져 병원에서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강영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그들 모자를 내가 너무 얕잡아 봤어. 소월이는 심유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어제 심유는 제운 고등학교에
강영수가 강용을 지하실에 가둔 이유는 단 하나, 그에게 작은 처벌을 안겨주기 위함이었다.저번 장소월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의 셋방 건물 아래에 있던 그의 수하들은 모두 강용이 걸어 나오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싸우는 소리까지 들었다.일은 그의 상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장소월은 학교 부근의 셋방에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제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그곳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강용을 제외하고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강영수는 예전 장소월이 강용과 어떤 사이였든, 지금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병실 밖으로 나갔다가 줄지어 서 있는 정장 차림의 경호원을 본 은경애는 불길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하룻밤 함께 지내보니 저 사모님은 꽤 괜찮은 분인 것 같았다. 심유는 많진 않지만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수고비까지 그녀에게 쥐여주었다.장소월이 은경애의 전화를 받고 있을 때, 강만옥은 장소월의 병실에 찾아와 따뜻한 물을 그녀의 침대 옆에 놓아주고 있었다.“사람을 걱정시키는 데에 뭐가 있단 말이야.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시험은 이미 지나갔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 수능을 잘 보면 되잖아.”“네.”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직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푹 쉬어. 무슨 일 있으면 말해. 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그럼 부탁할게요.”“가족끼리 부탁은 무슨.”확실히 가족이다. 저번 주 장해진과 강만옥은 혼인신고를 했으니 말이다.장해진은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다. 하여 재혼은 떠들썩하게 치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결혼식은 치르지 않았다.장소월은 베개 밑 핸드폰의 진동을 느꼈다.강만옥이 나간 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전화는 이미 꺼져있었다.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은경애였다.은경애는 그녀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겼다.「아가씨, 보살피라고 하셨던 그 사모님은 깨어나셨어요. 하지만... 강영수 도련님 정말 무서운 분이셨군요. 갑자기 온몸에 상처가 난 사람을 끌고 병실에
환자복을 입은 심유의 청초한 얼굴에서 두 갈래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침대를 잡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영수야, 아줌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용이는 아직 철이 없어 아무것도 몰라.”강용이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울부짖었다.“무릎 꿇지 말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참으로 웃기고 어이없는 모자의 모습이다.당시 심유가 그의 가정을 깨뜨렸을 때,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수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 했다. 이별을 선택했다면 멀리 떠날 것이지, 왜 근처에서 맴돌다가 강일주의 눈에 띈단 말인가!이게 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혼자 사생아를 낳아 키운 것 때문이다.강영수가 있는 한, 이 잡종은 영원히 강씨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바로 그때, 강영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보고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조금 전 잔뜩 날이 세워져 있던 모습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전화를 건 사람은 장소월이었다.“지금 어디야?”강영수는 강용을 힐끗 보고는 오싹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병원에 있어.”상대방은 한동안 침묵했다. 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소월의 허약하고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학교 옆 가게 만두가 먹고 싶어. 사다 줄 수 있어? 파는 빼고.”“그래. 알았어. 금방 가져다줄게.”“응. 기다릴게.”강영수는 전화를 끊은 뒤 승리자의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 차가운 눈빛으로 강용을 내려다보았다.“너한테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하나는 서울에서 머물며 네 어머니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거야. 내가 알기로 네 어머니는 얼마 버티지 못해. 다른 하나는 해외에 나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 거야. 하지만 난 매달 네 어머니의 병원비를 보내줄 거고 네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생활비도 책임질 거야.”강용의 눈에 시뻘건 핏줄이 줄기줄기 서렸다. 절대 굴복하지 않을 듯한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길들이지 못하는 야생 동물과도 같았다.“이런 기
“당시 난 목숨을 끊는 것으로도 부모님의 사이를 되돌릴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그 자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장소월은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울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곳, 아무도 닿을 수 없는 위치에 강림해 있는 그에게 장소월과 같은 망가진 가정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두 사람은 그런 점에서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다. 불행해질수록 더더욱 안정된 가정을 갖고 싶었다.“하느님은 공평해. 너에게 재부를 줬으니 다른 것은 빼앗아간 거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과 비교하면 우린 운이 좋은 편이잖아.”장소월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자유와 선택권만 갖는 것으로 충분했다.강영수의 크고 두꺼운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이제... 나한텐 너밖에 없어. 넌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야. 그렇지?”그 말에 장소월은 부담감에 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사실 그의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녀 한 명뿐만은 아니다.장소월은 당시 깊은 지하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강영수를 꺼내 그의 세상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김남주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해도, 그를 구원해준 일은 결코 쉬이 잊혀지는 게 아니다. 때문에 그녀는 강영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강영수에게 있어 김남주는 단지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무나 대체할 수 없다.김남주가 떠나가고 강영수가 다시 어둠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순간, 장소월이 마침 그곳에 나타난 것뿐이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이제 김남주가 돌아왔으니 장소월은 본의 아니게 그들 세상의 제3자, 방해꾼이 되어버렸다.장소월은 강영수의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김남주 역시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세상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장소월은 자신을 빨아들일 듯한 소용돌이가 일렁이는 그의 눈을 바라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