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필연코 긴밤이 될 것이다.밤바람에 어두운 커튼이 흔들리고, 장소월은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닦고 침대 옆 캐비닛으로 가서 깨진 휴대폰을 충전했다. 화면에 금이 간 휴대폰은 낮에는 괜찮았지만 지금 충전하려니 자꾸 끊겼다.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도착했고, 발신자 번호를 본 그녀는 마음을 졸였다.그녀는 받지 않고 전화가 여러 번 자동으로 끊기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상대방이 포기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연거푸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직 안 자는 거 알아.」「소월아, 왜 또 말을 안 들어?」「전화 받아.」「내가 지금 당장 강씨 별장에 가도 상관없는 거야?」장소월은 호흡곤란이 왔고 심장 박동도 불규칙했다.곧 그녀는 또 다른 영상을 받았다.차 안에서...그는 또 메시지를 보냈다.「이 영상을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되겠지?」대체 언제 찍었을까?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장소월은 얼음 저장고에 빠진 듯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리고, 또 전화가 걸려왔다.장소월은 30초 정도 기다리다가, 신호가 끊어지려 할 때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대체 왜 이래?”휴대폰 너머에서는 샤워하는 물소리와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지금의 전연우는 욕조에 누워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물로 타오르는 욕망의 불을 끄고 있었다.잔잔한 물속에서 단단한 물건이 세로로 세워졌고 그는 손으로 쥐고 있었다.“내가 보낸 걸 읽어줘.”글을 본 장소월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남자는 중국의 기서 ‘금병매’의 27장 포도 시렁의 구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분명 다 아는 글들이지만, 조합해서 보니 장소월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좀 작작 해!”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전화 너머의 남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말 듣지? 내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 네가 강씨 집안에 있다고 해서 너를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은 버려. 김남주가 돌아왔어. 네가 그 집에서 얼마나 버
“소월 아가씨, 도련님은 같이 안 내려오셨어요?”“아마 아직 자고 있을 거예요.”“제가 방금 갔을 때 방에 안 계시던데요?”강영수는 어젯밤 나가서 아마 밤새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그녀는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마 회사에 일이 있어서 나갔나 봐요.”“그렇군요.”장소월은 집을 나설 때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내일 시험이라서 그런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제운중학교.8시에 학생들은 하나둘 씩 수업에 들어왔다.“그 뉴스 봤어? 어젯밤 천하일성에서 큰 사건이 터졌는데, 황준엽이 누군가에게 죽도록 맞았대.”“봤어. 내가 그때 천하일성에 있었어. 그런데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 당시 경찰차와 구급차 모두 출동했어. 객실 종업원에게 들으니 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였대. 적어도 반신불수가 될 정도로 맞은 것 같아.”“황준엽은 대체 누구한테 밉보여서 그렇게 심하게 맞은 거지?”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연예 잡지를 손에 들고 방금 이야기를 하고 있던 여학생들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이것 좀 봐. 최신 뉴스야.”“뭐? 때린 사람이 강영수라고? 손에 안고 있는 여자는 누구야? 장소월은 아닌 것 같은데?”잡지 표지에서 강영수는 황금빛 긴 생머리에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는 여자를 안고 있었다. 파파라치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어렴풋한 옆모습과 몸매로 보아 장소월은 아닌 것 같았다.많은 여자는 손에 똑같은 잡지를 들고 뭔가를 연상하고 있는 듯했다.“헐, 황준엽을 때린 사람이 설마 강영수?”황준엽은 모두가 알아주는 재벌 2세였고, 게다가 그의 방탕한 습관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아마 황준엽이 이 여자에게 눈독을 들였고, 강영수가 구하러 갔다가 호텔에서 데리고 나오는 장면일 것이다.뉴스를 낸 잡지사는 바로 전에 장소월과 강영수의 사진을 찍은 잡지사였다.이번에는 장소월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꽤나 큰 소동이 벌어졌기에 휴대폰 푸시 뉴스에도 강영수의 소식이 떴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을 보았다. ‘
오후 5시 30분, 올림피아드 반.고건우는 마지막 문제를 강의하고 교재를 덮었다.“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더 질문 있나요?”“질문 없으면 오늘은 일찍 집에 돌아가세요. 기초 지식을 공고히 하고, 내일 시험에 영향 주지 않도록 일찍 자세요.”“마지막으로 강조하는데, 절대 지각하지 말고, 수험표도 잊지 말고 챙기세요.”고건우는 책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방을 챙기고 있었는데, 단모연이 와서 장소월의 어깨를 두드렸다.“만년 2등, 오늘 일찍 끝났는데 놀러 가지 않을래?”“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거 같아.”“쳇, 똑같은 핑계만 벌써 몇 번째야. 집에서 단속을 엄하게 해?”장소월은 말없이 싱긋 웃었다.허이준은 단모연에게 눈빛을 보냈고, 단모연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자신의 입을 가렸다. ‘아차, 까먹었네!’“괜찮아. 그럼 난 이준이랑 먼저 갈게.”“그래.”그들이 떠나고, 백윤서가 장소월의 앞에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소월아, 괜찮아?”“저 괜찮아요.”장소월은 별다른 표정 없이 가방을 챙겼다.강영수가 천하일성에서 안고 나온 여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강영수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모두 장소월이 곧 버림 받으리라 생각했고, 온갖 루머가 떠돌고 있었다.“그럼 난 먼저 교실로 돌아갈게. 만약 우울하면 언제든지 날 찾아와. 네가 집에 돌아오고 싶다면 연우 오빠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낼 거야.”“네, 먼저 돌아가요. 전 책을 챙길게요.”“좋아.”교실 전체에 장소월 혼자 남았을 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심장을 휘감았다.장소월은 이마를 짚고 손가락을 까맣고 곱슬곱슬한 머리 사이에 넣었다. 오늘 너무 따가운 시선을 받아 머리가 좀 아팠다.귓가에 들리는 각종 시끄러운 소리가 그녀를 숨 막히게 했고, 돌아가서 어떤 방식으로 강영수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어머, 이거 장소월 아니야?”“왜 아직도 안 갔어?”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복도를 지나다가 교실 안의 장
“만약 강 대표님에게 일러바치면 우리 부모님 사업에 영향 줄 거예요.”설채윤의 눈에 독기가 번뜩였다.“쓸모없는 것들. 하지만 겁먹지 마. 강영수랑 오래 못 갈 거야.”애초에 강영수가 두 사람의 사이를 만천하에 공표했지만, 지금은 밖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이 발견됐으니 장소월의 얼굴에 제대로 먹칠을 한 격이다.장소월은 학교에서 나왔다. 그녀의 전문 기사는 오늘 그녀가 일찍 하교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휴대폰 수리점으로 향했다.사장은 장소월의 휴대폰을 살펴보더니 말했다.“최신 휴대폰이 이렇게 망가졌으니 수리하는 비용이면 새 휴대폰 하나를 사겠어요. 수리하지 말고 마침 여기 새로 들어온 휴대폰이 몇 개 있는데 보시겠어요?”장소월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네, 한번 볼게요.”그녀의 휴대폰에는 특별히 중요한 것이 없었다. 매일 스팸 메시지를 받고, 가끔 몇 통의 전화를 받는 것 외에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오래된 펠프스 모델을 골랐다. 낙상 방지와 방수 기능을 모두 갖췄지만 공능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충분했다.원래 휴대폰의 연락처를 보며 번호를 하나씩 저장하기 시작했다.장소월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와 부딪쳤고, 그녀는 놀라서 얼른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었...”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더니... 얼른 다가가 상대방을 일으켜 세웠다.“난 괜찮아요. 소월 씨는요?”심유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고 장소월은 놀라서 물었다.“아주머니가 어떻게 여기 계세요?”심유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용이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고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어요.”“워낙 철이 없고 멋대로 행동하는 녀석이라 이제 저도 관여할 수가 없네요... 콜록콜록...”심유는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 손수건을 움켜쥐고 기침을 하더니, 손수건은 어느새 피로 물들었다. “아주머니...”심유는 부드럽게 웃으며 장소월의 손을 잡고 말했다.“고질병이에요. 강용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장소월은 불안감에 휩싸인 초조한 얼굴로 수술실 문 앞을 지켰다. 수술을 시작한 지 어느덧 3, 4 시간이나 지났으나 강용에겐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았다.대체 어디에 간 걸까?그녀는 강용 주변 사람의 연락처는 아는 것이 없었다.돌연 장소월의 머릿속에 한 곳이 떠올랐다. 혹시 도원촌에서 엽시연과 함께 있는 게 아닐까?그곳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장소월은 다급히 예전 생선 구이집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뚜뚜뚜.‘빨리 받아!’그때 도원촌.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건달 몇 명이 손님을 모두 내쫓고는 현광원을 둘러싸고 있었다.“당신들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강지훈이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별거 아니야. 아주 소소한 일일 뿐이거든. 하지만 고분고분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야. 이 칼엔 눈이 달리지 않았잖아? 안 그래?”“잠시 후 누가 전화 오면 뭘 묻든 모른다고만 해. 허튼소리를 했다간 저승에 발을 들여야 할 거야.”“네... 네...”현광원은 1m 89의 건장한 몸집의 남자였지만 이렇게 많은 건달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남자의 허리 쪽이 불룩한 것으로 보아 총까지 소지하고 있다고 추측된다. 때문에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프런트 앞 전화가 울렸다.강지훈이 눈짓을 하자 현광원은 쭈뼛거리며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여... 여보세요. 누구시죠?”“아저씨, 저 소월이에요. 혹시 엽시연과 강용이 거기에 갔나요? 오늘 강용 본 적 있어요?”현광원이 말했다.“나... 난 못 봤어. 그러니까 나한테 묻지 마. 난... 아무것도 몰라.”강지훈이 현광원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착하네. 잘했어. 또다시 물어도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겠지?”“네. 압니다. 압니다.”강지훈이 부하들을 데리고 문을 나서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보스, 이쪽 일은 해결했습니다.”“그래. 사람을 보내 계속 감시해.”“네.
장소월의 설명을 들은 엽시연의 손이 흔들렸다. 이에 팔에 문신을 새기던 남자가 꽥 소리를 질렀다.엽시연이 다급히 말했다.“기다려. 내가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볼게.”“그래. 부탁해.”엽시연은 재빨리 예전 강용과 친하게 지내던 몇 명의 친구들을 모았다.그중 빨간 머리가 말했다.“형은 오랫동안 우릴 보러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형이 여길 떠난 뒤엔 우리도 별로 연락하지 않았고요. 대부분은 형이 우리한테 전화했었죠. 형이 자주 가는 곳은 저희도 잘 몰라요.”“맞아요. 강용 형은 예전 우리와 썩은 채소잎을 주워 먹으며 어울려 다녔어요. 하지만... 그건 이제 오래전의 일일 뿐이에요.”썩은 채소잎을 주워 먹었다고? 장소월은 예전 강용의 삶이 그 정도로 가난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장소월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강용... 어렸을 때 고생 많이 했어?”빨간 머리가 말했다.“맞아. 하루에도 아르바이트를 몇 개나 했어. 일은 어찌나 잘하는지 바다에서 잡아 온 생선들을 옮기는 일엔 강용 형을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였어.”장소월은 전혀 모르는 강용의 모습이었다.엽시연이 소리쳤다.“지금 그런 얘기를 뭣 하려 해! 빨리 흩어져서 찾아야지!”장소월이 말했다.“나도 같이 가자!”“넌 나가지 마. 저번 일을 잊으면 안 돼. 도원촌은 안전한 곳이 아닌 데다가 넌 이곳에 익숙하지 않잖아. 우리가 찾아볼게. 찾으면 즉시 너한테 알릴게.”“꼭 좀 부탁할게. 고마워.”“고맙긴 뭘. 얼마 전에 밥도 얻어먹었잖아. 이 정돈 당연히 해야지.”“알아냈어요.”13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달려 들어왔다.“형, 제가 알아봤는데 오늘 4시쯤 눈 쪽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건달 한 무리를 데리고 현씨 아저씨네 가게에 쳐들어갔대요. 지금 가게는 문을 닫았고 집에도 찾아가 봤는데 아저씨는 없었어요.”엽시연이 말했다.“안 계신다면 아마 바다에 나가셨을 거야.”그들이 문을 나선 뒤 장소월은 생각에 잠겼다. 눈에 흉터가 있는 사람, 그리고 그 통화... 현씨 아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장소월의 눈에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중 몇 명은 강지훈의 수하들이었다.장소월은 곧바로 커튼을 닫고 뒷문으로 나갔다.그녀는 집을 나서며 강씨 집안의 운전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가 시작된 지 1분도 되지 않아 핸드폰은 배터리가 없어 전원이 꺼져버렸다.전연우는 이 어촌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장소월은 다급하게 뒷문으로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차가운 칼날이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으슥한 달빛 아래, 강지훈의 흉측한 흉터는 더더욱 공포스러웠다.“아가씨, 전 대표님께서 아가씨가 혼자 다니면 위험할 거라며 저희를 보내셨어요. 저희들과 함께 가시죠.”말도 안 되는 소리. 제일 위험한 건 바로 그들 자신이다.장소월이 겁에 질려 급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강지훈은 발로 문을 막고는 사납게 말했다.“아가씨, 좋은 말로 할 때 절 따라오세요! 계속 거부한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그녀는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당신들... 뭐 하려는 거야! 나 아버지한테 전화할 거야!”강지훈은 미치광이처럼 웃어댔다.“어르신은 아마 아가씨의 말을 들을 기회도 없을걸요?”장소월은 강제로 낡은 건물 입구에 끌려갔다. 여긴 예전 오 아주머니의 집이 아닌가? 그녀 역시 한때 이곳에 머물렀었다.강지훈이 문을 열고 말했다.“아가씨, 들어가세요.”방안은 조명을 켜고 있지 않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소월은 안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무서운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장소월은 즉시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강지훈은 그녀의 행동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곧바로 거칠게 여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안으로 밀어 넣고는 문을 닫아버렸다.장소월은 그렇게 바닥에 쓰러졌다. 몇 초 뒤, 그녀의 시선 속에 검은색 구두 한 쌍이 들어왔다. 남자가 허리를 굽혀 손 하나를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장소월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힘겹게 뒤로 물러
“경고하는데 나한테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이미 영수에게 연락했어. 아마 곧 올 거야.”“소월아, 김남주가 돌아왔어. 강영수가 아직도 너한테 신경이나 쓸 것 같아?”“그럼 넌? 백윤서한테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거야? 오빠...”그 마지막 두 글자를... 장소월은 입술을 꽉 깨물고 간신히 내뱉었다. 남자의 가슴팍을 애써 밀어내던 그녀는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담배 향을 맡았다. 담배 끊었다고 하지 않았나?그 말은 전연우의 입도 다물게 했다.“내가 예전에 널 좋다고 따라다닐 땐 날 쳐다보지도 않았었잖아. 이제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전연우...”장소월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너 설마 날 좋아하게 된 거야?”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장소월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뜨겁게 키스했다.“장소월, 네 생각 그대로야!”그의 목소리 또한 더욱 거칠어졌다.“하지만... 김남주가 돌아오고, 강영수가 날 떠난다고 해도 너와 난 절대 안 돼. 만약 날 한낱 노리개로 생각한다면 난 확 죽어버릴 거야...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너에게서 벗어날 거라고.”장소월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 한 글자 한 글자는 전연우의 마음속에 비수처럼 박혀버렸다.남자는 이어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코끝이 맞닿았다.“장소월, 아직도 모르겠어? 넌 평생 날 벗어나지 못해.”전연우는 폭력적으로 그녀를 침대로 밀쳤다. 이어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얼굴을 움켜쥐고는 키스를 퍼부었다. 순간 장소월의 옷 거지들이 침대 밑으로 연이어 떨어졌다.“이거 놔, 으악. 날 놔줘...”장소월은 온 힘을 다해 그를 향해 발길질했다. 그 틈을 타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알몸을 감쌌다. 그녀의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흘러내렸다.아까 침대에 놓여있던 속옷도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장소월은 참혹한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송시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목적을 달성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나 경호원에게 말했다.“퇴원 준비해요.”경호원이 말했다.“송 대표님, 간호사가 대표님은 상처가 아물기 전엔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송시아는 아랫배를 만지며 빙그레 웃었다.“이 고비만 넘기면 나도 한동안 푹 쉬어야겠어요.”“알겠습니다.”저녁 12시 커다란 승합차 안, 송시아는 누워있는 남자와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어떤 곳에 도착했다. 핸드폰 신호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곳이었다.천 명은 족히 담을 수 있을 것 같이 커다랗고, 쥐 죽은 듯 고요한 그곳 별장 안은 의료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 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인 주치의 또한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주위엔 높디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전연우를 가두기 위해 만든 새장 같았다.안방은 수영장 하나도 담을 수 있을 만큼 드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연우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의사는 그의 손등에 다시 링거 바늘을 꽂고 있었다.하루 종일 바삐 돌아친 탓에 송시아도 많이 피곤했던지라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옷을 벗고는 반신욕을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우유를 마시며 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얼마 후,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그녀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남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다가왔다.송시아는 매끄러운 긴 다리를 뻗어 눈앞의 남자를 도발했다.“여기 찾지 못할 줄 알았어요.”“나한테 누군가를 찾는 건 아주 간단한 거라고 했잖아.”송시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내가 알아봐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건 알려줄 수 없어. 너희들 사이 일엔 끼어들지 않을 거야. 난 그냥 네 뱃속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 내 대를 잇게만 하면 돼.”송시아는 씁쓸한 얼굴로 컵 안
송시아는 전연우의 손을 잡고 그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팔찌에 손을 댄 순간, 행동을 멈추고 느긋하게 그의 옆에 앉아 핸드폰으로 팔찌 사진을 찍고는 저장되지 않은 누군가의 번호에 전송했다.[이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봐 줘요.]이어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전연우 씨, 지금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연우 씨가 깨어났을 땐 성세 그룹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전생에서 당신은 날 망가뜨렸어요. 이번엔 내가 당신의 모든 걸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 거예요. 그래야 내가 더 쉽게 당신을 통제할 수 있잖아요.”“당신은 권력을 너무 욕심낸 탓에 제일 중요한 걸 잃은 거예요.”소민아는 회사에 돌아간 뒤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서 선생님이 대표님은 곧 깨어나실 거라고 했어요. 기성은 씨도 이제 돌아오는 거 맞죠?]쨍그랑.컵이 깨지는 소리에 소민아가 고개를 돌렸다. 신이랑이 일어나 유리 조각을 주우려하자 그녀는 급히 다가갔다.“움직이지 말아요. 다쳐요.”하지만 신이랑의 손가락은 이미 유리 조각에 찢어져 있었다. 소민아는 휴지로 그의 손가락을 감쌌다.“왜 그래요? 집에 돌아온 뒤로 쭉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았어요.”신이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른 한 손은 소민아에게 잡혀 있었다.“난 괜찮아요. 요즘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래요.”소민아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신이랑이 결혼 때문에 복잡해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솔직히 이게 더 좋은 상황 아니에요? 이랑 씨는 내 상사고, 우린 친구잖아요. 이랑 씨... 난 무슨 이유로든 지금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아요.”신이랑은 자신의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바람 좀 쐬러 나갈게요.”급히 나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언가 회피하는 것 같았다.늘 차분했던 신이랑은 평소와는 달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발코니에서 주먹을 꽉 말아쥐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으스러지는 듯한 두통이 또다시 밀려오기
“됐어. 너 같은 냉혈한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호주머니에서 조개껍질 팔찌를 꺼냈다.“너 지금 모든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 알아.”“전연우, 기억해. 깨어나면 소월 씨한테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예전 네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해.”“소월 씨는 줄곧 강영수의 죽음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긴 거야. 하지만... 이건 기억해야 해, 소월 씨는 너에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는 거. 소월 씨에겐 감정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지금 강영수는 죽지 않고 잘 살아 있어.”“네가 계속 고집부리면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너한텐 영원히 소월 씨를 잃어야 하는 처벌이 내려질 거야.”“소월 씨가 성까지 바꾸고 강영수와 결혼하면 넌 어떻게 할까!”서철용은 전연우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반지를 끼고 있는 무명지가 살짝 움직였다. 서철용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이제야 조급해졌어? 지금까지 뭐 하다 이제야 온 거야!”소민아가 일정을 말하기 시작한 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이자 소민아는 바로 일어섰다.“서 선생님, 대표님은 어떻게 됐어요?”“뭐 어떻겠어요. 당연히 식물인간 상태죠. 하지만 이번 달 안엔 깨어날 거예요.”소민아는 활짝 웃어 보였다.“그래요? 정말 잘됐네요.”서철용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신이랑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 언제 결혼해요? 나한테도 청첩장 보내는 거 잊지 말아요.”그 말에 신이랑과 소민아의 사이는 더 어색해졌다.소민아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서 선생님, 오해예요.”서철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내가 찾아가지 않았는데 제 발로 왔네요?”송시아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민아와 이랑 씨 결혼 청첩장은 내가 직접 보내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서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까
병원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뒤, 소민아가 쭈뼛거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변장 안 해도 돼요? 송시아의 사람들이 알아봐도 괜찮은 거예요?”“그 생각을 민아 씨만 한 것 같아요?”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병원에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아래에서 감시하던 놈이 이미 송시아한테 보고했을 거예요.”소민아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왜 부르셨어요?”서철용은 습관적으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두 사람과 같이 와서 놀려고요.”“뭐라고요? 서 선생님, 지금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장난을 쳐요!”서철용은 무언가 의미가 담긴 듯한 눈빛으로 신이랑을 쳐다보았다. 소민아 약시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가니 경호원들이 당장이라도 서철용을 잡아 누를 듯 위풍당당한 기세로 걸어왔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는 아무도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경호원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민아 아가씨,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그냥 잠깐 들를 일이 있어서요. 우리 셋이 같이 온 거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며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눈빛을 보냈다.경호원 한 명이 막아서려 했으나, 다른 경호원이 그를 제지했다.순조롭게 경호원들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병실 문 앞까지 도착한 뒤, 서철용은 걸음을 멈추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내 수호신 두 명이 이렇게까지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됐어요! 이젠 문 앞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저기!”소민아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문은 쾅 하고 닫혀버렸다.그녀가 옆에 있는 신이랑을 보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대체 왜 우릴 불러놓고 들어오지도 말라는 걸까요?”신이랑이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민아 씨가 있어서 송시아가 서철용을 건드리지 못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제야 서철용의 의도를
소민아는 옆에 앉아있는 신이랑을 보고는 말했다.“저 지금 이랑 씨와 같이 있어요.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에요. 무슨 일이세요?”“잘됐네요. 엘리트 개인 병원으로 와요.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바로요.”“참, 서 선생님, 왜 제가 전화를 걸면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뚜뚜뚜...”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소민아는 씁쓸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랑 씨, 우릴 왜 오라고 하는 걸까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가서 들어보죠.”“그래요.”마침 두 차가 함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다. 서철용이 차에서 내리자 소민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 선생님.”“걸으며 얘기하죠.”서철용은 소민아 옆에 있는 신이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신이랑은 서철용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두 사람 중간에 서 있던 소민아는 전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누군가 몰래 송시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송 대표님, 저희에게 감시하라고 시켰던 그 사람 나타났어요. 소민아와 신이랑과 함께요. 신이랑은 저희가 손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성세 그룹.대표 사무실 안, 송시아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무심히 돌리고 있던 펜도 손에서 내려놓았다.“이번 일에 동원한 사람들이 꽤 많네. 넌 계속 거기에서 지켜봐, 무슨 일을 하는지.”‘서철용, 감히 내 구역에 제 발로 기어들어와? 지금은 몸을 사리며 몰래 숨어있어야 하잖아.’서울 전체를 손바닥 안에 넣고 장악하는 기분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송시아는 창가로 걸어가 바닥에서 오가는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전연우 씨... 전생에서 장소월까지 버리고 이 자리에 오르려 한 이유가 있었네요.’‘전생에서 이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고 해도 결국엔 장소월을 잃고 말았어요.’‘역시 하느님은 공평해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게 만들죠.’전
“사리 분별 못 하는 그 자식한테 보내온 거지 뭐. 그놈이 빨리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짓말까지 만들어내 소월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서울까지 보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배은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가서 씻고 일찍 쉬어. 아기는 깨우지 마. 방금 잠들었어.”젖을 먹던 아이가 품 안에서 잠들자 배은란은 옷을 정리하고 아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철용은 잠들어있는 아이를 안아 옆 아기 침대에 눕혔다.“그럼 난 씻으러 갈게. 쉬어.”“괜찮아. 민용 씨 올 때까지 기다릴게.”서철용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나 밤에 자료 좀 봐야 해. 착하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그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병실 안에 별도로 간병인 실이 있어 요즘 서철용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에게 자신을 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배은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천천히 짙어져 갔다.서철용은 옆방에 들어간 뒤 침대에 누워 신발도 벗지 않고 손을 눈 위에 올려놓고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켰다. 배은란은 상처가 80% 정도 회복되었지만 아직 통증이 있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벽을 짚고 그의 옆까지 다가가 조심스레 신발과 옷을 벗겼다. 서철용은 정말 피곤했는지 꽤나 큰 움직임에도 깨지 않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서철용은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눈을 감고 더듬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귀 옆에 가져갔다.“여보세요. 누구시죠?”“철용이니? 네가 보낸 사람 이제 깨어났어.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 시간 날 때 한 번 와보지 않을래?”서철용은 왼쪽 팔에서 저림을 느껴 손을 움직이며 옆쪽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이불 속에 사람 한 명이 더 누워있었다
“내가 그렇게 흉측해 보여?”“난...”여자의 몸이든, 남자의 몸이든 서철용에겐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은란은 다르기 때문에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 혼자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서철용의 배은란에 대한 감정은 그녀와 서민용이 결혼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줄곧 그녀를 빼앗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었다.하여 갖은 방법을 대어 서민용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자신을 서민용으로 여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 심지어 최면을 한 뒤에도 서민용을 놓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서철용은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제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모두가 인정하는 실력 있는 의사인 서철용이었지만, 지금 배은란의 상황은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가 계속 몸을 돌리지 않자 배은란은 슬픔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했어.”그녀는 눈물을 닦고는 서철용의 손을 툭 쳐냈다.“내 몸에 더러운 게 자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피하는 건데!”“아기는 보면서 왜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 거야.”“민용 씨, 우리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를 하지 않았는지 알기나 해?”서철용이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엔 아무 데도 안 가고 너랑 같이 있을게. 응?”그가 배은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럼 연구원은?”“몇 개월 휴가 냈어. 그동안 계속 너랑 집에만 있을 거야.”배은란의 감정은 그제야 천천히 안정되었다.서철용이 이런 결정을 한 건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아까 누가 민용 씨 앞으로 왔다면서 택배 가져왔어. 상세한 주소도 안 쓰여있고, 이름도 없었어. 내가 책상 위에 놓아뒀어.”배은란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까 봐 열어 보지 않았다.서철용이 열어보니 지극히 일반적인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가 들어있었다.배은란이 물었다.“진짜 예뻐. 이거 어디에서 보내온 거야?”서철용은 조개껍데기
송시아가 분노가 가득 실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참혹했던 기억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아무도 내가 예전에 어땠는지 상관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집중돼 있거든요.”“이 큰 서울을 뒤엎는 것도 내 한 마디면 충분해요.”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요염한 얼굴에 송시아에 대한 가소로움이 가득 찼다.“정말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송시아 씨... 당신이든 전연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그 어디에도 계속 한쪽으로만 기우는 저울추는 없거든요.”송시아는 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떨어진 낙엽을 툭툭 걷어찼다.“됐어요. 그 말은 연우 씨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난 말할 것도 없죠.”“오늘 여기에 온 건 서 선생님한테 경고하기 위함이에요. 숨고 싶으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최대한 깊이 숨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을 제외하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거든요.”“아, 참! 그리고 당신 와이프... 당신도 와이프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건 원하지 않죠?”“서민용은 이미 죽었잖아요. 만약 내가 사실을 알려준다면 당신 와이프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서철용의 눈동자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송시아 씨,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면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아요?”그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 화면을 본 순간 송시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여기엔 송시아 씨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다 녹음되어 있어요.”“이것도 다 송시아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 만약... 은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가 저지른 일이든 모두 당신부터 의심할 거예요.”“은란이나 아이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난 당신이 예전 업소에서 나체로 춤을 추던 영상, 그리고 소민아와의 관계까지 모두 세상에 퍼뜨리고 서울 한복판 전광판에 생중계할 거예
하지만 서철용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짧게 몇 마디 보내곤 했다.수술이 끝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군병원.아래층 정원, 도우미가 남자아이를, 서철용이 여자아이를 안고 있고, 배은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답장 안 해?”최근 서철용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 빈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는 연구원의 소식을 놓칠까 봐 핸드폰 알림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 며칠 동안 연락을 해온 건 연구원이 아니라 소민아였다.서철용은 핸드폰을 꺼내 소민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이 귀찮은 여자한테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어.”성세 그룹.사무실 안, 소민아가 또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좀 구해주세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차단 표식이 떴다.배은란 역시 서철용이 다른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저번 수술을 마치고 온 날 배은란은 깜짝 놀랐었다. 그가 너무 피곤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잠들어 있었다. 배은란은 자신도 수술 회복기였지만,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막지 못했어요.”그 불청객을 봤음에도 서철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송시아가 어느새 나타나 도우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이가 아빠와 엄청 닮았네요. 서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송시아의 불순한 눈빛을 본 서철용은 간호사에게 배은란과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 꽤 많이 변한 것 같네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사람은 원래 다 변해요. 왜 그렇게 아내분을 급히 보내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