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은 차를 향해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백윤서는 그녀에게 물 한 병을 주며 걱정스레 말했다.“소월아,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장소월은 건네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괜찮아요.”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우리... 어디 가요?”백윤서도 어디로 가는지 몰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그러게요. 연우 오빠, 우리 어디로 가요?”“소월이는 어디로 가고 싶어?”전연우가 그녀에게 물음을 던졌지만, 말 속에는 또 다른 암시가 있는 듯했다. 장소월은 손에 있는 물병을 다시 옆에 두고 지금 차가 달리고 있는 방향이 장씨 저택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남자가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장소월은 시선을 피하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길가에서 세워줘요. 영수가 데리러 올 거예요.”“혼자 둘 수 없어. 아직 9시도 안 됐으니 일단 남원 별장에 돌아가서 얘기해.”그의 말은 장소월에게 거절의 여지를 주지 않았고, 장소월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소월은 소현아에게 답장을 했다.「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그럼 다행이야.」그리고 강영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는 회사 일을 다 처리하고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소현아에게서 또 메시지가 도착했다.「참, 너희 오빠 오늘 너무 멋졌어! 기자들한테 그런 말을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널 데리고 가다니. 그 기자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넌 모를 거야!」장소월은 얼굴을 찡그리고 답장했다.「무슨 말을 했는데?」「내일 인터넷 뉴스를 보면 알게 될 거야. 내가 잘 표현을 못 하겠어.」그들은 남원 별장에 도착했다.평소 이 시간에 장해진은 일찍 올라가서 쉬거나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장소월은 그를 만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면 또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세 사람이 앞뒤로 현관에 들어섰을 때, 오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윤서 씨 왔어요? 저번에 술떡을 먹고 싶다고 해서 오늘 좀 빚었어요. 어서 와서 맛보세요.”
“만둣국 다 됐어요.”오 아주머니는 만둣국 두 그릇을 들고 부엌에서 나와 장소월의 앞에 놓았다.“아가씨가 고수를 좋아하지 않으니 고기소만 넣었어요.”장소월은 그릇에 떠 있는 초록빛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주머니... 저 파 안 먹어요.”오 아주머니는 잠시 멍해지더니 웃으며 이마를 쳤다.“내 정신 좀 봐. 아가씨가 온 지 너무 오래돼서 까먹었어요. 다시 만들어올게요.”장소월은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오 아주머니는 종래로 그녀의 입맛을 잊은 적이 없었다.“괜찮아요. 제가 골라내서 먹으면 돼요.”장소월은 휴지를 꺼내 테이블에 펼쳐 놓고 파를 집어내기 시작했다.순간 침묵이 흘렀다.장소월이 책을 접고 고개를 돌려보니, 전연우가 젓가락을 들고 그녀를 도와 파를 골라주고 있었다.“여전히 귀찮은 애야.”“사실 아가씨는 사모님을 닮았어요. 사모님도 파를 좋아하지 않으셨어요.”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만둣국을 먹었지만, 왜 그런지 예전만큼 맛있지 않았다.백윤서는 술떡을 절반 먹고 금방 질려서 전연우 앞에 밀었다.“오빠, 너무 달아요. 제 거 좀 먹어줘요. 전 오빠 거 맛 볼래요.”“오빠, 우리 세 사람 진짜 오랜만에 같이 밥 먹는 거예요. 전에 저랑 소월이가 남은 음식은 늘 오빠가 처리해줬잖아요.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하던 시절이 그립네요.”오 아주머니는 부엌에 정리하러 갔고, 세 사람만 거실에 남았다.백윤서는 전연우 그릇의 만둣국을 먹었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술떡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사실 전연우도 장소월처럼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반 그릇을 먹은 장소월은 배가 불렀고 일어나 주방에 가려고 했다.“소월이 다 못 먹겠으면 내 그릇에 넣어.”장소월은 그릇을 든 손을 꼭 잡았다.백윤서도 한마디 보탰다.“어차피 나 배 안 불러. 나 줘.”장소월은 눈꺼풀을 늘어뜨리고 입을 열었다.“나 감기 걸렸어요. 옮으면 어떡해요.”말을 마치고 부엌으로 가서 남은 음식을 버렸다.그녀는 설거지를 하
전연우는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안 자고 가는 거야? 집에 빈방 있어.”그가 왜 갑자기 그런 눈빛으로 장소월을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야. 그냥 갈래.”장소월은 한 마디를 남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전연우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었고, 떠나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을 보며 눈동자는 더욱 깊어졌다.백윤서는 문득 입을 열었다.“오빠,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왜 소월이가 자기 집에 있는걸 싫어하는 것 같죠? 여기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여기는 소월이 집이잖아요.”강영수는 조수석 앞에 서서 걸어오는 사람을 향해 두 팔을 벌렸고, 장소월도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몸은 아주 차가웠다.그는 오늘 자주 입는 회색 정장 위에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어깨에 물방울이 맺혀있는 것을 발견했다.“왜 옷이 젖었어?”강영수는 검지를 구부려 그녀의 작은 얼굴을 만지더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퇴근하고 너 데리러 오는 길에 비가 좀 왔어. 출발할까?”“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오늘은 강영수가 직접 운전해서 왔다. 장소월이 조수석에 앉았지만, 조수석의 위치가 누군가에 의해 움직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는 거의 운전을 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는 장소월만 조수석에 앉았다. 지난번에 조수석에 앉았을 때보다 위치가 분명 뒤로 밀려 있었다.강영수는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해주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야. 의자가 좀 뒤로 밀린 것 같아서 내가 조절할게.”그러자 강영수의 안색이 변했다.“그래.”그는 액셀을 밟더니 또 입을 열었다.“오늘 일에 대해 이미 들었어. 안심해.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할게.”장소월은 손톱으로 안전벨트를 긁으며 말했다.“영수야... 아직은 사람들이 우리 관계에 대해 아는 걸 원하지 않아. 그리고 그 잡지들은...”“왜? 그 사람들이 너를 곤란하게 했어?”남자는 핸들을 잡은 손을 꼭 잡았다.장소월은 남자의 목소리에서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계속 말을
장소월은 약간 쓴 삼계탕을 한 그릇 마셨고, 강영수는 곁에서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차 안에서 나눈 이야기에 대해 아무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맛있어?”“그럭저럭. 난... 이만 돌아가서 숙제할게. 너도 얼른 쉬어. 잘 자.”“잘 자.”강영수는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손에 든 라이터를 들고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오부연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차리고 물었다.“도련님, 소월 아가씨와 싸우셨나요?”강영수는 다리를 꼬고 뒤로 기댄 채 말했다.“소월이가 그 기자들을 처리해 주길 원하는데, 내가 동의하지 않았어. 내가 아직도 많이 부족한가? 우리가 부적절한 관계도 아니고.”오부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소월 아가씨는 아직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을 듯하네요. 늘 혼자 다니며 다른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 연예 기자들이 이미 소월 아가씨의 삶을 방해했으니, 초조해하는 것도 당연하죠. 만약 소월 아가씨가 언젠가 강가에 시집온다면 꼭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죠. 지금 미리 적응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죠.”그녀가 졸업하면 조만간 강한 그룹의 사모님의 될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은 언론 기자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 감당할 수 없다면, 앞으로 그녀는 습관적으로 위축될 것이다.오부연은 강영수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말을 보탰다.“오늘 노부인께서 별장에 와서 소월 아가씨를 찾으셨어요. 팥떡이 드시고 싶으시다면서요.”강영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나도 아까워서 요리를 시키지 않는데, 그 할멈은 참 염치도 좋아.”장소월은 숙제를 마치고 단어 몇 개를 외우고 바로 잠이 들었다.이튿날 새벽.정장 단추를 채우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강영수는 식탁에서 낯익은 모습이 보이지 않자 거실 전체를 훑어보았다.“소월이는?”“소월 아가씨는 아침 일찍 나가셨어요. 시험장에 가본다면서요.”예전에 장소월은 먼저 자리에 앉아 강영수를 기다려 같이 식사를 하고, 그가 학교로 데려다주곤
장소월은 맨 뒷자리에 앉았고, 그녀의 앞자리에 앉은 단모연이 가끔 와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바로 이때, 장소월의 휴대폰이 울렸고 누군가 사진을 보내왔다.사진을 본 장소월은 온몸이 차가워졌고, 손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모르는 전화번호로 온 사진 속 그는 호텔의 흰색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 상반신을 벌거벗은 채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기록된 시간과 날짜를 보니 작년 설쯤으로 최근에 찍은 사진이었다.귓가에 굉음이 둘리더니 갑자기 강영수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내가 뭐하러 가는지 안 물어봐?”“3일 후면 바로 돌아올 거야.”“소월아, 뭘 보는데 넋이 나갔어?”단모연의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장소월은 놀라서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황급해서 어찌할 줄 몰라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남들이 볼까 봐 두려웠지만, 다행히 휴대폰 화면이 아래로 향해 떨어졌다.장소월이 당황하는 모습을 처음 본 학생들은 그녀에게 시선이 쏠렸다.단모연은 허이준의 시선을 느끼고 서둘러 설명했다.“내가 놀라게 한 것 아니야.”허이준: “휴대폰 안 망가졌어?”장소월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응, 괜찮아.”사실 휴대폰 화면은 깨져서 금이 갔고, 가장 자리도 약간 갈라진 흔적이 있었다.장소월은 이 일을 소화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누가 보냈을까?이런 사진을 그녀에게 보낸 목적이 무엇일까?오늘 시험장을 보고 나면 모레 시험이었다. 이 일로 인해 영향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장소월은 자꾸 생각의 굴레에 빠졌다.왜냐하면, 그녀는 강영수가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장소월은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놓고 두 번 다시 열 용기가 없었다.백윤서가 다가왔다. 장소월의 안색과 행동이 눈에 띄게 이상했기 때문이다.“소월아, 너 어디 아파?”“괜찮아요.”“하지만... 요 몇 교시 동안 선생님이 널 불렀지만, 계속 정신이 딴 데 팔려서 대답하지 않았잖아.”주위에 너무 많은 두 눈이 그녀를
이때, 한 통의 전화가 그녀의 생각을 어지럽혔다.낯선 번호였고, 장소월은 누군지 몰랐지만 마음속에는 어느 정도 답이 생겼다.원래 낯선 숫자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송시아’라는 이름으로 변해있었다.장소월은 숨도 고르지 못하고,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전화를 받았다. 귓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대략 5초 정도 침묵이 흘렀다. 장소월은 자신의 엄청난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여보세요, 장소월입니다. 누구시죠?”상대방은 키득키득 웃더니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장소월은 마치 뺨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김남주일까?이미 돌아왔을까?그날 장소월이 보이지 않자, 강영수가 그녀를 찾았을 때,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눈빛과 그 눈 밑의 이상한 낌새는 또 무엇일까?장소월은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늘어뜨렸다. 무력감이 자신의 온몸을 휘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생의 일이 오늘날에도 그녀에게 똑같이 재되고 있는 것 같았다.“소월아...”소현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녀는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숨을 헐떡였다. 마침내 낯익은 모습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장소월의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소월아, 괜찮아?”소현아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어디 아파?”장소월은 눈을 닦더니 고개를 들었다.“여긴 왜 왔어?”소현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이 가득했다.“방금 네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걱정돼서 따라왔어.”장소월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나 괜찮으니까 돌아가.”“잠깐만 네 옆에 있을게.”소현아는 장소월의 옆에 앉아 주머니에서 우유 한 병을 꺼내 건넸다.“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달콤한 걸 마시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잖아. 만약 울고 싶으면 내가 안아줄게.”“난 울고 싶지도 않고 포옹도 필요 없어. 우유 고마워. 이제 교실로 돌아갈래.”소현아는 떠나는 장소월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말을 잘못한 것이
“대표님.”강영수는 고개를 들더니 여전히 어두운 안색이었다.“무슨 일이야?”“여기 사인이 필요한 서류가 몇 개 있습니다.”“두고 가.”진봉은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다가 무심코 걸지 않은 전화가 보였다. 장소월의 번호였다.‘설마 소월 아가씨 때문에 화나신 건가?’그녀 말고 아무도 강영수의 감정을 이렇게 동요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소월 아가씨가 보고 싶으면 바로 전화하시면 되지. 이렇게 오래 화낼 필요는 없을 텐데? 두 사람 싸웠나?’“또 다른 볼 일 있어?”불쾌한 목소리였다.“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뭔데, 말해.”진봉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소월 아가씨와의 일 때문에 지금 회사 전체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을 업무에 끌어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강영수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지더니, 눈 밑에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지금 나한테 훈계하는 거야? 너한테 월급을 주는 사람은 나야. 할 말 끝났으면 당장 나가.”“죄송합니다, 대표님. 회사를 위해서 끝까지 말해야겠습니다. 남주 아가씨의 존재는 분명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습니다. 귀국하신 건 아직 소월 아가씨께서 모르고 있지만, 만약 대표님이 아직도 남주 아가씨와 만나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면, 아무리 대표님의 과거사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소월 아가씨는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는 벽이 생길 겁니다. 소월 아가씨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강영수의 눈빛은 극도로 어두워졌다.“이런 일은 네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돼. 나가!”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집어 들어 진봉에게 던졌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모두 견뎌냈다. 날카로운 서류의 가장자리가 그의 이마에 미세한 상처를 입혔다.강영수가 예전처럼 변덕스럽고 포악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마치 이전의 자포자기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진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 사무실 문을 닫았다.강영수는 제어
장소월은 휴대폰 화면을 누르며 오늘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장소월은 그들이 지금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만약 아직 김남주에게 미련이 남아 계속 연락하고 있다면 대체 왜 강영수는 그녀와 사귀고 있을까?단순히 말도 없이 떠나버린 김남주에게 화를 내기 위함일까?그렇다면 장소월은 그들 사이의 도구가 되는 격이다.장소월은 남자의 정신적인 배신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만약 강씨 가문을 떠나 다시 장씨 가문에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전연우의 손에 들어가 끝없이 모욕당할 것이 분명했다.지금의 그녀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하나는 화를 참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 강씨 가문의 보호를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 다른 하나는 강영수와 헤어지고 장씨 가문으로 돌아가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장소월의 마음속에는 이미 답을 얻었다.8시 30분 수업이 끝나고, 익숙한 차량이 제시간에 학교 앞에 서 있었다.장소월은 조수석 뒷자리에 앉았고, 차에 타고 있던 그는 이어폰을 끼고 다리에 노트북을 놓고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장소월은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그들은 아직 냉전을 하고 있었고, 강영수가 업무를 마치고 나니 장소월은 어느새 잠들었다.강영수는 사실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 쏠려 방금 회의 내용을 조금도 듣지 못한 채 황급히 회의를 끝냈다.강영수는 옆에 걸치고 있던 그레이 양복을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장소월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마침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그의 몸에서는 차고도 낯선 기운이 가득했다.예전에는 그의 몸에 있는 문신을 보아도 별다른 거리낌이 없었지만, 오늘은 조금 무서웠다.장소월은 곧바로 반응하고 곧 떨어질 것 같은 양복 외투를 위로 당기고 말했다.“고마워.”세글자를 내뱉는 순간, 남자의 몸에서는 더 찬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천만에.”강영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거리감 느껴지는 고맙다는 말이었다.진봉은 백미러로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