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강영수는 고개를 들더니 여전히 어두운 안색이었다.“무슨 일이야?”“여기 사인이 필요한 서류가 몇 개 있습니다.”“두고 가.”진봉은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다가 무심코 걸지 않은 전화가 보였다. 장소월의 번호였다.‘설마 소월 아가씨 때문에 화나신 건가?’그녀 말고 아무도 강영수의 감정을 이렇게 동요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소월 아가씨가 보고 싶으면 바로 전화하시면 되지. 이렇게 오래 화낼 필요는 없을 텐데? 두 사람 싸웠나?’“또 다른 볼 일 있어?”불쾌한 목소리였다.“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뭔데, 말해.”진봉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소월 아가씨와의 일 때문에 지금 회사 전체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을 업무에 끌어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강영수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지더니, 눈 밑에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지금 나한테 훈계하는 거야? 너한테 월급을 주는 사람은 나야. 할 말 끝났으면 당장 나가.”“죄송합니다, 대표님. 회사를 위해서 끝까지 말해야겠습니다. 남주 아가씨의 존재는 분명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습니다. 귀국하신 건 아직 소월 아가씨께서 모르고 있지만, 만약 대표님이 아직도 남주 아가씨와 만나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면, 아무리 대표님의 과거사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소월 아가씨는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는 벽이 생길 겁니다. 소월 아가씨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강영수의 눈빛은 극도로 어두워졌다.“이런 일은 네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돼. 나가!”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집어 들어 진봉에게 던졌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모두 견뎌냈다. 날카로운 서류의 가장자리가 그의 이마에 미세한 상처를 입혔다.강영수가 예전처럼 변덕스럽고 포악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마치 이전의 자포자기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진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 사무실 문을 닫았다.강영수는 제어
장소월은 휴대폰 화면을 누르며 오늘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장소월은 그들이 지금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만약 아직 김남주에게 미련이 남아 계속 연락하고 있다면 대체 왜 강영수는 그녀와 사귀고 있을까?단순히 말도 없이 떠나버린 김남주에게 화를 내기 위함일까?그렇다면 장소월은 그들 사이의 도구가 되는 격이다.장소월은 남자의 정신적인 배신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만약 강씨 가문을 떠나 다시 장씨 가문에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전연우의 손에 들어가 끝없이 모욕당할 것이 분명했다.지금의 그녀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하나는 화를 참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 강씨 가문의 보호를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 다른 하나는 강영수와 헤어지고 장씨 가문으로 돌아가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장소월의 마음속에는 이미 답을 얻었다.8시 30분 수업이 끝나고, 익숙한 차량이 제시간에 학교 앞에 서 있었다.장소월은 조수석 뒷자리에 앉았고, 차에 타고 있던 그는 이어폰을 끼고 다리에 노트북을 놓고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장소월은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그들은 아직 냉전을 하고 있었고, 강영수가 업무를 마치고 나니 장소월은 어느새 잠들었다.강영수는 사실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 쏠려 방금 회의 내용을 조금도 듣지 못한 채 황급히 회의를 끝냈다.강영수는 옆에 걸치고 있던 그레이 양복을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장소월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마침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그의 몸에서는 차고도 낯선 기운이 가득했다.예전에는 그의 몸에 있는 문신을 보아도 별다른 거리낌이 없었지만, 오늘은 조금 무서웠다.장소월은 곧바로 반응하고 곧 떨어질 것 같은 양복 외투를 위로 당기고 말했다.“고마워.”세글자를 내뱉는 순간, 남자의 몸에서는 더 찬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천만에.”강영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거리감 느껴지는 고맙다는 말이었다.진봉은 백미러로
“하지만 이 늙은이는 지금 팥죽이 딱 먹고 싶네요.”“제가 가서 준비해드릴게요.”장소월이 가방을 내려놓자 강영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강씨 집안의 오랜 하인이시라면 규칙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저녁 늦게 드시면 소화도 잘 안 됩니다. 아주머니, 데려다주세요.”“네, 도련님.”“잠시만요... 아주머니, 불린 팥이 아직 더 있나요?”“있습니다.”장소월: “오늘 학교 숙제가 별로 많지 않아요. 제가 바로 냄비에 끓여드릴게요. 대략 40분 정도면 돼요.”어르신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럼 수고해주세요.”“별말씀을요.”나이가 들수록 수면이 적어지는 법이다.장소월이 부엌으로 가고 어르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너랑 소월이는 이 그릇에 있는 쌀과 팥처럼 두 가지만 넣고 끓이면 순수한 맛이지만 다른 재료가 하나라도 섞이거나 적으면 맛이 변하는 거야. 이 할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스스로 잘 생각해봐. 죽은 끓일 필요 없다고 전해. 모레 시험이니 이틀 동안 방해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시험 끝나고 다시 얘기해. 괜히 애 기분 망치지 말고.”“소월이는 인내심이 강한 아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철이 들었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아이야. 하지만 네가 잘못을 해서 저 아이 마음이 돌아선다면 그때는 다시는 저 아이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을 거야.”“소중히 여겨. 지금으로선 우리 가문의 손자며느리가 될 자격이 충분한 아이니까.”적어도 그 여자보다 수 천 배는 훌륭했다.어르신이 떠난 뒤, 강영수는 다른 하인들을 물리고,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는 여자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그녀와 냉전을 하고 나서 강영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소월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단순 방패막으로 삼고, 이용과 목적을 위해 옆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강영수는 거의 걷잡을 수 없이 미쳐버렸다. 어쩌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지만, 장소월이 진짜 자신을 떠난다면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사랑을 받고 그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사람은 모두 이기적이다...만약 그가 없다면, 장소월은 장씨 가문으로 돌아가서 어떤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강영수가 아직 김남주에게 미련이 남았다고 해도, 장소월은 아무것도 모른 척할 수 있다.그녀는 지금 강영수가 필요했다.장소월이 남자를 이용하든, 남자가 장소월을 누군가의 대체품으로 생각하든 서로 필요한 존재였다.그래서 장소월은 그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도 정말 그를 좋아하고 싶고 그와 잘 지내고 싶기 때문이다.그를 좋아한다는 전제하에, 장소월은 자기 일을 완성해야 했다.헤어진 후에도, 누군가에 의해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그녀와 강영수 사이에 절대적인 공평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앞으로 강영수는 그녀가 원하는 장소월의 모습만 보게 될 것이다.결혼이든 연애든, 외도는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괜찮아. 조만간 익숙해 질 거야. 어차피 난 자주 외출하지도 않고, 대부분 시간은 학교에 있잖아.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야.”장소월은 성숙한 모습을 보였고, 강영수를 즐겁게 할 줄도 알았다.텅 빈 거실을 보고는 물었다.“할머니 돌아가셨어?”“응, 치매라서 한밤중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셔. 아주머니한테 시켜서 돌려보냈어.”“그래? 할머니 너무 멀쩡해 보이셔서 치매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장소월은 그를 밀어내고 말했다.“팥죽은 안 만들어도 되겠네. 난 먼저 방에 가서 숙제할게. 아직 조금 남았어.”“그래.”장소월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도 일찍 쉬어.”“응.”강영수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사실 그녀의 덤덤한 태도보다는 계속 자신에게 화를 내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녀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바로 이때, 강영수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는 사진 한 장을
“마침 잘됐네. 깨끗이 씻겨서 발가벗은 채로 손님에게 데려가. 괜히 시간 낭비하지 않게.”“당신들 너무 과몰입해서 연기하는 거 아니야?”말이 끝나자 김남주는 바로 뺨을 맞았다.“연기? 누가 그래? 우리가 연기한다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몸으로 갚아야 하는 건 당연한 도리야!”김남주의 눈은 공포에 젖었다. ‘분명 이게 아닌데...’테이프로 입을 막은 그녀는 몸부림칠 틈도 없이 직원 엘리베이터에 끌려 타서 천하일성의 호텔 방으로 향했다.같은 시각, 천하일성의 어느 호화로운 룸에서, 만취한 황준엽은 옆 남자의 어깨를 잡아당겼다.“전 대표, 저번에도 내가 많은 돈을 땄는데, 오늘도 이겨서 참 미안하게 됐어요. 자... 제 술 한잔 받으시죠.”기성은이 막았다.“대표님은 위염을 앓고 계셔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이 잔은 제가 대신 마시죠.”“네가 뭔데 끼어들어. 난 분명 전 대표에게 술을 권했는데 한낱 비서가 왜 끼어드냐고?”황준엽은 품에 있는 방금 게임을 하다가 져서 속옷만 입고 있는 섹시한 몸매의 여자를 향해 말했다.“네가 가서 한 잔 따라. 전 대표 오늘 안 마시면 날 무시하는 겁니다. 오늘 무조건 한 잔 올려야겠어요.”여자는 아주 풋풋해 보였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위스키 한 병을 집어 들고 반쯤 따르고는 눈앞에 있는 차갑고 의욕 없어 보이는 남자 앞에 내밀었다. 그는 아주 잘 생겼지만, 두 눈동자가 험상궂어 보여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분위기는 자꾸 쳐다보고 싶게 만들었다.“대표님... 한 잔... 하시죠.”전연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거침없이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에 여자는 얼굴이 뜨거워졌고 고개를 숙였다.“몇 살이죠?”“이설윤이라고 합니다. 올해 17살이고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미성년자?황준엽은 웃으며 갑자기 바닥에 있는 여자를 잡아당겨 전연우에게 내동댕이쳤다. 이설윤은 하마터면 술잔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전연우의 다리에 몸이 붙을 뻔했다.“그래, 바로 이
오늘 밤은 필연코 긴밤이 될 것이다.밤바람에 어두운 커튼이 흔들리고, 장소월은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닦고 침대 옆 캐비닛으로 가서 깨진 휴대폰을 충전했다. 화면에 금이 간 휴대폰은 낮에는 괜찮았지만 지금 충전하려니 자꾸 끊겼다.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도착했고, 발신자 번호를 본 그녀는 마음을 졸였다.그녀는 받지 않고 전화가 여러 번 자동으로 끊기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상대방이 포기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연거푸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직 안 자는 거 알아.」「소월아, 왜 또 말을 안 들어?」「전화 받아.」「내가 지금 당장 강씨 별장에 가도 상관없는 거야?」장소월은 호흡곤란이 왔고 심장 박동도 불규칙했다.곧 그녀는 또 다른 영상을 받았다.차 안에서...그는 또 메시지를 보냈다.「이 영상을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되겠지?」대체 언제 찍었을까?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장소월은 얼음 저장고에 빠진 듯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리고, 또 전화가 걸려왔다.장소월은 30초 정도 기다리다가, 신호가 끊어지려 할 때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대체 왜 이래?”휴대폰 너머에서는 샤워하는 물소리와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지금의 전연우는 욕조에 누워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물로 타오르는 욕망의 불을 끄고 있었다.잔잔한 물속에서 단단한 물건이 세로로 세워졌고 그는 손으로 쥐고 있었다.“내가 보낸 걸 읽어줘.”글을 본 장소월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남자는 중국의 기서 ‘금병매’의 27장 포도 시렁의 구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분명 다 아는 글들이지만, 조합해서 보니 장소월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좀 작작 해!”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전화 너머의 남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말 듣지? 내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 네가 강씨 집안에 있다고 해서 너를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은 버려. 김남주가 돌아왔어. 네가 그 집에서 얼마나 버
“소월 아가씨, 도련님은 같이 안 내려오셨어요?”“아마 아직 자고 있을 거예요.”“제가 방금 갔을 때 방에 안 계시던데요?”강영수는 어젯밤 나가서 아마 밤새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그녀는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마 회사에 일이 있어서 나갔나 봐요.”“그렇군요.”장소월은 집을 나설 때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내일 시험이라서 그런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제운중학교.8시에 학생들은 하나둘 씩 수업에 들어왔다.“그 뉴스 봤어? 어젯밤 천하일성에서 큰 사건이 터졌는데, 황준엽이 누군가에게 죽도록 맞았대.”“봤어. 내가 그때 천하일성에 있었어. 그런데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 당시 경찰차와 구급차 모두 출동했어. 객실 종업원에게 들으니 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였대. 적어도 반신불수가 될 정도로 맞은 것 같아.”“황준엽은 대체 누구한테 밉보여서 그렇게 심하게 맞은 거지?”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연예 잡지를 손에 들고 방금 이야기를 하고 있던 여학생들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이것 좀 봐. 최신 뉴스야.”“뭐? 때린 사람이 강영수라고? 손에 안고 있는 여자는 누구야? 장소월은 아닌 것 같은데?”잡지 표지에서 강영수는 황금빛 긴 생머리에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는 여자를 안고 있었다. 파파라치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어렴풋한 옆모습과 몸매로 보아 장소월은 아닌 것 같았다.많은 여자는 손에 똑같은 잡지를 들고 뭔가를 연상하고 있는 듯했다.“헐, 황준엽을 때린 사람이 설마 강영수?”황준엽은 모두가 알아주는 재벌 2세였고, 게다가 그의 방탕한 습관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아마 황준엽이 이 여자에게 눈독을 들였고, 강영수가 구하러 갔다가 호텔에서 데리고 나오는 장면일 것이다.뉴스를 낸 잡지사는 바로 전에 장소월과 강영수의 사진을 찍은 잡지사였다.이번에는 장소월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꽤나 큰 소동이 벌어졌기에 휴대폰 푸시 뉴스에도 강영수의 소식이 떴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을 보았다. ‘
오후 5시 30분, 올림피아드 반.고건우는 마지막 문제를 강의하고 교재를 덮었다.“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더 질문 있나요?”“질문 없으면 오늘은 일찍 집에 돌아가세요. 기초 지식을 공고히 하고, 내일 시험에 영향 주지 않도록 일찍 자세요.”“마지막으로 강조하는데, 절대 지각하지 말고, 수험표도 잊지 말고 챙기세요.”고건우는 책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방을 챙기고 있었는데, 단모연이 와서 장소월의 어깨를 두드렸다.“만년 2등, 오늘 일찍 끝났는데 놀러 가지 않을래?”“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거 같아.”“쳇, 똑같은 핑계만 벌써 몇 번째야. 집에서 단속을 엄하게 해?”장소월은 말없이 싱긋 웃었다.허이준은 단모연에게 눈빛을 보냈고, 단모연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자신의 입을 가렸다. ‘아차, 까먹었네!’“괜찮아. 그럼 난 이준이랑 먼저 갈게.”“그래.”그들이 떠나고, 백윤서가 장소월의 앞에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소월아, 괜찮아?”“저 괜찮아요.”장소월은 별다른 표정 없이 가방을 챙겼다.강영수가 천하일성에서 안고 나온 여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강영수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모두 장소월이 곧 버림 받으리라 생각했고, 온갖 루머가 떠돌고 있었다.“그럼 난 먼저 교실로 돌아갈게. 만약 우울하면 언제든지 날 찾아와. 네가 집에 돌아오고 싶다면 연우 오빠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낼 거야.”“네, 먼저 돌아가요. 전 책을 챙길게요.”“좋아.”교실 전체에 장소월 혼자 남았을 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심장을 휘감았다.장소월은 이마를 짚고 손가락을 까맣고 곱슬곱슬한 머리 사이에 넣었다. 오늘 너무 따가운 시선을 받아 머리가 좀 아팠다.귓가에 들리는 각종 시끄러운 소리가 그녀를 숨 막히게 했고, 돌아가서 어떤 방식으로 강영수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어머, 이거 장소월 아니야?”“왜 아직도 안 갔어?”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복도를 지나다가 교실 안의 장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