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집안의 훌륭한 후계자였다.권위 있는 재벌 후계자들이 있는 자리에 아름다운 미인들이 빠지면 안 된다.강영수의 마음을 얻으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명문가 자제들 외, 많은 명문가 아가씨들도 그와 함께 술 한 잔 마셔보려고 접근했다.하지만 모두 기성은의 선에서 막혀버리고 말았다.예전 강영수는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었다. 당시 모든 신문사와 방송사가 그 일을 보도했고 세상은 강영수로 인해 들썩였었다. 지금 일어서 걷고 있는 모습을 보니 모두 회복된 듯하다.강영수가 술을 마시기 싫다고 하면 그 누구도 감히 강제로 술을 권하지 못했다.파티는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끝이 난다.8시.돌연 파티장의 불빛이 꺼졌고 전체 공간이 어둠에 잠겼다.그때 파란색 조명이 반짝이더니 고급 브랜드 한정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여자 한 명을 비추었다. 이어 시작된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웅성거렸던 현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여자에게로 향했다.검은 생머리를 늘어뜨린 그녀가 깊은 바다의 영혼을 노래하는 곡을 연주하고 있으니 마치 아리따운 인어아가씨 같았다.무대 아래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해외 유학을 마치고 갓 돌아온 허씨 가문 아가씨 아니에요? 몇 년 못 본 사이 진짜 예뻐졌네요. 적어도 해성엔 저 아가씨와 비교할 수 있는 여자는 없을 것 같아요.”연주가 끝나자 허이경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허이경의 시선은 누군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 눈빛을 따라가 보니 다름 아닌 강영수였다.진봉은 핸드폰으로 허이경에 관한 정보를 서치해 강영수에게 보고했다.알고 보니 그들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하지만 강영수는 그녀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없었다.시계를 보니 파티가 끝나려면 아직 30분은 더 걸려야 했다.사람들은 모두 선명히 보아낼 수 있었다. 저 강한 그룹 후계자를 보는 허이경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반면 강 대표는 그녀에게 조금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8시 30분.장소월은 차 뒷좌석에 앉아 괴로운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일찍 나오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이들을 만나지 않았을 텐데.오늘은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일찍 교실을 나섰다. 하지만 하필 그때 학교에서 걸어 나오는 전연우와 백윤서와 맞닥뜨린 것이다.그들은 야식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끌고 차에 들이밀었다.전연우와 백윤서는 한창 신나게 야식 메뉴와 주말 데이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연인 사이인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에 끼어든 방해꾼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어 너무나도 불편했다.백윤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소월아, 너 뭐 먹고 싶어? 꼬치구이? 아니면 해산물?”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있다가 그제야 정신이 든 장소월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다 좋아요. 사실 난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아요.”“너 집에 다녀간 지 진짜 오래됐어. 오늘 같은 시간에 끝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백윤서가 잠시 고민하고는 말했다.“그럼 우리 꼬치구이 먹으러 가자. 그 가게엔 훠궈도 있어.”순간 장소월은 백미러로 전연우의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당황하며 재빨리 눈을 피했다.“그래요.”그녀는 훠궈를 먹어본 적이 없어 먹고 배탈이 나진 않을지 알 수 없었다.저번 강용과 길거리에서 먹은 꼬치구이로 인해 이미 충분히 곤욕을 치렀었다.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장소월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이미 가게에 들어가 있었다.이어 그녀가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백윤서는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종업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 돌려 뒤를 확인해보니 장소월은 아직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오빠, 뭘 먹을 거야?”“네 마음대로 주문해.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백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전화를 건 사람은 강영수였다. 매번 통화할
그의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장소월은 힘껏 그를 밀쳐냈다. 그녀가 벗어나려고 한 순간, 전연우는 애써 반항하다가 도망치는 나약한 토끼를 잡듯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챘다.장소월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다시 그의 품 안에 가둬졌다.“안 보이는 동안 살쪘네?”어둠 속에서 똑똑히 볼 순 없었지만 그녀를 한껏 농락하는 전연우의 눈빛을 선명히 상상할 수 있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희 집 밥을 먹은 것도 아니잖아.”전연우가 장소월의 뱃살을 꼬집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깊게 키스했다. 찌릿한 전류가 온몸을 휘감았다.실은 장소월에게선 살집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전에 비해 약간 살이 쪘을 뿐이다. 예전 그녀는 너무 말라 침대에서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강씨 집안으로 도망치면 내가 널 건드리지 못할 줄 알았어? 응?”장소월은 가슴에 얹어진 몹쓸 남자의 손길을 느꼈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장소월의 입에서 유혹적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만 그건 몸이 닳아 올라 나온 본능적인 소리가 아니라 통증 때문이었다.그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던 것이다.장소월이 불경스레 움직이는 그의 손을 잡고는 휙 밀쳐냈다.“전연우, 그만해! 윤서 언니가 알게 되는 게 두렵지도 않아? 아직 옆 가게에 있다는 거 잊지 마.”“너 무서워?”장소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무섭기도 하고 역겹기도 해. 백윤서 한 명으로도 부족해서 나한테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전연우, 너 이런 더러운 습관 대체 언제 고칠래? 윤서 언니는 널 많이 좋아하고 있고 너도 윤서 언니를 좋아하잖아. 만약... 윤서 언니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면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돼. 분명 상처받을 거야.”전연우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네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고?”“난 윤서 언니가 힘들어하는 거 싫어. 미안한 일을 하고 싶지도 않고. 이제 이런 짓 그만해. 너도 윤서 언니가 상처받는 건 원하지 않잖아.”전연우가 장소월을 놓아주자 그녀는 옷에 잡힌 주름을 정리하고는
전연우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블랙홀과도 같아서 도저히 그 무엇도 보아낼 수 없었다.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귄 지 꽤 되었음에도 백윤서는 그를 완전히 얻은 것 같지 않았고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손을 잡는 것 외에 연인 사이에서 흔히 하는 스킨쉽인 키스도 해본 적이 없었다.백윤서는 그저 자신이 너무 조급했다고 생각하며 애써 실망감을 숨겼다.전연우는 아직도 예전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를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전연우는 프런트에서 계산을 한 뒤 가게를 나섰다.오늘 그들은 가든 아파트가 아닌 장씨 저택으로 향했다.백윤서는 웅장하게 서 있는 별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오빠, 우리 집에 안 가?”백윤서는 해외에서 돌아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줄곧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더욱 싫었던 건 바로... 장해진이 그녀를 보는 눈빛이었다.“윤서는 여기가 싫어?”“아니요.”백윤서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표정에서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거라 추측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빠한테 말해.”전연우의 눈빛은 그녀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백윤서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말했다.“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전연우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말했다.“오빠, 잘 자요. 난 먼저 들어갈게요.”백윤서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차 문을 열고 부랴부랴 달려들어 갔다.남자의 얼굴엔 소녀가 남겨놓은 향기가 따스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전연우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다.백윤서가 거실로 들어가 아직 깨어있는 강만옥에게 인사하고는 위층으로 총총 올라갔다.백윤서가 돌아왔다는 건... 전연우도 왔다는 걸 의미한다.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전연우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선반 위에 내려놓고 주방에 앉아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여자친구
강만옥은 그의 눈빛을 읽고 싶었으나 깊게 감춘 그의 속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그녀의 마음엔 비참함만 자리 잡았다.“질투하는 거야?”전연우가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정장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어 더러운 물건이라도 만진 것처럼 손을 슥슥 닦고는 바닥에 버렸다.강만옥이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맞아. 원하는 남자를 얻지 못했으니 당연히 질투가 나지.”전연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하찮은 듯 쳐다보았다.“내 옆에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붙어있어 놓고 고작 알아낸 게 그거야? 아쉽네. 난 깨끗한 여잘 좋아하거든.”가볍게 툭 뱉어낸 그의 말이 강만옥의 심장을 후벼팠다. 힘들게 봉합된 상처에서 또다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그렇다. 확실히 그녀의 몸은 더럽혀졌다. 더욱이... 그녀는 전연우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마. 역겨우니까.”이 말은 장소월이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에게도 그 말 곧이곧대로 다른 사람에게 할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장소월이 강씨 저택에서 산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녀를 돌아오게 할 몇백 가지의 방법이 있다.“전연우, 우린 같은 류의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최선을 다해 백윤서를 보호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지금까지 했던 그 모든 일들을 알고도 네 옆에 있어 줄 것 같아?”“그리고 장소월... 만약 네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장씨 집안에 들어온 목적이 이곳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위함이라는 걸 안다면 어떻게 될까? 강씨 집안을 이용해 네 목숨을 끊어버릴 수도 있겠지.”전연우가 차갑게 말했다.“어디 한 번 해봐. 내가 먼저 죽는지 네가 먼저 죽는지 보자고.”...다음날은 주말이었다.전연우는 백윤서와 함께 놀이공원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고 있는 모습은 누군가의 카메라에 찍혀 한장 한장 장해진의 눈앞에 놓였다.분노에 휩싸인 장해진의 가슴팍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밥까지 먹고 나서야 전연우는 백윤서를 데리고 가든 아파트로 향했다.백윤서에게 오늘은 가장 기쁜 날이었다. 하여 그녀는 들뜬 마음에 와인도 몇 잔 마셨다.돌아올 땐 술에 취한 탓에 전연우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집에 들어온 뒤 전연우는 발로 문을 닫았다.백윤서는 몸을 돌려 전연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몽롱한 두 눈동자엔 취기가 잔뜩 어려있었다.“오빠... 약속해. 나랑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쿵.’그때 방안에서 돌연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움직임은 작았지만 전연우의 귀를 피할 순 없었다.이내 그의 시선이 문틈으로 향했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안에 누군가 있는 듯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장소월이었다.장소월은 부딪힌 이마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백윤서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나온 순간 환히 불빛이 켜져 있는 거실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두 사람의 친밀한 자세를 보니 무언가 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황급히 사과했다.“미안해요! 전에 이곳에 둔 옷을 가지러 온 거예요. 찢어진 윤서 언니의 필기 노트는 내가 모두 새로 베낀 뒤 책상에 놓아두었어요. 그럼 계속해요. 전 이만 갈게요.”당시 남원별장에서 인테리어를 할 때 그녀는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다. 당시 꽤 많은 물건을 가져왔었는데 그중엔 그녀가 평소 자주 입던 옷과 올림피아드 반에서 받은 자료들도 있었다. 그 후 너무 급히 떠난 탓에 물건을 가져갈 겨를이 없었었다.그녀는 오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오는 길에 이곳에 들린 것이다. 하지만 물건을 모두 챙기고 방을 나서려고 할 때, 전에 침대 밑에 떨어뜨렸던 영어 테이프가 생각났다.하여 손을 뻗어 줍는 과정에서 이마를 부딪친 것이다.그때 마침 그들이 집에 돌아왔다.그녀는 오기 전 전연우의 집에 전화를 걸어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이곳에 발을 들였다.이럴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윤서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길까 봐 크나큰 두려움이 엄습했다.가장 큰 감정은 바로 질투였다.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반면 그녀는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심지어 역겨운 눈빛까지 참아내야 했다.장소월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문을 나섰다. 행여 그 지옥에서 탈출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그녀가 차에 타자 운전기사가 물건을 트렁크에 실었다.“아가씨, 물건은 모두 챙기셨나요?”“네. 얼른 가죠!”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테이프였다. 이곳에 있었으니 며칠 내내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강씨 저택.장소월이 돌아왔을 때, 저번 그 노부인이 또다시 집안에 들어와 있었다.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노부인이 지팡이를 잡고 현관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동으로 만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두 개의 끈이 양쪽으로 드리워져 있었다.“할머니,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이 몸이 늙어 또 길을 잃었네요. 집에 먹을 거 있어요? 너무 배고프네요.”장소월이 집안을 둘러보니 도우미들은 보이지 않았다.“제가 지금 차려드릴게요.”장소월이 목에 둘렀던 수건과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녀는 안에 입은 아이보리색 니트 소매를 거두며 주방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가져와 노부인의 앞에 놓아주었다.“일단 물을 마시고 과일을 드시면서 허기를 달래세요. 제가 최대한 빨리 만들게요.”장소월은 평소 항상 꺼져있던 텔레비전을 켜고 드라마 채널로 돌렸다.“내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예전 할머니와 한동안 산 적 있는데 저희 할머니도 드라마를 좋아하셨어요.”노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소월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오늘도 혼자 있는 거예요? 도련님은요?”“출장 갔어요. 며칠 뒤에야 돌아올 거예요.”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식자재들을 가득 꺼냈다.노부인이 물었다.“도련님이 이렇게 어린 아가씨를 집에 데려온 건 처음 봤어요. 두 사람 사귀는 거예요?”장
장소월이 전화를 받았다. 통화 내용은 늘 그랬듯 밥은 먹었냐, 뭘 먹었냐 등 일상적인 대화였다. 강영수는 매일 시간을 보며 그녀의 일정을 체크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강영수가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면 장소월은 핸드폰을 별로 쓰지 않아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문자를 보냈다.7,8분 뒤 면이 거의 익자 장소월은 젓가락으로 냄비에서 면을 꺼내 그릇에 담았다.“강 대표님, 파티를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열어 죄송해요. 저한테 함께 술 한 잔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부드러운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마 해성 명문가의 아가씨일 것이다.장소월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조심하지 않아 뜨거운 물에 손이 데었다.조금 전 파티장에서 걸어 나온 허이경은 베란다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입을 닫았다.강영수가 못마땅한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자 허이경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가 설명하려고 할 때, 장소월이 말했다.“바쁜 것 같으니까 더 방해하지 않을게. 얼른 호텔에 돌아가 쉬어.”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분명 똑똑히 들었음에도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다.순간 강영수에게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의 눈동자엔 약간의 실망감도 스쳐 지나갔다.강영수가 핸드폰을 정장 호주머니에 넣고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으며 허이경을 무시해버린 채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통화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강영수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조심하세요. 당신은 아직 나와 말을 섞을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해요.”그때 밖에 나갔던 진봉이 핑크색 선물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대표님, 소월 아가씨가 원하셨던 선물 사 왔습니다. 하지만 무슨 맛을 원하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종류별로 모두 사 왔습니다.”강영수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래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잘했어.”그날의 통화 이후 두
“됐어. 너 같은 냉혈한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호주머니에서 조개껍질 팔찌를 꺼냈다.“너 지금 모든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 알아.”“전연우, 기억해. 깨어나면 소월 씨한테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예전 네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해.”“소월 씨는 줄곧 강영수의 죽음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긴 거야. 하지만... 이건 기억해야 해, 소월 씨는 너에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는 거. 소월 씨에겐 감정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지금 강영수는 죽지 않고 잘 살아 있어.”“네가 계속 고집부리면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너한텐 영원히 소월 씨를 잃어야 하는 처벌이 내려질 거야.”“소월 씨가 성까지 바꾸고 강영수와 결혼하면 넌 어떻게 할까!”서철용은 전연우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반지를 끼고 있는 무명지가 살짝 움직였다. 서철용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이제야 조급해졌어? 지금까지 뭐 하다 이제야 온 거야!”소민아가 일정을 말하기 시작한 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이자 소민아는 바로 일어섰다.“서 선생님, 대표님은 어떻게 됐어요?”“뭐 어떻겠어요. 당연히 식물인간 상태죠. 하지만 이번 달 안엔 깨어날 거예요.”소민아는 활짝 웃어 보였다.“그래요? 정말 잘됐네요.”서철용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신이랑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 언제 결혼해요? 나한테도 청첩장 보내는 거 잊지 말아요.”그 말에 신이랑과 소민아의 사이는 더 어색해졌다.소민아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서 선생님, 오해예요.”서철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내가 찾아가지 않았는데 제 발로 왔네요?”송시아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민아와 이랑 씨 결혼 청첩장은 내가 직접 보내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서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까
병원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뒤, 소민아가 쭈뼛거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변장 안 해도 돼요? 송시아의 사람들이 알아봐도 괜찮은 거예요?”“그 생각을 민아 씨만 한 것 같아요?”서철용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병원에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아래에서 감시하던 놈이 이미 송시아한테 보고했을 거예요.”소민아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왜 부르셨어요?”서철용은 습관적으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두 사람과 같이 와서 놀려고요.”“뭐라고요? 서 선생님, 지금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장난을 쳐요!”서철용은 무언가 의미가 담긴 듯한 눈빛으로 신이랑을 쳐다보았다. 소민아 약시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가니 경호원들이 당장이라도 서철용을 잡아 누를 듯 위풍당당한 기세로 걸어왔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는 아무도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경호원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민아 아가씨,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그냥 잠깐 들를 일이 있어서요. 우리 셋이 같이 온 거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며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눈빛을 보냈다.경호원 한 명이 막아서려 했으나, 다른 경호원이 그를 제지했다.순조롭게 경호원들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병실 문 앞까지 도착한 뒤, 서철용은 걸음을 멈추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내 수호신 두 명이 이렇게까지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됐어요! 이젠 문 앞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저기!”소민아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문은 쾅 하고 닫혀버렸다.그녀가 옆에 있는 신이랑을 보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대체 왜 우릴 불러놓고 들어오지도 말라는 걸까요?”신이랑이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민아 씨가 있어서 송시아가 서철용을 건드리지 못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제야 서철용의 의도를
소민아는 옆에 앉아있는 신이랑을 보고는 말했다.“저 지금 이랑 씨와 같이 있어요.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에요. 무슨 일이세요?”“잘됐네요. 엘리트 개인 병원으로 와요.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바로요.”“참, 서 선생님, 왜 제가 전화를 걸면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뚜뚜뚜...”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소민아는 씁쓸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랑 씨, 우릴 왜 오라고 하는 걸까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가서 들어보죠.”“그래요.”마침 두 차가 함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다. 서철용이 차에서 내리자 소민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서 선생님.”“걸으며 얘기하죠.”서철용은 소민아 옆에 있는 신이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신이랑은 서철용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두 사람 중간에 서 있던 소민아는 전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누군가 몰래 송시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송 대표님, 저희에게 감시하라고 시켰던 그 사람 나타났어요. 소민아와 신이랑과 함께요. 신이랑은 저희가 손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성세 그룹.대표 사무실 안, 송시아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무심히 돌리고 있던 펜도 손에서 내려놓았다.“이번 일에 동원한 사람들이 꽤 많네. 넌 계속 거기에서 지켜봐, 무슨 일을 하는지.”‘서철용, 감히 내 구역에 제 발로 기어들어와? 지금은 몸을 사리며 몰래 숨어있어야 하잖아.’서울 전체를 손바닥 안에 넣고 장악하는 기분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송시아는 창가로 걸어가 바닥에서 오가는 개미처럼 작은 크기의 사람들을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전연우 씨... 전생에서 장소월까지 버리고 이 자리에 오르려 한 이유가 있었네요.’‘전생에서 이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고 해도 결국엔 장소월을 잃고 말았어요.’‘역시 하느님은 공평해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잃게 만들죠.’전
“사리 분별 못 하는 그 자식한테 보내온 거지 뭐. 그놈이 빨리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짓말까지 만들어내 소월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서울까지 보내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배은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가서 씻고 일찍 쉬어. 아기는 깨우지 마. 방금 잠들었어.”젖을 먹던 아이가 품 안에서 잠들자 배은란은 옷을 정리하고 아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철용은 잠들어있는 아이를 안아 옆 아기 침대에 눕혔다.“그럼 난 씻으러 갈게. 쉬어.”“괜찮아. 민용 씨 올 때까지 기다릴게.”서철용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나 밤에 자료 좀 봐야 해. 착하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그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병실 안에 별도로 간병인 실이 있어 요즘 서철용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에게 자신을 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배은란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천천히 짙어져 갔다.서철용은 옆방에 들어간 뒤 침대에 누워 신발도 벗지 않고 손을 눈 위에 올려놓고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켰다. 배은란은 상처가 80% 정도 회복되었지만 아직 통증이 있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벽을 짚고 그의 옆까지 다가가 조심스레 신발과 옷을 벗겼다. 서철용은 정말 피곤했는지 꽤나 큰 움직임에도 깨지 않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서철용은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눈을 감고 더듬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귀 옆에 가져갔다.“여보세요. 누구시죠?”“철용이니? 네가 보낸 사람 이제 깨어났어.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 시간 날 때 한 번 와보지 않을래?”서철용은 왼쪽 팔에서 저림을 느껴 손을 움직이며 옆쪽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이불 속에 사람 한 명이 더 누워있었다
“내가 그렇게 흉측해 보여?”“난...”여자의 몸이든, 남자의 몸이든 서철용에겐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은란은 다르기 때문에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 혼자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서철용의 배은란에 대한 감정은 그녀와 서민용이 결혼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줄곧 그녀를 빼앗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었다.하여 갖은 방법을 대어 서민용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자신을 서민용으로 여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 심지어 최면을 한 뒤에도 서민용을 놓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서철용은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제 도저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모두가 인정하는 실력 있는 의사인 서철용이었지만, 지금 배은란의 상황은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가 계속 몸을 돌리지 않자 배은란은 슬픔에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예민했어.”그녀는 눈물을 닦고는 서철용의 손을 툭 쳐냈다.“내 몸에 더러운 게 자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피하는 건데!”“아기는 보면서 왜 나한테는 눈길도 안 주는 거야.”“민용 씨, 우리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를 하지 않았는지 알기나 해?”서철용이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엔 아무 데도 안 가고 너랑 같이 있을게. 응?”그가 배은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럼 연구원은?”“몇 개월 휴가 냈어. 그동안 계속 너랑 집에만 있을 거야.”배은란의 감정은 그제야 천천히 안정되었다.서철용이 이런 결정을 한 건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다.“아까 누가 민용 씨 앞으로 왔다면서 택배 가져왔어. 상세한 주소도 안 쓰여있고, 이름도 없었어. 내가 책상 위에 놓아뒀어.”배은란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까 봐 열어 보지 않았다.서철용이 열어보니 지극히 일반적인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가 들어있었다.배은란이 물었다.“진짜 예뻐. 이거 어디에서 보내온 거야?”서철용은 조개껍데기
송시아가 분노가 가득 실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참혹했던 기억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아무도 내가 예전에 어땠는지 상관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집중돼 있거든요.”“이 큰 서울을 뒤엎는 것도 내 한 마디면 충분해요.”서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요염한 얼굴에 송시아에 대한 가소로움이 가득 찼다.“정말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송시아 씨... 당신이든 전연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그 어디에도 계속 한쪽으로만 기우는 저울추는 없거든요.”송시아는 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떨어진 낙엽을 툭툭 걷어찼다.“됐어요. 그 말은 연우 씨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난 말할 것도 없죠.”“오늘 여기에 온 건 서 선생님한테 경고하기 위함이에요. 숨고 싶으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최대한 깊이 숨는 게 좋을 거예요. 장소월을 제외하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거든요.”“아, 참! 그리고 당신 와이프... 당신도 와이프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건 원하지 않죠?”“서민용은 이미 죽었잖아요. 만약 내가 사실을 알려준다면 당신 와이프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서철용의 눈동자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송시아 씨,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면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아요?”그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 화면을 본 순간 송시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여기엔 송시아 씨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다 녹음되어 있어요.”“이것도 다 송시아 씨한테서 배운 거예요. 만약... 은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가 저지른 일이든 모두 당신부터 의심할 거예요.”“은란이나 아이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난 당신이 예전 업소에서 나체로 춤을 추던 영상, 그리고 소민아와의 관계까지 모두 세상에 퍼뜨리고 서울 한복판 전광판에 생중계할 거예
하지만 서철용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을 때에만 짧게 몇 마디 보내곤 했다.수술이 끝난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군병원.아래층 정원, 도우미가 남자아이를, 서철용이 여자아이를 안고 있고, 배은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답장 안 해?”최근 서철용의 호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 빈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그는 연구원의 소식을 놓칠까 봐 핸드폰 알림을 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 며칠 동안 연락을 해온 건 연구원이 아니라 소민아였다.서철용은 핸드폰을 꺼내 소민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이 귀찮은 여자한테 일일이 대답해줄 필요 없어.”성세 그룹.사무실 안, 소민아가 또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고 있었다.[서 선생님, 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좀 구해주세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차단 표식이 떴다.배은란 역시 서철용이 다른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자신의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저번 수술을 마치고 온 날 배은란은 깜짝 놀랐었다. 그가 너무 피곤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렇게 하루가 지나도록 잠들어 있었다. 배은란은 자신도 수술 회복기였지만, 줄곧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막지 못했어요.”그 불청객을 봤음에도 서철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송시아가 어느새 나타나 도우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이가 아빠와 엄청 닮았네요. 서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송시아의 불순한 눈빛을 본 서철용은 간호사에게 배은란과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라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 꽤 많이 변한 것 같네요.”송시아가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사람은 원래 다 변해요. 왜 그렇게 아내분을 급히 보내는 거예요? 제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할까 봐요?”“걱정하지 말아요. 그 정도 선은
소민아는 송시아의 말에 반박할 방법이 없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송시아의 말은 점점 더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민아야...”“장소월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언니랑 같이 회사 운영하자. 응? 언니는 대표, 넌 부대표 자리에 앉는 거야. 우리 둘이 성세 그룹을 차지하는 거지.”허무맹랑한 상상 속에 빠져있는 송시아를 보며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날 세뇌시키지 말아요. 아무리 화려한 말로 포장해도 난 당신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다 알거든요. 오늘도 그냥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경호원이 깨끗이 씻은 과일을 들고 와 소민아 앞 탁자 위에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체 이곳에 뭘 기대하며 왔단 말인가? 송시아가 착해졌을 거라 기대했었나?송시아의 욕심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악마로 변해 소월 언니까지 해치려 하고 있다.“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답이 없네요.”“과일은 혼자 천천히 드세요. 전 독약이 들어있을까 봐 못 먹겠네요.”“민아야!”소민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해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떴다. 송시아는 그녀를 쫓아가려 침대에서 내려갔지만,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부축했다.“대표님, 조심하십시오.”“여자 하나 잡아 세우지 못하고 뭐 하는 거야!”송시아는 힘껏 그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뱃속 아이를 떠올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라앉혔다.소민아가 병원을 나와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신이랑이 물었다.“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됐어요?”소민아가 말했다.“돌아가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더는 묻지 않고 최대한 그녀를 위로했다.“민아 씨, 결혼 결정 못 하는 거 혹시 대표님 와이프분 때문이에요?”“그분이 걱정된다면... 내가 이미 사람을 보
한의준이 떠난 뒤, 소민아는 해바라기 꽃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오는 길에서 송시아의 병실에서 나온 듯한 남자와 마주쳤다. 왠지 낯이 익었지만, 어디에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소민아는 시선을 거두고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 곳곳에 멍 자국이 가득했고 목과 손목에 나 있는 선명한 상처들도 눈에 들어왔다. 소민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처럼 마음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강지훈의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은 이 정도로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뜻인가 보다.“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소민아는 꽃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송시아는 소민아를 보자 너무 기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껍질을 깎아놓은 과일을 소민아에게 건넸다.“방금 내온 과일이야. 먹어봐...”“참, 딸기랑 체리도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송시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민아는 바로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이 꼴로 어디에 가려고요?”“잠깐만 있다가 갈 거예요.”송시아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나... 아직 밥 못 먹었어. 언니랑 같이 밥 먹고 가면 안 돼? 민아야, 네가 와줘서 언니는 너무 행복해.”“이봐요.”송시아가 문밖 경호원을 불러 말했다.“이 과일 다 씻어와요.”소민아가 말했다.“난 필요 없어요.”송시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먹어야 해. 힘들게 마음먹고 온 거잖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너도 이 언니를 놓지 못한다는 걸 의미해. 그래서 언니는 정말 기뻐.”“네 얼굴을 본 순간 그놈에게 당해 생겼던 상처가 깨끗이 나아지는 것 같았어.”소민아는 고개를 떨구고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는 송시아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목에도 뚜렷한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 사람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송시아는 덤덤히 손을 거두고 동생을 바라보았다.“민아도 다 알게 된 거야? 강지훈이 나한테 독약을 먹이고 짐승 같은 놈들한테 짓밟히게 했어. 만약 그 사람이 나타나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