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수업 동안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장소월은 자꾸 어젯밤 비상 계단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리고 그의 말들!장소월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생각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잡념을 떨쳐버리고 칠판을 보는데, 선생님이 어디까지 강의했는지 알 수 없었다...1교시는 흐리멍덩하게 지나갔다.첫 번째 줄 창가 자리에 앉은 장소월은 뒤에서 인시윤과 백윤서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골드 색 초대장을 백윤서 앞에 내밀며 말했다.“이 초대장은 내가 인씨 가문 미래 후계자 자격으로 너랑 연우 오빠를 정식으로 초대하는 거야. 이번 주말 인하 그룹은 발표회 만찬이 있을 예정이야. 둘이 함께 제시간에 참석하기를 바라.”백윤서는 한 번도 이렇게 귀한 초대장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인시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미안, 시윤아. 회사 일에 대해 난 잘 몰라. 하지만... 이걸 연우 오빠한테 전달하지 않을 거야. 만약 오빠가 가겠다고 하면 내가 꼭 같이 갈게.”“응, 격식 있게 잘 차려입고 와. 괜히 장씨 가문 체면 구기지 말고.”백윤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얼굴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시윤은 또 장소월에게 다가와 초대장을 건넸다.“이건 너한테 주는 거. 우리 큰 오빠랑 만나고 있으니 미래에 내 새언니가 될지도 모르잖아. 지난번 일은... 큰오빠한테 이미 호되게 혼났어. 걱정 마. 강용의 일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큰 오빠한테 꼭 전해줘. 난 큰 오빠가 꼭 왔으면 좋겠어.”인시윤이 장소월과 백윤서를 대하는 말투는 확연히 달랐다. 백윤서를 대할 때는 말투가 강하고 약간 불쾌함도 섞여 있었다.하지만... 장소월을 대할 때는 훨씬 부드럽고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잘 전할게.”“고마워.”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인시윤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강영수 외에 장소월밖에 없을 것이다.인시윤은 자리로 돌아갔고 장소월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회사 일이라면 왜 하필 인시윤을 통해 부탁하
하지만 장소월을 미래의 새언니로 생각해 몇 마디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앞으로 진짜 한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그리고... 백윤서와는 영원히 한 가족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전연우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장해진 그 음흉하고 간교한 늙은이는 줄곧 계산이 빨랐다.한 편으로 딸을 통해 강씨 집안과 손을 잡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양자를 통해 인씨 집안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었다.장해진은 이를 얻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을 것이다.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아이도 버릴 수 있는 인간이다.전연우도 그저 백윤서 하나를 버리는 것에 불과했다...남천 그룹.장해진은 퇴임한 후 간만에 회사에 왔다. 그는 대표 자리에 앉았고, 전연우는 아래에 앉아 최근 재무제표를 건넸다.이번 매출액은 이전보다 32%나 올랐고, 회사 창립 이후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그리고 이 별 볼 일 없는 숫자들은, 장씨 가문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요즘 회사 상황이 좋아. 네가 잘 이끌어준 덕분이야.”전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닙니다. 강씨 가문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년 안에 회사 규모를 더 확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장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딸의 공로가 컸다. 용케도 강영수의 눈에 들었으니 말이다.“요즘 소월이는 강씨네 집에서 어떻게 지낸대? 가봤어?”“소월이는 학업이 바빠 거의 만나지 못했어요. 가끔 윤서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가 만나면 몇 마디 나누곤 합니다.”백윤서 얘기를 꺼내자 장해진의 얼굴이 급히 어두워졌다.“너희 아직도 만나는 거냐?”전연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네.”“잘 생각해. 보잘것없는 여자를 원하는지, 아니면 남들이 우러러보는 피라미드 위에 널 세울 수 있는 여자를 원하는지. 너도 이제 어리지 않아.”장해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전연우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너도 내 아들이야
그녀의 스타일만 본다면 어느 유흥업소의 간판 마담인 줄 알 것이다.10여 년 전 무도장에서 가장 유행했던 헤어스타일에 귀걸이는 에메랄드 주얼리였다.손목시계는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어 40억은 호가하는 고가의 제품이다.하지만 이런 돈들은 장해진의 피를 조금 빼는 정도에 불과했다.강만옥은 다가와 전연우의 몸에 달라붙더니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저 인간이 네 여자친구한테 손을 쓰려나 보네? 조심해!”전연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가슴 위에 얹은 여자의 손을 보더니 단번에 뿌리치고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때마침 사무실 도어벨이 울리기 시작했다.“들어와요!”전연우가 돌아서는 순간, 강만옥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깃들었다.기성은이 들어와 보고했다.“윤서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들여보내.”“네.”강만옥은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 붉은 입술로 활짝 웃었다.“왜? 우리 사이를 남들이 오해할까 봐?”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강만옥은 피식 웃었다.“당신이 좋아하는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늘 궁금했어. 장해진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난 못 속여...”백윤서도 어쩌면 전연우의 도구일지 모른다.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이용할 수 있는 그는 정말 진심이라곤 없는 인간이다.그런 전연우가 모든 것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피라미드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지 강만옥은 너무 기대되었다.전연우는 과연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강만옥은 허리를 비틀며 사무실을 나섰고 마침 입구에서 백윤서와 마주치고는 가볍게 웃고 떠났다.백윤서는 손에 보온병을 들고 말했다.“오빠, 미안해요. 제가 방해했죠?”전연우는 얼굴에 부드러운 가면을 썼다. 방금 강만옥을 대할 때의 무뚝뚝함은 보이지 않았다.“여기까지 웬일이야?”“우리 같이 밥 먹은 지 너무 오래됐잖아요.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삼계탕을 샀는데... 우리 같이 먹어요!”“와서 앉아.”전연우는 소파에 앉았고 백윤서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온병을 열고 보니 안에는 남자가 집에서 즐겨
그날 저녁 갑자기 생리가 와서 치마에 피가 묻었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와달라고 했다.전연우는 비로소 교실에서 그녀를 안고 나갔다.“오빠, 이번 주말 시간 있어요? 우리 데이트해요. 얼마 전 밸런타인데이에도 나랑 함께 보내지 않았잖아요.”“알았어. 그때 가서 시간 맞춰볼게.”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저번 밸런타인데이에 백윤서는 그와 함께 영화를 보고 쇼핑할 계획을 세웠다.그때도 전연우는 이렇게 말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일만 했다.“그럼 우리 놀이공원 가요. 금요일에 학교 끝나고 제가 오빠 기다릴게요.”전연우는 알겠다고 했다.점심 식사 후, 기성은이 들어와 30분 후에 회의가 있다고 보고했다.백윤서는 방해하지 않고 회사를 떠났다.기성은이 떠나고, 전연우가 프로젝트 문서를 확인할 때 실수로 바탕화면의 마우스를 만졌고 원래 꺼졌던 컴퓨터가 밝아졌다.컴퓨터 화면에는 하나의 오디오가 있었다.전연우는 오디오를 보면서 눈동자가 더욱 깊고 차가워지더니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컴퓨터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너... 보고 싶어.”이 간단한 보고 싶다는 한마디를 전연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도 이런 말투가 있다니.이것은 바로 장소월의 통화 녹음으로, 4~5시간 분량의 녹음이 기록되어있었다.전화 속의 목소리는 그녀 말고도 강영수의 목소리가 있었다... 두 사람 진짜 사귀고 있다니!전연우는 순간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자신의 물건을 남에게 조금씩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분명 미친 게 틀림없다!그래서 머릿속에 온통 그녀 생각뿐이다.잘못된 선택을 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도서관.마지막 30분을 남겨두고 장소월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손에 있던 펜을 필통에 넣었다.맞은 편에 앉아 있는 두 남녀는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다행히 오늘 도서관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용아, 나 이 문제 모르겠어. 알려줘. 방금 소월이가 말한 거 전혀 못 알아듣겠어.”장소월은 책을 정리하며 말했다.“오늘 과외는 여기까
계속 이런 식이라면 강용 뿐만 아니라 장소월 또한 학업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그녀는 도서관에서 나온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설마 앞으로도 오늘처럼 곳곳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다닐 셈인가?’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도저히 저 속내를 알 수가 없다.장소월이 곁에 없는 날이었지만, 강영수는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하교 시간이 되었다. 장소월이 책가방을 정리하고 교실을 나서려 할 때 백윤서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소월아, 저녁에 시간 괜찮아? 연우 오빠와 나 그리고 너, 이렇게 셋이 같이 밥을 먹은 지 꽤 오래됐잖아. 오늘 저녁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줄게. 전에 오 아주머니한테서 요리를 배웠으니까 너도 입에 맞을 거야.”역시나 장소월은 거절했다.“나 곧 수업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요.”“수업? 그 특별반 말하는 거야?”“네.”“왜 예전의 방식대로 바로 올림피아드 반에 들어오지 않는 거야?”장소월이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던 순간, 인시윤이 걸어와 피식 웃으며 백윤서에게 말했다.“너 바보야? 오늘 시험 꼴등이 누구였더라? 바로 너잖아. 언니인 너한테 올림피아드 반에 남아있을 수 있는 기회를 남겨둔 거라고. 대체 무슨 낯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백윤서는 덤덤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말은 더이상 하지 않았다.장소월이 책가방을 메며 백윤서를 두둔했다.“내가 특별반에 간 이유는 다만 그곳에서 1등을 하기 위함이야.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인시윤이 웃으며 말했다.“소월아, 너도 이제 등수를 신경 쓰게 된 거야?”그녀가 장소월을 대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장소월이 아직 교실에 남아있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그중엔 1m 80 정도 키에 과묵한 성격을 가진 남자아이도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의 외모는 꽤나 준수한 편이었다. 남학생의 이름은 허이준이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제운 고등학교 전교 1등이자 장소월이 넘어야 할 라이벌이었다.
강씨 집안의 훌륭한 후계자였다.권위 있는 재벌 후계자들이 있는 자리에 아름다운 미인들이 빠지면 안 된다.강영수의 마음을 얻으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명문가 자제들 외, 많은 명문가 아가씨들도 그와 함께 술 한 잔 마셔보려고 접근했다.하지만 모두 기성은의 선에서 막혀버리고 말았다.예전 강영수는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었다. 당시 모든 신문사와 방송사가 그 일을 보도했고 세상은 강영수로 인해 들썩였었다. 지금 일어서 걷고 있는 모습을 보니 모두 회복된 듯하다.강영수가 술을 마시기 싫다고 하면 그 누구도 감히 강제로 술을 권하지 못했다.파티는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끝이 난다.8시.돌연 파티장의 불빛이 꺼졌고 전체 공간이 어둠에 잠겼다.그때 파란색 조명이 반짝이더니 고급 브랜드 한정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여자 한 명을 비추었다. 이어 시작된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웅성거렸던 현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여자에게로 향했다.검은 생머리를 늘어뜨린 그녀가 깊은 바다의 영혼을 노래하는 곡을 연주하고 있으니 마치 아리따운 인어아가씨 같았다.무대 아래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해외 유학을 마치고 갓 돌아온 허씨 가문 아가씨 아니에요? 몇 년 못 본 사이 진짜 예뻐졌네요. 적어도 해성엔 저 아가씨와 비교할 수 있는 여자는 없을 것 같아요.”연주가 끝나자 허이경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허이경의 시선은 누군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 눈빛을 따라가 보니 다름 아닌 강영수였다.진봉은 핸드폰으로 허이경에 관한 정보를 서치해 강영수에게 보고했다.알고 보니 그들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하지만 강영수는 그녀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없었다.시계를 보니 파티가 끝나려면 아직 30분은 더 걸려야 했다.사람들은 모두 선명히 보아낼 수 있었다. 저 강한 그룹 후계자를 보는 허이경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반면 강 대표는 그녀에게 조금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8시 30분.장소월은 차 뒷좌석에 앉아 괴로운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일찍 나오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이들을 만나지 않았을 텐데.오늘은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일찍 교실을 나섰다. 하지만 하필 그때 학교에서 걸어 나오는 전연우와 백윤서와 맞닥뜨린 것이다.그들은 야식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끌고 차에 들이밀었다.전연우와 백윤서는 한창 신나게 야식 메뉴와 주말 데이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연인 사이인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에 끼어든 방해꾼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어 너무나도 불편했다.백윤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소월아, 너 뭐 먹고 싶어? 꼬치구이? 아니면 해산물?”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있다가 그제야 정신이 든 장소월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다 좋아요. 사실 난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아요.”“너 집에 다녀간 지 진짜 오래됐어. 오늘 같은 시간에 끝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백윤서가 잠시 고민하고는 말했다.“그럼 우리 꼬치구이 먹으러 가자. 그 가게엔 훠궈도 있어.”순간 장소월은 백미러로 전연우의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당황하며 재빨리 눈을 피했다.“그래요.”그녀는 훠궈를 먹어본 적이 없어 먹고 배탈이 나진 않을지 알 수 없었다.저번 강용과 길거리에서 먹은 꼬치구이로 인해 이미 충분히 곤욕을 치렀었다.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장소월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이미 가게에 들어가 있었다.이어 그녀가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백윤서는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종업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 돌려 뒤를 확인해보니 장소월은 아직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오빠, 뭘 먹을 거야?”“네 마음대로 주문해.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백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전화를 건 사람은 강영수였다. 매번 통화할
그의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장소월은 힘껏 그를 밀쳐냈다. 그녀가 벗어나려고 한 순간, 전연우는 애써 반항하다가 도망치는 나약한 토끼를 잡듯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챘다.장소월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다시 그의 품 안에 가둬졌다.“안 보이는 동안 살쪘네?”어둠 속에서 똑똑히 볼 순 없었지만 그녀를 한껏 농락하는 전연우의 눈빛을 선명히 상상할 수 있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희 집 밥을 먹은 것도 아니잖아.”전연우가 장소월의 뱃살을 꼬집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깊게 키스했다. 찌릿한 전류가 온몸을 휘감았다.실은 장소월에게선 살집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전에 비해 약간 살이 쪘을 뿐이다. 예전 그녀는 너무 말라 침대에서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강씨 집안으로 도망치면 내가 널 건드리지 못할 줄 알았어? 응?”장소월은 가슴에 얹어진 몹쓸 남자의 손길을 느꼈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장소월의 입에서 유혹적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만 그건 몸이 닳아 올라 나온 본능적인 소리가 아니라 통증 때문이었다.그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던 것이다.장소월이 불경스레 움직이는 그의 손을 잡고는 휙 밀쳐냈다.“전연우, 그만해! 윤서 언니가 알게 되는 게 두렵지도 않아? 아직 옆 가게에 있다는 거 잊지 마.”“너 무서워?”장소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무섭기도 하고 역겹기도 해. 백윤서 한 명으로도 부족해서 나한테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전연우, 너 이런 더러운 습관 대체 언제 고칠래? 윤서 언니는 널 많이 좋아하고 있고 너도 윤서 언니를 좋아하잖아. 만약... 윤서 언니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면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돼. 분명 상처받을 거야.”전연우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네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고?”“난 윤서 언니가 힘들어하는 거 싫어. 미안한 일을 하고 싶지도 않고. 이제 이런 짓 그만해. 너도 윤서 언니가 상처받는 건 원하지 않잖아.”전연우가 장소월을 놓아주자 그녀는 옷에 잡힌 주름을 정리하고는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
과연 정말 그럴까?강지훈이 내뱉은 말, 그리고 소현아 배 속의 아이...소씨 부인을 돌려보낸 후, 규영은 별장 거실로 돌아와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는 주인님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외국에 있는 동안, 사실 주인님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나를?” 어지럽게 흩어졌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도우미들은 처음 보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미경도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 “맞습니다! 현아 아가씨는 병원에서 매일 주사를 맞으셨습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주사 맞는 걸 제일 무서워하십니다. 감기에 걸려 의사가 올 때마다 주인님 품에 숨곤 하셨지요. 현아 아가씨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늘 주인님의 성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현아 아가씨 방에서 주인님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강지훈은 처음으로 옆에 있는 미인을 무시해 버린 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천효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지훈 씨.”규영이 건넨 편지를 받은 뒤, 강지훈은 분홍색 봉투를 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훈 씨,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 당신 없이 사는 거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여기 의사들 매일 나한테 주사를 놔요. 팔이 아파 죽겠다고요! 심지어 머리에도 주사를 놔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의사는 화까지 내면서 주사를 놓는 것도 모자라 밥도 안 줘요. 주사 맞고 나면 팔뚝이 멍투성이가 되는데, 지금 글씨 쓰는 것도 아파요.규영과 미경의 말로는 내 배 속에 아기가 생겼대요. 하지만 이 사실을 강지훈 씨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지훈 씨는 아기를 싫어하기 때문에.흑흑흑... 그럼 나도 아기 안 낳을래요.강지훈 씨, 이 병원 안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집에 가서 아빠랑 엄마 보고 싶어요. 그리고 민아, 소월이...나 언제 데리러 올 거예요!너무 배고파요!규영과 미경은 또 나한테 먹을 것을 아무것도 안 줬어요.강지훈 씨,
“몰라요.”손이준이 짧게 대답했다.강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 멍청이의 일은 더는 미루면 안 된다.강용은 밖으로 나가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하지만 알아보니 가장 번화한 시내로 가려면 100km도 훌쩍 넘는 거리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렌터카 매장에 전화해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차는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한다고 한다.오늘 밤 짐을 정리하고 내일 떠나면 될 것이다.두 남자는 아래층 거실에 남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만 빚어 놓으려고 했건만, 한번 시작하니 한 시간도 훌쩍 넘겨버렸다.서울.강지훈은 소현아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러시아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최고급 호텔부터 기차역,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지하 클럽까지 그의 세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데도 말이다.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다.북경 감옥 전체는 살얼음판을 걷듯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강지훈은 평소 가장 아끼던 여자한테조차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잃고 말았다.“소씨 집안 쪽에선 아직 소식 없어?” 강지훈은 왕좌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부관이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소씨 집안을 며칠 동안 지켜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현아 씨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소현아 씨의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실종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소현아 씨가 돌아와 슬퍼할 테니,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씨 집안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입니다.”규영과 미경이 밖에서 걸어 들어와 보고했다.“주인님, 소씨 집안 사람들이 또 찾아왔습니다.”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돌려보내. 그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지?”“네, 주인님.”그 바보는 임신한 몸으로 대체 어디까지 도망간 걸까?천
강용 역시 장소월이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몰래 항우울제를 복용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씨 집안에 있을 때도, 전연우의 곁을 떠나도...그녀의 병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강용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장소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와 흉터는 이제 모두 옅어졌지만, 마음속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의 손은... 무거운 물건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다른 힘든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그녀는 붓을 쥘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강용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그녀는 가족도 없이 늘 혼자였다...사실 장소월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의,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하디귀한 아가씨였는데...그녀는...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선 안 되는 사람이다.“가끔은 나도 현아처럼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현아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강용... 나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라도 버틸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워.”강용은 너무 마음이 아파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고 온기를 나누어주었다.“아니, 그럴 일 없을 거야. 너한텐 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나 현아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아. 정말이야!”“나는 단지 걔가 너한테 자꾸 들러붙는 게 질투 났을 뿐이야.”“소월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떠나자. 걸어서라도 가지 뭐.”“강용, 나한테 재앙이라고 했던 송시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불행해졌어. 너, 강영수, 인시윤,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여자... 충고하는데, 당장 내쫓거나 아니면 단체 여행이라도 보내요. 최대한 멀리요. 그 여자가 소월 씨 곁에 있으면, 강지훈이 언젠간 반드시 찾아갈 거예요.”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서철용의 말투에 장소월의 마음도 불안해졌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잖아요. 전 현아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게다가 현아는 임신까지 했는 걸요.”“뭐, 뭐라고요?” 서철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 여자가 어떻게 임신을 할 수가 있어요!”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이미 뱉어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전 강지훈이 나한테 피임약을 달라고 했었어요. 소현아에게 먹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만약 약에 문제가 있어서 제때 피임을 하지 못했고 지금 임신까지 했다면, 아이는 90% 확률로 기형아거나 사산아로 태어날 거예요. 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아이를 지우게 해야 해요.”그 소식을 들은 순간 장소월은 충격에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힘없이 휴대폰이 미끄러 떨어졌다.서철용도 그녀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소현아가 임신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강지훈이 소현아를 러시아에 보낸 건, 뇌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내가 확인해봤는데, 소현아가 맞은 약물은 뇌 속의 어혈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지만,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요. 때문에... 그 아이는 낳으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소현아의 가족 쪽은... 알아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서철용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너무나 청천벽력 같은 잔인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위층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강용은 바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다급히 위층으로 달려갔다. 장소월의 방에서 흘러나온 소리라는 걸 알
강용은 자신의 자리를 뺏기자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 장소월은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내가 할게. 너는 좀 쉬어.” 강용은 장소월이 하던 일을 빼앗았다.장소월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손이준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기에, 흔쾌히 그에게 일을 넘겨주기로 했다. “소금은 조금만 넣어. 현아 짠 거 잘 못 먹어.”“알았어.”이제 한가해진 장소월이 강용에게 물었다.“방 청소해 줄까?”강용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대충 치워주면 돼.”“그래.”강용은 성격이 깔끔한 편이라 방 청소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현아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장소월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깨웠다. 소현아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장소월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의 침구 세트를 본 그녀는 잔뜩 신이 난 듯 장소월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고마워, 소월아.”“됐어. 얼른 쉬어. 밥 다 되면 깨워줄게.”소현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약간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월아, 나 방금 엄청 무서운 꿈 꿨어. 강지훈이 내가 몰래 도망친 걸 알고 엄청 화냈어. 날 잡아서 가둬놓고 다시는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더라고.”“소월아, 나 강지훈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장소월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사실 그녀는 이토록 걱정에 잠겨 있는 소현아의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소현아는 만날 때마다 마냥 즐거워만 보였는데... 아무래도 북경 감옥에 있는 동안 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괜찮아, 현아야. 여긴 강지훈이 없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이 널 붙잡아가는 일은 없을 거야. 부모님이 보고 싶으면, 전화하면 되잖아.”소현아는 걱정스러운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몰래 전화 해봤는데, 강지훈이 우리 집에 있는 것 같았어. 소월아... 나 부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너무 무서워.”“강지훈은 항상 날 괴롭히기만 해.”
월이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양념을 만들던 장소월은 시커멓게 변해버린 밀가루 반죽을 입에 넣고 있는 월이를 발견했다.“월아, 안 돼!”장소월은 재빨리 뛰쳐나가 월이의 입안에 있던 밀가루 반죽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강용, 냉장고에 뭐 먹을 거 있나 봐 봐. 배고픈 것 같으니까 뭐라도 좀 줘야겠어.”강용은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고 냉장고에서 오이 하나와 삶은 감자 하나를 찾아냈다.강용은 감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운 후 휴지로 감싸서 전해줬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투덜거렸을 텐데, 오늘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여기.”장소월은 감자를 건네받아 월이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많이 먹으면 안 돼. 탈 날 수도 있으니까 꼭꼭 씹어 먹어. 조금만 기다리면 밥 먹을 수 있어.”월이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한입 크게 베어 물려고 했지만 그 작은 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입가에 침만 잔뜩 흘리고 말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장소월의 눈에 강용의 얼굴 군데군데 묻어 있는 하얀 밀가루가 들어왔다. 아까 만두피를 밀 때 실수로 묻은 듯했다. 장소월은 손을 뻗었지만 키가 닿지 않았다. “머리 숙여 봐.”강용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머리를 숙였다.하지만 그때, 남자 한 명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이준은 빨래한 옷을 쾅 하고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그 소리에 소파에 누워 쉬고 있던 소현아까지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눈을 떴다가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장소월은 강용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주며 말했다. “됐어.”“오빠, 오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장소월은 강용에게 말했다. “빨래 너는 거 좀 도와줄 수 있어?”강용은 기분 좋게 걸어가며 말했다.“그렇게 하지, 동생.”강용도 장소월이 곧 생리를 시작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