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병원으로 가. 도착하면 전연우한테 연락해. 수술할 때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해.”“알았어.”장소월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서철용을 불렀다.수술 전, 서철용은 검사를 진행했다. 그녀의 자궁에서 감염이 일어나 큰 출혈이 생긴 것이었다.“왜 이제야 온 거예요. 이미 감염이 일어났잖아요.”장소월은 수술대에 누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바로 당신들이 원했던 거잖아요.”서철용이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전연우는 소월 씨를 너무 많이 봐줬어요. 나였다면... 그 정도 약으론 턱없이 부족했을 거예요.”그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말했다.“환자복으로 갈아입으면 수술을 시작할 수 있어요. 잘 생각해요. 자궁을 들어내면 영원히 임신할 수 없어요.”장소월이 처량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머리카락을 적셨다.“... 나한테 다른 선택은 없잖아요.”당장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나약한 모습이었다. 그때 서철용의 머릿속에 예전 그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시름시름 앓다가 2년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었다.전연우가 소식을 듣고 수술실로 급히 달려와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어떻게 됐어?”“지금으로선 적출 수술을 제외하고 아무런 방법도 없어.”그때 강용은 벽에 기대어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당신들 장소월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장씨 집안 아가씨가 굴러온 돌에 처참히 당하다니. 이봐, 전씨... 대단하네!”서철용이 그를 힐끗 보고는 다시 전연우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아는 사람이야?”전연우의 깊은 눈동자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강용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수술은 언제 끝나?”“한 시간 정도 뒤면 끝나.”서철용이 빙그레 웃으며 강용에게 말했다.“간단한 맹장 수술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여자친구는 곧 나올 거예요.”“내가 바본 줄 알아요? 대체 누가 맹장염으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려요!”휴. 이 아이도
더러워진 수술 도구를 폐기하러 소각실로 향하던 간호사는 안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에 다급히 멀리 몸을 피했다.사무실 안엔 옅은 피비린내가 가득 차 있었다.용기 안에 들어있는 이상한 모양의 붉은 고깃덩어리엔 감염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바로 장소월의 몸에서 나온 기형 자궁이었다.“처음에 아직 되돌릴 기회가 있다고 했던 건 널 위로하는 말일 뿐이었어. 이걸 좀 봐. 이미 감염이 진행됐어. 본래의 모양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잖아. 계속 장소월의 몸에 남아있으면 악화만 될 뿐이야. 빨리 적출해내지 않는다면 목숨도 보장하지 못해.”서철용이 용기를 들어 전연우에게 보여주고는 덤덤히 휴지통에 던져버렸다.“아이를 낳지 못하면 입양하면 되잖아. 불임임에도 불구하고 장소월에게 목맬 남자는 많을 텐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서철용이 그의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몸에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오싹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왜 그래? 마음이 약해졌어? 아니면 후회라도 하는 거야?”서철용이 책상 위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돌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연우, 너 설마 장소월한테 다른 감정이 생긴 거야? 그런 장난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와 장소월이 연인이 되면 하느님도 노할 거라고!”“쓸데없는 말 하지 마.”전연우는 짧게 한 마디 내뱉고는 방에서 걸어 나가다가 입구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일을 깨끗이 처리해야 해. 아무도 이번 일을 알아선 안 돼.”“날 믿지 못하는 거야?”서철용은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담뱃불을 끄고는 이어 흰 의사 가운을 벗고 개인 휴식실에 들어갔다. 안엔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여자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서철용은 그녀가 자든 말든 개의치 않고 곧바로 이불을 들어 올린 뒤 여자의 몸을 뒤집고는 애무 하나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여자의 가장 깊은 곳으로 비집고 들어갔다.그때 잠에서 깬 여자는 두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올리고
장소월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죄책감에 눈을 피했다. 그녀는 왜 이런 죄책감에 사로잡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이용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속였다는 것 때문에?강영수가 말했다.“의사 선생님께서 간단한 맹장 수술이니까 곧 몸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넌 그냥 병원에서...”장소월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눈을 내리깔고 이불 위 강영수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옥같이 하얗던 그녀의 얼굴은 가엽도록 창백해져 있었다.“맹장 수술이 아니라 자궁 적출 수술이야.”강영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솔직히 털어놓자 장소월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와 눈을 맞추지는 못했다.“맹장 수술이라고 한 건 아버지를 속이기 위함이야. 하지만 난 너까지 속이고 싶지 않아.”강영수가 물었다.“왜 그래야 하는데?”장소월은 용기를 한껏 끌어 올려서야 그와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아버지가 아신다면 난 애를 낳는 도구가 될 수 없어. 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할 거고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할 거야... 아마 누군가에게 팔려 가겠지.”결혼한 늙은 남자한테 팔려갈 가능성이 컸다. 그 연령대 사람은 이미 아이가 있으니 장소월이 아이를 낳든 말든 상관이 없을 테니 말이다.젊음과 아름다운 미모야말로 그녀의 최고의 자본이고 무기였다.“난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래서 숨기려는 거야.”장씨 집안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며 살았던 거였어?강영수가 그녀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소월아, 두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아이는 중요하지 않아!”하지만 장소월은 여전히 심장이 저려왔다. 의연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 속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날 위로해줄 필요 없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아무리 감정이 깊다고 해도 언젠가는 틈이 벌어지는 도화선으로 작용할 거야.”“영수야, 내가 강씨 집안에 가기로 결정한 건
“강씨 집안의 개인 의사는 우리 병원 의사 선생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에요.”“그리고 환자분이 직접 요청해 퇴원한 거예요. 그래서 저희도 별다른 수가 없었어요.”백윤서가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았다.“아쉽네요. 소월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을 사 왔는데 정작 소월이는 이곳에 없네요.”“하지만 강 대표님 좋은 분 같았어요. 그분과 함께라면 환자분은 분명 행복할 거예요.”백윤서는 전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다같이 깊은 그의 눈동자에선 한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병실에서 나갔다.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 장소월은 2주 동안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 사이 강영수는 줄곧 그녀의 옆에서 회복을 도왔다. 완전히 나아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따사로운 햇살이 창문 옆 장소월의 침대를 비추었다. 얇은 잠옷 치마를 입은 장소월의 손목은 햇볕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교하고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살짝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왼쪽 어깨에 늘어뜨렸고 달 모양 목걸이는 그녀의 매혹적인 쇄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얼굴색도 거의 회복해 생기가 돌았고 입술은 붉은 꽃물이라도 들인 듯 눈길을 사로잡았다.창밖 나무에 무성히 뻗은 가지 곳곳엔 파릇파릇 아지랑이가 돋아나왔다.개인 의사가 장소월의 몸을 살피고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소월 아가씨,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감사해요. 선생님.”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별말씀을요.”강영수는 장소월의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장씨 집안 쪽은 잘 처리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학교엔... 내일 갈 거야?”장소월이 그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그럼 내일 가는 거로 하자! 그전에 밖에 나가서 좀 걷고 싶어. 오랫동안 나가지 못했잖아.”“그래. 나랑 같이 가자.”강씨 저택 후원에 많은 희귀한 품종들이 심어져 있었다. 강영수가 그중
그녀가 강영수를 선택한 것인가?정확히 말하면 강영수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강영수가 사귀자는 말을 꺼냈을 때, 장소월은 전생의 비극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 잠시 망설였었다.떠나는 것과 남는 것을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기도 했다.하지만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을 주겠다는 강영수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도 했었다.그의 자상함과 세심함은 조금씩 그녀가 세운 방어막을 허물고 있었다.그녀는 종래로 이런 사랑받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강영수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그녀가 어떤 잘못을 하든 강영수는 늘 옆을 지키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해결해줄 것 같았다.그가 그녀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한 번 기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오부연이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강영수는 한 여자를 오랫동안 사랑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강영수가 차 사고를 당하자마자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함께 해외에 가버렸다.그 후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도 없다.강씨 저택에 오기 전, 오부연은 그녀에게 강영수를 도와 당시의 트라우마 속에서 걸어 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강씨 저택에 온 건 오로지 숨을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아직 자신에 대한 강영수의 감정이 정말 사랑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전 여자친구의 대체품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뭐든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취하고 싶은 것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시간을 계산해보니 전연우도 곧 장해진에게 손을 쓸 것이다.그녀는 아무나 칼질을 해댈 수 있는 도마 위의 생선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살길은 도망치는 것 외엔 강영수의 곁에 머무르는 것밖에 없었다.장소월은 수술대에 오른 그 순간 이미 결심을 내렸어야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려고 마음먹었다.장소월은 집에서 몸을 회복하는 동안에도 학업을 놓지
돈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떳떳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그게 아니기에 장소월은 당당히 강영수와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었다. 신문에 강한 그룹과 장씨 집안이 손을 잡고 중요한 몇 개의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실렸다.장해진이 딸 덕분에 강씨 집안이라는 거대한 배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이제 장소월의 앞에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인시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올림피아드 팀 쪽엔 여전히 한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시험 시간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소월은 남는 시간이면 과외 선생님의 건의에 따라 영어로 된 소설책을 펼쳤다. 처음엔 한 권을 읽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젠 책의 내용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점심시간, 장소월이 가져온 도시락을 꺼냈을 때 백윤서가 책을 안고 걸어왔다.“소월아... 그동안 잘 지냈어? 저번에 연우 오빠와 함께 병원에 갔었는데 넌 이미 퇴원했더라고. 그 후 널 보러 강씨 저택에도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 미안해.”장소월은 고개를 숙인 채 책을 펼치며 말했다.“난 잘 지내고 있어. 너도 오빠도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백윤서는 영문자가 가득 찍혀있는 장소월의 책을 보고는 물었다.“너 무슨 책을 보는 거야?”“war and peace. 전쟁과 평화.”백윤서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소월아, 아직은 이런 책을 볼 때가 아닌 것 같아.”“너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했잖아. 내가 다 필기했으니까 가져가서 봐.”장소월이 말했다.“고마워... 난...”“그럼 여기에 놓고 갈게. 난 올림피아드 팀 수업에 가야 해.”백윤서가 필기장을 책상에 둔 채 교실을 나갔다.장소월의 말은 채 끝나지 않았다. 실은 그녀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그녀는 이번 특별반 시험에서 반드시 1등의 자리를 쟁취해야 한다.그 후 올림피아드 시합에서도 1등을 한다면 서울대에 직행할 수 있다.그녀는 강씨 집안에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야,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그들이 함께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니!장소월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정상 아니야? 밥 먹고 쇼핑하고, 전에... 너희도 윤서랑 하던 거 아니야?”과외를 해준 일은... 해변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강용이라는 걸 몰랐을 때, 그녀는 거절했다.거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강용이 그녀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고등학교 2년 동안 강용은 항상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괴롭혔다. 그래서 6반 친구들이 하나둘씩 그녀와 멀어지고 따돌리게 했다.이것이 그녀의 성격이 괴팍해진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다른 사람과 왕래하지 않고 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그녀와 강용의 사이는 확실히 전보다 완화되었다.남들 눈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가까워 보이지만, 2년 동안 강용이 그녀에게 한 나쁜 짓을 두 사람은 잊고 있었다.왜 백윤서를 해치려고 하냐며 그녀의 목을 조르던 강용...장소월은 그때 백윤서를 향한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만약 그때 윤서를 해치려 한다고 인정했다면, 남자는 자신을 진짜 목졸라 죽였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방금 방서연의 말은 강용이 날 좋아한다고 오해한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강용을 좋아한다는 뜻인가?’어떤 오해를 했든 간에, 모두 황당한 일이었다.강용과 백윤서는 단둘이 도원촌의 해변에 가서 한 지붕 아래에 묵었었다.백윤서가 막 전학 왔을 때, 두 사람에 대한 스캔들이 난무했고, 전교생이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장소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스러운 표정으로 방서연을 보았다.“강용은 계속 윤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나랑 뭔 상관이야? 네가 방금 말한 일들은 모두 나를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어. 강용에게도 진작 말한 부분이고.”장소월은 방서연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하!”강용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방서연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강용은 딱딱한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갈라진 벽 틈에 옅은 핏자국
여학생은 마침 문 앞에서 지나가는 장소월과 마주쳤다.장소월은 입구에서 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쓰러진 의자를 보고 장소월은 다가가 일으켜 세웠고, 방서연과 허철의 시선이 그녀에게 떨어졌다.방서연은 속으로 아직도 여기 올 낯이 있냐고 나무랐다.장소월은 그들을 보고, 또 온몸에 포악한 기운이 가득한 강용을 보았다. 손가락을 따라 내려온 피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폭발하는 강용의 모습을 그녀는 6반에 있을 때 이미 본적이 있었다.‘이 자식은 분명 조울증일 거야!’장소월은 더 묻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이건 윤서가 나한테 준 노트야. 다 베껴쓰면 돌려줘. 그리고 의무실에 꼭 가봐.”말을 마친 그녀는 교실을 떠났다.옆에 있던 두 사람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강용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으니, 지금 입을 열면 죽은 목숨이었다.강용은 핑크색 노트를 집어 들고 펼쳐보니, 확실히 장소월의 필체가 아니었다. 첫 페이지에 백윤서의 이름이 쓰여있었다.그는 가차 없이 노트를 반으로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학교가 끝날 때까지 장소월은 노트가 찢어진 사실을 몰랐지만, 옆 반에서 백윤서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장소월은 복도 옆의 창턱에 앉아 화장실에 가는 2반 여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오늘 누가 쓰레기통에서 백윤서 노트를 봤대. 그것도 반으로 찢어진 채로!”“그 두 사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휴, 우리는 시험이나 걱정하자! 강용이 왔으니 나도 이젠 꼴찌를 면하겠네.”강용이 백윤서의 노트를 찢었다?망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돌려 뒷줄에 앉아 있는 백윤서를 보고 망설였다.마지막 교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소월은 2반으로 갈 생각이었다.청소하는 아주머니는 매일 교실에 아무도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와서 청소하곤 했다.학생들이 거의 교실을 떠나고 백윤서는 두 손을 뒤로하고 장소월에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오늘 네 것까지 챙겨왔어. 수업도 끝났는데 왜 아
명세진이 말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결혼인데, 결혼식을 안 하다니 말이 안 돼. 남들이 알면 비웃을 거야.”신이랑의 입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그가 확연히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 뭐든 민아 씨 뜻에 따를 거예요.”“이게...”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명세진 역시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결혼식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양가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식사 자리는 빼놓을 수 없지.”소민아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이미 다음 달로 식사 약속을 잡아놨어요. 그때 아빠 엄마랑 같이 오세요.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하죠.”“그래... 너랑 이랑이 둘 다 괜찮으면, 고모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너희 둘이 알아서 결정해.”“참, 민아야, 혹시 현아한테 요즘 전화해 본 적 있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매일 집에 전화했을 텐데, 요즘 들어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 게다가...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해 봐도 통화가 안 돼.”소민아가 말했다. “오는 길에 이미 전화해 봤는데 연결이 안 됐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바쁜 일이 있는 거겠죠.”명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만, 현아 몸 상태가 걱정돼. 애가 혹시나 병이 더 악화되면 우리까지 못 알아보게 될까 봐.”소민아는 명세진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어떻게든 현아 언니랑 연락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그래, 오늘 쉬는 날이면 여기서 자고 가. 마침 빈방도 있잖아.”소민아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명세진과 함께 뒷마당을 산책했고, 신이랑은 회사에서 돌아온 소정국과 거실에서 장기를 두었다.소민아가 명세진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넌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혹시 다퉜어?”“민아야, 결혼은 평생을 좌우하는 일이
“혹시 나한테 불평하는 거야?”강지훈은 돌연 발작이라도 하듯, 제 몸 위에 있던 여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점점 더 기고만장해지는군!”천효연은 풀썩 주저앉았지만, 상처 입거나 괴로운 기색은 전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요염하게 몸을 비틀며 두 무릎으로 기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유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을 벌려 남자의 손가락을 천천히 빨아들였다. 남자의 눈에서 분노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행동은 더더욱 과감해졌다. 혀를 움직여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강지훈은 허리 아래 매혹적인 자태의 여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천효연 같은 여자는 전문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훈련을 받는다. 태생적으로도 요물과 같아서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모든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고 사로잡는다.강지훈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채, 엄청난 크기의 물건을 그녀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천효연은 입을 벌려 온몸으로 받아들였다.몇 번이고 반복되는 거칠기 그지없는 행위...마침내 절정에 이르자, 천효연은 마치 처음 경험해본 황홀한 맛인 듯 몽롱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혀를 내밀어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강지훈은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에 바로......소민아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소현아는 전화벨이 울린 지 3초 안에 빠르게 받곤 했었는데 말이다.신이랑은 손에 선물을 든 채 그녀를 위로했다. “불안하면 나랑 같이 가봐요.”소민아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런 곳은 한 번 가본 것만으로도 충분해요.”그녀는 지난번 북경 감옥에 갔을 때,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데다 깊은 산속을 뚫고 가야 하는 곳이라 일반적인 차는 전혀 드나들지 않는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끔찍한 소문들이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미경이 말했다.“현아 아가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효연 아가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송시아보다도 훨씬 나아요. 그 여자는 별장에 오자마자 왕이라도 된 듯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시켰잖아요.”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요.”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주사는 석 달에 한 번씩 맞는 것으로, 뇌의 핏덩이를 녹여준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북경 감옥은 밤이 되면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고, 가끔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오곤 했다.사방이 막혀 있는 격투장 안, 강지훈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내려와 부관이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링 위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숨통이 끊겨 있었다.이건 북경 감옥의 규칙이었다. 이긴 자는 다시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다.강지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소식이 없어?”부관이 묻지 않아도 소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장님,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마침 소장님이 조사하고 있는 일도 그쪽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합니다.”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나?강지훈은 손에 든 물건을 던져 버리고 검은색 군복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사무실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했고, 벽엔 부자연스러운 그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건 소현아가 이곳에 왔을 때 그린 그림이었다.강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관이 라이터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전화 안 왔어?”부관이 대답했다.“얼마 전 감옥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탈옥을 시도한 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연 아가씨가 돌아온 탓에 현아 아가씨가 주인님의 총애를 잃게 된 걸까? 주인님의 여자 교체 속도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효연 아가씨를 제외하고 주인님이 진심으로 마음을 쏟았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들은 늘 새로운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현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해서 심통을 부리며 주인님과 싸우기 일쑤였다.어쩌면 그녀에게 싫증이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현아 아가씨는 결국 주인님에게 버려진 듯하다.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도 없다. 주인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효연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만약 어르신께서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애써 그녀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현아가 수술대에 실려 간 뒤, 주인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규영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래야만 소현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현아의 머리에 주사기 바늘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정맥에 주사했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주사 안 맞을 거예요! 이거 놔요!”규영과 미경은 소현아의 팔다리를 누르며 안심시켰다. “현아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요.”집에 간다는 말을 듣자 소현아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약물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주변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규영이 물었다. “이 약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요셉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됐어요.”소현아의 뱃속 아기에게 조금의 문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