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밖에서 농구를 치던 남학생 몇 명이 걸어왔다.강용은 이마에 검은색 머리띠를 한 채 농구공을 안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공표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강용은 손에 들고 있던 농구공을 휙 던져버렸다. 방서연이 곧바로 공을 받아안았다.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을 버려두고 장소월에게 가는 강용의 모습에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대체 장소월이 어디가 좋다는 거야? 술집에 안 가는 건 그렇다고 쳐. 심지어 게임까지 끊었어. 저번 학기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니까? 나 진짜 강용의 몸에 다른 누군가의 영혼이 들어온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허철이 콧등에 걸린 안경을 올리며 못마땅한 듯 말했다.그는 그저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갈 뿐이다.좋아하는 사람이 이토록 훌륭한데 강용이 어떻게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약 장소월을 햇살에 비유한다면 강용은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와도 같다.“이봐, 아가씨... 날 못 믿어서 직접 확인하는 거야?”강용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난 그저 내 성과를 보고 싶었을 뿐이야. 잘했어. 계속 노력해.”장소월은 칭찬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뜨려 했다.“그냥 이렇게 가려고? 상은 안 줘?”장소월이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상은 이제 매일 아침 자습을 할 수 있다는 거야! 난 이만 수업하러 갈게!”참 장소월 다운 말이다.점심엔 전교에서 대이동이 진행되었다.강용은 단번에 1층 교실에서 장소월의 옆 반에 옮겨왔다.그가 문신이 새겨진 길고 곧게 뻗은 손으로 한창 문제를 풀고 있는 장소월의 책상을 두드렸다.“아가씨, 밥 먹으러 안 가?”장소월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난 됐어. 혼자 먹으러 가. 난 아까 매점에서 빵을 사 왔으니까 대충 먹으면 돼. 아직 몇 문제 남았어.”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백윤서가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강용을 발견했다.“강용, 이번 시험 잘 봤더라? 축하해!”백윤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소월이랑 밥을 먹으려고 온 거야? 우리 같이 가자!”장소월은 이미
“서울 강남 병원으로 가. 도착하면 전연우한테 연락해. 수술할 때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해.”“알았어.”장소월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서철용을 불렀다.수술 전, 서철용은 검사를 진행했다. 그녀의 자궁에서 감염이 일어나 큰 출혈이 생긴 것이었다.“왜 이제야 온 거예요. 이미 감염이 일어났잖아요.”장소월은 수술대에 누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바로 당신들이 원했던 거잖아요.”서철용이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전연우는 소월 씨를 너무 많이 봐줬어요. 나였다면... 그 정도 약으론 턱없이 부족했을 거예요.”그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말했다.“환자복으로 갈아입으면 수술을 시작할 수 있어요. 잘 생각해요. 자궁을 들어내면 영원히 임신할 수 없어요.”장소월이 처량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머리카락을 적셨다.“... 나한테 다른 선택은 없잖아요.”당장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나약한 모습이었다. 그때 서철용의 머릿속에 예전 그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시름시름 앓다가 2년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었다.전연우가 소식을 듣고 수술실로 급히 달려와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어떻게 됐어?”“지금으로선 적출 수술을 제외하고 아무런 방법도 없어.”그때 강용은 벽에 기대어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당신들 장소월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장씨 집안 아가씨가 굴러온 돌에 처참히 당하다니. 이봐, 전씨... 대단하네!”서철용이 그를 힐끗 보고는 다시 전연우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아는 사람이야?”전연우의 깊은 눈동자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강용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수술은 언제 끝나?”“한 시간 정도 뒤면 끝나.”서철용이 빙그레 웃으며 강용에게 말했다.“간단한 맹장 수술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여자친구는 곧 나올 거예요.”“내가 바본 줄 알아요? 대체 누가 맹장염으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려요!”휴. 이 아이도
더러워진 수술 도구를 폐기하러 소각실로 향하던 간호사는 안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에 다급히 멀리 몸을 피했다.사무실 안엔 옅은 피비린내가 가득 차 있었다.용기 안에 들어있는 이상한 모양의 붉은 고깃덩어리엔 감염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바로 장소월의 몸에서 나온 기형 자궁이었다.“처음에 아직 되돌릴 기회가 있다고 했던 건 널 위로하는 말일 뿐이었어. 이걸 좀 봐. 이미 감염이 진행됐어. 본래의 모양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잖아. 계속 장소월의 몸에 남아있으면 악화만 될 뿐이야. 빨리 적출해내지 않는다면 목숨도 보장하지 못해.”서철용이 용기를 들어 전연우에게 보여주고는 덤덤히 휴지통에 던져버렸다.“아이를 낳지 못하면 입양하면 되잖아. 불임임에도 불구하고 장소월에게 목맬 남자는 많을 텐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서철용이 그의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몸에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오싹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왜 그래? 마음이 약해졌어? 아니면 후회라도 하는 거야?”서철용이 책상 위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돌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연우, 너 설마 장소월한테 다른 감정이 생긴 거야? 그런 장난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와 장소월이 연인이 되면 하느님도 노할 거라고!”“쓸데없는 말 하지 마.”전연우는 짧게 한 마디 내뱉고는 방에서 걸어 나가다가 입구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일을 깨끗이 처리해야 해. 아무도 이번 일을 알아선 안 돼.”“날 믿지 못하는 거야?”서철용은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담뱃불을 끄고는 이어 흰 의사 가운을 벗고 개인 휴식실에 들어갔다. 안엔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여자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서철용은 그녀가 자든 말든 개의치 않고 곧바로 이불을 들어 올린 뒤 여자의 몸을 뒤집고는 애무 하나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여자의 가장 깊은 곳으로 비집고 들어갔다.그때 잠에서 깬 여자는 두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올리고
장소월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죄책감에 눈을 피했다. 그녀는 왜 이런 죄책감에 사로잡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이용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속였다는 것 때문에?강영수가 말했다.“의사 선생님께서 간단한 맹장 수술이니까 곧 몸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넌 그냥 병원에서...”장소월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눈을 내리깔고 이불 위 강영수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옥같이 하얗던 그녀의 얼굴은 가엽도록 창백해져 있었다.“맹장 수술이 아니라 자궁 적출 수술이야.”강영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솔직히 털어놓자 장소월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와 눈을 맞추지는 못했다.“맹장 수술이라고 한 건 아버지를 속이기 위함이야. 하지만 난 너까지 속이고 싶지 않아.”강영수가 물었다.“왜 그래야 하는데?”장소월은 용기를 한껏 끌어 올려서야 그와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아버지가 아신다면 난 애를 낳는 도구가 될 수 없어. 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할 거고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할 거야... 아마 누군가에게 팔려 가겠지.”결혼한 늙은 남자한테 팔려갈 가능성이 컸다. 그 연령대 사람은 이미 아이가 있으니 장소월이 아이를 낳든 말든 상관이 없을 테니 말이다.젊음과 아름다운 미모야말로 그녀의 최고의 자본이고 무기였다.“난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래서 숨기려는 거야.”장씨 집안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며 살았던 거였어?강영수가 그녀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소월아, 두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아이는 중요하지 않아!”하지만 장소월은 여전히 심장이 저려왔다. 의연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 속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날 위로해줄 필요 없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아무리 감정이 깊다고 해도 언젠가는 틈이 벌어지는 도화선으로 작용할 거야.”“영수야, 내가 강씨 집안에 가기로 결정한 건
“강씨 집안의 개인 의사는 우리 병원 의사 선생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에요.”“그리고 환자분이 직접 요청해 퇴원한 거예요. 그래서 저희도 별다른 수가 없었어요.”백윤서가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았다.“아쉽네요. 소월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을 사 왔는데 정작 소월이는 이곳에 없네요.”“하지만 강 대표님 좋은 분 같았어요. 그분과 함께라면 환자분은 분명 행복할 거예요.”백윤서는 전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다같이 깊은 그의 눈동자에선 한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병실에서 나갔다.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 장소월은 2주 동안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 사이 강영수는 줄곧 그녀의 옆에서 회복을 도왔다. 완전히 나아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따사로운 햇살이 창문 옆 장소월의 침대를 비추었다. 얇은 잠옷 치마를 입은 장소월의 손목은 햇볕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교하고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살짝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왼쪽 어깨에 늘어뜨렸고 달 모양 목걸이는 그녀의 매혹적인 쇄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얼굴색도 거의 회복해 생기가 돌았고 입술은 붉은 꽃물이라도 들인 듯 눈길을 사로잡았다.창밖 나무에 무성히 뻗은 가지 곳곳엔 파릇파릇 아지랑이가 돋아나왔다.개인 의사가 장소월의 몸을 살피고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소월 아가씨,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감사해요. 선생님.”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별말씀을요.”강영수는 장소월의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장씨 집안 쪽은 잘 처리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학교엔... 내일 갈 거야?”장소월이 그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그럼 내일 가는 거로 하자! 그전에 밖에 나가서 좀 걷고 싶어. 오랫동안 나가지 못했잖아.”“그래. 나랑 같이 가자.”강씨 저택 후원에 많은 희귀한 품종들이 심어져 있었다. 강영수가 그중
그녀가 강영수를 선택한 것인가?정확히 말하면 강영수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다.강영수가 사귀자는 말을 꺼냈을 때, 장소월은 전생의 비극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 잠시 망설였었다.떠나는 것과 남는 것을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기도 했다.하지만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을 주겠다는 강영수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도 했었다.그의 자상함과 세심함은 조금씩 그녀가 세운 방어막을 허물고 있었다.그녀는 종래로 이런 사랑받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강영수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그녀가 어떤 잘못을 하든 강영수는 늘 옆을 지키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해결해줄 것 같았다.그가 그녀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한 번 기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오부연이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강영수는 한 여자를 오랫동안 사랑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강영수가 차 사고를 당하자마자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함께 해외에 가버렸다.그 후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도 없다.강씨 저택에 오기 전, 오부연은 그녀에게 강영수를 도와 당시의 트라우마 속에서 걸어 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강씨 저택에 온 건 오로지 숨을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아직 자신에 대한 강영수의 감정이 정말 사랑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전 여자친구의 대체품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뭐든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취하고 싶은 것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시간을 계산해보니 전연우도 곧 장해진에게 손을 쓸 것이다.그녀는 아무나 칼질을 해댈 수 있는 도마 위의 생선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살길은 도망치는 것 외엔 강영수의 곁에 머무르는 것밖에 없었다.장소월은 수술대에 오른 그 순간 이미 결심을 내렸어야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려고 마음먹었다.장소월은 집에서 몸을 회복하는 동안에도 학업을 놓지
돈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떳떳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그게 아니기에 장소월은 당당히 강영수와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었다. 신문에 강한 그룹과 장씨 집안이 손을 잡고 중요한 몇 개의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실렸다.장해진이 딸 덕분에 강씨 집안이라는 거대한 배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이제 장소월의 앞에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인시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올림피아드 팀 쪽엔 여전히 한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시험 시간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소월은 남는 시간이면 과외 선생님의 건의에 따라 영어로 된 소설책을 펼쳤다. 처음엔 한 권을 읽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젠 책의 내용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점심시간, 장소월이 가져온 도시락을 꺼냈을 때 백윤서가 책을 안고 걸어왔다.“소월아... 그동안 잘 지냈어? 저번에 연우 오빠와 함께 병원에 갔었는데 넌 이미 퇴원했더라고. 그 후 널 보러 강씨 저택에도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 미안해.”장소월은 고개를 숙인 채 책을 펼치며 말했다.“난 잘 지내고 있어. 너도 오빠도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백윤서는 영문자가 가득 찍혀있는 장소월의 책을 보고는 물었다.“너 무슨 책을 보는 거야?”“war and peace. 전쟁과 평화.”백윤서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소월아, 아직은 이런 책을 볼 때가 아닌 것 같아.”“너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했잖아. 내가 다 필기했으니까 가져가서 봐.”장소월이 말했다.“고마워... 난...”“그럼 여기에 놓고 갈게. 난 올림피아드 팀 수업에 가야 해.”백윤서가 필기장을 책상에 둔 채 교실을 나갔다.장소월의 말은 채 끝나지 않았다. 실은 그녀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그녀는 이번 특별반 시험에서 반드시 1등의 자리를 쟁취해야 한다.그 후 올림피아드 시합에서도 1등을 한다면 서울대에 직행할 수 있다.그녀는 강씨 집안에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야,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그들이 함께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니!장소월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정상 아니야? 밥 먹고 쇼핑하고, 전에... 너희도 윤서랑 하던 거 아니야?”과외를 해준 일은... 해변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강용이라는 걸 몰랐을 때, 그녀는 거절했다.거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강용이 그녀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고등학교 2년 동안 강용은 항상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괴롭혔다. 그래서 6반 친구들이 하나둘씩 그녀와 멀어지고 따돌리게 했다.이것이 그녀의 성격이 괴팍해진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다른 사람과 왕래하지 않고 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그녀와 강용의 사이는 확실히 전보다 완화되었다.남들 눈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가까워 보이지만, 2년 동안 강용이 그녀에게 한 나쁜 짓을 두 사람은 잊고 있었다.왜 백윤서를 해치려고 하냐며 그녀의 목을 조르던 강용...장소월은 그때 백윤서를 향한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만약 그때 윤서를 해치려 한다고 인정했다면, 남자는 자신을 진짜 목졸라 죽였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방금 방서연의 말은 강용이 날 좋아한다고 오해한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강용을 좋아한다는 뜻인가?’어떤 오해를 했든 간에, 모두 황당한 일이었다.강용과 백윤서는 단둘이 도원촌의 해변에 가서 한 지붕 아래에 묵었었다.백윤서가 막 전학 왔을 때, 두 사람에 대한 스캔들이 난무했고, 전교생이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장소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스러운 표정으로 방서연을 보았다.“강용은 계속 윤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나랑 뭔 상관이야? 네가 방금 말한 일들은 모두 나를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어. 강용에게도 진작 말한 부분이고.”장소월은 방서연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하!”강용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방서연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강용은 딱딱한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갈라진 벽 틈에 옅은 핏자국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장소월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지훈이 정말 온다면 그 사람과 함께 떠날 거야?”소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놈 싫어. 현아는 소월이랑 강용한테 아기도 낳아줘야 해.”“그리고 우리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잖아.”“소월아, 네가 그랬지, 다음 목적지는 바닷가라고. 나 데리고 상어 보러 갈 거라고 했잖아.”소현아는 양손에 탕후루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장소월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 외에도 체리 몇 개가 더 들려 있었다.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임산부를 위해 장소월이 사준 것이었다.“그래. 약속 어기지 않을게.”장소월은 저녁 반찬으로 구이용 고기를 조금 구매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입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주변 상인들은 노점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심지어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장소월은 이런 아수라장을 종래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뒤 출구가 모두 막혀버려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장소월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 오빠? 어떻게 여기 계세요?”“시장에서 식재료 사는 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의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치셨어요!”얼굴까지 창백한 걸 보니 총상을 입은 것 같았다.“쉿, 조용히 해요.”그들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숨어 몸을 바짝 붙인 채 외부의 공포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틈새가 너무 비좁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기에 일어선 채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손이준의 옆
장소월은 힘이 풀린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확실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다.손이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식재료도 사다 놓았다.소현아는 어젯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은 임산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는 냄비에 남은 미음 세 그릇을 어젯밤 먹다 남은 반찬과 함께 야무지게 비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소리쳤다.“소월아, 일어났어?”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음산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는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냄비에 있던 미음 다 먹었는데, 조금만 더 먹고 싶어서요... 혹시 더 있어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섭기는 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손이준은 그릇을 탁자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드세요.”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갑고 쌀쌀한 목소리였다.‘강지훈은 왜 저 멍청이한테 꽂힌 걸까?’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 지고 있나 보다.별이도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전연우는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직도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전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 시간까지도 밥 먹으러 내려오지 않는 거지?아침도 먹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지났다.장소월의 방에서부터 가게까지의 거리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게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이봐.”덥수룩한 머리숱의 남자가 다가왔다.“형님, 무슨 일이십니까?”“시내에 가서 먹을 것 좀 사와. 10분 준다. 많이 사와.”“알겠습니다, 형님.”“아니야! 저 사람들한테...”“그게 좋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장소월은 방에서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 주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선을 몇 군데 그
“싫어... 싫어. 나 안 돌아갈 거야.” “안 돼, 잡지 마!” “강용, 나 살려줘!”장소월은 종래로 그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연우는 그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고 있었다. 다만 꿈속에서까지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전생과 이번 생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그녀를 한번 또 한 번 사무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월아... 내 아내! 넌 영원히 내 여자야...’전연우는 내면의 욕망을 애써 억눌러 술 취해 자고 있는 여자를 탐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전연우는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는 그녀에게 옷을 입혔다. 그녀의 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장소월은 온몸이 파도 속에 잠긴 듯했다. 끔찍하게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숨통이 트이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술에 취한 탓인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방에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잠시 후 눈앞에 흰빛이 번뜩이더니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장소월은 온몸이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시 반이었다.가슴 위에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월이가 엎드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장소월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옆에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월이를 보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손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우리 월이는요?”장소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고 있어요.”“왜 그래요?”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 그만 마셔.”양똥 소주는 확실히 독했다. 강용은 겨우 반병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면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운 손이준은 멀쩡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만두는 소현아에게 거의 전부 양보했다.소현아가 혼자서 세 그릇이나 비우는 사이, 장소월은 별로 먹지 않아 거의 공복 상태였던 지라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며 소현아에게 말했다. “현아야, 월이 좀 봐줘. 난 강용을 방에 데려다줘야겠어.”“응, 응. 알았어.”장소월이 손을 대기도 전에, 손이준이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용을 부축했다. “내가 같이 올라갈게요.”“월이는 여기 얌전히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저 괜찮아요. 소파에 가서 잠깐 누워 있으면 돼요. 오빠, 그럼 강용 부탁 드릴게요.”장소월이 소파에 눕자, 별이는 장난감을 들고 다가와 작은 머리를 들이밀고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엄마... 냄새 좋아.”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장소월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그마한 몸이 그녀의 품에 쏙 들어왔다.아이는 고개를 젖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어느덧 깊이 잠든 듯했다.소현아는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소파 옆에 얌전히 앉아 턱을 괴고 잠이 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월이 잠들었으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그때, 2층에서 쿵 소리에 이어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손이준이 술에 취한 강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 방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강용이 다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아래층에 내려와 장소월의 옆을 지키고 있는 어리숙한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낀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올라가도 돼요.”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자러 갈게요.”소현아는 그에게 겁을 먹은 듯 허
소현아는 잔뜩 신이 난 채 원래 자리에 돌아가 그릇을 들고 강용에게 다가갔다. “닭 다리 먹고 싶어.”강용은 손을 뻗어 닭 다리 두 개를 집어주며 말했다. “말 잘 들었으니까 두 개 줄게.”“고마워, 강용.” 소현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볼에 있는 보조개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 의아한 듯 접시에 담긴 닭 다리를 세어보더니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나 더 먹으면 소월이 몫이 모자라잖아. 이건 소월이 줘야겠다.”소현아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에 장소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난 괜찮아.”시장에서 사 온 닭 다리 외에 손수 만든 만두도 준비되어 있었다.그때 월이가 깨어나 장소월에게 다가가 안아달라고 조르며 팔을 뻗었다.손이준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꾸짖었다. “이쪽으로 와.”울먹거리는 아이를 본 장소월은 가엾은 마음에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먹일게요.”장소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올리려 했지만, 순간 손목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힘이 풀려 아이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강용이 재빨리 아이를 잡았다.“괜찮아? 아직 손목 안 나은 거야?”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고질병이지 뭐.”“미안해, 월아. 많이 놀랐지?”그녀를 올려다보는 월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조금의 무서움도 들어있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장소월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오빠, 죄송해요. 예전에 손을 다쳐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하마터면 월이를 떨어뜨릴 뻔했어요.”손이준은 듣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의 음식을 먹으며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손이준은 저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걸까.식탁 분위기는 소현아와 강용이 주도했다. 강용은 소현아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있었다. 그녀가 까놓은 땅콩을 보니 흥이 올라 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얼마 후 음식점 사장이 맥주 한 상자를 배
규영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계획이 효과를 본 것 같네. 나중에 현아 아가씨 만나면 꼭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어.”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사실 강지훈은 그 편지를 믿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 있는 거라곤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없는 여자니까. 처음 그녀를 곁에 둔 건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였다.편지지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본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워졌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묘하게 벅차오르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소현아는 사나운 늑대가 쫓아오는 공포스러운 꿈을 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소현아는 급기야 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보야, 바보야...” “빨리 일어나! 안 일어나면 만두 다 먹어버린다!”그 말에 소현아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강용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흐어엉, 강용, 나 악몽 꿨어. 늑대가 우리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막 쫓아왔어.”갑작스러운 포옹에 강용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도록 손을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강용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멍청아. 살살 좀 해. 숨 막혀 죽겠다.”소현아는 훌쩍이며 강용을 놓아주었다. “너무 무서웠어.”강용은 그녀의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됐어. 꿈일 뿐이야. 내려가서 밥 먹어. 몇 그릇 먹으면 바로 잊혀질 거야.”“옷 제대로 입고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게.”“응, 응.”소현아는 신발을 신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강용이 신발 챙겨줬다. 헤헤.’“강용, 잠깐만. 나랑 아기랑 같이 가!”벌써 가버렸을 줄 알았던 강용은 사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눈에 띄게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소현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의
과연 정말 그럴까?강지훈이 내뱉은 말, 그리고 소현아 배 속의 아이...소씨 부인을 돌려보낸 후, 규영은 별장 거실로 돌아와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는 주인님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외국에 있는 동안, 사실 주인님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나를?” 어지럽게 흩어졌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도우미들은 처음 보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미경도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 “맞습니다! 현아 아가씨는 병원에서 매일 주사를 맞으셨습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주사 맞는 걸 제일 무서워하십니다. 감기에 걸려 의사가 올 때마다 주인님 품에 숨곤 하셨지요. 현아 아가씨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늘 주인님의 성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현아 아가씨 방에서 주인님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강지훈은 처음으로 옆에 있는 미인을 무시해 버린 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천효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지훈 씨.”규영이 건넨 편지를 받은 뒤, 강지훈은 분홍색 봉투를 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훈 씨,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 당신 없이 사는 거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여기 의사들 매일 나한테 주사를 놔요. 팔이 아파 죽겠다고요! 심지어 머리에도 주사를 놔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의사는 화까지 내면서 주사를 놓는 것도 모자라 밥도 안 줘요. 주사 맞고 나면 팔뚝이 멍투성이가 되는데, 지금 글씨 쓰는 것도 아파요.규영과 미경의 말로는 내 배 속에 아기가 생겼대요. 하지만 이 사실을 강지훈 씨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지훈 씨는 아기를 싫어하기 때문에.흑흑흑... 그럼 나도 아기 안 낳을래요.강지훈 씨, 이 병원 안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집에 가서 아빠랑 엄마 보고 싶어요. 그리고 민아, 소월이...나 언제 데리러 올 거예요!너무 배고파요!규영과 미경은 또 나한테 먹을 것을 아무것도 안 줬어요.강지훈 씨,
“몰라요.”손이준이 짧게 대답했다.강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 멍청이의 일은 더는 미루면 안 된다.강용은 밖으로 나가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하지만 알아보니 가장 번화한 시내로 가려면 100km도 훌쩍 넘는 거리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렌터카 매장에 전화해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차는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한다고 한다.오늘 밤 짐을 정리하고 내일 떠나면 될 것이다.두 남자는 아래층 거실에 남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만 빚어 놓으려고 했건만, 한번 시작하니 한 시간도 훌쩍 넘겨버렸다.서울.강지훈은 소현아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러시아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최고급 호텔부터 기차역,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지하 클럽까지 그의 세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데도 말이다.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다.북경 감옥 전체는 살얼음판을 걷듯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강지훈은 평소 가장 아끼던 여자한테조차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잃고 말았다.“소씨 집안 쪽에선 아직 소식 없어?” 강지훈은 왕좌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부관이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소씨 집안을 며칠 동안 지켜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현아 씨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소현아 씨의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실종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소현아 씨가 돌아와 슬퍼할 테니,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씨 집안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입니다.”규영과 미경이 밖에서 걸어 들어와 보고했다.“주인님, 소씨 집안 사람들이 또 찾아왔습니다.”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돌려보내. 그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지?”“네, 주인님.”그 바보는 임신한 몸으로 대체 어디까지 도망간 걸까?천
강용 역시 장소월이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몰래 항우울제를 복용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씨 집안에 있을 때도, 전연우의 곁을 떠나도...그녀의 병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강용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장소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와 흉터는 이제 모두 옅어졌지만, 마음속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의 손은... 무거운 물건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다른 힘든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그녀는 붓을 쥘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강용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그녀는 가족도 없이 늘 혼자였다...사실 장소월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의,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하디귀한 아가씨였는데...그녀는...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선 안 되는 사람이다.“가끔은 나도 현아처럼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현아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강용... 나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라도 버틸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워.”강용은 너무 마음이 아파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고 온기를 나누어주었다.“아니, 그럴 일 없을 거야. 너한텐 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나 현아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아. 정말이야!”“나는 단지 걔가 너한테 자꾸 들러붙는 게 질투 났을 뿐이야.”“소월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떠나자. 걸어서라도 가지 뭐.”“강용, 나한테 재앙이라고 했던 송시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불행해졌어. 너, 강영수, 인시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