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시윤은 양손으로 턱을 받쳐 들고 말했다.“아저씨, 이게 지금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예요? 동생을 위해 문제집을 빌리러 왔잖아요? 저랑 함께 구경하지 않으면 안 빌려줄 거예요. 지금 당장 기사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겠어요.”“좋을 대로 하세요.”전연우는 언짢은 말투로 말하고는 일어나 가려 했다.당황한 인시윤은 바로 전연우의 옆에 앉아 그의 팔짱을 끼고 가지 못하게 했다.협박이 안 통하자 인시윤은 바로 성질을 죽였다.“아저씨, 반나절만 나랑 놀아줘요. 오늘부터 설인데 나 혼자란 말이에요.”그녀는 전연우의 팔을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제발 부탁이에요! 연우 오빠!”인시윤은 보통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일반적으로 아저씨가 아니면 늙은 남자라고 호칭했다.자기보다 7~8살이나 연상이니 확실히 나이 차이가 컸다...장소월은 강용에게 끌려 한 층 전체에서 음식을 팔고 있는 푸드타운에 도착했다. 하지만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테이블 위에는 버려진 플라스틱 포장 상자가 가득했고, 바닥에는 먹다가 뱉은 뼈가 있었고, 길가에는 들개 몇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공기 중에는 향기로운 음식 향신료 냄새 외에도, 온갖 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도 있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불쾌한 냄새는 바베큐 냄새에 가려졌다.장소월은 뼈다귀를 밟고 고개를 숙인 후, 징그러워서 자신의 발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랐다.“강용, 여기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왜 여기 데리고 왔어?”“공주병!”강용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아가씨,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강용은 그녀를 데리고 푸드타운을 지나 골목길을 들어갔다. 잠시 걸은 후, 점차 인파가 적어졌다. 이곳은 약간 깨끗했고, 붐비는 사람들이 적어 장소월은 다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그들은 열려 있는 검은 나무 페인트 문 앞에 도착했다. 홀 앞은 깨끗했지만, 이 시간에 두 테이블의 손님만 식사하고 있었다.“도착했어!”“밥 먹으러 여기까지 온 거였어?”강용은 눈썹을 치
장소월은 별로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식당은 골목 안에 있어서 발견하기 어려웠다.먹은 지 몇 분 안 되어 다른 손님들은 이미 계산을 마치고 떠났다.이 가게에 그들만 남았다.사장님은 60-70대 어르신이었다. 한가한 틈을 타서 돋보기를 끼고 무언가를 꿰매고 있는 것 같았다. 바늘구멍에 실을 넣지 못해 강용을 찾아왔다.“이것 좀 봐줘요. 눈이 어두워 바늘구멍을 찾지 못하겠네.”강용은 마침 식사를 마치고 휴지 한 장을 뽑아 입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뭐 꿰매시게요? 봐봐요.”“옷인데, 저번에 못에 긁혀서 구멍이 났어요. 꿰매면 더 입을 수 있어요.”“아주머니는 어디 가셨어요?”“개 산책시키러 나갔어요. 한참 후에야 돌아와요.”강용은 사장님의 자리에 앉아 낡은 파란색 옷을 집어 들었다. 힐끗 보아도 몇 년은 입은 듯한 옷이었다.강용이 바느질까지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장소월은 다 먹고 일어나서, 두 손을 카운터에 대고, 강용이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강용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왜? 처음 봐?”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너 바느질도 할 줄 알아? 신기하단 말이야, 강용!”강용은 웃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별 것 아니야. 많이 하다 보면 알게 돼 있어.”‘많이 해봤다고? 강씨 집안 재력 수준이면 낡은 옷을 바로 버리지. 옷을 꿰매어 입지 않을 텐데?’이런 모습의 강용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팔뚝에 문신이 있고, 평소 거들먹거리는 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런 강용이 지금 바느질을 하고 있으니, 장소월은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강용은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놀 때는 누구보다 미쳐있고, 학교에서도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지만, 진지할 때는 바느질까지 하는 남자이다!강용이 꿰맨 소맷자락에는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사장은 연신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역시 우리 강용이야. 너무 대단해요.”“별것 아니에요.”그들이 떠
장소월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많이 산 줄 몰랐고, 우선 손에 들고 있는 것부터 먼저 먹고 나서 다시 사야 했다.그녀는 물건을 살 때도 생각 없이 사곤 했다.인파 속에서 장소월은 뜨거운 눈빛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고, 그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봤나?’그들은 다 구경하지 못하고 시장을 나섰다.눈 깜짝 할 사이에 이미 시간이 늦어졌다.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잇달아 들렸다.장소월은 원래 서둘러 집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 집에 가기를 거부했다.그들은 공원에서 이미 문을 닫은 카페 밖에 앉아서 남은 음식을 먹고 머리 위의 불꽃놀이를 보았다.“새해 복 많이 받아, 강용!”그녀는 고개를 돌려 맞은 편에 앉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현란한 불꽃놀이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장소월의 목소리를 들은 강용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나 가야 해.”“데려다줄게.”장소월은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 택시 타고 가면 돼. 너 빨리 집에 돌아가. 가족들이랑 저녁 먹어야지.”강용에게 설은 해마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가자.”두 사람은 테이블 위의 쓰레기를 치우고 공원을 나섰다.강용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늘 일, 그 자식이 알게 될까 봐 두렵지 않아?”장소월은 덤덤하게 말했다.“영수 말하는 거야? 영수가 안다고 해도, 내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잖아?”“넌 진짜 미련한 거야? 아니면 미련한 척하는 거야? 강가의 본가는 나도 가본 적이 없어.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는 해?”“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영수에게는 목숨을 걸고 보호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강영수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마비된 것도 그 여자 때문이었다.그녀는 강영수가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3년 동안 만났다.당시 강영수의 성격은 지금의 강용과 비슷했다.강영수가 더... 포악했을지도 모른다.그때의 강영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그 여자
강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답은 이미 뻔했다.“내가 강가에 간 이유는 단지 강가의 힘을 빌려서 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을 뿐이야.”강영수가 그녀를 외국에서 데려오는 날이면, 장소월도 강가를 떠나야 한다.하지만 장해진은, 장소월과 강영수의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여 당분간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을 것이다.나중에 장소월이 강가에 시집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장해진은 매정하게 그녀를 버릴 것이다.강용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사실 네 말은 절반만 맞아!”‘영수는 확실히 널 좋아해. 아니면 날 강가에서 내쫓지도 않았겠지.’강용은 고개를 숙이고 웃어 보였다.‘보아하니 오 집사가 그 여자랑 영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네. 그 여자랑 영수는 절대 재결합할 수 없어.’장소월은 강용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말이야?”“무슨 말이긴. 그 자식이 돌아오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조심해. 만약 네가 그 자식을 이용의 도구로 삼은 것을 알게 된다면. 쯧. 됐어, 나 먼저 갈게. 혼자 택시 타고 가.”강용은 돌아서서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개학해서 봐. 소월 아가씨.”강용은 진짜 떠나버렸다.지금 시간에 기사들은 거의 집에 돌아가 설을 쇠고 있어 택시 잡기가 어려웠다.장소월이 정신을 차렸을 때, 밝은 가로등 아래 익숙한 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차 안의 음흉한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저 인간이 왜 여기 있지?’그녀는 피하지 못하고, 전연우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가득했다.장소월은 안전벨트를 잡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전연우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하지만, 장소월은 차 안에 인시윤의 문제집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인시윤이랑 함께 여기 왔던 거야? 날 감시한 게 아니고?’저녁 6시가 지났고,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집에 거의 도착할 때, 전연우가 먼저 입을
장소월은 조롱하듯 말했다.“자기 옆에 앉은 사람이 살인범이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두렵냐고?원래 장소월은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을 듣지 않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전연우가 변명하지 않는 걸 보니 이 일은 사실인 모양이다.살인을 저지른다고 해도, 그는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래도 그 언니랑 1년을 만났는데, 슬프지도 않아? 어떻게 손을 쓸 수 있어? 그 언니는 널 진심으로 좋아하잖아.”“좋아한다고? 지금 질투해?”그의 말투는 담담했다.장소월의 눈은 마치 감정 없는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나청하를 대신해 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 던진 물음이었다.한때 좋아했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묻고 싶었다.그의 마음속에 조금의 후회라도 있을까?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까?장소월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장소월은 깊은숨을 쉬었다.‘됐어, 분명 대답하지 않을 거야. 이 인간의 속내를 읽을 수도 없고.’“너 같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그는 분명 보복을 받을 것이다. 장소월은 전연우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잃고 평생 혼자 살아가기를 바란다.“그래? 날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장소월은 난처해서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남원 별장에 도착하자, 차는 멈추었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전연우는 차를 잠그고 트렁크에서 폭죽을 꺼냈다.집안에 들어서고, 장해진은 불쾌한 눈빛으로 장소월을 보았다.“왜 이제야 와?”장소월은 서둘러 설명했다.“오빠랑 나가서 뭐 좀 사 왔어요.”장해진은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밥 먹자!”가정부는 위층으로 가서 백윤서를 불렀다.밥 먹기 전에 폭죽을 터뜨렸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앉자 장소월은 장해진의 왼쪽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강만옥은 내려오지 않았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순간, 옆에 금속 라이터가 나타났다. 장소월은 놀라서 들고 있던 공명등을 떨어뜨렸고,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두었다.“왜 발걸음 소리도 없어? 여긴 왜 왔어?”“이거 써.”전연우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은 라이터를 그녀에게 건넸다.장소월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에 있는 라이터를 가지려던 순간, 전연우는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당겼고, 자신의 뜨거운 가슴을 그녀의 등에 바짝 붙였다.애매한 자세에 장소월은 몸부림쳤다.“뭐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 봐!”전연우의 커다란 몸집은 가냘픈 소녀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그가 고개를 숙이니 콧김에서 나오는 따뜻한 숨결이 여자의 목덜미 사이로 흘러내렸고, 민감한 땅에 한줄기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아 여자는 짜릿함을 느꼈다.“보라고 해.”전연우는 그녀의 뒤에서 공명등을 집어 들었다.“불 켜려던 거 아니었어? 잡고 있어.”장소월은 몸을 비틀며 말했다.“일단 나 좀 놔줘.”“또 움직이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그는 장소월의 귀밑을 살짝 깨물었다.장소월은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전연우는 탁하고 금속 라이터 뚜껑을 열고 아래 심지에 불을 켰다.뜨거운 열기에 공명등은 부풀기 시작하더니, 충분한 열기에 이르자 공명등은 하늘로 날아올랐다.“소원 안 빌어?”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듣기 좋았다.“빌어. 앞으로 전연우가 제 옆에서 멀리 떨어지게 해주세요.”전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원은 실현될 것 같지 않네.”“이제 나 좀 풀어줄래? 가서 잘 거야.”“소월아... 혹시 오빠한테 암시하고 있는 거야?”장소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이를 악물었다.“그런 추잡한 생각 좀 그만해! 윤서가 보면 어쩌려고?”이 한마디에 전연우는 바로 손을 놓았다.그는 역시나 백윤서를 신경 쓰고 있었다.장소월은 통제에서 벗어난 후 바로 도망쳤다.장소월이 도망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연우는 눈빛이
전연우가 말을 하지 않자 강만옥은 멘탈이 무너졌다.“네 손에 달린 목숨이 몇 개인 줄 알아? 너도 장해진 손에 죽고 싶은 거야? 대체 뭘 망설여? 설마 장소월 때문이야?”강만옥은 쓸쓸하게 웃었다.“하, 그럴 줄 알았어. 전연우, 너 장소월 좋아하지!”전연우의 눈이 차가워졌다.“당신 일 때문에 내 계획을 망칠 수는 없어. 지금은 장가뿐만이 아니야. 장해진이 죽기를 원한다면 먼저 당신 몸에 상처부터 치료한 다음 나랑 다시 얘기해.”그는 돌아서 문을 박차고 떠났다.전연우는 옆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문 앞에서 방 안의 작은 인기척을 들었다.그가 손잡이를 누르고 들어가니 소리는 욕실에서 들려왔다.전연우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몇 분 후, 샤워 소리가 멈추더니, 욕실 문이 열리고, 하얀 목욕 타월을 두른 백윤서가 나왔다.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늘어뜨리고 방금 샤워한 탓에 피부는 붉고, 촉촉히 젖은 눈은 방금 숲에서 걸어 나온 사슴처럼 매혹적이었다.“여기서 뭐 해?”백윤서는 두 손으로 가슴 부위를 감싸고 당황스럽지만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미안해요. 오빠가 아직 아래층에 있는 줄 알았어요. 내 방에 온수가 고장 났는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서 오빠 욕실 좀 빌려 썼어요.”“씻었으니 빨리 돌아가 쉬어.”전연우가 뒤돌아서 나가려고 손을 문손잡이에 얹는 순간, 여자는 달려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오빠, 가지 마요. 이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요?”백윤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혼자 남자의 방에 와서 적극적으로 어필했으니, 이건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는 뜻이었다.“오빠를 좋아해요. 영원히 제 옆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대학에 입학하면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난 더이상 못 기다리겠어요. 더 기다리면 오빠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제발, 날 가져요. 네? 그래야 정말 오빠의 여자가 된 것 같단 말이에요.”전연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자 침대에 올라가는 거 말고는 할 일이 없는 거야? 윤서야
장소월의 머리는 아무렇게나 머리핀으로 틀어 올려져 있고, 귓가에는 머리카락이 나른하게 흩어져있었다. 몸에는 흰색 캐시미어 잠옷 원피스를 입었고 후드에는 두 개의 긴 토끼 귀가 드리워져 있었다.장소월을 바라보는 전연우의 눈빛은 그윽하면서도 깊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든 블랙홀 같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장소월은 물을 연거푸 마시고는 컵을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돌아서자마자 전연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장소월은 그가 또 미친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전연우는 장소월을 바라보면서 귓가에는 강만옥의 말이 맴돌았다.“장해진은 강설을 이렇게 대했어.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야. 네 손에 달린 목숨이 몇 개인 줄 알아? 너도 장해진 손에 죽고 싶은 거야? 대체 뭘 망설여? 설마 장소월 때문이야? 너 소월이를 좋아하지?”‘장소월을 좋아해? 말도 안 돼. 소월이는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도구일 뿐이야.’장소월은 침을 삼키고 그의 곁을 지나 빠르게 뛰다가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장소월은 자신을 보는 전연우의 눈빛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평소 전연우의 눈빛에는 욕망, 화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악이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고 싶은지, 그는 전혀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전연우의 눈빛은 장소월을 두렵게 만들었다.“뭐... 뭐 하려는 거야?”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끌고 순간 1층 화장실로 갔다.장소월은 아버지에게 들킬까 봐 감히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전연우는 그녀를 벽에 밀쳤다.“전연우, 그만해. 나 배 아프단 말이야!”만약 전연우만 괜찮다면 그의 몸에 실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물론 이런 더럽고 저속한 말을 그녀는 직접 내뱉을 수 없었다.전연우가 무슨 행동을 하기도 전에 장소월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조금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빨리 나가! 나 화장실 급해!”그녀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전연우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눈빛에는 경멸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바보 같은 여자... 충고하는데, 당장 내쫓거나 아니면 단체 여행이라도 보내요. 최대한 멀리요. 그 여자가 소월 씨 곁에 있으면, 강지훈이 언젠간 반드시 찾아갈 거예요.”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서철용의 말투에 장소월의 마음도 불안해졌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잖아요. 전 현아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게다가 현아는 임신까지 했는 걸요.”“뭐, 뭐라고요?” 서철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 여자가 어떻게 임신을 할 수가 있어요!”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이미 뱉어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전 강지훈이 나한테 피임약을 달라고 했었어요. 소현아에게 먹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만약 약에 문제가 있어서 제때 피임을 하지 못했고 지금 임신까지 했다면, 아이는 90% 확률로 기형아거나 사산아로 태어날 거예요. 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아이를 지우게 해야 해요.”그 소식을 들은 순간 장소월은 충격에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힘없이 휴대폰이 미끄러 떨어졌다.서철용도 그녀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소현아가 임신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강지훈이 소현아를 러시아에 보낸 건, 뇌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내가 확인해봤는데, 소현아가 맞은 약물은 뇌 속의 어혈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지만,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요. 때문에... 그 아이는 낳으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소현아의 가족 쪽은... 알아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서철용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너무나 청천벽력 같은 잔인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위층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강용은 바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다급히 위층으로 달려갔다. 장소월의 방에서 흘러나온 소리라는 걸 알
강용은 자신의 자리를 뺏기자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 장소월은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내가 할게. 너는 좀 쉬어.” 강용은 장소월이 하던 일을 빼앗았다.장소월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손이준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기에, 흔쾌히 그에게 일을 넘겨주기로 했다. “소금은 조금만 넣어. 현아 짠 거 잘 못 먹어.”“알았어.”이제 한가해진 장소월이 강용에게 물었다.“방 청소해 줄까?”강용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대충 치워주면 돼.”“그래.”강용은 성격이 깔끔한 편이라 방 청소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현아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장소월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깨웠다. 소현아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장소월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의 침구 세트를 본 그녀는 잔뜩 신이 난 듯 장소월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고마워, 소월아.”“됐어. 얼른 쉬어. 밥 다 되면 깨워줄게.”소현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약간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월아, 나 방금 엄청 무서운 꿈 꿨어. 강지훈이 내가 몰래 도망친 걸 알고 엄청 화냈어. 날 잡아서 가둬놓고 다시는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더라고.”“소월아, 나 강지훈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장소월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사실 그녀는 이토록 걱정에 잠겨 있는 소현아의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소현아는 만날 때마다 마냥 즐거워만 보였는데... 아무래도 북경 감옥에 있는 동안 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괜찮아, 현아야. 여긴 강지훈이 없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이 널 붙잡아가는 일은 없을 거야. 부모님이 보고 싶으면, 전화하면 되잖아.”소현아는 걱정스러운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몰래 전화 해봤는데, 강지훈이 우리 집에 있는 것 같았어. 소월아... 나 부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너무 무서워.”“강지훈은 항상 날 괴롭히기만 해.”
월이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양념을 만들던 장소월은 시커멓게 변해버린 밀가루 반죽을 입에 넣고 있는 월이를 발견했다.“월아, 안 돼!”장소월은 재빨리 뛰쳐나가 월이의 입안에 있던 밀가루 반죽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강용, 냉장고에 뭐 먹을 거 있나 봐 봐. 배고픈 것 같으니까 뭐라도 좀 줘야겠어.”강용은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고 냉장고에서 오이 하나와 삶은 감자 하나를 찾아냈다.강용은 감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운 후 휴지로 감싸서 전해줬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투덜거렸을 텐데, 오늘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여기.”장소월은 감자를 건네받아 월이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많이 먹으면 안 돼. 탈 날 수도 있으니까 꼭꼭 씹어 먹어. 조금만 기다리면 밥 먹을 수 있어.”월이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한입 크게 베어 물려고 했지만 그 작은 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입가에 침만 잔뜩 흘리고 말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장소월의 눈에 강용의 얼굴 군데군데 묻어 있는 하얀 밀가루가 들어왔다. 아까 만두피를 밀 때 실수로 묻은 듯했다. 장소월은 손을 뻗었지만 키가 닿지 않았다. “머리 숙여 봐.”강용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머리를 숙였다.하지만 그때, 남자 한 명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이준은 빨래한 옷을 쾅 하고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그 소리에 소파에 누워 쉬고 있던 소현아까지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눈을 떴다가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장소월은 강용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주며 말했다. “됐어.”“오빠, 오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장소월은 강용에게 말했다. “빨래 너는 거 좀 도와줄 수 있어?”강용은 기분 좋게 걸어가며 말했다.“그렇게 하지, 동생.”강용도 장소월이 곧 생리를 시작할
장소월은 월이를 집으로 데려와 의료 상자를 꺼내 바늘로 물집을 터뜨리고 물을 짜냈다. “아파?”월이는 침까지 흘리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파, 엄마... 호호.”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 월이를 보며, 장소월은 머리를 다친 아이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휴지로 아이 입에서 흘러나온 침을 닦아내며 말했다. “우리 월이 정말 용감하구나.”“하지만 다시는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마. 머리카락이 타서 하나도 안 예쁘잖아.” 장소월은 월이가 입고 있는 원피스에서도 불에 타서 생긴 커다란 구멍 하나를 발견했다.“이봐, 여기도 탔네. 벗어봐, 이모가 꿰매줄게.”약을 다 바른 후, 장소월은 월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옷을 입혀주었다. 그러고는 바늘과 실을 가져와 옷을 꿰매기 시작했다.바느질 솜씨도 훌륭한 장소월이었다. 전생에 한가할 때면 수공업을 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옷을 다 꿰매고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손이준에게 또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는 이미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너 정말 사람 이렇게 피곤하게 만들어야겠어? 조금만 먹으라고 했잖아.”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장소월은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눈앞에 뜻밖의 화목한 장면이 펼쳐졌다. 강용이 어깨에 크고 작은 짐을 걸친 채 소현아를 부축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현아야, 무슨 일이야?”강용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병이 나았다고 금세 또 돼지가 되어버렸어. 먹을 것을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발목을 접질렸어. 그건 그렇고, 어제 저녁 우리한테 밥 가져다주기로 했잖아. 왜 안 왔어?”장소월이 대답했다. “너무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잠들었어.”“혹시 저혈당 아니야? 병원에 같이 가볼까?”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돼. 현아는 괜찮은 거야?”강용은 이마를 짚었다. “저 얼굴 좀 봐. 어디 문제 있는 사람처럼 보
장소월은 그릇을 들고 일어서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그릇을 깨끗이 씻었다. “오늘은 빨래도 해야 해서요. 그냥 집에서 기다릴 거예요.”손이준이 짧게 말했다.“마음대로 해요.”부엌을 다 사용한 후, 손이준은 깨끗하게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소월은 위층으로 돌아가 소현아의 방을 정리했다. 소현아에겐 이불 속에 간식을 숨겨두고 밤중에 몰래 먹는 버릇이 있었다. 임신 중인 그녀를 위해 과자 섭취를 금지했지만, 이불을 들춰보니 아직 다 먹지 않은 과자 봉지가 놓여 있었다. 장소월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녀는 침대 시트와 이불, 그리고 베갯잇까지 모두 새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곳은 경제 발전이 더딘 곳이라 세탁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물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장소월은 세숫대야를 들고 공동 세탁실로 향했다. 평소 사람들로 붐비는 그곳이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 수돗물을 틀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아이가 끌어안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월아? 머리카락 왜 이렇게 됐어?”“불에 탔어요.”“뭐라고?”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장소월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 옆에 손이준이 물통을 들고 서 있었다. “이준 오빠? 빨래하러 오신 거예요?”“네.”장소월은 월이의 머리카락에서 불에 그을린 탄 냄새를 맡았다. “월아, 너 머리 왜 탄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나쁜... 나쁜 거 잡으려고... 몰래... 먹었어.”“무슨 뜻이야?”손이준은 물통에 물을 반쯤 채우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쥐가 나타나서 월이의 과자를 먹어치웠어요. 잠시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쥐를 잡겠다고 아궁이에 들어갔더라고요.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탄 거예요.”장소월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 날 뻔했네요. 다른 곳은 안 다쳤어요?”“아파! 엄마... 호호.”월이는 조심하지 않아 뜨
송시아를 처리했으니, 다음은 서철용 차례다.두 번의 삶의 기억을 가진 전연우는 잠시 그를 남겨두는 것에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전화가 끊어졌다.장소월은 마치 물에 빠진 듯, 몸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 그녀는 늘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수십 번 반복했었다. 오늘처럼 깊이 잠든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평소에는 작은 소리만 들려도 깨어나기가 일쑤였는데...사실 전연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우연히 옷장 속에 숨겨둔 약병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 약이 우울증 치료제라는 것을 전연우가 모를 리 없었다.과거 장소월이 죽은 후, 전연우는 그녀가 쓰던 옷방에서 엄청난 양의 이런 약을 발견했었다.장소월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이 묘하게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시간을 확인하니, 겨우 아침 9시였다.옷을 갈아입던 중,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두 개의 약병을 발견했다. 혹시 어젯밤 실수로 수면제를 먹은 걸까? 하지만 옷장에서 약을 꺼냈던 기억은 꽤나 선명했다.어젯밤 어떻게 기절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방에서 나온 순간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지?’음식 냄새를 맡은 장소월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손이준이였다.“이준 오빠? 왜 여기에...?”손이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프라이팬 속 음식을 저으며 말했다. “어젯밤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쓰러지더라고요. 혹시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예요?”장소월이 하려던 질문을 그가 쏟아내자 이상하게 상황이 역전된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별일 아니에요. 저혈당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그럼... 이건...”손이준이 말했다.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가스가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여기 주방을 빌렸어요. 그 보답으로 점심은 내가 만들어줄게요.”장소월은 기억이 나지 않아 미간을
그녀는 분명 아직 꽃다운 젊은 나이다. 하지만 스스로 쌓아 놓은 마음의 문턱을 좀처럼 넘지 못하고 있다.장소월은 약병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몇 알을 쏟았다. 살펴보니 약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보는 수밖에 없다.“뭘 먹고 있는 거예요?”남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요리 도구를 든 채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왠지 아까보다 얼굴빛이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장소월은 재빨리 약을 삼키고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고질병이 도져서 진통제 좀 먹었어요. 선... 아니, 오빠...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손이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소금이 없어서요.”그제야 장소월은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사 오려고 했는데 깜빡 잊어버렸어요.”“지금 사 올게요.”몇 걸음 내디뎠을 때, 약을 먹어서인지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다.장소월은 비틀거리며 벽을 붙잡았다. 순간 손이준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몇 분 뒤,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손이준으로 위장한 전연우는 쓰러지는 장소월을 품에 안았다.더 이상 차갑지도, 냉담하지도 않은 전연우의 눈빛이었다. 그는 가면을 내려놓고 예전 같은 탐욕스럽고 강렬한 눈빛으로 품 안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소월아, 내 아내...”“정말... 보고 싶었어!”그 한마디에 장소월은 억지로 눈을 떴지만, 그저 단 한 순간이었을 뿐 곧바로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전연우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팔을 괴고 엎드려 그녀를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보스, 식사는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가져다드릴까요?”전연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직이 말했다. “병원에 있는 놈들에게 내일 다시 오라고 전해. 오늘
장소월이 장을 보고 돌아와 보니 거실은 손이준의 손에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이러실 필요 없어요. 손님으로 오셨잖아요.”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장소월은 부엌으로 가서 물을 끓여 차를 우려냈다.“선생님, 차 드세요.”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손이준은 손에 들고 있던 먼지떨이를 내려놓고 말없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어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부엌에 가서 장소월이 뭘 사 왔는지 살펴보았다.“왜 그러세요?”손이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아서요. 쌀 씻어 놔요. 물은 손가락 두 마디 높이로 붓고요.”장소월이 난처한 듯 만류했다.“이... 이러시면 안 되죠. 그냥 제가 할게요.”손이준은 냉정한 목소리로 정곡을 찌르며 말했다. “요리 나보다 잘해요?”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선생님.”손이준은 고개를 숙여 채소를 다듬으며 말했다. “호칭이 너무 듣기 거북하네요. 그냥 이준이라고 이름을 부르던가, 아니면 오빠라고 불러요.”장소월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뭇거렸다.“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것 같으니... 그럼... 이준 오빠라고 부를까요?”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손이준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마음대로 해요.”손이준은 누구에게나 차갑고 냉담하게 대하며 거리감을 유지하는 감정 없는 로봇 같은 사람인 듯했지만, 또 그렇게만 보기도 어려웠다.솔직히 오빠라는 호칭은 너무 친밀한 느낌이라 그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장소월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정말 그 사람이 아닌 건가?“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그의 목소리에 장소월은 바로 고개를 들고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부탁드릴게요.”장소월은 위층 방으로 올라가 닫혀 있는 옷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나갈 때 분명 문이 열려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나한테 하는 것처럼 똑같이 잘해줘... 어린아이 챙겨주는 것처럼 해도 돼, 응?”세 사람의 관계는 확실히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평소 장소월은 소현아를 좀 더 챙기려고 노력했었다.하지만 강용은 워낙 솔직한 성격이라 장소월 앞에서는 소현아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뒤돌아서면 감히 3미터 안으로 접근하지도 못하게 했다. 소현아는 그의 차가운 눈빛만 봐도 두려움에 떨곤 했었다.소현아가 강용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걸 알지만, 장소월은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저 강용이 소현아를 어린아이 대하듯 조금만 더 잘해주길 바랄 뿐이었다.“현아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일 뿐이야. 강용, 현아는... 우리 친구잖아.”강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앞으로는... 좀 더 잘해주도록 할게.”“그러니까 나 밀어내지 마.”장소월이 말했다.“꼭 약속 지켜줘.”“병원에 가서 현아 좀 보살펴줘. 강용, 내가 한 말 잊지 말고.”장소월이 핏자국을 지우려 위층에 올라가 보니 이미 누군가가 깨끗하게 치워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바닥은 물기 때문에 축축해져 있었다.장소월은 방에 가서 마른걸레를 가져와 바닥에 엎드려 물기를 닦아냈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피비린내가 사라지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장소월은 방 안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었다. 그러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계단을 내려갔다.“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손이준은 빨간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바구니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가 과일까지 들고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까 많이 놀라셨죠?”“앉으세요.” 장소월이 소파에 앉자, 손이준도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장소월이 대답했다.“조금요. 그래도 아기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선생님 따님은요?”“자고 있습니다.”길 건너편 국수 가게에서 별이는 재갈처럼 물린 고무젖꼭지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칭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