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는 차를 몰고 병원에 도착했고, 접수를 마치고 장소월을 응급실에 데려갔다.새 벽 두세 시가 되어서야 안정을 찾았다.전연우는 그녀를 데려다주고 전화를 받으러 나간 이후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간호사가 그녀 손에 있는 주삿바늘을 뽑아주고 당부했다.“앞으로 절대 함부로 먹지 마세요. 환자분 위장은 절대 자극적인 음식을 피해야 해요. 특히 매운 음식은 절대 드시면 안 돼요.”“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병실에 전연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장소월이 병실을 나서자, 맞은편 병실의 여자는 화장실에서 나와 병실 문 앞에 멈추어 손잡이를 잡더니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장소월은 빠르게 달려가 그녀가 땅바닥에 쓰러지려던 순간 부축했다.“아주머니, 괜찮으세요?”그녀는 이목구비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지녔으며, 몸에서 은은한 재스민 향이 나지만, 몸이 너무 야위어 병약한 미인처럼 보였다. 그녀가 정신이 혼미해서 눈을 뜨자 장소월은 얼른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장소월은 왠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병실에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눕힌 다음 장소월은 간호사 벨을 눌렀다. 간호사는 재빨리 달려와 여자의 상태를 확인했다.그녀에게 링거를 주고는 말했다.“저혈당이에요. 큰 문제는 아니에요.”“환자분... 오늘 저녁 또 식사를 안 하셨어요?”심유는 두 번 기침하고 말했다.“괜찮아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간호사: “매번 이러시면 안 돼요. 조금이라도 드셔야죠. 죽을 가져오라고 할게요.”심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수고해주세요.”“아닙니다.”간호사가 떠나고, 심유의 시선은 다시 장소월에게 향했다.“고마워요, 아가씨 이름이 뭐죠?”“저는 장소월이에요. 아주머니, 괜찮으신 거죠? 전 이만 가볼게요.”“고마워요. 소월 씨.”장소월은 빙긋 웃었다.“별것 아니에요.”심유는 따뜻한 눈빛으로 장소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역시 좋은 아가씨야, 우
거짓말!전연우는 퇴원 절차를 마쳤다.장소월은 차에 올라탔고, 돌아가는 길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보통 이 시간이라면 그녀는 졸려서 죽을 지경이지만, 오늘은 정신이 또렷했다.‘방금 이 인간이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화낸 거야? 왜?’장소월은 생각하다가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얼마나 오래 잤을까, 갑자기 목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장소월은 숨이 좀 막혀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눈을 떠보니 검고 짙은 그의 머리카락이 보였고, 몸에서는 이상한 전류가 흘렀다.“전연우, 그만해!”방금 자고 일어났더니 목소리가 조금 잠겨 더 매혹적으로 들렸다.“나 방금 병원에서 돌아왔어. 작작 해!”장소월이 차창 밖을 내다보니 놀랍게도 집 차고였다. 옷이 걷어 올려지고,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자극하여 그녀는 약간 추웠다.장소월은 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고 그의 짐승 같은 욕망을 멈추려 했다. 남자가 거친 손으로 장소월의 옷 아래를 힘껏 주무르자 장소월의 입에서는 수치스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정말 미칠 지경이다!장소월은 이성을 잃지 않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한겨울이지만 그는 옷을 많이 입지 않아서 어깨는 딱딱하기만 했다.복수하려는 심리인지, 남자의 손은 점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녀의 얇은 곳에 닿았다. 장소월은 즉시 입을 떼고 얼굴에는 부끄러움과 짜증이 가득했다.“나 좀 그만 괴롭혀!”전연우는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는, 정욕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람 무는 거 좋아하나 봐. 지금 내 손도 너에게 물렸어.”“이런 변태 양아치!”장소월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의 뺨을 때렸다.전연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장소월은 바로 겁에 질렸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굴욕적인 눈물이 가득 고였고, 목소리까지 떨렸다.“늘 나만 괴롭혀... 그것도 집 앞에서...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손을 눈에 얹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장소월의 이런 모습을 본 남자는 금방 흥미를 잃었고, 손을 빼더니 꿀 묻은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남자가 결국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고 운전석에 자리를 고쳐앉았다.“꺼져!”장소월은 단정히 옷을 입은 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병원에서 받아온 약도 차에 남겨둔 채 말이다.거실 청소를 하고 있던 오 아주머니의 눈에 다급히 집으로 들어오는 장소월의 모습이 들어왔다. 운 것 같았다.“소월 아가씨, 무슨 일 있었어요?”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 난간에 몸을 의지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날 밤이 지나고, 설날 당일, 심지어 그 후 연속 4, 5일이 지나도록 전연우를 만나지 않았다.전연우와 장소월이 장씨 저택을 떠나는 그 날, 장소월은 한창 집에 인사 온 친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녀는 아버지가 그들을 배웅하라고 할까 봐 두려워 못 본 척 황급히 주방에 숨었다.그렇게 그녀는 평온한 설날 연휴를 보냈다.올해 장해진이 직접 주최한 회사 연말 파티에서 그녀는 남천 그룹의 영애로서 아버지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파티장에서 장소월은 단연 가장 돋보이는 미모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곳엔 남천 그룹의 협력 회사 대표들도 여러 명 참석했다. 회사 연말 파티라는 명목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의 또 다른 목적은 바로 장소월에게 남편감을 선택해주는 것이었다. 만약 강씨 가문과의 혼사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남천 그룹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협력 회사 가문과 혼약을 맺는 것도 꽤나 괜찮은 길일 것이다.강씨 가문의 규모는 장씨 가문의 열 배를 훨씬 뛰어넘는다. 때문에 장씨 가문에게 있어 강영수는 확실히 오르기 힘든 나무다.장소월의 자태에 매혹되지 않는 남자는 없다. 심지어 장해진과 비슷한 지극한 나이의 큰아버지 벌 되는 사람들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장소월은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여러 명의 명문 가문 도련님들과 연락처를 교환했고 파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장소월이 술 냄새가 진동하는 차에 올라탔다. 어둡게 굳은 장해진의
“다른 용건 있어? 나 지금 밥 먹는 중이라 없으면 이만 끊을게.”“그래? 강영수 씨랑 같이 있는 거야?”장소월이 강영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녀를 바라보던 강영수와 눈이 마주쳤다.“응.”“소월아, 나 연우 오빠랑 사귀기로 했어!”“그래. 축하해!”장소월의 덤덤한 목소리에선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우릴 축하해 줄 거지?”“응.”“고마워, 소월아!”드디어 백윤서와 결혼하고 싶었던 꿈을 이룬 건가?장소월은 이유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이제 보니 전연우는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가 손에 쥔 것들을 모두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연 백윤서 단 한 사람뿐이다.전연우는 충분히 인시윤을 아내로 맞이하여 인씨 집안을 등에 업고 자신만의 상업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아마 강씨 집안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또한 인씨 집안이 버티고 있으니 더이상 온몸에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윤서를 선택했다. 이는 전연우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처음부터 알았어야 했다.사실 장소월은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었을 때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챘었다.그녀는 이번 생에선 전연우와 백윤서가 순조롭게 사랑을 이어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전생에서의 백윤서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장소월은 당시 아버지의 반응을 떠올리며 말했다.“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거 아버지가 아셔. 많이 화나신 것 같아. 조심해.”“걱정하지 마. 연우 오빠가 날 보호해 줄 거야.”보호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장소월의 머릿속에 백윤서의 얼굴에 피어난 환희와 행복감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전연우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자리로 돌아왔다.강영수가 물었다.“빨리 집에 오라고 하셔?”장소월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아니. 윤서 언니야.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공부 분위기는 한껏 더 고조되어 개학 첫날부터 시험을 봤다.시험을 끝마친 뒤 이른 시간인 3시,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제운 고등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살고 있어 학교 기숙사에 머무르는 학생은 몇 명 되지 않았다.지방에서 온 학생들까지도 학교 외부에서 셋방을 맡는 것을 선택했다.장소월이 물건을 정리하고 교실을 나서려고 할 때 고건우가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다.사무실 안.“고 선생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잠깐 기다려.”고건우가 서랍을 뒤져 가장 밑에 깔려있던 시험지를 꺼냈다.“장소월 학생, 올림피아드 팀에 아직 관심 있어? 다음 달에 시합이 있어서 특별 티오를 신청할 수 있거든. 시합에 참가하고 싶다면 내가 널 시험장에 들여보낼 수 있어.”“모든 학교를 통틀어 이번 특별 티오는 단 한 명뿐이야. 넌 성적도 좋고 머리도 좋잖아. 너같이 훌륭한 학생이 참가하지 못한다면 선생님은 밤에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아.”장소월이 말했다.“만약 제가 거기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다면 서울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가요?”“당연하지!”그녀가 동의하자 고건우는 흥분하며 의자를 그녀의 앞으로 끌고 가 앉았다.“내 말 잘 들어! 정상적으로 실력 발휘만 한다면 넌 모든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학금도 받을 수 있어... 또한 1년 동안의 해외 교환생 자격도 가질 수 있어. 만약 계속하여 해외에서 발전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지금 조금 힘든 건 참아내면 돼... 대학교에 들어가면 하루에 수업이 4개 정도밖에 없으니까 많이 편해 질 거야. 하고 싶은 일들 모두 할 수 있어!”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뭘 해야 하나요?”“특별반에 들어가기만 하면 돼. 이 특별반은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꾸려진 거야. 기간은 올림피아드 시합 이틀 전까지야. 그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학생들 중에서 1등만 하면 돼. 네 실력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네.”장소월은 고건우의 사무실에서
강용이 손에 쥐고 있던 꼬치로 접시를 툭툭 내리쳤다.“말 돌리지 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빠가 위가 불편하다고 해서 같이 병원에 간 거야.”장소월은 거짓말을 할 때 항상 고개를 숙이고 상대의 눈을 피한다.그것을 모를 리 없는 강용은 단번에 이유를 추측해낼 수 있었다.야시장에서 그렇게 많이 먹고 저녁에 병원에 갔으니, 아마 위병이 났을 것이다.강용이 사장님을 향해 소리쳤다.“남은 건 취소할게요.”“왜 그래! 나 아직 배도 안 불렀단 말이야!”“다른 맛있는 거 사줄게.”“그럼 나한테 좀 남겨줘야 해!”강용은 한 손 가득 들고 도망쳐버렸다. 장소월에게는 먹다 남긴 소시지 반쪽만 남기고 말이다.사장님이 그들이 음식값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칠까 봐 다급히 달려왔다.“아가씨, 아직 계산 안 했어요!”“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얼마죠?”사장님이 말했다.“5천 원이에요.”장소월은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한 뒤 강용을 따라갔다.강용이 그녀를 기다리는 듯 속도를 늦추었다. 평소 이곳엔 많은 학생들이 와 음식을 즐긴다. 강용과 장소월이 함께 꼬치구이를 먹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자연히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고 생각했다.“저 둘 사귀는 거 아니야?”“그런 것 같아. 저번 학기에 강용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장소월을 만나러 1반에 갔잖아.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함께 도서관에 갔고.”“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아.”“하지만 우리 아빠 말로는 장씨 집안과 강씨 집안을 이어준 사람이 바로 강한 그룹의 후계자라던데? 당시 장소월이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고 잠깐 나오지 못하다가 다시 등교하던 날 함께 온 사람이 바로 그 강한 그룹 후계자였잖아.”“정말이야? 장소월 진짜 대단하네! 서울에서 제일가는 명문가 집안을 손에 넣고 주무르고 있잖아!”강용은 그녀를 데리고 환경이 비교적 좋은 생선 요리 가게에 갔다. 안엔 거의 모든 종류의 생선이 있었고 요리 방식도 다양했다.다 주문하고 나니 5만 원 정도 되는 가격이었고 강용이 돈을
식사를 마치고 나니 4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마침 강씨 집안의 운전기사가 장소월을 데리러 학교에 도착했다. 그녀가 차에 앉아 집으로 돌아갈 때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강영수가 보내온 문자였다.「최근 기온이 떨어져서 추우니까 옷 많이 껴입고 다녀. 저녁에 오 집사한테 두꺼운 이불로 바꿔주라고 할까?」장소월은 문자를 보고는 곧바로 답장했다.「괜찮아. 아직은 별로 안 추워.」강영수는 더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장소월은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나 학교 끝났어. 먼저 집에 갈게.」「오늘 왜 이렇게 일찍 끝난 거야? 운전기사한테 말해뒀어.」「그래. 새 교과서를 받고 시험 하나 보고 나서 끝났어. 조금 전엔 강용을 만나 밥 먹었어.」강영수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화면을 보다가 답장했다.「알았어. 난 회의하러 들어가야 해. 저녁에 봐.」「그래.」장소월은 곧바로 강씨 저택으로 갔다. 흥취반 수업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끝마쳤다.시간을 아껴 공부에 투자하기 위함이었다.강씨 저택.오부연이 마당에서 새로 온 도우미들에게 주의 사항을 일러주고 있었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자 십여 명의 도우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소월 아가씨.”장씨 저택에선 이런 광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장씨 저택은 별로 크지 않아 도우미가 4명 밖에 없었으니 강씨 저택과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장소월은 긴장되는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녀의 불편함을 눈치챈 오부연이 말했다.“다들 일하러 가세요.”“네.”도우미들이 자리를 떠난 뒤 오부연이 장소월에게 다가갔다.“아가씨, 평소보다 3시간 일찍 집에 오셨네요. 간식 준비해 드릴까요?”“아니에요. 이미 먹어서 배가 별로 안 고파요. 집사님 전 공부를 해야 해서 바로 방에 들어갈게요.”오부연이 공손히 웃으며 말했다.“그래요.”장소월은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렸다.“참, 집에 농어 있어요?”“아가씨, 농어를 드시고 싶으세요?”“저녁에 제가 농어 요리를 할게요.
“영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저도 몰라요.”장소월은 도우미로부터 답을 듣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진봉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진봉이 전화를 받았다.“소월 아가씨?”“아직도 야근하고 있는 거예요?”진봉은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있는 남자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대표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시라 늦은 시간에 퇴근하실 거예요. 아가씨는 내일 일찍 학교에 가셔야 하니 오늘 밤엔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진봉의 목소리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또한 그녀는 핸드폰 너머로 누군가의 울음소리도 들었다....저녁 열한 시.“소월 아가씨, 기다리지 마세요. 도련님께서 하루 정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에요. 늦은 시간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몸이 망가져요.”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문제를 풀며 말했다.“괜찮아요. 30분만 더 기다릴게요. 먼저 주무세요.”마지막 도우미가 방에 돌아가려던 순간, 현관에 서 있는 검소한 옷차림의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서서 집안에 앉아있는 장소월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도우미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사모님!”“영수가 데려온 아가씨가 바로 저 아이야?”“네.”“지금 뭐 하고 있어?”“도련님이 아직 안 들어오셔서 기다리고 있어요.”“알았어. 이만 가봐.”“네. 사모님.”장소월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노인 한 명이 흙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고 있었다.장소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깥엔 희미한 가로등만 길을 밝히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한 번도 이 노부인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12시가 거의 되어가는 시간에 불쑥 나타난 사람이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최근 보았던 공포 영화가 떠올랐다.‘시골 귀신’“할머니...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으셨어요? 길을 잃은 거예요?”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본 순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가씨, 날 귀신
과연 정말 그럴까?강지훈이 내뱉은 말, 그리고 소현아 배 속의 아이...소씨 부인을 돌려보낸 후, 규영은 별장 거실로 돌아와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는 주인님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외국에 있는 동안, 사실 주인님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나를?” 어지럽게 흩어졌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도우미들은 처음 보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미경도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 “맞습니다! 현아 아가씨는 병원에서 매일 주사를 맞으셨습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주사 맞는 걸 제일 무서워하십니다. 감기에 걸려 의사가 올 때마다 주인님 품에 숨곤 하셨지요. 현아 아가씨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늘 주인님의 성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현아 아가씨 방에서 주인님에게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강지훈은 처음으로 옆에 있는 미인을 무시해 버린 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천효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지훈 씨.”규영이 건넨 편지를 받은 뒤, 강지훈은 분홍색 봉투를 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훈 씨, 내가 잘못했어요. 사실 당신 없이 사는 거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여기 의사들 매일 나한테 주사를 놔요. 팔이 아파 죽겠다고요! 심지어 머리에도 주사를 놔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의사는 화까지 내면서 주사를 놓는 것도 모자라 밥도 안 줘요. 주사 맞고 나면 팔뚝이 멍투성이가 되는데, 지금 글씨 쓰는 것도 아파요.규영과 미경의 말로는 내 배 속에 아기가 생겼대요. 하지만 이 사실을 강지훈 씨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지훈 씨는 아기를 싫어하기 때문에.흑흑흑... 그럼 나도 아기 안 낳을래요.강지훈 씨, 이 병원 안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집에 가서 아빠랑 엄마 보고 싶어요. 그리고 민아, 소월이...나 언제 데리러 올 거예요!너무 배고파요!규영과 미경은 또 나한테 먹을 것을 아무것도 안 줬어요.강지훈 씨,
“몰라요.”손이준이 짧게 대답했다.강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그 멍청이의 일은 더는 미루면 안 된다.강용은 밖으로 나가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하지만 알아보니 가장 번화한 시내로 가려면 100km도 훌쩍 넘는 거리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렌터카 매장에 전화해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차는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한다고 한다.오늘 밤 짐을 정리하고 내일 떠나면 될 것이다.두 남자는 아래층 거실에 남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만 빚어 놓으려고 했건만, 한번 시작하니 한 시간도 훌쩍 넘겨버렸다.서울.강지훈은 소현아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러시아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최고급 호텔부터 기차역,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지하 클럽까지 그의 세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데도 말이다.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다.북경 감옥 전체는 살얼음판을 걷듯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강지훈은 평소 가장 아끼던 여자한테조차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잃고 말았다.“소씨 집안 쪽에선 아직 소식 없어?” 강지훈은 왕좌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부관이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소씨 집안을 며칠 동안 지켜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현아 씨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소현아 씨의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실종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소현아 씨가 돌아와 슬퍼할 테니,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씨 집안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입니다.”규영과 미경이 밖에서 걸어 들어와 보고했다.“주인님, 소씨 집안 사람들이 또 찾아왔습니다.”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돌려보내. 그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지?”“네, 주인님.”그 바보는 임신한 몸으로 대체 어디까지 도망간 걸까?천
강용 역시 장소월이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몰래 항우울제를 복용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씨 집안에 있을 때도, 전연우의 곁을 떠나도...그녀의 병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강용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장소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 왔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와 흉터는 이제 모두 옅어졌지만, 마음속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의 손은... 무거운 물건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다른 힘든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다.그녀는 붓을 쥘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림은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강용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그녀는 가족도 없이 늘 혼자였다...사실 장소월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의,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하디귀한 아가씨였는데...그녀는... 이렇게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선 안 되는 사람이다.“가끔은 나도 현아처럼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현아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강용... 나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라도 버틸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워.”강용은 너무 마음이 아파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고 온기를 나누어주었다.“아니, 그럴 일 없을 거야. 너한텐 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나 현아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아. 정말이야!”“나는 단지 걔가 너한테 자꾸 들러붙는 게 질투 났을 뿐이야.”“소월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떠나자. 걸어서라도 가지 뭐.”“강용, 나한테 재앙이라고 했던 송시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불행해졌어. 너, 강영수, 인시윤,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여자... 충고하는데, 당장 내쫓거나 아니면 단체 여행이라도 보내요. 최대한 멀리요. 그 여자가 소월 씨 곁에 있으면, 강지훈이 언젠간 반드시 찾아갈 거예요.”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서철용의 말투에 장소월의 마음도 불안해졌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잖아요. 전 현아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게다가 현아는 임신까지 했는 걸요.”“뭐, 뭐라고요?” 서철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 여자가 어떻게 임신을 할 수가 있어요!”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이미 뱉어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전 강지훈이 나한테 피임약을 달라고 했었어요. 소현아에게 먹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만약 약에 문제가 있어서 제때 피임을 하지 못했고 지금 임신까지 했다면, 아이는 90% 확률로 기형아거나 사산아로 태어날 거예요. 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아이를 지우게 해야 해요.”그 소식을 들은 순간 장소월은 충격에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힘없이 휴대폰이 미끄러 떨어졌다.서철용도 그녀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소현아가 임신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강지훈이 소현아를 러시아에 보낸 건, 뇌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내가 확인해봤는데, 소현아가 맞은 약물은 뇌 속의 어혈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지만,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요. 때문에... 그 아이는 낳으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소현아의 가족 쪽은... 알아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서철용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너무나 청천벽력 같은 잔인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위층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강용은 바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다급히 위층으로 달려갔다. 장소월의 방에서 흘러나온 소리라는 걸 알
강용은 자신의 자리를 뺏기자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 장소월은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내가 할게. 너는 좀 쉬어.” 강용은 장소월이 하던 일을 빼앗았다.장소월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손이준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기에, 흔쾌히 그에게 일을 넘겨주기로 했다. “소금은 조금만 넣어. 현아 짠 거 잘 못 먹어.”“알았어.”이제 한가해진 장소월이 강용에게 물었다.“방 청소해 줄까?”강용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대충 치워주면 돼.”“그래.”강용은 성격이 깔끔한 편이라 방 청소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현아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장소월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깨웠다. 소현아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장소월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의 침구 세트를 본 그녀는 잔뜩 신이 난 듯 장소월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고마워, 소월아.”“됐어. 얼른 쉬어. 밥 다 되면 깨워줄게.”소현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약간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월아, 나 방금 엄청 무서운 꿈 꿨어. 강지훈이 내가 몰래 도망친 걸 알고 엄청 화냈어. 날 잡아서 가둬놓고 다시는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더라고.”“소월아, 나 강지훈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장소월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사실 그녀는 이토록 걱정에 잠겨 있는 소현아의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소현아는 만날 때마다 마냥 즐거워만 보였는데... 아무래도 북경 감옥에 있는 동안 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괜찮아, 현아야. 여긴 강지훈이 없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이 널 붙잡아가는 일은 없을 거야. 부모님이 보고 싶으면, 전화하면 되잖아.”소현아는 걱정스러운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몰래 전화 해봤는데, 강지훈이 우리 집에 있는 것 같았어. 소월아... 나 부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너무 무서워.”“강지훈은 항상 날 괴롭히기만 해.”
월이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양념을 만들던 장소월은 시커멓게 변해버린 밀가루 반죽을 입에 넣고 있는 월이를 발견했다.“월아, 안 돼!”장소월은 재빨리 뛰쳐나가 월이의 입안에 있던 밀가루 반죽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강용, 냉장고에 뭐 먹을 거 있나 봐 봐. 배고픈 것 같으니까 뭐라도 좀 줘야겠어.”강용은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고 냉장고에서 오이 하나와 삶은 감자 하나를 찾아냈다.강용은 감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운 후 휴지로 감싸서 전해줬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투덜거렸을 텐데, 오늘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여기.”장소월은 감자를 건네받아 월이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많이 먹으면 안 돼. 탈 날 수도 있으니까 꼭꼭 씹어 먹어. 조금만 기다리면 밥 먹을 수 있어.”월이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한입 크게 베어 물려고 했지만 그 작은 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입가에 침만 잔뜩 흘리고 말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장소월의 눈에 강용의 얼굴 군데군데 묻어 있는 하얀 밀가루가 들어왔다. 아까 만두피를 밀 때 실수로 묻은 듯했다. 장소월은 손을 뻗었지만 키가 닿지 않았다. “머리 숙여 봐.”강용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머리를 숙였다.하지만 그때, 남자 한 명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이준은 빨래한 옷을 쾅 하고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그 소리에 소파에 누워 쉬고 있던 소현아까지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눈을 떴다가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장소월은 강용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주며 말했다. “됐어.”“오빠, 오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장소월은 강용에게 말했다. “빨래 너는 거 좀 도와줄 수 있어?”강용은 기분 좋게 걸어가며 말했다.“그렇게 하지, 동생.”강용도 장소월이 곧 생리를 시작할
장소월은 월이를 집으로 데려와 의료 상자를 꺼내 바늘로 물집을 터뜨리고 물을 짜냈다. “아파?”월이는 침까지 흘리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파, 엄마... 호호.”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 월이를 보며, 장소월은 머리를 다친 아이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휴지로 아이 입에서 흘러나온 침을 닦아내며 말했다. “우리 월이 정말 용감하구나.”“하지만 다시는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마. 머리카락이 타서 하나도 안 예쁘잖아.” 장소월은 월이가 입고 있는 원피스에서도 불에 타서 생긴 커다란 구멍 하나를 발견했다.“이봐, 여기도 탔네. 벗어봐, 이모가 꿰매줄게.”약을 다 바른 후, 장소월은 월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옷을 입혀주었다. 그러고는 바늘과 실을 가져와 옷을 꿰매기 시작했다.바느질 솜씨도 훌륭한 장소월이었다. 전생에 한가할 때면 수공업을 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옷을 다 꿰매고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손이준에게 또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는 이미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너 정말 사람 이렇게 피곤하게 만들어야겠어? 조금만 먹으라고 했잖아.”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장소월은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눈앞에 뜻밖의 화목한 장면이 펼쳐졌다. 강용이 어깨에 크고 작은 짐을 걸친 채 소현아를 부축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현아야, 무슨 일이야?”강용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병이 나았다고 금세 또 돼지가 되어버렸어. 먹을 것을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발목을 접질렸어. 그건 그렇고, 어제 저녁 우리한테 밥 가져다주기로 했잖아. 왜 안 왔어?”장소월이 대답했다. “너무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잠들었어.”“혹시 저혈당 아니야? 병원에 같이 가볼까?”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돼. 현아는 괜찮은 거야?”강용은 이마를 짚었다. “저 얼굴 좀 봐. 어디 문제 있는 사람처럼 보
장소월은 그릇을 들고 일어서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그릇을 깨끗이 씻었다. “오늘은 빨래도 해야 해서요. 그냥 집에서 기다릴 거예요.”손이준이 짧게 말했다.“마음대로 해요.”부엌을 다 사용한 후, 손이준은 깨끗하게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소월은 위층으로 돌아가 소현아의 방을 정리했다. 소현아에겐 이불 속에 간식을 숨겨두고 밤중에 몰래 먹는 버릇이 있었다. 임신 중인 그녀를 위해 과자 섭취를 금지했지만, 이불을 들춰보니 아직 다 먹지 않은 과자 봉지가 놓여 있었다. 장소월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녀는 침대 시트와 이불, 그리고 베갯잇까지 모두 새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곳은 경제 발전이 더딘 곳이라 세탁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물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장소월은 세숫대야를 들고 공동 세탁실로 향했다. 평소 사람들로 붐비는 그곳이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 수돗물을 틀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아이가 끌어안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월아? 머리카락 왜 이렇게 됐어?”“불에 탔어요.”“뭐라고?”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장소월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 옆에 손이준이 물통을 들고 서 있었다. “이준 오빠? 빨래하러 오신 거예요?”“네.”장소월은 월이의 머리카락에서 불에 그을린 탄 냄새를 맡았다. “월아, 너 머리 왜 탄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나쁜... 나쁜 거 잡으려고... 몰래... 먹었어.”“무슨 뜻이야?”손이준은 물통에 물을 반쯤 채우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쥐가 나타나서 월이의 과자를 먹어치웠어요. 잠시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쥐를 잡겠다고 아궁이에 들어갔더라고요.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탄 거예요.”장소월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 날 뻔했네요. 다른 곳은 안 다쳤어요?”“아파! 엄마... 호호.”월이는 조심하지 않아 뜨
송시아를 처리했으니, 다음은 서철용 차례다.두 번의 삶의 기억을 가진 전연우는 잠시 그를 남겨두는 것에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전화가 끊어졌다.장소월은 마치 물에 빠진 듯, 몸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 그녀는 늘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수십 번 반복했었다. 오늘처럼 깊이 잠든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평소에는 작은 소리만 들려도 깨어나기가 일쑤였는데...사실 전연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우연히 옷장 속에 숨겨둔 약병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 약이 우울증 치료제라는 것을 전연우가 모를 리 없었다.과거 장소월이 죽은 후, 전연우는 그녀가 쓰던 옷방에서 엄청난 양의 이런 약을 발견했었다.장소월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이 묘하게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시간을 확인하니, 겨우 아침 9시였다.옷을 갈아입던 중,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두 개의 약병을 발견했다. 혹시 어젯밤 실수로 수면제를 먹은 걸까? 하지만 옷장에서 약을 꺼냈던 기억은 꽤나 선명했다.어젯밤 어떻게 기절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방에서 나온 순간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지?’음식 냄새를 맡은 장소월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손이준이였다.“이준 오빠? 왜 여기에...?”손이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프라이팬 속 음식을 저으며 말했다. “어젯밤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쓰러지더라고요. 혹시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예요?”장소월이 하려던 질문을 그가 쏟아내자 이상하게 상황이 역전된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별일 아니에요. 저혈당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그럼... 이건...”손이준이 말했다.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가스가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여기 주방을 빌렸어요. 그 보답으로 점심은 내가 만들어줄게요.”장소월은 기억이 나지 않아 미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