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가 떠나갔을 때, 바닥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크고 작은 값비싼 물건들 모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기성은은 전연우와 함께 일한 이후로 그가 이렇듯 크게 반응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예전 같은 성격이었다면 인시윤은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경호원들이 훼손한 물건들은 인씨 가문에게 아무런 타격도 없었지만 엄준한 경고를 준 건 분명하다.인시윤이 그날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았다면, 왜 그녀 한 명뿐이란 말인가?“대표님, 혹시 인씨 가문에서 손을 써 성세 그룹을 망가뜨리려 하지 않을까요?”앞에서 걸어가던 전연우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버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저 집안 무서워하는 거 봤어?”“일단 회사로 돌아가.”“네. 대표님.”성세 그룹 부대표 사무실.송시아는 전화를 끊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소민아는 커피를 들고 들어와 책상 위에 내려놓을 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역시 내가 과대평가했어.”소민아가 말했다.“부대표님, 커피 여기 있습니다. 다른 일 없으면 가보겠습니다.”송시아가 최근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한 이후로 소민아는 송시아의 비서로 일했다. 이직 전 마지막 2주라고 할지라도 맡겨진 일엔 최선을 다했다.“잠시만요. 내가 가져오라고 했던 대표님 스케줄표 왜 아직도 안 줘요?”“부대표님, 대표님의 스케줄은 기 비서님만 알고 계십니다. 어제 문자를 보냈었는데 아직까지 답장이 없으십니다. 몇 번 전화해도 할 때마다 바로 끊으셨고요. 저도 정말 방법이 없어요. 비서팀 다른 직원들한테 물어보니까 대표님께선 최근 별로 회사에 나오지 않으시고 집에서 일을 처리하신다고 합니다. 사인할 서류가 있을 땐 기 비서님이 직접 남원 별장에 가시고요.”송시아는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알겠어요. 나가봐요. 저녁에 나랑 남원 별장에 갈 준비도 하고요. 대표님에게 사인 받아야 할 서류가 있거든요.”“네. 알겠습니다.”소민아는 사무실에서 나간 뒤 핸드폰을 꺼내 장소월에게 문자를 보냈다.작업실에서 그
소민아가 또 문자를 보낸 순간 핸드폰 상단에 차단 메시지가 떴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자식, 양아치. 네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래. 차단할 테면 하라고 해. 누가 아쉬워하는 줄 아나.’소민아도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기성은이 그녀를 차단했다고 하니, 그녀는 아예 그의 연락처를 삭제해 버렸다.‘앞으로 연락해 달라고 빌지나 마.’소민아가 송시아에게 말했다.“부대표님, 조금 전 기 비서님에게 저희가 왔다고 문자를 보냈는데요... 기 비서님이 절 차단해버렸어요.”송시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너 같은 비서 필요 없어 이제!”소민아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다급히 용서를 빌었다.“죄송합니다, 부대표님. 시말서 쓰겠습니다.”송시아는 고개를 든 순간 3층에서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소월과 눈이 마주쳤다.처음 느끼는 온몸을 휘감는 수치심에 그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장소월! 네가 뭔데 그런 같잖은 표정을 지어! 전생에서 내 발아래에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게 빌다가 끌려나간 게 누군데!’지금까지도 송시아는 전생의 기억에 사로잡혀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송시아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조용히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장소월 씨, 아직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남자한테 빌붙는 것 외에 당신이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요? 전연우가 옆에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지 신세잖아요!”전생에서도 송시아는 그녀에게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당시 그녀에겐 확실히 아무것도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전연우를 떠난다고 해도 더 잘 살 수 있다.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음 짓고 있는 송시아를 보며 장소월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전연우는 그저 당신 손에서 얻을 이익만 보고 당신을 남겨두고 있는 거예요. 지금 전연우는... 나 없인 못 살아요!”“송시아 씨, 앞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요. 괜히 제 발로 찾아와서 이렇게 창피와 모욕을 당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장소월은 먼저 전
소민아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돈은 어디에서든 벌 수 있다. 조금 더 벌기 위해 계속 이곳에서 일하다간 심장까지 멈춰버릴 것 같았다.예전 비서팀 사무실에 있을 땐 한가해 하루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송시아가 돌아온 이후로는 매일 머리가 지끈거렸다.다른 맡길 일이 있으니 잠시 송시아 옆에 있으라는 기성은의 궤변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를 이렇듯 방치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 수 있냐고 물으면 다 무시해버린다...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헌신짝처럼 버려버린 건가? 그래서 연락처도 차단했고?소민아가 자리에서 핸드폰을 하며 앉아있을 때, 옆에 있던 직원의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회사에서 제일 편한 사람이 민아 씨 같아요. 가끔씩 부대표님의 화를 받아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잖아요.”“맞아요! 민아 씨, 정말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나가면 다시는 성세 그룹같이 좋은 회사 못 만날 거예요.”“민아 씨는 걱정할 필요 없죠. 소씨 집안에 돈 많잖아요. 부자 친척을 두고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소민아는 그들의 말 속에 들어있는 은은한 조롱과 비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못 들은 척 간식을 입에 넣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시계를 확인했다. 1분만 지나면 퇴근 시간이었다.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소민아 씨, 처음에 어떻게 회사에 들어왔어요? 설마 정말 낙하산이에요?”“그러니까요! 듣기론 학사나 석사 학위는 있어야 비서팀에 들어올 수 있다던데...”소민아는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요?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그게 무슨 뜻이에요?”소민아는 충전 선을 뽑아 가방에 집어넣으며 오지랖 넓은 그 직원에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무슨 뜻이긴요. 심심해 보인다는 얘기죠.”그때 마침 비서실에 들어온 기성은이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맡은 일들은 다 끝냈어요?”그 한 마디에 소민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민아는 뒷담화를 하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늘 얼굴 두껍게 당당했던 소민아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소민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 옅은 쌍꺼풀까지 있어 꽤나 청초하고 준수했다.지금까지 만났던 소개팅 남자 중에서 외모는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소민아 씨...?”“네... 맞아요.”소민아가 그를 쳐다보았다.“제 엄마 소개로 나오신 분 맞나요?”“네.”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들어가서 앉죠. 바깥은 추워요.”소민아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창가 옆에 자리 잡고 앉은 뒤, 멋쩍은 듯 목덜미만 만지작거리는 남자를 보고는 소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할게요. 전 소민아라고 해요.”“신이랑이에요.”소민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가 적극적으로 다가가라는 데엔 이유가 있었어. 엄청 내성적이네. 이런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자 두 사람은 임의로 몇 개 선택해 주문했다.“오래 기다리셨어요? 버스 타고 오는데 길이 너무 막히더라고요.”“네.”짧디짧은 한 글자뿐인 대답에 소민아는 너무 난처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컵을 들어 물을 마시며 애써 어색함을 감추었다. 외모는 확실히 그녀의 이상형에 가깝다. 그저 말수가 조금 적을 뿐이다.너무나도 불편했다!한참이 지나도록 어떻게 한마디도 내뱉지 않는단 말인가.설마 무슨 나쁜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음식이 모두 오르자 소민아는 조심스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신이랑 씨, 우리 오늘 왜 만났는지는 알고 있죠?”“선이요.”“알고 있네요! 모르시는 줄 알았어요. 응당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어 직업이라든가, 사는 곳이라든가, 재산이 얼마라든가, 차와 집은 갖고 있는지 등등...”신이랑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전 회
천극이라는 이름의 그 책은 소민아가 중학교에 다닐 때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다. 그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경로라곤 고작 인터넷에서 겨우 찾은 몇 개 짤막한 인터뷰가 전부였다. 그건 신이랑이 출간한 첫 책이었는데 단숨에 소설 랭킹 1위에 올랐고 10만 자까지 올렸을 땐 구독량이 100만으로 치솟아 올랐다. 2주 뒤엔 웹툰까지 만들어졌다.당시 그야말로 전국의 학교를 뒤집어놓았었다. 소민아에겐 그 소설 자체가 그녀의 청춘이었다.소민아는 중학교 시절 신처럼 숭배했던 사람이 지금 이 시간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것도 그녀의 맞선 상대로서 말이다!세상에!정말이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녀는 꿈인지 생신지 확인하려 밥상 밑에서 몰래 자신의 다리를 꼬집었다.소민아는 너무 흥분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신이랑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사인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신비주의 작가라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절대 이랑 씨 정체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을게요.”누군가와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촉한 적은 처음이라 신이랑은 약간 불편한 듯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그래요. 다음에 가져다줄게요.”소민아가 흥분하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지금 사인해주면 돼요. 이럴 줄 알았다면 이랑 씨가 쓴 책을 가지고 나왔을 텐데.”그 순간 머지않은 곳에 있는 서점을 발견한 그녀는 무언가 번뜩 생각나 말했다.“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올게요. 절대 가면 안 돼요.”신이랑이 뛰어가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네.”소민아는 식당을 나가 맞은편 서점에 들어간 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과 검은색 펜을 하나 사고 뛰어나왔다.“제 이름이랑 소민아 선녀 대박 기원이라고 써주세요.”“네.”신이랑은 마치 기계 사람처럼 빈 공간에 소민아가 요구한 구절을 써주었다.살펴보니 그의 글씨도 외모처럼 청초하고 깨끗했다.“이렇게요?”그의 말투는 느릿하고도 부드러워 전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네
소민아는 항상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다. 식사시간,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다른 화제를 던졌다. 신이랑이 귀찮아할 거라 여겼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는 조금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차근차근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세 마디만 초과하면 입을 다물라고 다그치는 기성은과는 완전히 달랐다.“이랑 씨, 저 이제 배불러요. 다 드셨어요?”“네. 저도 배불러요.”“아직 이른 시간인데 나가서 영화라도 볼까요? 요즘 재밌는 공포 영화 나왔다던데, 어때요?”“좋아요.”신이랑이 카운터로 걸어가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했다.소민아는 두 손을 뒤로 가져간 채 말했다.“이랑 씨, 다음엔 애플 페이 한 번 써봐요. 그럼 현금 가지고 다닐 필요 없어요.”“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괜찮아요. 오늘은 이랑 씨가 샀으니까 다음엔 제가 대접할게요.”소민아는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제가 데이트 신청했을 때 거절만 하지 않으면 돼요.”“언제 부르든 나올게요.”소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쌓였던 눈이 녹아 바닥은 약간 젖어있었다.“지금 영화 보러 가면 소설 쓸 시간 없지 않아요? 오늘 올린다고 하셨잖아요.”“이미 다 얘기해뒀어요.”그가 그녀를 살짝 쳐다보고는 물었다.“안 추워요?”참으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괜찮아요.”“이거 해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검은색 실장갑을 꺼내주었다.소민아가 바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한테 주면 이랑 씨는요?”“난 안 추워요.”“그럴 리가요.”그녀는 어디에서 용기가 솟아올랐는지 바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따뜻했다.“정말 안 춥나 보네요. 그럼 제가 할게요.”신이랑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는 당황스러움에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소민아는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이미 발까지 꽁꽁 얼어있었다. 손은 더 말할 것도 없다.“됐어요. 이제 가요. 마침 이 부근에 영화관이 있어요.”그는 키가 꽤나 컸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쳐다봤을 때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귀가 눈에 들어
두 시간 반의 영화가 끝난 뒤, 그들은 사람들로 붐비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구석까지 밀린 그녀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다.“아아, 내 발.”신이랑이 그녀를 비좁은 공간 속에서 끌어냈다.“괜찮아요?”“네. 괜찮아요.”“조금만 참아요.”“네.”소민아는 그의 등 뒤 안전한 공간에 자리 잡았다. 꼭 맞잡은 창백하게 하얀 그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건장한 몸집을 눈앞에 두고 숨을 죽였다. 심장이 당장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쿵쾅거리며 요동쳤다.1층에 도착하자 소민아는 그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에서 나갔다.나간 뒤에도 신이랑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소민아는 그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아까 영화를 볼 때 자주 눈을 감고 있기도 했었다.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왜 그래요? 어디 불편하세요?”신이랑이 부드럽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조금 전 영화를 볼 때 엄마로부터 받았던 문자가 떠올랐다.“이랑 씨,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머리 아파하는 그의 모습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더없이 온순하고 귀여웠다.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집에 가서 약 먹으면 돼요.”그의 말투는 늘 이런 식인가보다. 느리고 부드러우며 친절하다.소민아가 말했다.“그럼 안 되죠! 저랑 같이 약 사러 가요. 머리 아픈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저도 잘 알아요. 매번 늦게까지 야근할 때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벽에라도 부딪히고 싶더라니까요.”“가요. 제가 약 사줄게요.”“난...”소민아는 신이랑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그렇게 급히 앞으로 걸어가는 소민아는 온통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신이랑의 눈빛을 느끼지 못했다.머지않은 곳 검은색 승용차 안, 기성은과 소피아가 앉아있었다.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을 때, 소피아는 건물에서 나오는 소민아를 발견했다.“기
“저기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한곳을 가리켰다.“와. 진짜 부자시네요. 가요... 여기 한 달 월세 엄청 비싸지 않아요?”소민아는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두 사람은 오래된 친구처럼 친해져 있었다. 소민아는 그가 말하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별로 안 비싸요.”“피곤하면 매일 집에서 소설만 써요. 힘들게 인간관계를 신경 쓰지 말고요. 이랑 씨는 모를 거예요. 제 예전 회사 상사들이 얼마나 괴물 같았는지.”그의 시선이 지긋이 소민아에게로 향했다.“출근하는 게 행복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요.”소민아는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난 한 달에 몇억씩 손쉽게 버는 이랑 씨와 달라요. 출근 안 하면 누가 절 먹여 살리겠어요? 이제 더는 삼촌한테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신이랑이 말했다.“나 돈 많아요. 내가 먹여 살려 줄게요.”그 말에 소민아는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돌연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그런 농담 안 웃기거든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절 먹여 살리겠대요!”“천천히 가까워져야죠.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신이랑은 잘못된 말을 내뱉은 아이처럼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한 고급 주택가에 들어서자 신이랑이 발걸음을 멈추었다.“도착했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약 가지고 가요. 전 더는 안 따라갈게요.”“돈 줄게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 하자 소민아는 그의 팔목을 잡았다.“됐어요. 얼마 안 돼요.”“곧 열 시네요. 저도 이만 집에 갈게요. 어서 들어가요.”신이랑은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잘 자요.”“이랑 씨도 잘 자요!”소민아는 그를 등진 채 팔을 흔들었다.소민아는 주택가를 떠나 택시를 잡으려 거리에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팔을 스치고 지나서야 아직 그의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