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성인이기에 시윤은 단번에 도준이 저를 데리고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이에 어색해진 시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화제를 전환했다.“코드 프로그래밍할 줄 안다면서 일 찾으려면 그쪽 일 충분히 찾을 수 있지 않나요?”소혜는 테이블 위에 있는 감자칩을 입에 넣고 ‘바삭바삭’ 씹으며 대답했다.“현재 나와 있는 알바 모두 싹쓸이해서 완성했어요. 더 이상 돈 벌 수 있는 곳이 없더라고요.”“그럼... 왜 소혜 씨 오빠 찾아가지 않아요?”그 말에 소혜는 화가 난 듯 투덜거렸다.“말도 마요. 돈 빌려달라고 했더니 기다리래서 기다렸는데 기부금을 모은다면서 링크 하나를 만들어 그걸 홀랑 가족 채팅방에 올려버렸지 뭐예요. 가족 채팅방에 우리 엄마 아빠도 있는데. 제목은 아예 [소혜의 성매매 기부금을 모집합니다]라고 말이에요!”“...”소혜는 그때 생각에 또 이를 갈았다.“형수, 우리 오빠랑 정말 잘 이혼했어요.”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시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그럼 여기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5년 정도 있어도 돼요?”“네?”소혜의 말을 들어보니 집안 재산을 탕진한 데다, 팔 수 있는 건 모두 팔아 원래는 집에서 부모님 밥을 얻어먹을 계획이었는데, 매일 남자한테 돈을 쓴다는 걸 알고 화나서 쫓아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오갈 데도 없는 거고.말을 하던 소혜는 눈을 깜빡이며 시윤을 바라봤다.“형수, 저 한 달 월급 세일해줄게요. 80%만 주면 되니 집에서 먹고 잘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사실 시윤이 인터넷에서 찾은 베이비 시터를 못마땅해한 이유는 아이를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걱정되어서다. 물론 소혜가 경험은 없지만, 그래도 식구이니 마음이 놓일 거고, 어머니도 집에 있으니 소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터였다.결국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매달 240만씩 줄게요. 언제 갈지는 나중에 예기하고.”소혜는 그 말에 얼른 시윤의 다리를 껴안았다.“안 가요. 저 절대 안 가
3월이 되자 바람은 더 이상 피부를 에는 듯 매섭지 않았고, 기온도 차츰 풀어졌다. 게다가 해원은 봄이 일찍 찾아오기에 벌써 봄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보름 정도 지나자 소혜는 벌써 도윤을 돌보는 데 익숙해졌고, 도윤도 새로 온’베이비시터’를 받아들인 듯했다. 게다가 시윤도 이제는 다시 극단을 나가기 시작했다.도윤이 아직 어려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하기에 도준이 해원에 도윤 보러 오기로 했다. 만나는 날이 다가오자 시윤은 전날 도윤의 기저귀와 젖병, 분유와 이유식을 챙겼다. 그러다 도윤이 도준과 있으면서 적응하지 못할까 봐 장난감도 몇 개 준비했다.준비를 마치니 11시가 가까워졌다.시윤은 그제야 욕실에 들어가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샤워할 때면 시윤은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발레극을 보곤 하는데 오늘에는 왠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왔다.‘도준 씨가 내일이면 오네.’이건 두 사람이 이혼한 뒤, 처음으로 만나는 거다. 시윤은 도준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심지어는 내일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본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지한 시윤은 저를 때리고 싶은 마음마저 생겼다.‘이혼도 했는데 뭘 입는지는 왜 신경 쓰는 건데?’그렇게 밤새도록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다음날 깨었을 때 시윤의 눈 밑에는 검푸른 다크서클이 생겨났다.시윤이 2층에서 내려와 보니 소혜가 카드로 도윤과 장난치고 있었다.“이것 봐. 이건 사과, 이건 배, 이건 귤...”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 중의 카드 한 장을 골라냈다.그제야 소혜는 자기가 골라낸 게귤이 아니라 오렌지라는 걸 알아차리고 엇색하게 웃었다.“하하하, 이걸 다 아네?”도윤이 말은 아직 할 줄 모르지만 소혜는 왠지 도윤이 저를 경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뭐야. 조그만 게 하나도 안 착하잖아.’“소혜 씨.”때마침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
시윤은 피식 웃었다.“도윤아, 오늘은 아빠랑 놀러 갈 거야. 아빠한테 안겨야지.”시윤은 말하면서 도윤의 손을 떼어내고는 도준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그사이 도준의 시선은 오롯이 시윤에게만 향할 뿐 도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도준을 바라보던 도윤은 아빠가 저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걸 발견하고 눈을 흘겼다....시윤은 오늘 오전 연습만 있어 일찍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점심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기 바쁘게 도준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왜요?”“도윤이가 계속 울음을 안 멈추는데, 시간 나면 좀 올래?”도준이 얘기할 때,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도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이에 시윤은 걱정돼서 다급히 말했다.“배고파서 그런 거 아니에요? 분유 먹였어요?”“먹였어, 그런데도 계속 울어.”“아마 환경이 바뀌어 적응이 안 되나 봐요. 저도 연습이 끝났으니 바로 갈게요. 어디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사냥감을 잡은 듯한 포식자의 미소를 지었다.“골든 빌라야.”시윤은 얼른 외투를 걸치며 대답했다.“알았어요. 바로 갈 테니까 그사이 먼저 달래고 있어요. 너무 울면 목쉴 수 있으니까.”전화를 끊은 도준은 울부짖던 도윤을 바라봤다. 그랬더니 도윤도 관중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내 울음을 멈추고 하품했다.심지어 도준은 재밌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손에 있는 젖병을 건네자 도윤은 울지도 않고 스스로 젖병을 쥐고 분유를 먹기 시작했다.그걸 본 도준은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애 하나는 잘 낳네. 내 장점만 쏙 빼닮았어.’그로부터 약 반 시간 뒤, 초인종이 울렸다.도준이 도윤을 힐끗 보자 도윤은 뜻을 이해했는지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심지어 방금 전 통화할 때보다 더 세게 울어댔다.그제야 도윤은 문을 열었고, 시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도윤이는요?”도준은 소파 쪽을 가리켰다.“저기.”그러자 시윤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도윤을 품에 안았다.“아유, 우리 도윤이, 뚝
그 시각, 주방.시윤은 앞치마를 두르고 긴 머리를 뒤에 묶어 올린 채 채소를 썰고 있었다.앞치마의 끈은 시윤의 가는 허리를 더 굴곡져 보이게 했고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여성미를 더 부각했다.그때 마침 채소를 썬 시윤이 담을 그릇을 찾는 듯 두리번대다가 발꿈치를 들고 캐비닛에 올려둔 그릇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릇이 너무 안쪽에 있어 애를 먹던 찰나, 혼 하나가 쑥 나와 시윤이 집으려던 그릇을 꺼내주었다.도준은 가녀린 여자를 제 품 안에 가두고는 힘 있는 팔로 조리대를 짚었다.몸에 힘을 싣느라 바짝 당겨진 팔뚝으로 핏줄이 울퉁불퉁 튀어 올라 순간 시윤을 사로잡았다.시윤은 귀까지 빨개지더니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왜 나왔어요?”“도윤이 자.”그 시각 도윤은 방 안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심심해하고 있었다.하지만 시윤은 그 말에 껌뻑 속았다.“그래요?등에 닿은 남자의 몸이 너무 선명해 시윤의 시선은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했다.“가서 쉬고 있어요. 저 금방 끝낼게요.”“도와줄게.”도준은 끝내 시윤의 뒤에서 물러나 시윤이 채소를 써는 사이 옆에서 고기를 다졌다. 도준의 칼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지만 그 모습이 너무 무서운 게 흠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완성되었고,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한 음식들이 하나둘 올라왔다.도윤에게 이유식을 먹이려고 방에 갔던 시윤은 아이가 여전히 자는 걸 발견하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의자에 앉았다.“도윤이가 여기서 이렇게 잘 잘 줄은 몰랐네요.”도준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렇게 한참 동안 식사를 하던 그때, 도준이 갑자기 물었다.“극단 돌아갔던데, 적응돼?”“연습을 오랫동안 쉬어서 그런지 아직 몸에 익지 않은데, 윤 쌤이랑 선배들이 도와준 덕에 그나마 괜찮아요.”시윤은 말을 마치고 도준을 바라봤다.“그러는 도준 씨는요? 회사 일은 순조로워요?”“괜찮아. 자기가 보고 싶어 문제지만.”시윤은 잠깐 멍해 있다가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장
시윤은 마구 도리질했다.“무슨 소리예요? 저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도준은 손을 들어 시윤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몇 가닥 잡더니 야릇한 눈빛으로 시윤을 바라봤다.“그런데 나는 생각했는데.”이윽고 도준은 점점 붉어지는 시윤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자기가 내 밑에서 어떻게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는지, 거울에 비친 자기 허리가 어땠는지, 그리고...”“그만!”시윤은 화가 나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옆에서 놀고 있던 도윤마저 시윤을 바라봤다.그제야 시윤은 도윤이 놀랐을까 봐 얼른 달랬다.“너한테 말하는 거 아니야.”도윤이 다시 장난감을 놀기 시작하자 시윤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어쩜 아들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요?”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내가 뭐?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니고. 나 정말 생각했어. 우리 그때 뜨거웠잖아.”“변태!”도준은 피식 웃었다.“뭐야? 내 아이도 낳아 줬으면서 아직도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아?”시윤은 더 이상 도준의 말에 대꾸하기 싫어 도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하루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밤이 되었다.도준은 직접 운전해 두 사람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그러자 소혜가 바로 달려 나와 먼저 도윤을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윤 역시 그 뒤를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도준이 갑자기 막아섰다.“할 얘기 있어.”“왜요?”시윤은 하루 종일 도준에게 당하고 나니 말투가 좋지 않았다.그러자 도준이 목소리를 낮추며 달랬다.“내가 참지 못했어. 나 무시하지 마, 응?”시윤은 도준이 자세를 낮추고 달래는 투로 말하는 걸 항상 참지 못하는지라 어색하게 몸을 틀었다.“우리 이혼했어요. 이혼한 사이에 무시하는 건 정상 아니에요?”“그래, 이혼했지.”도준은 시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우리 이제 남남이니 내가 누구 만나든 상관없지?”순간 어리둥절해진 시윤은 고개를 들어 더 남자다워진 도준을 바라봤다.‘왜 이런 걸 묻는 거지?’‘설마 벌써 새 애인이 생겼
다음날.시윤은 여느 때처럼 연습하러 극단에 도착했다. 이번 달 방송 출연이 있기에 윤영미는 발레극 중 한 부분을 선택해 제자들을 연습시켰다.그렇게 긴장 가득한 연습이 끝나자 시윤은 수아를 포함한 후배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들 앞길을 가로막았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임우진이었다. 우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시윤에게 인사를 건넸다.“선배, 저 오늘 생일이라 모두를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그 말에 수아가 끼어들어 대신 동의했다.“진작 알려주지. 그럼 선물도 준비했을 텐데.”하지만 우진의 시선은 오롯이 시윤한테만 맴돌았다.“선물은 필요 없어요. 선배가... 와주는 것만으로도 기뻐요.”우진이 이렇게까지 말하기도 했고, 후배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어 시윤은 이내 소혜에게 문자를 보내고 후배들과 함께 출발했다....우진의 집은 13평 정도 되는 작은 아파트인데 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게다가 미리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해물 구이와 바베큐, 그리고 맥주를 시간 맞춰 주문했다.시윤은 본인 주량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맥주를 조금씩만 마셨다.하지만 하필 술 게임을 할 때 여러 번 벌칙에 걸려 술을 마시다 보니 점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시윤은 본인이 취할까 봐 우진에게 먼저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우진이 벌떡 일어나 함께 뒤따라 나왔다.“우리 동네 길이 복잡해요. 게다가 저녁이라 제가 아래까지 데려다줄게요.”시윤은 머리가 어지러워 바로 동의했다....저녁이라 밤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시윤은 술을 마신 탓에 아무 말이 없었고, 우진은 너무 긴장한 탓에 말하지 못해 두 사람 사이에 침묵만 흘렀다.그렇게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우진은 겨우 손을 비비며 말을 꺼냈다.“선배, 이혼했다면서요?”‘수아가 말해줬나 보네.’시윤은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대답에 우진의 눈은 이내 반짝이더니 자리에 곧게 서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선배, 혹시 저를 한번 고려
제 가슴에 떨어진 시윤의 작은 머리를 본 도준은 우진과 대화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는지 이내 시윤을 들어 안고 떠나갔다.그 뒤에서 우진은 시윤이 두 손으로 도준의 목을 끌어안는 걸 바라보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심지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소년처럼 눈이 이글거렸다.‘두 사람이 이젠 이혼도 했는데, 왜 쟁취하지 않아? 민도준한테 맞설 용기조차 없으니 선배가 너 안 좋아하지. 무조건 선배한테 내 결심을 보여줘야 해.’...한편, 차 안.“물...”도준이 시윤 대신 안전벨트를 매주기 바쁘게 시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목말라. 물.”도준은 곧바로 물 하나를 시윤의 입가에 댔다.“입 벌려.”시윤은 고분고분 입을 벌리고 물을 마시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왜 이렇게 차갑지? 너무 차가워.”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차가워야 정신 차릴 것 아니야.”도준은 이내 생수병 뚜껑을 받아버렸다. 어두운 불빛 아래 힘 있는 팔 덕에 남성미가 한층 더해졌다.도준은 생수병을 던져 버리고 손을 들어 시윤의 얼굴을 잡더니 엄지로 입술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그렇게 차가워?”‘냉동했던 물인데 안 차가울 리가 있나? 이것도 질문이라고 하나?’시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차가워요.”새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말 하면서 열린 순간, 남자의 뜨거운 혀가 안으로 파고들었다.“싫어... 읍...”도준은 마구 젓는 시윤의 팔을 꽉 잡아 등 뒤로 묶더니 몸을 바싹 붙였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몸이 부딪히며 시윤은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어졌다.오랜만인지라 도준은 힘 조절도 하지 않아 술에 취했던 시윤마저 정신이 들었다. 시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하려 했지만, 도준이 시윤 먼저 턱을 잡으며 말했다.“착하지? 움직이지 마. 차갑다며?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싫어요.”조금 정신이 돌아온 시윤은 몸을 버둥댔지만 손이 묶인 탓에 움직일수록 오히려 도준의 욕망을 더 건드렸다.아니나 다를까 도준의 숨결은 더 거칠
시윤은 도준의 음산한 말투에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도준이 아무나 찾아도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다시 화가 치밀어 겁도 없이 도준의 속을 긁었다.“그게 도준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우리 이혼했으니 아무나 만나도 된다면서요? 도준 씨도 다른 사람 만날 수 있는데, 저라고 왜 안 되는데요?”그 말에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던 도준은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딩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방금 전 무서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농담기 섞인 허스키한 목소리만 남았다.“아, 그러니까 내가 지난번에 그 말을 했다고 지금까지 삐져 있었어? 질투해서?”“누가 그렇대요? 얼마나 기뻤다고. 도준 씨가 다른 여자랑 사귀면 제가 도윤이한테 새아빠, 새엄마 부르는 방법까지 가르쳐 줄게요. 두 사람 축복해 줘야 하니까.”도준은 그 말에 피식 웃더니 손으로 시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자기가 이렇게 배려심이 넘치는 줄 몰랐네. 그래, 도윤이 새엄마 될 사람인데, 자기가 골라주는 건 어때? 명문가 여식? 아니면 연예인? 그것도 아니면 자기처럼 유연한 발레리노나 찾을까?”도준이 진지하게 상대를 고르기 시작하자 시윤은 화가 나 얼굴이 벌게졌다.“제 마누라도 아닌데,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도준은 시윤의 반응을 관찰하며 눈웃음을 쳤다.“자기도 내 마누라잖아. 그러니 자기 말 들어야지. 자기가 만나라는 사람 만날게. 어때?”‘뭐야? 지금 뭐 이직하기 전에 새 직원 찾아놓고 가라는 것도 아니고.’시윤은 점점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긴 손가락으로 시윤의 머리카락을 감았다.“자기가 내 취향 제일 잘 알잖아. 안 그래?”그 말에 시윤은 끝내 폭발한 듯 도준의 손을 뿌리쳤다.“나쁜 놈! 사람도 아니야!”시윤은 높은 소리로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감히 도준을 이렇게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시윤 뿐일 거다.이미 붉어진 시윤의 눈시울을 보며 도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자기한테 욕먹은 나도 안 울었는데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