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원은 도심과는 거리가 먼 곳에 위치하여 있다. 단독 주택단지는 워낙 조용해 특히 밤이 되면 사람의 모습이라곤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때문에 눈앞 중년 남자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려 한다면 그녀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할 것이다.심지안의 손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서는 걸 선택하지 않았다.“다시 말하면 어쩔 건데요? 난 틀리지 않았어요. 당신은 강아지를 제대로 지켜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규정도 어겼어요. 금관성에선 셰퍼드를 키우는 걸 엄격히 금지하고 있잖아요. 저한텐 당신을 고발할 권리가 있어요.”남자는 고발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겁을 먹고 입을 꾹 다문 채 강아지를 데리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심지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내 성연신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에 와달라고 말했다.“끈을 묶지 않았어요?”“묶었어요. 하지만 숲에 들어가서는 잠시 놓았었어요.”“바보예요?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 반드시 끈을 묶어야 한다는 것도 몰라요?”“알아요. 전 그저 사람이 없으니까 몇 분 놓아준 것뿐이에요.”“고작 몇 분일지라도 놓으면 안 돼요.”“하지만 그땐 사람이 없었다고요. 갑자기 셰퍼드가 나타날 거라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심지안은 억울함과 답답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원이는 성연신의 강아지지만 그녀에게도 원이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원이의 상처를 보니 그녀도 몹시 괴로웠다.성연신의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지금 무슨 낯으로 말대답을 하는 거예요?”“됐어요. 이렇게 싸울 시간 없어요.”심지안이 입술을 깨물며 힘없이 말했다.“일단 원이의 상처부터 살펴요.”원이는 보기엔 걸음걸이가 조금 삐걱대는 것 외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 배를 까뒤집고 누워 애교를 부리기까지 했다.성연신은 원이의 털을 파헤쳐 셰퍼드에게 물린 상처를 살펴보았다.단 한 곳이었지만 상처는 꽤 깊었다. 아직 피도 멎지 않아 끊임없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심지안은 또다시 깊은 자책감
심지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머리에 처음 든 생각은 무언가 오해가 생겼을 거라는 것이었다.“전 베끼지 않았어요.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난 잘못 볼 수 있어요. 하지만 흥신에서도 잘못 볼 수 있을까요? 오늘 아침 그쪽에서 직접 나한테 전화해 말한 거예요.”“그럴 리가 없어요. 전 베끼지 않았어요. 최종 버전은 그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수정한 거예요. 저한텐 베낄 기회조차 없었어요.”“인터넷의 문건과 흥신에 보낸 문건 내용은 50퍼센트 이상 일치해요. 이래도 변명할 게 있어요?”“보낸...”문득 무언가 떠오른 심지안은 우유가 묻은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한 번 훑어본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이건 제가 수정한 게 아니에요.”상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심지안 씨가 한 게 아니라면 누군가 누명을 씌우기라도 했단 말인가요?”“정말 제가 쓴 게 아니에요. 어젯밤 팀원들과 회식하러 나가기 전 이미 거의 수정을 마쳤었어요. 이재성 씨가 야근하겠다고 하길래 마무리 작업을 맡겼고요.”서인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제가 증언할 수 있어요! 지안 언니는 어젯밤 저희들과 함께 있었어요.”상사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재성 씨는요?”이재성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다.“저 맹세할 수 있어요.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전 어젯밤 분명 심지안 씨가 지시한 대로 수정한 뒤 와이프를 데리러 갔었어요.”서인수가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하지만 최종 수정을 할 기회는 오직 이재성 씨 한 명에게만 있었잖아요.”“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들이 밖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동안 전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을 했다고요. 그런데 이제 와 제 탓이라고요? 거기다 최종 수정본은 심지안 씨의 메일로 발송한 거잖아요. 휴. 제가 이렇게 억울함을 많이 당한답니다.”그 말을 들은 심지안은 즉시 부인했다.“전 메일을 보내지 않았어요. 오늘 아침 출근해서 보내려고 했단 말이에요.”이재성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보냈는지
심지안이 택시에 탄 뒤 운전 기사에게 흥신 그룹 위치를 알려주었다.운전기사가 말했다.“아, 흥신이요. 저 그쪽 길에 대해 잘 알아요.”“빨리 부탁드립니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요.”“알겠어요. 저 운전 잘해요. 절대 시간을 지체하지 않을게요!”그 말과 함께 속도를 끌어올리며 코너링을 하던 순간, 돌연 차 한 대가 그들 택시 앞에 나타났다.순간 깜짝 놀란 택시 기사가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빨랐던 탓에 사고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귀를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차가 맞부딪혔다.다행히 두 차 운전기사 모두 반응속도가 빨랐기에 심지안은 몸이 약간 앞으로 휘청거렸을 뿐 유리에 부딪히지는 않았다.운전 잘하신다면서요...“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코너를 돌면서 그렇게 속도를 낸다고요? 심장도 안 좋은 우리 어르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당신이 책임질 거예요?”임수현이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려 소리쳤다.택시 기사는 자신의 잘못임을 알고 있었기에 얼른 사과하고 보험 회사에 연락해 처리하려고 했다.하지만 자세히 보니 상대 차량은 가격이 몇십억 원에 달하는 링컨이었다.택시 기사의 얼굴에 순간 어둠이 내려앉았다.‘망했어.’차에서 내린 심지안은 상대 차 안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할아버지.”성수광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환히 웃음꽃을 피웠다.“지안아, 네가 왜 여기에 있어?”“저 서류를 가져다주는 길이었는데...”그녀가 택시 기사를 힐끗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기사님께 빨리 가달라고 말했었거든요. 할아버지, 몸은 괜찮으세요?”“괜찮아. 임수현, 너 더 이상 택시 기사님을 난처하게 하지 마. 이런 접촉 사고는 흔한 일이잖아.”성수광이 심지안을 향해 손을 저으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얼른 들어와 앉아. 여긴 택시를 잡기가 어려우니까 할아버지가 데려다줄게.”시간이 급박했던지라 심지안은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지안아, 어디로 가?”“할아버지, 흥신이에요.
“네.”비서가 심지안을 바라보았다.“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심지안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여비서는 이어 프로젝트 책임자를 부르고는 그의 귓가에 몇 마디 속삭였다.그 순간 책임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음을 표했다.여비서와의 대화가 끝난 뒤 그가 심지안을 향해 걸어와 조금 전과는 180도 바뀐 태도로 말했다.“미안해요. 제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했죠. 우리 다시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 볼까요?”심지안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 굳어있다가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너무 좋죠!”책임자는 10분 동안 심지안이 가져온 수정본을 살펴보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아주 좋아요. 이거로 정하죠.”“이... 이렇게 빨리 결정한다고요?”“전 심지안 씨의 능력을 믿어요.”심지안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절 믿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잠시만요. 오늘 오전 제가 지안 씨의 상사분께 지안 씨가 베껴서 보냈다고 얘기했어요. 저 때문에 그분이 지안 씨를 오해했을 것 같네요.”“이 프로젝트는 제가 맡은 거니까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도 제가 책임져야죠.”그녀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제가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해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게 만들었어요.”그녀와 동료들은 그저 일로 맺어진 인연일 뿐, 항상 회사의 이익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아야 한다.그래도 다행히 서인수는 그녀를 믿고 있다.책임자가 여비서가 했던 당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이렇게 해요. 이 일엔 제 책임도 있으니까 제가 지안 씨와 함께 부용에 가서 설명할게요.”심지안은 깜짝 놀라 크고 맑은 눈을 깜박거렸다.“아니에요. 제가 말하면 돼요. 책임자분께선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하지만 상대는 끝까지 부용에 함께 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심지안은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재성은 처음엔 그저 자료를 찾아본 것이라 부인했다.하지만 상사의 계속되는 추궁에 결국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입사하자마자 팀장직에 오른 심지안을 질투해 어리석을 짓을 저지른 것이다.상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우리 부서는 프랑스 쪽 회사와 협력해야 하는 곳이에요. 심지안 씨는 프랑스어에도 능통하고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경험도 있어요. 하지만 이재성 씨는요? 경력은 긴 반면 능력은 심지안 씨에게 한없이 미치지 못해요. 그런데도 팀장 자리를 욕심낸다고요?”이재성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빠져나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일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혀주고 있으니 말이다.상사는 이재성이 오랫동안 회사에 몸담았다는 것을 고려해 그저 해고만 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이재성은 어두운 얼굴로 사무실에서 나와 자신의 짐을 정리한 뒤 부용을 떠났다.심지안의 결백이 밝혀진 것이다.상황파악을 마친 동료들은 모두 심지안의 주위에 빙 둘러서서는 입이 마르도록 그녀를 칭찬했다.심지안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오전 그들이 자신을 향해 했던 비난을 생각하니 마음의 거리가 한껏 멀어진 듯한 기분이었다.저렇게 줏대 없이 나부끼는 가벼운 사람들이라니.성연신의 말이 맞다. 부용의 분위기는 정말 별로다. 암투가 넘치고 서로가 서로를 짓밟는 거에 혈안이 되어있다.심지안은 자리에 앉아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흥신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문자를 보냈다.그가 직접 와주지 않았다면 상사는 아마 CCTV를 보는 것조차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프로젝트 책임자가 보낸 답장 내용은 이러했다.「저한테 감사할 필요 없어요. 주 대표님한테 감사해야죠.」심지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그녀가 문자의 의미를 물으려고 한 순간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다.「미안해요. 제가 잘못 보냈네요.」「감사해할 필요 없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오히려 제 경솔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은 심지안
“내가 널 속였다는 증거라도 있어?”강우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럼 너한텐 연아가 네 혼수를 가져갔다는 증거 있어?”“연아 언니의 목에 백옥 목걸이가 걸려있는 거 봤어. 그리고 진선 사무실의 곽준위 씨도 증명해 줄 수 있어.”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본래 내 소유인 물건이 내 것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니.강우석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당연히 심지안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궁금했던 건 심연아가 대체 언제 자신과 화해하냐였다.그의 부모님은 매일매일 그를 쫓아다니며 자금 융통을 재촉하고 있다...심지안은 전화기 너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전화를 끊어버렸다.강우석은 전화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마를 깊게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그를 도울 수 있는 건 심씨 집안을 제외하곤 삼촌 한 명뿐이다.하지만 삼촌과 심지안의 관계가...강우석은 이를 꽉 깨물고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진현수를 찾아갔다.진현수가 차를 한입 마시고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할 얘기 있으면 해.”강우석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했다.“삼촌,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찾아왔어요. 저 자금을 융통해야 해요. 아버지가 약속하셨어요. 돈만 준비되면 저한테 계열사를 하나를 맡기겠다고요. 가문의 프로젝트도 절반이나 저한테 나누어주신대요.”“난 너한테 줄 생각이 없어. 돌아가.”“삼촌, 전 삼촌의 친조카잖아요. 이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주세요. 삼촌은 제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삼촌이 절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버진 그 잡종 놈에게 회사를 넘겨줄 거라고요.”강우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찌감치 사이가 벌어져 등을 돌린 채 살고 있다. 그 후 강우석의 아버지는 밖에서 여자 한 명을 만나 아들을 낳았다. 진현수는 이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심씨 집안은?”“저 연아와 싸웠어요...”진현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싸웠다고 널 돕지 않는대?”“이번엔 좀 심하게 싸웠거든
기분이 확 상해버린 성연신은 뼈대가 훤히 드러난 손가락으로 심지안을 가리켰다.“밥 해줘요.”심지안은 배가 너무 아파 도저히 하기가 싫었다.“시켜 먹어요.”“그래요. 그럼 지안 씨가 사요. 나 플라워타운의 해산물이 먹고 싶어요.”성연신이 그녀의 속셈을 알아채고는 말했다.플라워타운은 금관성에서 가장 이름있는 연어를 위주로 파는 해산물 가게였다. 가격은 높고 양이 적은 거로도 꽤 유명했다.심지안이 멍한 얼굴로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제가 오늘 월급을 받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그럼 많이 먹어야겠네요.”“...”심지안은 배달 앱을 켠 뒤 핸드폰을 성연신에게 건넸다.“먹고 싶은 거 시켜요.”그는 임의로 몇 개 골랐다. 별로 많은 양은 아니었다.심지안은 고통을 참으며 돈을 지불하고는 자신의 먹을 죽과 만두도 주문했다.성연신은 음식이 배달되고 나서야 그녀가 추가로 주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왜 그렇게 자신한테 인색해요?”“이게 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잖아요. 난 풀만 먹더라도 당신은 풍족하게 먹여야죠.”심지안이 삐딱한 태도로 답했다. 하지만 생리통 때문에 말투가 한없이 나긋해졌고 거기에 순진무구한 얼굴까지 더해지니 사람의 마음을 저릿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젓가락을 쥔 성연신의 손이 멈췄고 눈빛에 아련한 깊이가 더해졌다.자신은 굶더라도 그에게만큼은 좋은 걸 먹이고 싶어 할 정도로 그를 좋아하다니.제아무리 단단한 강철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런 말에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성연신이 연어를 심지안의 앞으로 스르륵 밀며 말했다.“같이 먹어요.”심지안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았다.그녀는 지금 생리통 때문에 해산물이 먹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만두에 더 군침이 돌았다.심지안은 만두를 집어 들고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행복감이 만연한 얼굴로 말이다.성연신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
심지안은 성연신의 얼굴을 보자 확신하게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할아버지께서 저보고 당신 회사에 가라고 하셨어요?”“그런 셈이죠.”“할아버지께서 그때 저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저는 핑계를 찾아 거절했어요.”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성연신은 고개를 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책임을 회피하는 건 빠르군요.”“원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왜 회피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심지안은 진지한 태도로 반박했다.어르신이 너무 열성적이어서 감당할 수 없었다.사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성씨 가문의 손주며느리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그녀는 할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거짓말을 하면서 속이고 싶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정말 잘해 주셨다.그래서 심지안은 죄책감을 느꼈다.성수광은 휴지를 꺼내 입을 닦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부용은 바빠?”“좀 바빠요.”“많이 힘들어?”“육체적으로 힘든 건 괜찮아요. 마음이 힘든 게 문제죠.”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서로 등 뒤에서 칼을 꽂고 있었다.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성연신은 눈썹을 치켜들고 말을 하려는데 심지안이 먼저 나서서 홀가분하게 말했다.“그런데 저 퇴사하기로 했어요.”그는 조금 놀랐다.“왜요?”그는 그녀가 부용에서 1, 2년 동안 열심히 버틸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릴 줄은 몰랐다.너무 어리석지는 않았다.“당신 말이 맞으니까요.”심지안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그에게 요즘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마치 숨구멍을 찾은 것처럼 그녀는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쏟아냈다.말을 마친 후 그녀는 훨씬 더 편안해진 기분으로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업계에서 부용의 평판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성연신은 이 모든 것에 놀라지 않았다.이것은 또한 다른 모든 100년 역사를 가진 회사들은 계속 발전하고 있지만 부용만 후퇴하고 있는 분명한 이유이기도 했다.“번역해야 할 프랑스어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