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심지안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말했다.“배청미가 이러는 건 나와 상관이 없어요…”“됐어요. 그만 말해요.”손남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할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도 지안 씨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배청미가 이렇게 됐는데도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지안 씨는 우리가 바보로 보여요?”심지안은 목구멍에 솜으로 꽉 막힌 것 같았다. 그녀가 말하려고 할 때 이진우가 먼저 차갑게 말했다.“지안 씨가 나타난 후부터 지안 씨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다쳤어요. 성연신, 성연신 할아버지, 지금은 손남영의 약혼녀까지 다쳤어요. 다른 사람이 지안 씨를 해치려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누가 지안 씨를 해쳤나요? 오히려 그들이 피해자예요.”“하지만 난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사실만 얘기했어요. . .”“그럼 왜 매번 지안 씨는 다치지 않고, 다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에요?”심지안은 시종일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성연신을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은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겉으로 보이는 상처를 받지 않으면 무사하다고 생각하는 그들 때문에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상처를 입을지언정 억울함과 모독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난 아니에요. 믿든 안 믿든 난 그녀를 밀지 않았어요. 그녀는 심연아예요. 우리를 속이러 온 것 같아요. 연아가 남연 씨에게 접근한 것도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환자가 깨어났습니다.”간호사가 나와서 말하자 손남영은 심지안의 말을 듣지 않고 재빨리 병실로 들어가 배청미의 상황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병실로 들어갔다.심지안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가 정말 죄인이 된 것 같았다.성연신이 잘생긴 얼굴로 말했다.“왜 배청미와 함께 화장실에 갔었어요?”심지안은 그의 말을 순식간에 알아듣고는 멍하니 물었다.“연신 씨도 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지안 씨는 청미 씨를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어요.”한발 물러서서 배청
손남영은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억울하겠어.”심연아는 병원에 남아 상태를 조금 더 지켜봐야 했다. 손남영은 회사 일을 처리해야 했기에 차를 몰고 돌아갔다. 그는 컴퓨터를 가지고 다시 병원으로 와서 그녀의 옆을 지켰다. 심연아는 옆에 사람이 없을 때 한 번호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심지안이 내 정체를 안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상대방이 답장을 보내왔다.「손남영과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때요? 」심연아가 대답했다.「다른 사람들은 저를 믿고 있어요. 」상대방에게서 다시 답장이 왔다.「긴장하지 말아요. 」성연신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병원에서 바로 성원 그룹으로 갔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거실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니 날이 밝아왔다. 그는 바로 차를 몰고 아침 회의하러 회사로 향했다.회의를 마치고 정욱은 아침밥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 드세요.”성연신은 다크써클이 눈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심지안이 나를 찾지는 않았어?”정욱은 성연신의 휴대폰을 쳐다보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네...”성연신은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제 지안이가 나에게 손남영의 약혼녀가 심연아라고 말했어. 심연아는 지안이의 이복언니야.”“아... 그럴 리가요. 두 사람 완전히 다르게 생겼잖아요.”정욱도 손남영의 약혼녀를 본 적이 있었다. 비슷한 게 아니라 아예 다르게 생겼다.“만약 성형했다면?”“너무 터무니없는 거 아니에요?”정욱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현재 성형 기술은 엄청 발전해 있었다. 이 점을 생각한 그는 신중하게 말했다.“가능성 있어요. 성형 수술로 얼굴을 바꾸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요...”성연신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감옥에 가서 은옥매의 피를 좀 뽑아와. 머리카락이나 손톱도 괜찮아. 아무거나 가져와.”“대표님, 은옥매와 손 대표님의 약혼녀 친자 검사를 하시려고요? 손 대표님께서 동의할까요?”“걔 동의가 왜 필요해?
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밖을 쳐다봤다.“누가 왔어요?”시끌벅적한 밖의 소리에 부엌에서 밥을 짓던 도우미가 손을 닦고 밖으로 나가더니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아, 둘째 도련님!”“성여광?”“많은 사람이 왔네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여광이 사람들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선두에는 성여광이 있었고 그는 심지안을 보더니 멱살을 거칠게 잡고 밖으로 끌었다.“뭐 하는 짓이에요!”심지안이 화를 내며 그를 힘껏 밀치려 했다.“지안 씨가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니까 당연히 경찰서에 보내야죠!”성여광은 예전처럼 주눅 들어 있지 않고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그는 성연신이 오늘 지방으로 출장을 떠나 심지안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전 아니에요! 전 할아버지를 해치지 않았어요!”“모든 증거가 지안 씨를 가리키고 있기에 변명해도 소용없어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성씨 가문의 어른들이에요. 우리는 지안 씨를 오랫동안 못마땅해했어요.”심지안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뭐 하시려는 거예요?”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한 노인이 걸어 나와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두 가지 중에 선택해. 성씨 가문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거나, 우리가 너를 경찰서로 데려가거나.”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삼촌, 무슨 소리예요? 풀어주면 어떡해요?”성여광이 급하게 말했다.노인의 얼굴에 음흉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쟤를 떠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야. 성연신의 말이 맞아. 지금 경찰서에 보내도 기껏해야 용의자밖에 안 돼. 유력한 증거가 없으면 저 여자를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리고 할아버지의 복수를 한다고 해도 중정원에서 사고 치면 안 돼. 너는 네 형도 생각해야지. 그는 성씨 가문의 하늘이야. 그에게 불똥이 튀면 안 돼.”성여광은 불쾌감을 감추고 노인의 말에 동의했다.심지안은 떠나려 했으니 당연히 첫 번째 제안을 선택했다.그녀는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성씨 가문의 친척들이 중정원의 경호원들 앞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사람을 찾아 처리해.”“알겠습니다...”두 시간 뒤.성연신은 중정원에 도착해서야 무슨 상황인지 알게 되었다.경호원들은 당시 심지안을 막지 않고 성여광을 내쫓내지도 않았다.어이가 없었다. 그녀를 돌려보냈으니 누구에게 죄를 묻는단 말인가?성연신은 차가운 눈빛으로 성여광을 쳐다봤다.“꺼져.”성여광은 멈칫했다.‘형이 정말 심지안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그럼 형, 전 가볼게요. 형도 이 일을 너무 생각하지 마세요. 다 형을 위해서예요.”성여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가 곧 나오실 거에요. 아빠가 나오면 아빠와 함께 와서 사과할게요. 우리는 그래도 가족이잖아요.”성연신이 가볍게 비웃었다.“칩 투자가 실패했나 봐?”성여광의 낯빛이 변했다.“변고가 생겼어요.”그는 원래 본전과 이자를 모두 받을 수 있었으나 칩이 고장 나는 바람에 돈을 찾을 수 없었다.“그래.”성연신은 흥미 없다는 듯이 큰 손을 내저으며 빨리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성여광은 욕을 먹지 않아 기뻐하며 그를 막아섰던 경호원들에게 침을 뱉고 건들건들 떠났다.성연신은 무심한 표정을 거두고 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심지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았어?”“네, 찾았습니다. 지금 보안 호텔에 있습니다.”정욱이 아이패드로 검색하며 말했다.“심지안 씨가 매우 신중하게 이 호텔을 잡은 것 같습니다. 호텔 옆에 바로 경찰청이 있습니다.”“출발하자.”성연신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연신이 심지안을 찾았을 때, 그녀는 진유진과 호텔에서 배달 음식을 먹으며 여유롭게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심지안은 성연신이 찾아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심지안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저 안 돌아갈래요.”심지안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그녀는 다시는 그 감옥 같은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청민의 도움 없이는 성연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연신이 자신을 찾아
“우리 일에 이러쿵저러쿵하지 마세요.”성연신은 이 말을 던지고는 강제로 심지안을 끌고 떠났다.진유진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거지?’차 안에서 둘은 서로 마주 보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심지안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 평온했다.성연신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억울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앞 좌석에 앉아있던 정욱은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며 병풍처럼 조용히 있었다.차 안에 정적이 흐르고 고요해지자 성연신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내일모레면 배청미와 은옥매의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올 거예요.”심지안이 휙 고개를 돌려 성연신을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절 믿는 거예요?”“내가 언제 지안 씨를 안 믿는다고 말했었나요?”“줄곧 믿지 않았잖아요.”이 말에 성연신은 사레가 들렸고 얼굴색도 안 좋아졌다. 그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밤이 깊어지자 차는 천천히 금관성을 빠져나와 제경 방향으로 향했다.심지안은 밖의 광경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돌아가는 거 아니에요?”“맞아요. 장소를 바꾸는 것뿐이에요.”“어디로 가요?”“우리 신혼집이요.”이 말을 하는 성연신의 눈이 부드럽게 변했다.“구체적인 위치는 제경과 성남의 분계선 근처에 있어요. 집은 일찍이 다 지은 상태였고 최근 인테리어도 끝냈어요. 앞으로 우리는 그곳에서 생활할 거예요.”‘제경과 성남의 분계선 근처라…'이건 진유진이 그녀를 보러 올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쪽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쓸쓸하게 혼자였다.심지안의 눈빛이 서글퍼졌다. 마치 시들어가는 꽃처럼 그녀가 시들어가는 게 보였다.성연신은 심지안의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날 죽일 셈이에요?”성연신이 흠칫하며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는 게 지안 씨를 죽이려 하는 건가요? 난 지안 씨의 맘속에서 그런 사람밖에 안 되나요?”정욱
“아니요… 난 진현수를 좋아하지 않아요.”그녀의 영롱한 두 눈 가득 눈물이 흘렀다. 너무 불쌍했다.“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내 옆에 있으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전 연신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심지안이 눈을 꼭 감았다. 두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렀다.이 말을 할 때 그녀는 너무 아파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머릿속에 과거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성연신이 잘 대해줬던 것을 그녀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 실망이 쌓이자 사랑도 사라지게 되었다.그녀는 지금 무사하게 아기를 낳아 아기가 커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성연신은 멘붕이 왔다. 그는 손바닥을 꼭 맞잡았다. 답답한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그의 심장을 찔렀다.‘내가 사라져 준다면 그녀가 더 잘 살 수 있을까? 처음에는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여자가 나를 얻은 지금 이렇게 콧방귀를 낀다고?’성연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난처함이 발바닥으로부터 머리끝까지 몰려왔다.하지만 가슴 아픈 게 난처함보다 컸다.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살코기를 갉아 먹는 느낌이었다.정욱은 백미러를 쳐다봤다. 성연신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화가 났나? 아니면 슬픈 건가?’그는 알 수가 없었다.“차 세워.”성연신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정욱은 바로 차를 멈췄다.‘대표님께서 심지안 씨를 차에서 내리게 하려는 건가?’그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고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한적한 곳이었기에 여기서 내린다면 틀림없이 택시를 잡기 어려울 것 같았다. ‘심지안 씨는 지금 임신 중이고 몸도 허약해서 이곳에서 내리면 안 될 텐데.’여기까지 생각한 정욱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대표님 화 푸시고 무슨 일 있으시면 집으로 가서 다시 얘기하시죠…”“너만 입 있어?”성연신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욱을 바라봤다. 정욱은 벌벌 떨며 뒷말을 삼켰다.“지안 씨를 장원에 데려다줘.”“네?”정욱은 미
이번에 심지안은 입을 열었다.“나 때문에 라고요?”“저번에 비밀 조직의 사람이 지안 씨의 목숨을 노렸던 사건도 다행히 무사하게 넘어갔지만 비밀 조직에는 홍지윤 말고도 몇백 명의 킬러가 있습니다. 송석훈 그 사람은 사이코패스입니다. 대표님의 어머니를 찾지 못했으니 대표님에게 보복할 게 분명합니다. 지안 씨는 대표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비밀 조직이 지안 씨에게 손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지안 씨에게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 임시연에 대한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비밀 조직에 혼란을 주어 지안 씨를 보호하려고 하셨습니다. 대표님은 최선을 다해 지안 씨에게 잘해주고 있습니다.”심지안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이제는 상관없어요.”성연신이 누구를 사랑하든지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정욱은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안은 그가 말했던 신혼집에 도착했다.어둠 아래 장원은 엄청 커 보였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지만 심지안은 여전히 불안했다.낯선 환경 탓에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서움이 올라왔다.다행인 건 중정원에 있었던 도우미 몇 명도 그곳에 있었다.도우미들은 이미 이곳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녀에게 이곳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 줬다.심지안은 그 들의 소개를 더 들을 마음이 없었다.“제 방은 어디 있어요?”“사모님, 여기는 사모님과 대표님의 신혼집인데 더 둘러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네.”“대표님께서 신경을 쓰셨는데 너무 존중해 주지 않는 거 아닌가요?”“그럼 이모님께서 존중해 주세요.”심지안은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아 아무 방문이나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누웠다.낯선 환경 탓인지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았다.이때,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려왔다.“체. 너무 오만한 것 같아. 언젠가 대표님이 사모님에 관한 관심이 사라졌을 때도 사모님이 저렇게 오만하게 나올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그만해, 대표님
홍지윤이 그를 바라보며 반신반의하며 말했다.“정말 날 풀어줄 거예요?”“지윤 씨 생각에는요?”“난 백 퍼센트 믿을 수 없어요. 성연신 씨가 나에게 먼저 이득을 좀 주세요.”“지윤 씨는 나와 조건을 논의할 자격이 없어요.”홍지윤이 이를 악물었다.“그럼 나 말하지 않을래요.”홍지윤은 만약 자신이 다 말해도, 그가 번복한다면 그냥 놀아난다고 생각했다.말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가치가 있지 않은가.성연신은 기분도 별로 좋지 않은 상태라 그녀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홍지윤은 언젠가 입을 열게 돼 있었다.빨리 알게 되느냐 늦게 알게 되느냐 그 차이였다.장원.장소가 바뀐 탓에 심지안은 자는 내내 악몽을 꾸었다.꿈에서 그녀는 사거리 교차로에 서 있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어렴풋이 작은 그림자 하나가 보였고 그 그림자는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앳된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심지안은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불쌍한 마음에 말랑말랑한 아이를 안고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와! 엄마 절 버리지 말아요. 버리지 말아요. 흑흑흑…”왜인지 모르겠지만 배 속 아이는 깜짝 놀란 듯 엉엉 울었다.심지안은 처음으로 아기를 달래는 거라 경험이 없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아가, 배고파서 그래?”“흑흑흑, 엄마 절 떠나가지 말아요. 제발…”아기는 대답하지 않고 저 말만 반복했다.심지안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아기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하다가 천천히 사라졌다.아기는 울면서 그녀의 옷깃을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지만 언제 나타났었냐는 듯 아기는 사라졌다.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큰길에서 아이를 찾아 헤맸다.아침부터 저녁까지 찾았지만, 아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그녀는 막막하게 울면서 한 번 또 한 번 아이를 불렀다. 아이를 꼭 찾고 싶었다.“사모님, 아침밥 준비되었습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심지안은 꿈에서 깨어나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