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안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며칠간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하며 참고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해외에서 몸이 망가질 정도로 일에 심신을 다 바쳤다. 하지만 그 결과 남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도 모자라 이젠 밥도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충 옷을 걸친 다음 택시를 타고 심씨 가문 계열사 난진 그룹으로 향했다.그녀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마침 회의를 마친 사람들이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심연아는 심전웅의 등 뒤에서 일에 대한 궁금증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심전웅은 자애로운 얼굴로 대답해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보기 좋은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었다.심전웅은 지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토록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심지안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서러움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심연아가 앞에 서 있는 심지안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환히 웃으며 말했다.“지안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요즘 어디에 갔었던 거야?”심지안은 가식적인 그녀의 표정을 힐끗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심전웅에게 물었다.“왜 3개월 동안 저한테 월급을 주지 않은 거예요?”심지안의 질문에 심전웅의 얼굴이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180도 바뀌었다. 그는 심지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이유를 묻기 전에 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부터 생각해.”심지안이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다 얘기했잖아요. 오늘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건 제 탓이 아니라고요. 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전 어제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고 숙지했어요. 업무적으론 절대 착오가 없었어요. 상대방이 절 존중하지 않아 일이 틀어진 거예요.”그녀는 어제 링거를 맞으면서도 늦은 밤까지 자료를 읽었다. 일에 있어선 항상 누구보다도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그녀였으니 말이다.“네가 무슨 낯으로 어젯
그 말을 들은 심연아의 얼굴에 은밀한 흥분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심지안을 막아섰다.“지안아, 그런 충동적인 말은 하면 안 돼. 이곳은 네 집인데 그만두고 어디에 간다는 거야? 나한테 돈이 있으니까 퇴근하면 너한테 보내줄게. 그것으로 월급을 받았다고 생각해. 응?”“쟤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마! 나가고 싶으면 빨리 꺼져! 짜증 나게 눈앞에서 아른거리지 말고!”심지안이 절대 우 대표에게 사과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하고 나자 더더욱 화가 치솟아 오른 심전웅은 경비원을 부른 뒤 심연아의 팔목을 잡고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얼마 후 경비원이 달려와 나가지 않으면 끌고서라도 내보낼 기세로 심지안의 몸을 잡았다.“내 몸에 손대지 마. 나 혼자 나갈 수 있어!”그녀는 깊게 호흡하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한 걸음을 내디디며 밖으로 나갔다.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회사 문을 나서자마자 심연아를 찾아온 강우석과 마주쳤다.심지안의 어두운 얼굴을 본 강우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녀에게 충고랍시고 말했다.“너와 연아는 가문에서의 지위가 하늘과 땅 차이잖아. 넌 아저씨의 말에 군소리 없이 따라야지 맞서선 안 돼. 남자는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여자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넌 쓸데없이 너무 꼿꼿해.”심지안은 외모도 출중하고 능력도 있지만 집안의 도움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반평생을 노력해도 이렇다 할 집 한 채조차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가난함이라면 치를 떠는 강우석은 항상 부와 권세를 움켜주기를 갈망했다. 하여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줄 뒷배를 얻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였다.“얘기 다 끝났어?”심지안은 강우석 이 쓰레기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꺼져.”“너!”강우석은 냉정한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난 진심으로 널 돕고 싶어서 한 말인데 태도가 왜 그래?”“내가 언제 너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오지랖 부리지 마.”말을
진유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이제 없어. 너한테 알맞은 자리 하나가 있었는데 하필 오늘 직원을 구했거든. 하지만 보광 그룹 본부가 국내에 들어왔잖아. 우리 회사 근처에 있어. 나 며칠 전 인터넷에서 그 회사가 프랑스어 번역관을 구한다는 공고를 봤어. 너 프랑스어 잘하잖아, 자격증도 있고. 분명 그곳에 취직할 수 있을 거야. 한 번 도전해보지 않을래?”심지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몇 년 전 바닥을 쳤다가 기사회생한 보광 그룹을 말하는 거야?”“맞아. 거기야!”그녀는 손가락으로 북쪽 고층건물을 가리켰다.“저기야, 가깝지? 월급도 꽤 높은 걸로 알고 있어. 네가 저기에 출근하면 우리 매일 함께 퇴근하면서 술 한잔해도 되겠네!”심지안이 진유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의 중심에 자리한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에 금색으로 새겨진 ‘보광 그룹’ 네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5년 전 보광 그룹은 투자 실패로 인해 파산에 이르기 직전까지 몰락했다. 그 후 돌연 미스터리한 누군가가 보광 그룹을 맡았지만 워낙 명성이 없었던 사람인지라 업계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다들 그 어리석은 애송이 놈이 회사를 완전히 말아먹을 거라고 혀를 찼었다.하지만 1년 후, 그 사람은 전세를 뒤집어 사업상의 모든 문제를 깔끔히 해결한 뒤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로 인해 금융 천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그녀는 그토록 능력 있는 리더 밑에서 일하게 된다면 분명 난진 그룹에서보다 훨씬 더 큰 발전을 이룩할 거라 생각했다.하지만...심지안이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내 전공은 금융 쪽이 아니잖아. 들어갈 수 있을까?”“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심지안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카드 잔액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집에 돌아가 이력서를 제출해야겠어.”심지안은 진유진과 함께 저녁밥을 먹은 뒤 버스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가니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레이색 잠옷을 입은 성연신이 밥상에 앉아 우아한 자
성연신의 옆모습은 준수하면서도 차가움이 묻어났다.“아니요.”“아...”심지안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여기고는 그 일에 더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몸이 다 드러나는 옷밖에 없어요?”성연신이 돌연 퉁명스럽게 물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종아리까지 오는 길이의 치마를 내려다보았다.“이게 뭐가 짧아요?”“목 쪽.”심지안은 어이가 없었다.“... 쇄골만 나왔을 뿐인데...”강우석의 삼촌은 그와 여덟 살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보수적일 줄이야.“지금은 괜찮아요. 하지만 엎드리면?”성연신이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심지안은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 그 문소리의 내막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쑥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엎드려도 제 방에서 엎드린 거잖아요... 설마 불순한 의도로 절 훔쳐보기라도 한 거예요?”성연신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덤덤히 말했다.“미안해요. 난 D컵 정도는 돼야 좋아하거든요.”그 말인즉슨 심지안은 그의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얘기였다.순간 심지안은 얼굴은 물론이고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몹쓸 남자가 지금 그녀의 가슴이 작다고 비웃는 건가?말문이 막힌 심지안은 일그러진 얼굴로 도도하고도 우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성연신을 쳐다보았다. 장인이 조각한 듯한 그의 얼굴은 마치 하느님이 빚어낸 가장 완벽한 예술작품 같았다.그녀는 그가 독한 혀를 갖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뻔뻔스럽기까지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가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아침.심지안이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을 때 보광 그룹 인사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심지안 씨, 안녕하세요. 오늘 오후 면접 보러 오실 수 있으세요? 괜찮다면 면접 약관을 메일로 보내드릴게요.”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벌떡 차리고 대답했다.“시간 돼요! 반드시 제시간에 도착할게요. 그럼 오후에 봬요.”심지안은
면접을 보기 전에 먼저 필기시험을 봐야 했다.필기시험은 그녀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시험지를 바치고 연설아의 옆을 지나가던 그녀는 연설아가 아직도 시험지의 대부분 문제를 답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조급한 기색이라곤 없이 방금 한 네일을 감상하고 있었다.심지안은 왠지 이번 면접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기시험 결과 그녀는 합격하지 못했고 거의 최저점을 맞았다.“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낮은 점수를 받았을 리가 없어!”심지안은 면접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시험지를 공개하고 틀린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시기 바랍니다.”중간에 앉은 면접관 연봉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면접관마다 합격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건 하나 있어요. 과정이 어떻든 점수가 낮으면 불합격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 당장 보광 그룹에서 나가요. 다른 면접자들의 귀한 시간을 뺏지 말고요.”“전 단지 공정과 공평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다른 면접자들의 시간이 귀한 건 맞지만 저의 시간도 함부로 낭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심지안은 허리를 곧게 펴고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옆에 있던 면접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다들 그녀가 왜 이토록 과하게 흥분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연설아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다렸고 동영상을 촬영하여 심연아에게 보내려고 했다.심지안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연설아의 짓이라는 걸 알아챘다. 심지안을 내쫓은 면접관과 그녀에게 점수를 준 면접관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 면접관이 그녀가 받아들일 만 한 이유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줬더라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에서 2년을 살았고 프랑스어 C2 등급까지 땄다.보광 그룹에 인재가 많아 면접까지 통과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최저점을 줬다는 건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연설아가 중간에서 음모를 꾀하는
오늘 인사팀에 면접이 있다던 일이 떠올랐다. 정욱은 불합격한 면접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력서를 버리려는데 성연신이 그를 불렀다.“잠깐.”익숙한 이름을 들은 성연신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력서를 보았다.상업 빌딩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단독 사무실, 인사팀 매니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면접자들의 정보 자료를 대표 사무실의 비서 실장에게 건넸다.정욱은 자료를 받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인사팀 매니저는 까치발까지 하며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섰다.“심지안 씨에 대해 좀 알아봐.”성연신이 싸늘한 얼굴로 분부했다.“네, 지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일 처리가 빠른 정욱은 십 분도 채 안 되어 심지안의 정보를 찾아냈다.“대표님, 심지안이라는 사람 정말 있더라고요. 그런데 1차에서 떨어졌어요.”성연신은 길고 말끔한 손가락으로 잔뜩 구겨졌던 이력서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이분 경력으로는 1차에서 떨어질 리가 없겠는데.”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정욱이 이력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프랑스어 C2 등급이면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리가 없어요.”프랑스어 C2 등급을 딴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30대지만 심지안은 기껏해야 24살 정도 돼 보였다. 그녀처럼 젊고 유능한 인재야말로 보광 그룹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성연신은 손가락으로 리듬 있게 테이블을 톡톡 치며 뭔가 고뇌에 빠진 듯했다.‘이 세상에 정말 이런 우연이 있다고?’어떤 사람은 평생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데 그와 심지안은 안 지 나흘 만에 부부가 되었고 심지어 그녀가 보광 그룹에 면접까지 보러 왔다. 정말 아무런 목적도 없단 말인가?정욱은 성연신의 옆에서 수년간 일해왔지만 여전히 그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대표님, 한번 자세히 알아볼까요?”“응.”성연신은 깍지를 낀 손을 가슴 앞에 내려놓고는 잠깐 멈칫했다.“그리고 면접에 왜 불합격했는지도 알아봐.”...오후 4시, 정
하지만 프랑스어 C2 등급을 취득하고 게다가 젊고 스트레스 관리도 잘하는 사람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금 젊은이들은 쩍하면 일을 그만뒀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대표님께서 인재를 아끼시는 거겠지?’연봉기는 해고 통보를 받던 그때 한창 사무실에서 유유자적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인사팀 매니저가 해고 통지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는 순간 그는 한참 동안 넋을 놓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지금 장난해요? 내가 보광 그룹에서 15년이나 일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잘라도 돼요?”인사팀 매니저와 연봉기는 지금까지 줄곧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사팀 매니저가 우쭐거리며 말했다.“그건 내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대표님의 뜻입니다.”대표라는 소리에 연봉기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졌다.“자르는 건 되지만 나한테 해고 이유와 배상을 줘야 할 겁니다.”“배상 같은 건 없어요.”인사팀 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이유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많은 일에는 이유가 없죠. 예를 들어 오늘 연봉기 씨가 프랑스어 C2 등급인 면접자한테 아무 이유 없이 최저점을 준 것처럼 말이에요.”연봉기는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 계집애한테 든든한 배후가 있었으니 그렇게 나댔지.’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기 전 인사팀 매니저는 문득 뭔가 떠오른 척하며 말했다.“아 참, 조카분한테도 내일 회사로 출근할 필요 없다고 전해줘요.”연설아는 한창 내일 입사 첫날에 입을 옷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예쁜 옷들을 전부 꺼내 입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이것저것 입어 보던 그때 연봉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작은아버지는 보광 그룹의 원로급인데 어떻게 해고당할 수 있어요? 나랑 걔는 그냥 보통 친구예요. 걔 집안도 아무 배경이 없다고요. 정말이에요,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한테 거짓말한 거 없어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여보세요? 작은아버지, 끊지 말아요!”연설아가 다급하게 뭐라 얘기하려 했지만 연봉기는 가차 없이 전
성연신이 일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땐 벌써 밤 9시가 다 되었다. 별장 안은 등도 켜지 않은 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고 심지안의 방 앞을 지나가던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심지안의 갈라진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잠깐만요.”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틈 사이로 빛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잠시 후 심지안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평소 밝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눈시울도 붉은 걸 보니 한참 동안 운 게 틀림없었다.성연신은 생기가 없는 심지안의 이런 모습이 싫었다. 마치 폭풍우를 맞은 꽃송이처럼 잔뜩 시들어있었다.“울었어요?”심지안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아니요.”“나 눈 안 멀었어요.”그와 말씨름할 기분이 아니었던 심지안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무슨 일로 날 불렀어요?”성연신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덤덤하게 대답했다.“별일은 아니고 나 지금 밥 먹으려는데 지안 씨도 먹을래요?”그녀는 그가 예의상 물어본 줄로 생각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데 이 시간에 아주머니를 부른다고? 자본가의 돈을 벌기 참 쉽지 않네.’성연신은 아무런 표정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심지안도 방문을 닫고 어릴 적 엄마가 사준 곰 인형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곰 인형에 자신의 그리움을 털어놓다가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얼마 정도 잤을까, 갑자기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그녀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꼬르륵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심지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주방.성연신은 잠옷 차림으로 잘게 썬 파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위에 뿌렸다. 계단 모퉁이에서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그녀를 본 성연신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심지안은 주걱으로 능숙하게 계란 후라이를 뒤집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요리할 줄도 알았어? 그냥 국수인 것 같은데 엄청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