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을 보기 전에 먼저 필기시험을 봐야 했다.필기시험은 그녀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시험지를 바치고 연설아의 옆을 지나가던 그녀는 연설아가 아직도 시험지의 대부분 문제를 답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조급한 기색이라곤 없이 방금 한 네일을 감상하고 있었다.심지안은 왠지 이번 면접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기시험 결과 그녀는 합격하지 못했고 거의 최저점을 맞았다.“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낮은 점수를 받았을 리가 없어!”심지안은 면접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시험지를 공개하고 틀린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시기 바랍니다.”중간에 앉은 면접관 연봉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면접관마다 합격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건 하나 있어요. 과정이 어떻든 점수가 낮으면 불합격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 당장 보광 그룹에서 나가요. 다른 면접자들의 귀한 시간을 뺏지 말고요.”“전 단지 공정과 공평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다른 면접자들의 시간이 귀한 건 맞지만 저의 시간도 함부로 낭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심지안은 허리를 곧게 펴고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옆에 있던 면접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다들 그녀가 왜 이토록 과하게 흥분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연설아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다렸고 동영상을 촬영하여 심연아에게 보내려고 했다.심지안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연설아의 짓이라는 걸 알아챘다. 심지안을 내쫓은 면접관과 그녀에게 점수를 준 면접관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 면접관이 그녀가 받아들일 만 한 이유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줬더라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에서 2년을 살았고 프랑스어 C2 등급까지 땄다.보광 그룹에 인재가 많아 면접까지 통과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최저점을 줬다는 건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연설아가 중간에서 음모를 꾀하는
오늘 인사팀에 면접이 있다던 일이 떠올랐다. 정욱은 불합격한 면접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력서를 버리려는데 성연신이 그를 불렀다.“잠깐.”익숙한 이름을 들은 성연신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력서를 보았다.상업 빌딩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단독 사무실, 인사팀 매니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면접자들의 정보 자료를 대표 사무실의 비서 실장에게 건넸다.정욱은 자료를 받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인사팀 매니저는 까치발까지 하며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섰다.“심지안 씨에 대해 좀 알아봐.”성연신이 싸늘한 얼굴로 분부했다.“네, 지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일 처리가 빠른 정욱은 십 분도 채 안 되어 심지안의 정보를 찾아냈다.“대표님, 심지안이라는 사람 정말 있더라고요. 그런데 1차에서 떨어졌어요.”성연신은 길고 말끔한 손가락으로 잔뜩 구겨졌던 이력서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이분 경력으로는 1차에서 떨어질 리가 없겠는데.”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정욱이 이력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프랑스어 C2 등급이면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리가 없어요.”프랑스어 C2 등급을 딴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30대지만 심지안은 기껏해야 24살 정도 돼 보였다. 그녀처럼 젊고 유능한 인재야말로 보광 그룹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성연신은 손가락으로 리듬 있게 테이블을 톡톡 치며 뭔가 고뇌에 빠진 듯했다.‘이 세상에 정말 이런 우연이 있다고?’어떤 사람은 평생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데 그와 심지안은 안 지 나흘 만에 부부가 되었고 심지어 그녀가 보광 그룹에 면접까지 보러 왔다. 정말 아무런 목적도 없단 말인가?정욱은 성연신의 옆에서 수년간 일해왔지만 여전히 그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대표님, 한번 자세히 알아볼까요?”“응.”성연신은 깍지를 낀 손을 가슴 앞에 내려놓고는 잠깐 멈칫했다.“그리고 면접에 왜 불합격했는지도 알아봐.”...오후 4시, 정
하지만 프랑스어 C2 등급을 취득하고 게다가 젊고 스트레스 관리도 잘하는 사람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금 젊은이들은 쩍하면 일을 그만뒀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대표님께서 인재를 아끼시는 거겠지?’연봉기는 해고 통보를 받던 그때 한창 사무실에서 유유자적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인사팀 매니저가 해고 통지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는 순간 그는 한참 동안 넋을 놓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지금 장난해요? 내가 보광 그룹에서 15년이나 일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잘라도 돼요?”인사팀 매니저와 연봉기는 지금까지 줄곧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사팀 매니저가 우쭐거리며 말했다.“그건 내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대표님의 뜻입니다.”대표라는 소리에 연봉기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졌다.“자르는 건 되지만 나한테 해고 이유와 배상을 줘야 할 겁니다.”“배상 같은 건 없어요.”인사팀 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이유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많은 일에는 이유가 없죠. 예를 들어 오늘 연봉기 씨가 프랑스어 C2 등급인 면접자한테 아무 이유 없이 최저점을 준 것처럼 말이에요.”연봉기는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 계집애한테 든든한 배후가 있었으니 그렇게 나댔지.’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기 전 인사팀 매니저는 문득 뭔가 떠오른 척하며 말했다.“아 참, 조카분한테도 내일 회사로 출근할 필요 없다고 전해줘요.”연설아는 한창 내일 입사 첫날에 입을 옷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예쁜 옷들을 전부 꺼내 입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이것저것 입어 보던 그때 연봉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작은아버지는 보광 그룹의 원로급인데 어떻게 해고당할 수 있어요? 나랑 걔는 그냥 보통 친구예요. 걔 집안도 아무 배경이 없다고요. 정말이에요,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한테 거짓말한 거 없어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여보세요? 작은아버지, 끊지 말아요!”연설아가 다급하게 뭐라 얘기하려 했지만 연봉기는 가차 없이 전
성연신이 일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땐 벌써 밤 9시가 다 되었다. 별장 안은 등도 켜지 않은 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고 심지안의 방 앞을 지나가던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심지안의 갈라진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잠깐만요.”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틈 사이로 빛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잠시 후 심지안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평소 밝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눈시울도 붉은 걸 보니 한참 동안 운 게 틀림없었다.성연신은 생기가 없는 심지안의 이런 모습이 싫었다. 마치 폭풍우를 맞은 꽃송이처럼 잔뜩 시들어있었다.“울었어요?”심지안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아니요.”“나 눈 안 멀었어요.”그와 말씨름할 기분이 아니었던 심지안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무슨 일로 날 불렀어요?”성연신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덤덤하게 대답했다.“별일은 아니고 나 지금 밥 먹으려는데 지안 씨도 먹을래요?”그녀는 그가 예의상 물어본 줄로 생각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데 이 시간에 아주머니를 부른다고? 자본가의 돈을 벌기 참 쉽지 않네.’성연신은 아무런 표정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심지안도 방문을 닫고 어릴 적 엄마가 사준 곰 인형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곰 인형에 자신의 그리움을 털어놓다가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얼마 정도 잤을까, 갑자기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그녀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꼬르륵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심지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주방.성연신은 잠옷 차림으로 잘게 썬 파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위에 뿌렸다. 계단 모퉁이에서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그녀를 본 성연신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심지안은 주걱으로 능숙하게 계란 후라이를 뒤집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요리할 줄도 알았어? 그냥 국수인 것 같은데 엄청
“경비원?”이 얘기는 비서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경비원마저 이 일과 연관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심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을 생각하니 억울한 감정이 또다시 밀려왔다. 그녀는 옷소매를 거두고 다친 상처를 그에게 보여주었다.“이것 봐요. 경비원이 긁어놓은 상처예요. 종아리에도 있어요.”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에 딱지가 앉은 상처가 두 군데 있었다. 마치 값비싼 예술품에 스크래치라도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보광 중신의 흉을 계속 듣던 성연신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 심지안은 억울했던 기분을 다 토해내고 나서야 성연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그를 콕콕 찔렀다.“왜 그래요?”‘설마 보광 중신의 대표랑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아무것도 아니에요.”“네...”성연신이 고개를 내리뜨리며 감정을 거두었다.“일찍 자요. 설거지 잊지 말고요.”“알았어요.”심지안은 그가 밥을 했으니 자신이 설거지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심씨 저택, 밤이 깊어졌지만 여전히 불이 환히 밝혀있었다.심전웅이 의자에 앉아 반신반의하며 물었다.“누군가 지안이를 위해 나선 바람에 보광 중신의 면접관이 해고당한 게 확실해?”심연아가 그의 옆에 앉아 팔을 잡아당겼다.“정말이에요. 안 그러면 무슨 이유겠어요? 이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 리가 없어요. 지안이가 오르지 말아야 할 나무에 오른 게 틀림없어요.”“고작 걔 주제에?”심전웅이 하찮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그 귀한 분들이 바보도 아니고.”딱 봐도 가족을 속이고 밖에 내연녀를 둔 상황인 게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이런 일이 상류층에서는 그리 희한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물론 심지안은 밖에서 몰래 만나는 내연녀일 것이고.“아빠, 지안이가 잘못된 길을 가게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내일 지안이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요.”은옥매가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사회가 험악해서 귀한 분들의 돈도 쉽게 얻어쓰지 못해요.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는데 어떤 한 젊은 내연
원래 경비원 대신 생김새가 단정한 젊은이로 바뀌었는데 전혀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심지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녀가 길을 잃은 줄 알고 먼저 다가와 물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면접 보러 왔어요.”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면접 보러 왔을 때 경비원님을 본 적이 없는데 혹시 교대 근무인가요?”“저 어제까지 창고에서 일하다가 오늘 이쪽으로 발령받았어요.”“그럼 전에 이곳에서 일하던 경비원은요?”심지안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비원은 화들짝 놀라더니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에 심지안은 모든 걸 알아챘고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해고당했나 보네.’처음에 그녀는 보광 그룹의 높은 연봉 때문에 지원했지만 지금 보니 관리 임원분들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자기 사람이라도 감싸고 돌진 않으니 말이다.어제 소동이 있고 난 뒤 오늘 재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 많지 않아 과정이 빨리 진행됐다.필기시험을 순조롭게 통과한 심지안은 곧장 면접 보러 갔다. 면접이 끝났을 때 벌써 오후가 되었다.“심지안 씨, 보광 중신의 면접에 참석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면접은 끝났고 면접 결과는 내일 메일로 통지할 겁니다.”“네, 감사합니다.”보광 그룹을 나선 심지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이거야말로 대기업의 면접이지. 어제는 정말 개판이었어.’건물 사무실.성연신이 창가 앞에 서 있었다.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어 더욱 훤칠해 보였고 안에는 단정하게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검은 긴바지가 그의 곧고 기다란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앞머리 밑의 그윽한 두 눈에 쉽게 다가가지 못할 싸늘함이 담겨있었다.그는 건물 아래의 미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비서 실장이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셨다.“대표님, 심지안 씨 방금 면접 보고 가셨습니다. 인사팀에서 심지안 씨 조건이 괜찮다면서 내일 아침에 면접 합격 통지
심연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심연아의 도움으로 연설아는 연예 뉴스 기자와 연락이 닿았고 돈을 내고 댓글 아르바이트까지 구했다.그날 오후.심지안은 인터넷 동영상을 보며 요리를 배웠다. 성연신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주방에서 앞치마를 입고 영상에서 가르치는 대로 팬에 각종 양념을 넣는 심지안을 발견했다.“밥할 줄 모르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음식은 먹는 거지, 낭비하는 게 아니에요.”배달이든 괴상한 요리든 그는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았다.심지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더니 예쁜 얼굴로 히죽 웃었다.“낭비 안 해요. 이번에는 맛이 꽤 괜찮아요.”성연신은 그녀가 말한 맛이 꽤 괜찮다는 요리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그냥 혼자 먹어요. 배탈 나면 구급차 부르고요.”“내 체면 좀 살려줘요. 이번에는 진짜 지난번보다 훨씬 맛있어요.”“먹고 싶지 않아요.”성연신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내가 얘기했었잖아요. 돈 말고는 당신이 원하는 거 줄 수 없다고요.”심지안이 움직이던 두 손을 멈추었다.“알아요. 난 그냥 어제 연신 씨가 국수를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하려는 것뿐이에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죠.”“마음대로 해요.”성연신은 아무런 표정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석양이 하늘을 벌겋게 물들였고 마지막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심지안의 얼굴을 밝게 비췄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흥, 안 먹겠으면 말아요. 나 혼자 먹을 테니까. 배고파 죽든 말든 상관 안 해요!”한 시간이나 고생한 끝에 그녀는 반찬 세 개와 찌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심지안은 굳게 닫힌 2층 서재 문을 올려다보며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올라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밥이 다 됐는데 정말 안 먹을 거예요?”하지만 방안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자요? 신이 씨?”성연신은 이마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방문을 열고는 심지안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당황함과 어색함이 뒤섞인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당신이 한 밥 안
성연신은 그녀에게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없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위층에서 카드 한 장을 가져와 심지안에게 건넸다.“이건 내 카드인데 앞으로 필요한 생활비랑 쇼핑하고 싶을 때 이 카드로 긁어요.”심지안은 채소를 사는데 돈이 얼마 들지 않는다고 얘기하려다가 자신이 백수라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고 카드를 받았다.“알았어요.”“장 보고 싶으면 오카마트로 가요. 거기 물건이 신선해요.”“그런데 수입 마트는 너무 비싸요. 작은 배추 한 포기도 몇만 원씩 하더라고요.”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시장에서 사면 엄청 싸요. 게다가 농장에서 당일에 딴 거라 싱싱해요.”“난 지금 분부하는 거예요, 상의하려는 게 아니라.”배가 부른 성연신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지안 씨 임무는 나를 도와서 집안 어른들을 해결하는 것이지, 현모양처 노릇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배역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요.”심지안은 그를 째려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수입 마트는 뭐 달라? 외국 물건이라면 다 좋은 줄 아나. 그거 먹으면 뭐 불로장생이라도 할 수 있어?’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난 그냥 연신 씨 돈을 아끼려고 그러는 거죠.”“난 돈이 부족하지 않으니까 아낄 필요 없어요.”성연신은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았다.“시간 나면 옷도 몇 벌 사요. 주말에 나랑 같이 할아버지 뵈러 가요.”심지안은 앞치마 밑의 치마를 보여주며 말했다.“지금 입고 있는 거 입으면 안 돼요? 그때 200만 원이나 주고 샀단 말이에요.”“중요한 자리에 갈 때 작년 디자인을 입으면 안 돼요.”심지안이 애써 웃는 척 말했다.“알았어요...”어차피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고 돈도 그의 돈을 쓰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설거지를 마친 심지안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화면에 딩동 하고 메일 알림이 떴다. 확인해보니 보광 중신에서 보낸 면접 합격 메일이었다. 드디어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심지안은 너무도 흥분되어 늦은 밤까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