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은 그녀에게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없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위층에서 카드 한 장을 가져와 심지안에게 건넸다.“이건 내 카드인데 앞으로 필요한 생활비랑 쇼핑하고 싶을 때 이 카드로 긁어요.”심지안은 채소를 사는데 돈이 얼마 들지 않는다고 얘기하려다가 자신이 백수라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고 카드를 받았다.“알았어요.”“장 보고 싶으면 오카마트로 가요. 거기 물건이 신선해요.”“그런데 수입 마트는 너무 비싸요. 작은 배추 한 포기도 몇만 원씩 하더라고요.”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시장에서 사면 엄청 싸요. 게다가 농장에서 당일에 딴 거라 싱싱해요.”“난 지금 분부하는 거예요, 상의하려는 게 아니라.”배가 부른 성연신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지안 씨 임무는 나를 도와서 집안 어른들을 해결하는 것이지, 현모양처 노릇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배역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요.”심지안은 그를 째려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수입 마트는 뭐 달라? 외국 물건이라면 다 좋은 줄 아나. 그거 먹으면 뭐 불로장생이라도 할 수 있어?’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난 그냥 연신 씨 돈을 아끼려고 그러는 거죠.”“난 돈이 부족하지 않으니까 아낄 필요 없어요.”성연신은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았다.“시간 나면 옷도 몇 벌 사요. 주말에 나랑 같이 할아버지 뵈러 가요.”심지안은 앞치마 밑의 치마를 보여주며 말했다.“지금 입고 있는 거 입으면 안 돼요? 그때 200만 원이나 주고 샀단 말이에요.”“중요한 자리에 갈 때 작년 디자인을 입으면 안 돼요.”심지안이 애써 웃는 척 말했다.“알았어요...”어차피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고 돈도 그의 돈을 쓰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설거지를 마친 심지안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화면에 딩동 하고 메일 알림이 떴다. 확인해보니 보광 중신에서 보낸 면접 합격 메일이었다. 드디어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심지안은 너무도 흥분되어 늦은 밤까
두 사람의 오고 가는 대화를 들은 후 심지안을 쳐다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재산을 더 많이 나눠 가지기 위해 막무가내로 아버지와 싸우는 그런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심지안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앙다물었다.“변호사한테 늦게 오라고 하세요.”“안 돼. 변호사가 얼마나 바쁜 분인데 널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어.”그녀가 내릴 생각이 없어 보이자 심전웅은 그냥 가려 했다.“시간이 없으면 내가 대신 먼저 관리하다가 나중에 네가 시집갈 때 줄게.”“아니요! 같이 가요.”그녀는 황급히 말을 바꾸고 심전웅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일도 물론 중요했지만 어머니가 남긴 물건이야말로 그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심전웅이 그녀를 협박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가져오지 못하면 앞으로는 더 어려워진다.이따가 보광 그룹 인사팀에 상황을 설명하고 입사를 하루 미루거나 오늘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얘기해야겠다. 만약 상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갑자기 약속을 어긴 건 그녀이기에 남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심전웅이 길옆에 세워져 있는 차에 올라타고는 심지안이 손에 꽉 쥐고 있는 휴대 전화를 힐끔거렸다.“변호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집에 가서 얘기하자.”차 양 쪽에서 지키고 있는 경호원을 본 심지안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경호원은 왜 데리고 나왔어요?”“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어디 다녀오느라고 그랬어. 얼른 타, 시간 지체하지 말고.”심지안은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전웅이 아무리 그녀를 미워한다고 해도 백주대낮에 그녀를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네.”심지안도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녀가 제대로 앉기도 전에 차가 출발해버렸다. 심지안은 몸을 비틀거리며 겨우 제대로 앉았다. 심전웅에게 어머니가 남긴 혼수에 관하여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그녀는 재빨리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요! 내려야겠어요.
“네 능력이 어떤지 아니까 그만두라고 하는 거야. 우리 회사랑 보광 그룹 같은 대기업이 비교가 돼?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 아니야?”심지안은 제자리에 멍하니 선 채 휴대 전화만 꽉 쥐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심전웅의 편애가 심해 진작 적응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고 심전웅도 누리꾼들과 같은 편에 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어렸을 적부터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바로 심연아에 대한 심전웅의 칭찬과 격려였다. 그녀는 마치 남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심전웅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의 휴대 전화를 확 빼앗아갔다. 심지안이 휴대 전화를 다시 가져오려 했지만 경호원에게 제압당해 꼼짝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반항하는 도중에 심전웅은 그녀의 휴대 전화에서 보광 그룹 HR의 연락처를 찾아내 사직하겠다는 문자를 보낸 후 휴대 전화를 꺼버렸다.“당신은 제 아빠예요. 아빠라는 사람이 딸이 잘되는 게 그렇게 싫어요?”도무지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심지안은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렸다.“그만해! 난 네가 망신당하는 걸 막으려는 거야!”심전웅이 버럭 화를 내더니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얘를 집에 가둬서 집 밖에 나오지 못 하게 해.”그러고는 차에서 내렸다. 당황한 심지안이 여러 번이고 차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30분 후, 심씨 저택에 도착한 심지안은 그대로 방에 버려졌고 그녀가 도망갈까 봐 문까지 걸어 잠갔다....보광 그룹 HR은 문자를 받자마자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꺼진 상태였다.“수진 언니, 안 오겠다면 그냥 내버려 둬요. 연 전무님까지 내쫓을만한 능력을 지닌 분을 걱정해서 뭐 해요?”“그러게 말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상사가 될지도 몰라요.”“하하하. 그럼 회사의 능구렁이 같은 임원들이 가만히 있겠어요?”보광 그룹의 HR은 그들과 달리 성숙한 여성이었고 이름은 오수진이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화들짝 놀란 성연신은 컴퓨터에 대고 몇 마디 얘기한 후 회의를 마쳤다. 그가 다리를 꼬며 차분하게 물었다.“이유는?”“그건 잘 모르겠어요. 인사팀 얘기로는 심지안 씨가 출근 시간이 거의 될 때쯤에 출근 안 하겠다는 문자만 보내고 소식이 뚝 끊겼답니다.”성연신은 심지안이 아침에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비춰보는 모습을 떠올렸다.“전화해봤대?”“했는데 꺼져있대요.”그녀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연신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회사에 지원한 것도 그녀이고 갑자기 안 오겠다고 하는 것도 그녀였다.단지 표정만으로 대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던 정욱은 휴대 전화를 꺼내 실시간 검색어를 그에게 보여주었다.“다른 일이 하나 더 있어요. 아무래도 연봉기가 해고당한 게 억울한지 인터넷에 손을 쓴 것 같아요.”성연신은 기사를 대충 훑어보더니 십분의 일도 채 읽지 않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심지안 씨가 여론 때문에 안 온 거 아닐까요? 인사팀에서 심지안 씨네 집에 사람을 보내 상담해주는 건 어떤지 여쭤보더라고요. 어쨌거나 보광 그룹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요.”“보광 그룹이 필요한 건 프랑스어 통역사지, 심지안 씨가 아니야.”성연신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재면접을 보게 한 건 심지안 씨한테 기회를 준 거야.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몇몇 댓글 때문에 일자리를 포기한다면 멘탈이 너무 약해. 앞으로 함께 일을 하면서도 엄살을 부릴 수 있어.”지금 젊은이들은 성적이 조금만 높아도 제 분수를 모르고 높은 곳만 바라본다.정욱이 멋쩍게 물었다.“그럼 이 일은 신경 쓰지 말란 말씀입니까?”“그래. 평소 하던 대로 처리해.”그의 시선은 줄곧 컴퓨터 화면에만 머물러있을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오늘 회사에 별다른 일이 없어 성연신은 제시간에 퇴근한 후 별장으로 돌아갔다. 텅 빈 집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신발장에 놓여있는 여성용 슬리퍼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맨날 집에 있지도 않으면서 밥을 해주겠다고?’아직 배가 고프지 않았던 성연신은 위층으로 올라가 샤
심지안이 아무런 표정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언니 엄마가 내연녀인 걸 알았을 때도 창피한 줄 모르더니만.”심연아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옷장을 어루만졌다.“너 기억나? 이 옷장 원래 내 방에 있던 건데 네 옷장이 더 이뻐 보여서 아빠한테 바꿔 달라고 했어. 이 집안의 모든 게 다 내 것인데 엄마가 내연녀면 뭐? 그래도 안주인이 됐잖아.”출발이 늦어도 충분히 다채롭게 살 수 있다.심지안의 어머니는 명문가의 규수였지만 심전웅과 함께하기 위해 부모님과 등까지 돌렸다. 그런데 결국 심전웅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고작 옷장 하나 빼앗은 거 갖고 우쭐거리기는.”심지안은 그녀를 한껏 조롱하며 웃었다.“옷장 얘기하니까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네. 새 옷장이랑 낡은 옷장을 바꾸는 바보가 어디 있어.”그녀는 강우석 같은 인간쓰레기를 마치 보물인 것처럼 아꼈다.심연아의 낯빛이 사색이 되더니 뭔가 떠올랐는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가슴을 쭉 폈다.“자기가 가지지 못하니까 마음이라도 위로하려고 그러는 거 알아.”“그딴 건 가지고 싶지도 않아. 언니랑 언니 엄마는 똑같아. 대놓고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지.”드디어 화가 난 심연아가 손을 들고 그녀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심연아가 손을 들 거라고 진작 예상한 심지안은 옆으로 피하면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세게 확 잡아당겼다.‘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 우르르 떨어졌고 심연아도 바닥에 넘어졌다.그녀의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고 예쁜 원피스에도 먼지가 묻은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심연아가 목적에 달성했다는 듯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너 이제 끝났어.”그러고는 곧장 심전웅에게 고자질하러 달려갔다. 방을 나가면서 방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심연아가 나가는 동시에 심지안은 민첩하게 창문을 열었다. 일부러 심연아의 화를 돋우어 그녀가 나간 틈에 도망치려는 계획이었다. 바닥 잔디와의 높이가 약 3m 정도 되었다. 심지안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두 눈을 감고 펄쩍 뛰어내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도 돼요.”심지안은 마음이 따뜻해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평소에는 엄청 사납더니 이럴 때는 또 따뜻한 사람이네요...”“뭐라고요?”“아무것도 아니에요!”성연신이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방금 지안 씨를 쫓아온 두 사람이 지안 씨 부모님이에요?”“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핸들을 잡은 성연신의 두 손이 멈칫했다. 심지안의 개인 정보를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버지는 계시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까 두 분이 아무래도 그녀의 아버지와 새엄마인 모양이다.그동안 집에서 잘 지내진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집안일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다.차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심지안은 눈을 내리뜨리고 차 안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마치 버려진 반려동물처럼 속상하지만 아무 소리도 내질 못했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온 성연신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출근은 왜 안 했어요?”“갑자기 일이 생겨서요.”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다 찾은 일자리를 놓치고 말았어요.”“인터넷에 떠도는 것 때문에 그래요?”“연신 씨도 그 기사 봤군요...”심지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할 짓이 없이 근거 없는 말로 남을 헐뜯는 사람이 참 많더라고요. 난 당당하니까 전혀 두려울 게 없어요. 난 고작 그딴 거 때문에 출근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에요.”성연신이 그녀를 힐끗 보았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요?”“아니면요? 그런 걸로 흔들릴 사람 같아요?”심지안이 두 눈을 깜빡였다. 처음으로 그녀가 달리 보인 성연신이 가볍게 웃었다.예쁜 여자라면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그녀들은 대부분 연약하고 엄살이 심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미모를 믿고 쉬운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곤 했다. 하여 갖은 굴욕을 견디면서도 내연녀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처럼 근면 성실한 여자는 극히 드물었고 그런 여자들과는 아예 다른 과에 속했다.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성연신이 시동을 끄고 차
심지안이 몸을 파르르 떨며 두 눈을 떴다. 흐릿하던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바로 나가요!”다행히 어젯밤 심하게 삔 게 아니라서 조금 통증이 있는 것 외에는 걷는데 이상이 없었다.그녀는 신속하게 씻은 후 여성스러운 원피스로 갈아입고 성연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어때요? 이 옷 괜찮아요?”성연신의 두 눈이 반짝였다. 오늘 이 옷차림이 예쁜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보리 원피스가 단아함을 자아냈고 거기에 옅은 메이크업까지 하니 생기가 감돌았다. 연한 레드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마치 젤리처럼 탱글탱글한 게 한입 맛보고 싶은 충동마저 생겼다.하지만 옷이 너무 저렴해 보였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보신다면 잘해주지 못했다고 뭐라 하실 게 뻔했다.성연신은 아무 말 없이 심지안을 끌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다른 걸로 갈아입어요.”옷장 안에 비싼 명품 옷들이 가득 걸려있었고 서랍에는 눈을 떼지 못할 액세서리와 화장품이 가득했다.심지안은 너무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릴 적에는 용돈이 적었고 대학교에 가서 돈을 벌 능력이 생긴 후에야 명품이라는 걸 만져봤다. 강우석도 비싼 명품 선물을 준 적이 있어 명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것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옷장에 걸린 옷만 해도 수억이 훌쩍 넘었고 비싼 액세서리까지 더하면 상상도 못 할 금액일 것이다.“원래는 지안 씨한테 직접 가서 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도 없고 다리도 불편하니까 그냥 가져오라고 했어요. 지안 씨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할지 몰라서 아무거나 샀는데 한번 골라봐요. 여기 있는 거 다 마음에 안 들면 다리가 나은 후에 직접 가서 사요.”심지안이 숭배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신이 씨 돈이 이렇게나 많아요? 연신 씨가 너무 좋아요!”가끔 모진 말을 내뱉는 것 말고는 강우석보다 훨씬 나았다. 전에는 귀신에게 홀렸나, 왜 강우석의 가족 중에 이런 훌륭한 싱글남이 있는 걸
10분 후, 더는 추위를 견딜 수 없었던 심지안은 성연신의 옷소매를 살며시 잡아당기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나 너무 추운데 유리창 좀 닫으면 안 돼요?”그러자 성연신이 매너 있게 대답했다.“당연히 되죠.”그러고는 서백호에게 유리창을 닫으라고 했다.그의 두 눈에 비친 교활함이 이내 사라졌지만 심지안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성연신이 일부러 그녀에게 장난친 걸 알아차린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나한테 옷 사준 걸 생각해서 참는다 내가!’두 사람이 온다는 연락을 받은 성수광은 진작 문밖으로 나와 지팡이를 짚은 채 목이 빠져라 그들을 기다렸다.차 한 대가 단독 주택 앞에 멈춰 섰다. 심지안은 눈앞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며 의아해했다.강우석의 삼촌이 돈이 많긴 하나 금관성에서 손꼽히는 부자는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저택은 딱 봐도 수백억이 훌쩍 넘어 보였다.‘금융업이 돈을 이렇게나 많이 버나?’심지안이 나지막이 물었다.“혹시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집이에요?”“네. 지금까지 5대가 여기에 살았어요.”성연신이 대답했다.“네...”돈 많은 조상이 이 집을 산 거라면 이해가 되었다. 수백 년 전에 금관성에서 이런 집이 그리 비싸진 않았을 테니까.철거 보상금으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그 덕에 자손 몇 대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아이고. 드디어 기다리던 손주며느리가 왔구나.”성수광은 심지안을 보자마자 눈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그의 모습은 한없이 자애롭고 다정했다.심지안은 성연신이 미리 준비한 선물을 건네며 활짝 웃었다.“할아버지,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암, 마음에 들고말고. 무조건 마음에 들어.”성수광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다. 그런데 심지안의 발목의 상처를 본 순간 낯빛이 확 어두워지더니 성연신에게 버럭 화를 냈다.“너 이 녀석, 혹시 우리 지안이 괴롭혔어?”“연세가 드시니까 눈도 잘 안 보이시나 봐요? 제가 지안 씨를 괴롭혔다면 이렇게 가볍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