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에는 “오늘 밤 일이 있으니 기다리지 말거라”라고 쓰여 있었다.몇 년 동안 궁에서 일한 수로는 한눈에 황제의 필체라는 것을 알아봤다.그런데 황제가 누구에게 이 쪽지를 남겼을까?이튿날 아침.황제가 영소전을 떠나자 수로는 이 일을 귀비께 아뢰었다.귀비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설마 전에 폐하가 매일 밤 가신 곳이 장신궁이었느냐? 폐하를 기다리고 있는 자가 누구냐? 남자냐 여자냐? 그들… 그들 매일 밤 무엇을 하였느냐?”춘하가 급히 다가가 귀비를 타일렀다.“마마, 조급해하지 마십시오.”“볼일이 있어서 일 수도 있잖습니까?”“폐하께서 비밀리에 어떤 관원을 조사하고 있어서 매일 밤 누군가의 보고를 들을 수도…”춘하 자신도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귀비의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귀비는 안색이 창백했다.“본궁… 머리가 너무 아프다. 약을 가져오너라.”귀비 마마의 두통이 발작했다.춘하는 약을 가지러 가려다 문득 어제 태의의 말이 생각났다. 그 약은 더 이상 쓸 수 없어서 이미 다 처리해 버렸다고 했다.‘지금 마마의 두통이 이렇게 심한데 어쩜 좋아?’“당장 태의를 청하거라!”귀비는 두통뿐만 아니라 온몸이 아팠다.말에서 추락한 후 귀비는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뼈도 부서진 것만 같았다.태의는 바로 왔다. 하지만 귀비께 진통제를 처방하지 않고 그냥 참으며 견디라고 했다.귀비는 아파서 꽃병을 던졌다.“약! 본궁에게 약을 주시오!”“본궁이 이렇게 아픈 걸 보고만 있을 건가?”“윽… 머리 아파…”귀비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어제 봉합한 상처도 당기는 듯 아팠다.춘하는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아직 아침 조회중이라 춘하는 한참 기다려서야 말을 전했다.귀비가 많이 아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소욱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참으라 하거라.”참지 않고 진통제를 복용하면 진통제가 귀비 체내의 주혼산과 상호 작용하여 독소를 생성하게 되는데 그게 더 치명적이다.춘하는 황제에게 귀비를 보러 갈 수 없냐고 부탁하
서왕은 공손하고 온화하다. 평소에 친절하여 이번에 승마장 사고를 조사할 때 어마장의 노비들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그에게 알려줬다.“소신이 알아본 결과, 원래 승마장을 준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그날 갑자기 큰 병에 걸려 다른 사람으로 바꿨답니다.”“그날 승마장 청소를 책임진 사람이 내시 왕천해였습니다.”“사고 직후 왕천해는 그 돌들이 어디서 났는지 모른다고 우겼고, 한밤중에 뭔가를 나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조사에 혼선을 주려 했습니다.”“그런데 목격자에 의하면 마구 경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 왕천해는 매일 밤늦게야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마구 경기장에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이것만 봐도 왕천해가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서왕은 궁중의 일을 관리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단서를 찾자 바로 황제에게 보고했다.소욱은 바로 진한길에게 명령했다.“왕천해를 잡아서 엄하게 심문하거라!”“분부 받자옵겠습니다.”진한길이 어마장에 도착했을 때 왕천해는 이미 호위에게 잡혀있었다.호위는 영화궁의 사람들이었다.진한길은 의아했다.진한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황제의 서재로 돌아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소욱은 이 사실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소식이 참 빠르구나.”그러나 서왕은 이 점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어마장 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황후 마마께서 어젯밤 어마장에서 새벽까지 계셨다 합니다. 거의 밤을 새웠다고 합니다.”서왕이 찾을 수 있는 단서, 황후도 당연히 찾을 수 있다.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내세우지 못하면 왕천해는 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영화궁.봉구안은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지금 봉구안의 글씨는 동생 장미와 거의 비슷하다.황후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조건 해낸다는 점을 연상은 무척 탄복했다.연상은 탁자 위의 모래시계를 보았다.“마마, 한 시진이나 심문했는데 왕천해는 여전히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왕천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봉구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왕천해가 이 일을 했다는
호위 두 명이 밖에서 왕천해가 있는 방을 지키고 있었다.밤이 되자 한 궁녀가 음식을 가져왔다.호위는 술이 한 병 더 있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해했다.궁녀가 설명했다. “황후 마마께서 간수하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호위님들께 상을 내렸셨습니다.”호위들은 술을 받았다. “황후 마마께 감사드립니다!”술 몇 모금을 넘긴 호위들은 곧 어지러움을 느꼈다.쿵!쿵!둔탁한 소리가 두 번 나더니 호위들이 땅바닥에 꼿꼿이 쓰러졌다.그러자 방금 음식을 가져온 궁녀가 나타나 방으로 들어갔다.왕천해는 잠이 들었었는데 이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누구냐?”왕천해는 누군가가 칼을 꺼내 든 것을 보았다.궁녀가 막 손을 쓰려고 할 때, 갑자기 횃불로 밖이 밝아졌다.왕천해는 이를 악물었다.“빨리 가거라! 함정이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호위 몇 명이 뛰어들어 와 두 사람을 겹겹이 에워쌌다.상황이 불리해지자 왕천해는 재빨리 궁녀의 손에 있는 칼을 빼앗아 궁녀 가슴에 찔렀다.궁녀는 눈이 휘둥그레진 체 얼마 못 가 숨을 거두었다.왕천해는 소리쳤다.“자객이다! 내가 자객을 죽였다!”봉구안은 이때 밖에 서 있었다.봉구안의 눈에는 살벌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끌어 내거라!”왕천해는 죽어도 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광기를 풍겼다.“마마, 무슨 원인으로 소인을 가두려 하는 겁니까?”“황후 마마라고 해서 형을 남용할 수 있는 겁니까?”“내보내 주시오!”봉구안은 칼에 찔린 궁녀를 쳐다보았다.그 궁녀는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아직 조금의 호흡이 있었다.“이 궁녀의 신원과 어느 궁의 궁녀인지 정확히 조사하거라.”“예, 마마!”왕천해는 궁녀의 ‘시체’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갑자기 소리쳤다.“더 이상 심문할 필요 없습니다.”“소인입니다! 다 소인이 한 짓입니다!”‘귀비 마마께서 나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나 보군…’‘내가 하루 더 살면 마마는 하루 더 불안해 있겠군…’왕천해가 갑자기 죄를 인정할지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봉구안은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황제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공기 중에 응결된 것처럼 어둡고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귀비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봉구안은 황제께 잡혀 비틀거렸던 몸을 바로잡았다.‘귀비를 정말 많이 아끼는구나. 귀비에게 오점 하나 생기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구나’“신첩의 추측일 뿐입니다. 믿고 말고 조사하든 말든 폐하의 결정에 달려있습니다.”소욱의 얇은 입술은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이 여인 항상 겉으로는 공손하지. 진정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정말 짐이 그 말의 의미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귀비의 병문안, 가보았는가?”“귀비는 황후의 약 때문에 이 심한 고통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황후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이 귀비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느냐?”“귀비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느냐? 남을 해치려다 자신을 해친 멍청이로 보이느냐?”“짐은 황후가 범인 같구나.”봉구안은 동공이 수축했다.하지만 바로 변명하지 않았다.소욱의 눈빛은 봉구안에게 고정시켰다.“조검 사건 후 짐이 경고했거늘… 모든 것을 거기서 마무리하라고… 무고한 귀비 더 이상 해치지 말라고…”“귀비가 낙마한 이유는 결론적이로 황후가 이번 마구 경기를 치렀기 때문이오.”“황후, 짐이 묻겠다. 황후 정말 아무런 계산이 없었는가?”봉구안은 담담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없습니다.”봉구안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남자의 얼굴은 윤곽은 뚜렷했고 시선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갑자기 밖에서 누가 아뢰었다.“폐하, 귀비 마마께서 아파서 기절하셨습니다.”…영소전.황제는 침대 옆에 앉아 있었고 귀비는 황제의 소매를 가볍게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폐하… 신첩 너무 아픕니다…”귀비는 왕천해가 죽은 사실을 전해 들었다.그러나 황제는 계속 영화궁에 남아 있었다.봉장미가 또 이간질할까 봐 두려워 황제를 모셔오라고 했다.소욱은 담담한 눈빛으로 귀비를 바라보며 물었다.“왕천해라는 사람을 아느냐?”귀비는 순진한 얼굴로 의아해
사람은 황제 앞으로 끌려왔다.황제는 한눈에 이 사람이 귀비 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물로 깨워라.”촥--찬물 한 바가지를 맞은 수로는 깨어났다.눈을 뜨자 존귀하고 위엄 있는 황제가 눈에 보였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폐하를 뵙겠사옵니다!”수로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만약 황제께서 귀비가 자신을 장신궁에 보내 감시하라고 시킨 걸 알면 큰일 난다.하지만 그가 이미 맞아 쓰러졌다는 것은 황제에게 들켰다는 뜻이다.수로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소욱의 턱 선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얇은 입술은 가볍게 움직였다.“팔 하나를 부러뜨리거라.”“예!”진한길은 잽싸고 잔인하게 처리했다.처량한 비명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부러진 팔이 하나 더 생겼다.영소전.귀비가 취침하려 할 때 춘하가 갑자기 흥분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마마, 폐하가 오셨습니다!”‘폐하가 이렇게 늦게 오신 건 틀림없이 마마가 걱정돼서 일 거다.’귀비는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귀비가 정리하고 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성가는 이미 내전에 도착했다.춘하는 눈치 있게 물러나갔다. 이 밤을 황제와 마마께 드렸다.귀비는 사랑이 가득 찬 눈빛으로 앞으로 다가갔다.“폐하, 신첩…”“짐이 귀비의 사람을 데려왔소.” 소욱은 눈빛이 차가웠고 말투도 예전 같지 않았다.귀비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신첩의 사람요?”이때 귀비는 외전에 있는 춘하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아!”귀비는 마음이 조마조마 해졌다.‘도대체 무슨 일이…’소욱이 손을 흔들자 문이 닫혔다.귀비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후퇴했다.“몇 년간 짐은 귀비만을 총애하고 보호했소.”“그런데 애비 이번엔 너무 지나친 거 아니오?”황제가 자신을 '애비'라고 부르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다.그러나 순간 귀비는 한기가 발바닥에서 머리 위로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수로가 들켰나 보다.’지금 아무런 변명을 해도 황제의 노여움을 살 뿐이다.그래서 귀비는 바로 잘못을 인정했다.“폐하, 신첩이 잘
봉구안이 비밀 편지를 태웠다. 그녀의 두 눈에 비친 불꽃은 마치 지옥에서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처럼 모든 죄악을 삼킬 것만 같았다.“귀비는 빈틈이 없이 일 처리를 하고 사람 관리도 잘하지. 조검부터 왕천해까지, 다들 자신이 죽을지언정 귀비를 배신하지 않았다.”“그래서 산적 사건에서도 귀비에 대한 심증만 있지 구체적인 증거가 없지. 그래서 황제가 귀비를 믿는 것도 뭐라 할 수 없다.”“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귀비의 죄증을 하나씩 모으는 것이다.”“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번에는 궁녀 하나지만 앞으로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다.”“언젠가 증거들이 다 갖추어지면 귀비는 할 말이 없을 거다.”“그때면 폐하도 더 이상 귀비를 지키지 못할 거다.”이렇게 하는 건 귀비를 직접 죽이는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하지만 귀비를 쉽게 죽여 버리면 첫째는 마음속의 한을 풀 수 없고, 둘째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아 장미가 억울해 할 것이다.봉구안은 귀비가 가지고 있고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귀비의 죄를 알리려고 한다.황제가 총애하는 비빈이 죽으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죄 많은 여인이 죽으면 모두가 박수를 치며 기뻐할 것이다.…자녕궁.태후는 불붙은 향을 향로에 꽂았다.“황후를 다시 보게 됐어.”“열흘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는데 이틀 만에 사건을 해결하다니…”계 상궁이 의심했다.“태후 마마, 왕천해가 정말 진범일까요? 배후에서 주범이 있을 않을까요?”태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걸 누가 알아…”이때 영소전.춘하는 귀비께 약을 드리고 입을 열었다.“마마, 이번에 너무 아슬아슬했습니다. 황후가 수를 써서 우리를 끌어들이다니…”“왕천해가 영리하게 바로 궁녀 주아를 죽이고 사전에 당부한 대로 독을 복용해서 자결했으니 다행이지…”“그렇지 않고 그 두 사람이 황후의 손에서 혹독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귀비 마마를 토해 낸다면…”귀비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근심으로 가득했다.불과 두 달 만에 조검과 왕
영소전.봉 부인은 난방에 앉아 있었다. 문과 창이 닫혀 있었고 향을 피우고 있었다. 봉 부인은 연기 때문에 눈을 뜨기 어려웠고 숨도 막혔다.귀비가 갑자기 물어볼 일이 있다고 봉 부인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봉 부인을 난방에 불러들이고는 향이 정신을 맑게 하고 건강에 좋다며 궁안 곳곳에 피웠다.하지만 봉 부인이 맡기에 이 향들은 품질이 나쁜 것들이었다.한 시진이 지나자 궁 안에서 연기로 가득했다.봉 부인은 정말 견딜 수 없었다.봉 부인이 창문을 열려고 시도했는데 창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밖에서 잠근 것 같았다.봉 부인은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밀었다.문도 움직이지 않았다.봉 부인은 마음이 불안해졌다.‘설마 여기에 갇힌 것은 아니겠지.’봉 부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귀비가 무엇을 하려는 걸까?’“콜록…”향의 연기가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화재 현장의 연기처럼 숨을 쉴 수 없게 했다.봉 부인은 얼굴이 파래졌다.봉 부인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이 조이는 듯 목은 따가워 왔고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현기증이 났다.탁탁!봉 부인은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귀부인의 예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누구 없소? 문… 문 좀 열어 주시오…”난방에서 멀지 않은 내전.춘하는 귀비가 화장하는 것을 시중들고 있었다.환관 한 명이 달려들어와 아뢰었다.“마마, 봉 부인께서 문을 두드리며 나오시려고 합니다. 더 이상 참을 못할 것 같습니다.”난방에 많은 향로가 타고 있었다. 가장 저질의 향이었다. 문과 창이 닫혀 있어 건장한 남자도 이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귀비는 못 들은 듯 차가운 눈빛으로 동경 속의 자신을 모습을 쳐다보았다.귀비 얼굴에 생긴 흉터는 매우 추했다.몇 달 동안 약을 쓰면 완치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 기간 동안은 밖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딱지가 떨어져도 두꺼운 분으로 흉터를 가릴 수밖에 없다.이 모든 것은 봉장미 때문이다.그 빌어먹을 마구 경기 때문이
영소전의 호위들이 문을 막았다.“황후 마마 용서하여 주시오. 귀비 마마께서 귀빈을 접대하라는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호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잔잔한 눈으로 스산한 기운을 풍기며 호위의 말을 끊었다.“죽기 싫으면 꺼지거라!”이때 안에서 여유롭고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황후 마마 오셨습니까?”“신첩이 많이 다쳐서 친히 마중 나가지 못한 점을 용서하여 주시오.”“눈치 없는 것들! 감히 황후 마마를 막는가?”“이따 본궁이 벌을 내려주마.”그러자 호위들이 물러서서 봉구안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황후 마마, 들어가시지요. “…내전.봉구안은 어머니 유씨를 먼저 보았다.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는 귀비를 보았다. 귀비의 두 눈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독사처럼 차가웠다.“황후 마마, 신첩 지금 봉 부인께 어떻게 해야 자녀를 잘 양육하는지에 대해 여쭙고 있습니다.”“때마침 잘 오셨어요.”봉 부인은 봉구안에게 궁절을 올렸다.“황후 마마를 뵙겠습니다.”봉구안은 낮은 목소리로 차갑게 분부했다.“연상, 부인을 먼저 영화궁으로 모시거라.”“예! 마마!”혼자 남은 봉구안이 걱정된 봉 부인은 떠나면서 여러 번이나 고개 돌려 봤다.봉 부인이 떠나자 귀비는 피식 웃으며 도발적인 어조로 말했다.“황후 마마 왜 이렇게 긴장하십니까? 본궁이 봉 부인께 무엇이라도 할까 두려우신 겁니까?”“여기는 황궁입니다. 신첩이 감히…”“하물며 신첩과 봉 부인은 말이 잘 통해서…”봉구안은 찻잔의 조각들을 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귀비께 향해 갔다.처음에는 귀비도 아무 일 없이 덤덤하게 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그러나 황후가 주저함 없이 곧장 귀비의 발끝에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다.그 매서운 기세…귀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하인 춘하가 경각심을 일으켰다. “황후 마마, 마마…”봉구안은 허리를 굽혀 귀비를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폐하께서 본궁께 귀비 병문안 오지 않은 것을 탓하여 오늘 왔소.”이
연상이 내전을 들어섰을 때, 넘어져 있는 병풍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마마, 정말로 떠나실 건가요?”봉구안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그래. 진 씨 가문의 사건은 내 마음에 새길 것이다.”그 검은 옷은 진 대인마저 해쳤다.연상은 얼굴에 걱정을 띠며 물었다.“마마, 저는 폐하께서…”“폐하께서도 결국 납득할 것이다.” 봉구안의 눈빛은 깊은 어둠에 잠긴 듯했다.만약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그날 밤, 소욱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그의 마음속은 불타오르는 듯했다.그는 1년의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몰래 그것을 반년으로 바꿔놓았다!온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천천히 다가가려 했건만, 그녀는 이미 떠날 계획을 세워놓은 것이다!세상에 어찌 그녀만큼 무정한 여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다음 날.소욱은 조정 일을 마친 후, 영화궁으로 향했다.호위들은 철통같은 경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황후의 처소가 아닌 감옥과도 같았다.내전 안.그는 장자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얼굴에는 억제된 감정이 서려 있었다.봉구안을 보자, 그녀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어떤 비녀나 장식도 없이 나무 비녀 하나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그녀는 공손히 절을 올렸다. 신하의 예법이었다.소욱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어젯밤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아침상은 들었느냐?”봉구안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예.”“짐은 이미 사람을 보내 그 검은 옷을 추적하게 했다. 머지않아 소식이 올 것이다.”말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살짝 물러나 피했다.소욱의 목이 탁 막히는 듯했다. 그는 억지로 감정을 억눌렀다.“궁에서 이 오랜 시간동안 그대는 짐에게 아무런…”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단호히 대답했다.“없었사옵니다.”감정이란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는 법.비록 그녀의 마음속에 망설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철석같은 마음을 가진
소욱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 그는 곧장 봉구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궁에서 나가 그 검은 옷을 쫓겠다는 거지? 좋아, 허락하마.”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조사하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라.”봉구안은 흔들림 없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검은 옷을 쫓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폐하, 이번에 떠나면 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소욱의 가늘고 긴 눈이 살짝 감기더니, 약간의 분노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계약서에 분명 1년이라고 적지 않았느냐...”“폐하가 기억을 잘못하셨사옵니다. 6개월입니다.”봉구안은 손에 든 계약서를 그에게 건넸다.소욱은 즉시 계약서를 펼쳐 보았고, 냉정한 얼굴에는 놀람과 충격, 그리고 후회가 서렸다.계약서에는 정말 6개월이라고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처음 약속했던 것은 1년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설명은 하나뿐이었다.그녀가 ‘1년’을 ‘6개월’로 고쳐 쓴 것이다…소욱은 눈을 떨구고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차가운 물에 담긴 옥처럼 묵직하고 서늘했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빛은 어두워졌고 미세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억지 웃음이 떠올랐다.“황후, 이런 농담은 하지 마라.”“1년이면 1년이다. 네가 멋대로 고친 것은 인정할 수 없다.”봉구안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녀의 태도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계약서를 믿사옵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소욱이 계약서를 바로 찢어버린 것이다.봉구안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소욱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고 제왕의 위엄을 드러내며 불가항력적인 어조로 말했다.“내가 말했듯이 1년이다.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줄일 수 없다!”봉구안은 바닥의 찢어진 종이를 냉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잊으셨
장락궁 안.영비는 진왕과 그의 동조자들 간의 내밀한 서신과 증거를 소상히 황제 앞에 올렸다.“이 모든 증거는 아버지께서 찾아내신 것이옵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진왕의 속셈을 의심하시어, 겉으로는 그와 친분을 쌓는 척하며 이 명단을 입수하셨사옵니다.”영비가 제출한 증거들은 소욱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그는 서류를 검토한 뒤, 정색하며 말했다.“그대의 부친에게 큰 공이 있다.”영비의 눈에는 결연한 충성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충신은 제 부친의 본분이옵니다.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옵니다.”“폐하께서는 요 며칠 진왕 일로 매일 늦은 밤까지 고생하셨는데, 이제 조금이나마 쉴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사실 소욱이 오늘 장락궁에 온 이유는 영비가 손에 넣은 이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는 예전부터 전조를 관리하고, 영비는 온 가문을 동원하여 그를 도왔다.영비는 평범한 여인들과 달랐다. 겉보기엔 연약해 보였지만, 실은 단호하고 남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그는 그녀를 첩이 아닌 참모로 여겼고, ‘후궁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예외로 여겼다.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이제는 황후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떠나기 전, 소욱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이런 증거는 앞으로 그대 부친이 직접 올리도록 하라. 전조와 후궁이 서로 얽히지 않는 것이 낫다.”영비는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곧 평온을 되찾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알겠사옵니다. 폐하 뜻대로 하겠사옵니다.”그녀는 황제 앞에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때, 밖에서 진한길이 문을 두드렸다.“폐하, 소신이 아뢸 일이 있습니다!”…“감옥에서 실종되었다고? 아니면 탈옥한 것이냐?”소욱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어둡고 날카로웠다.진한길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아마도… 탈옥한 것 같사옵니다.”어쨌든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소욱의 눈은 더욱 차가워졌다.“이 일은 당분간 황후에
소욱은 확신하고 있었다.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면 절대로 잊지 않는다.그는 결코 영비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아무리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할 리 없었다.하지만, 영비에게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고,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그가 황위에 오를 때 그녀는 전력을 다해 그를 도왔다.그런 그녀가 어찌 이런 어마어마한 거짓을 꾸며낼 수 있겠는가?영비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 속엔 깨진 슬픔이 가득했다.“폐하께서 기억 못 하셔도 괜찮사옵니다.”“그날 밤의 일은 본디 하나의 실수였사옵니다.”“소첩은 그것을 잊을 것이옵고, 폐하께서도 잊으시어 그것이 황후마마와 폐하 사이의 가시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소욱은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며, 좁아진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모용란, 그간의 십 수 년의 정을 봐서라도, 거짓으로 나를 속이지 마라. 그 아이가 정말로 나의 아이란 말이냐?”영비는 입술 안쪽을 꽉 깨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소욱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기분이었다.주먹을 꽉 쥐었다.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한참 침묵 끝에, 그는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이 일은, 절대 황후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영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랐다.“소첩은 비록 황후마마와 오래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마마께서 폐하와 소첩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사실 그날 밤의 실수를 제외하고는, 저희 사이는 깨끗하고 명백하옵니다.”소욱은 턱을 단단히 다물고, 얼굴에는 엄한 표정이 가득했다.그날 밤의 일이라면, 그는 단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그는 영비를 물리고 난 뒤, 말없이 앉아 있었다.책상 위의 상소문 속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술이 사람을 망치는구나!’“여봐라 거기 있느냐.”“신 진한길, 여기 있사옵니다!”비록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조사해 보면 반드시 무언가 드러날 것이다.
소욱은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방금 태황태후의 말은 그조차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영비가 유산을 했다니!? 그것이 언제 있었던 일이란 말인가?’그때 가빈이 입이 간지러웠던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태황태후마마, 영비마마께서 유산을 하셨던 적이 있사옵니까? 왜 첩은 그런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사옵니까?”그 외의 후궁들 또한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태황태후는 영비의 손을 붙잡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일이야 황상이 출정한 후에 벌어진 일이니라.”“그때 영비는 병중에 있었기에 몸도 마음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자신이 잉태한 줄도 몰랐었지.”“그저….”그 말을 하며 태황태후는 일부러 태후를 흘깃 쳐다보았다.태후는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며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녀는 태황태후의 책망 어린 눈길을 피하며 마음속으로 두려움이 번졌다.영비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알고 있는 극소수 중 하나였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바로 간접적으로 그 아이를 해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었다.당시 태후가 어의들을 막아 세우지만 않았다면, 영비가 유산이라는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이 일은 태후가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었다.황제가 이를 알게 되면, 그가 이 어미를 더욱 미워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하지만, 결국 종이는 불을 덮지 못하는 법. 이 비밀도 드러나기 시작했다.소욱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 있었다.그 틈을 타 봉구안은 그의 손을 놓았다.봉구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멀리 연극무대를 바라보았다.지금 펼쳐지는 이 장면이 무대 위의 연극보다 훨씬 흥미로워 보였다.이 자리에서 소욱이 더 말을 늘어놓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괜히 말을 덧붙이다가는 자신이 영비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둘러싼 비밀까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은 늘 그랬듯, 오늘 일은 오늘 해결하는 법이라 믿었다.만수궁의 연극이 끝나자마자, 그는 봉구안을 강제로 끌어내어
만수궁.태황태후는 영비에 대한 애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그녀는 의도적으로 영비를 자신 곁 자리에 앉히고, 온갖 말을 다 하며 그녀를 챙겼다.“어젯밤은 잘 잤느냐?”영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단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세월이 고요히 흐르는 듯한 은은한 우아함을 풍겼다.다른 후궁들은 그 광경을 보며 시기와 질투의 눈길을 보내며, 더 이상 연극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태후 역시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대극이 시작되기 전, 태황태후는 조용히 모든 이들에게 말했다.“영비가 궁에 돌아온 일, 모두 알겠지만... 오늘 나는 옛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그 말에, 그녀는 태후를 바라보았다.“옛날, 영비가 병이 깊어 치료를 받지 못해 급히 장례를 치르다 죽음에 이를 뻔하였다.”“나는 영비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고 의심하였고, 그 시체를 바꿔서 확인하였다.”“다행히 하늘의 은혜로 영비는 살아있었지… 다만 숨결이 너무 약해 죽었다 판단한 것이었어.”모든 후궁들은 놀라긴 했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 ‘시체는 최소한 3일을 두고 확인한다’는 규칙이 생긴 것이었다.태황태후는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어의에게 진찰을 받았을 때, 비록 살아있긴 했으나, 숨이 약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네. 그래서 나는 그때 의심했던 것이었어. 궁 안에 영비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숨기고, 영비를 옥양산에 있는 절로 보내 회복될 때까지 지내게 했던 것이었어.”모두 서로를 보며 눈치를 챘다.태황태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몇 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황제가 영비를 너무 아끼고 있었으니, 그런 사실을 바로 황제에게 알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궁 안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눈치껏’ 행동해야 했다.위에 있는 이가 하는 말에 따라, 그저 따라 말할 뿐이었다.그래서 모두 영비의 귀궁을 축하하였다.태후는 속으로 마음이 불편했다.태황태후가 말한 ‘영비를
영비는 서왕에게 목을 졸렸지만,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비록 전하께서... 저에게 이렇게 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전하를 용서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폐하께 전하께서 저를 궁에서 데리고 나갔고, 이렇게 오랜 세월 저를 가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이지 않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전하는 저를 정말로 해칠 수 없으십니다.”결국 서왕은 손을 풀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용란,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야.”영비는 여전히 여린 모습을 보였다.“그 말은 제가 전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저희는 모두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까?”“어떤 수단을 쓰느냐는 그저 저희의 선택일 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서왕의 앞에 다가가 그의 허리띠에서 옥패를 살짝 빼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기억하십니까? 저희 셋은 서로를 지키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까.”서왕은 갑자기 기분 나쁜 한기를 느끼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모용란, 너는 정말 구제불능이야.”그는 단호히 말을 마친 후, 거침없이 돌담을 빠져나갔다.영비는 어두운 바위 속에 혼자 남아, 서왕의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속삭였다.“나는 널 용서했어, 정말로.”…자녕궁.영비가 궁에 돌아온 이후, 태후는 한 번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영비가 궁으로 돌아온 그날, 태후에게 와서는 여러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그중에는 과거의 행동을 용서할 것이며, 황제가 태후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태후는 영비의 말 속에서, 언젠가 복수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태후마마, 약을 드셔야 하옵니다. 어의께서 말씀하시길, 약을 드시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으실 거라 하였사옵니다.”태후는 깊은 갈색 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약을 밀쳐내며 말했다.“아
검은 옷을 입은 자는 감옥에 갇혀 철저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혀를 깨물어 자결하거나 독을 먹어 목숨을 끊을까 염려해, 그의 입에는 철제 입막이가 씌워져 있었다.봉구안이 감옥에 들어서자, 검은 옷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웃고 있는 듯 보였다.입막이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가면이 벗겨진 그의 얼굴이 봉구안의 눈에 들어왔다.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두 눈은 끝이 위로 치켜올라가 날카롭고 사납게 보였다.봉구안은 머릿속으로 무수히 그려보았던 원수의 얼굴을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그녀는 옥졸에게 명령했다.“그 입막이를 벗겨라.”쇠사슬이 풀리자, 검은 옷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장군, 요즘은 평안한가?”그는 마치 죄인이 아닌 듯,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듯 가벼운 어조였다.감옥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봉구안은 서두르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단회욱은 대체 어떻게 죽였지?”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검은 옷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이미 알고 있지 않소? 그는 그대에게 날아든 천수지독을 대신 막아내고, 독이 퍼져 죽었소.”봉구안의 눈빛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다.“왜 그가 내 목숨으로 5년을 바꾸었다고 말한 거지?”검은 옷은 일부러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눈을 위로 굴렸다.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그런 일이 있었나? 대체 어디서 들은 이야기요?”봉구안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그의 얼굴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며 단호히 외쳤다.“당장 말하거라!”검은 옷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태연히 답했다.“북대영의 전신의 손에 죽는다면, 영광일 뿐이오.”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봉구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네가 죽음을 원한다면, 내가 네 바람을 절대 들어줄 리 없다.”검은 옷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가 천옥이란 걸 알고 있소. 심문이든 고문이든, 하고
궁중에는 영비와 비슷한 모습의 여인들이 많았다.이 순간, 소욱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봉구안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다른 비빈들에게는 늘 냉담했던 그의 눈에, 눈앞의 여인을 향한 복잡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영비…”소욱의 미간에는 깊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그 순간, 그 여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다.“폐하, 소첩입니다. 소첩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소첩이 돌아왔나이다!”옆에 있던 녕비는 이를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반면, 현비는 품위 있게 말을 보탰다.“폐하께서 대승을 거두셨고, 영비마마께서도 돌아오셨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소욱은 어색한 듯 품에 안긴 여인을 살짝 밀쳐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곁에 서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영비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황후를 바라보며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의식한 듯했다.“황후마마.”봉구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꾸했다.“예를 생략하거라.”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본디 불가능한 일이었다.이로 보아 영비의 죽음에는 분명 감춰진 진실이 있는 듯했다.하지만, 봉구안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관한 일이었다.영비보다 그녀가 더 마음에 두고 있는 이는 바로 그 검은 옷을 입은 독인이었다.그녀는 반드시 단회욱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영화궁.봉구안이 돌아오자마자, 최 상궁은 급히 그녀를 따라와 영비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마마, 오늘 영비마마를 보셨사옵니까?”“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며칠 전부터 영비마마의 소식으로 궁중이 온통 뒤집혔다 하옵니다.”“듣자 하니, 그녀께서 과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태황태후마마의 비밀스러운 보살핌을 받아왔고, 이제야 완쾌되어 돌아오셨다 하옵니다….”봉구안은 마음에 짙은 불쾌함이 스쳤다.“물러가라.”연상은 그녀의 심중을 눈치챘으나, 감히 더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