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 관리들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곧바로 운산파에도 전해졌다.운산파 정당 안.장문과 장로들이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한 장로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장문에게 말했다. “장문,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아무래도 황제가 강주에 온 것 같습니다.”다른 장로도 급히 덧붙였다. “저도 똑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장인이 최근 유독 부산을 떨고 있으니, 분명 황제가 강주에 머무는 것이 확실합니다.”운산파 장문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육십 대 노인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죽산진 쪽 상황은 어떤가?”곧 누군가가 답했다. “아직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암살이 실패한 듯합니다.”장문이 싸늘하게 웃었다.“뻔하지 않느냐? 틀림없이 실패했겠지. 게다가 우리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아니면 그 황제 놈이 어찌 강주까지 직접 찾아왔겠느냐? 이건 분명히 우리 운산파를 겨냥한 거다!”모두가 근심스러운 눈길로 장문을 바라봤다. 장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지시했다. “제자 몇 명을 내려보내서 황제가 정말 강주에 왔는지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고, 다른 이들을 시켜 뒷산의 물건들을 서둘러 처리해라. 나머지 제자들은 움직이지 말고 이틀 뒤 있을 비무대회 준비에만 집중하도록 하여라.”장로들이 즉시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장문.”……전진파.차선아는 명상을 하려 했으나,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눈을 뜨고 앞을 응시했다. 숨소리가 약간 거칠었다.어둠이 내린 후, 봉구안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을 때 여제자 몇 명이 그녀를 에워쌌다. 새로 들어온 사매가 궁금했던 것이다.“요즘 같은 때 전진파에 들어오다니 신기하네!” “사매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왜 가면을 쓰고 있는 거죠? 같이 온 다른 사매는 하루 종일 안 보이던데… 어디에 계십니까?” “부장문님이랑 무슨 관계십니까? 어떻게 시험도 없이 바로 입문할 수 있었던 거죠?”쉴 새 없이 쏟
봉구안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면 아래의 얼굴에도 약간의 변장을 더해 두었다.가면을 벗은 후에도 그녀는 당당했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전진파의 한 여제자가 부끄러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자기 몸에 함부로 손을 대던 운산파 제자를 밀쳐냈다.그러나 상대는 오히려 당당했다.“그건 내가 할 말이지! 당당하지 못하니까 제대로 검사를 못 받는 거 아냐?”“내가 뭐가 당당하지 못하단 거야? 분명히 네가 검사하는 척하면서 날 함부로 만졌잖아…!” 전진파의 여제자는 참을 수 없는 듯 항의했다.그러자 주변의 다른 운산파 제자들이 즉시 그녀에게 반박했다.“헛소리 마라! 우린 정당하게 신분 확인을 했을 뿐이야. 네가 마음에 찔리는 게 있으니 괜히 그러는 거겠지!”주변에 있던 다른 문파 사람들도 슬슬 모여들어 그녀들을 보며 수군거렸다.“전진파 여자들은 하나같이 고고한 척 하더니 결국은 남자들 관심 받고 싶은 거 아니야?”“그러게 말이야. 그냥 신분 검사하는 건데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몰라. 자기들이 그렇게 매력적인 줄 아나 봐!”“강호에 남녀가 따로 있나? 자기들이 속이 더러우니까 남들도 그런 줄 아는 거지. 남자 손 타기 싫으면 무림대회엔 뭐하러 나오나 몰라.”“그래 맞아, 무술 대결하면 당연히 신체 접촉은 불가피한데, 이런 여자들이랑은 싸우기도 싫다니까. 잘못하면 책임지라고 할지도 몰라, 하하!”운산파 제자들은 점점 더 우쭐해졌다.“잘 들었지? 신분 검사받기 싫으면 애초에 무림대회에 나오지 말고 절에나 들어가! 거기엔 남자 없으니까 말이야!”전진파 제자들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성미 급한 방민이 참지 못하고 나서려 하자, 차선아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했다.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순간, 그녀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튀어나가 좀 전의 운산파 제자를 단숨에 발로 차버렸다.차선아는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봉구안임을 알 수 있었다. 늘 평온
비무대회가 시작되기 전, 운산파의 부장문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오늘 운산파는 이 자리에서 강호의 여러 영웅호걸들을 모시고,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비무대회를 개최하여 무림의 패자를 가리고자 합니다. 최강자의 인도로 강호의 위세를 한층 더 떨치고자 하니,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를 바랍니다!”“대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비무의 규칙은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문파든 먼저 15승을 거두면 승리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학문에 우열이 없고 무예에는 두 번째가 없다고 하지만, 오늘 대회는 어디까지나 친선 비무이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승리를 얻기 위해 동료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설령 이긴다 해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옳소!” 군중들 사이에서 동조하는 소리가 들렸다.부장문은 군중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 지금부터 비무대회를 정식으로 시작하겠습니다!”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운산파의 장문인 구학이었다. 그의 이마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어 연로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매섭고 날카로운 기운을 띠고 있었다.그때 한 제자가 장문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님, 현재까지는 수상한 인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구학은 별다른 반응 없이 입술만 가볍게 움직였다. “알겠다. 물러가라. 대회가 시작되었으니 산문을 닫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하라.”“알겠습니다, 장문님!”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미 들어올 사람은 모두 군중 속에 섞여 있다는 것을 말이다.봉구안과 소욱 외에도 열무신 일행은 작은 문파로 위장하여 운산파 내부를 몰래 탐색하는 중이었다.비무대 위에서는 모두 늦게 출전할수록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첫 번째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결국 운산파가 먼저 자기 문파 제자를 내보내며, ‘벽돌을 던져 옥을 이끌겠다’고 했다.그 상대는 벽력당의 제자였다.벽력당은 암기 사용에 능숙했으나, 이번엔
오늘은 비무대회가 열리는 날이라 운산파 제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부엌에서는 제자들이 점심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혹시 내 족발 못 봤어? 방금 쪄서 솥 위에 올려놨는데 어디 갔지?” 한 제자가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족발을 찾고 있었다.다른 제자들은 자기 일로 정신이 없었다.“어디 다른 곳에 뒀겠지.” “넌 항상 뭘 그렇게 잘 잃어버리냐.” “앞마당으로 누가 가져갔을 수도 있지.”부엌 밖 담장 아래에서는 열무신이 족발을 손에 들고 뼈만 남기고 맛있게 뜯고 있었다. 그는 남은 뼈를 마당을 지키는 개에게 던져줬다.개가 뼈를 물고 달아나자 열무신은 즉시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땅에 내려선 그는 손에 묻은 기름을 풀잎에 쓱쓱 닦으며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다.이곳은 운산파의 고위 제자들이 머무는 구역이며, 조금만 더 들어가면 장문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그는 재빨리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뜻밖에도 나무 위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오백이었다. 그는 열무신을 보자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이거 참 우연이군.”열무신은 아무 대꾸 없이 기름이 묻은 손을 오백의 옷에 쓱 닦았다.바로 그때 나무 아래를 지나던 운산파 제자들이 코를 킁킁거렸다.“어디서 좋은 냄새 나지 않아? 엄청 향긋한데!” “너 배고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부엌 근처라 냄새가 풍기나 보네.”그들이 지나간 뒤, 오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멀리 운산파 장문의 방을 가리켰다. 열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목적이 같았던 것이다.오백이 다시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망 볼 테니, 자네가 안으로 들어가시오.”한편, 봉구안은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눈치채고 몇 번이나 따돌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미행이 붙었으니 더는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결국 길을 잃은 척 운산파 제자 하나를 붙잡았다. “실례합니다만, 변소가 어디에 있습니까?”잠시 후 그녀는 다시 비무장
“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오늘은 비무대회가 열리는 날이라 운산파 제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부엌에서는 제자들이 점심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혹시 내 족발 못 봤어? 방금 쪄서 솥 위에 올려놨는데 어디 갔지?” 한 제자가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족발을 찾고 있었다.다른 제자들은 자기 일로 정신이 없었다.“어디 다른 곳에 뒀겠지.” “넌 항상 뭘 그렇게 잘 잃어버리냐.” “앞마당으로 누가 가져갔을 수도 있지.”부엌 밖 담장 아래에서는 열무신이 족발을 손에 들고 뼈만 남기고 맛있게 뜯고 있었다. 그는 남은 뼈를 마당을 지키는 개에게 던져줬다.개가 뼈를 물고 달아나자 열무신은 즉시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땅에 내려선 그는 손에 묻은 기름을 풀잎에 쓱쓱 닦으며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다.이곳은 운산파의 고위 제자들이 머무는 구역이며, 조금만 더 들어가면 장문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그는 재빨리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뜻밖에도 나무 위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오백이었다. 그는 열무신을 보자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이거 참 우연이군.”열무신은 아무 대꾸 없이 기름이 묻은 손을 오백의 옷에 쓱 닦았다.바로 그때 나무 아래를 지나던 운산파 제자들이 코를 킁킁거렸다.“어디서 좋은 냄새 나지 않아? 엄청 향긋한데!” “너 배고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부엌 근처라 냄새가 풍기나 보네.”그들이 지나간 뒤, 오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멀리 운산파 장문의 방을 가리켰다. 열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목적이 같았던 것이다.오백이 다시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망 볼 테니, 자네가 안으로 들어가시오.”한편, 봉구안은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눈치채고 몇 번이나 따돌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미행이 붙었으니 더는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결국 길을 잃은 척 운산파 제자 하나를 붙잡았다. “실례합니다만, 변소가 어디에 있습니까?”잠시 후 그녀는 다시 비무장
비무대회가 시작되기 전, 운산파의 부장문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오늘 운산파는 이 자리에서 강호의 여러 영웅호걸들을 모시고,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비무대회를 개최하여 무림의 패자를 가리고자 합니다. 최강자의 인도로 강호의 위세를 한층 더 떨치고자 하니,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를 바랍니다!”“대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비무의 규칙은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문파든 먼저 15승을 거두면 승리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학문에 우열이 없고 무예에는 두 번째가 없다고 하지만, 오늘 대회는 어디까지나 친선 비무이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승리를 얻기 위해 동료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설령 이긴다 해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옳소!” 군중들 사이에서 동조하는 소리가 들렸다.부장문은 군중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 지금부터 비무대회를 정식으로 시작하겠습니다!”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운산파의 장문인 구학이었다. 그의 이마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어 연로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매섭고 날카로운 기운을 띠고 있었다.그때 한 제자가 장문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님, 현재까지는 수상한 인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구학은 별다른 반응 없이 입술만 가볍게 움직였다. “알겠다. 물러가라. 대회가 시작되었으니 산문을 닫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하라.”“알겠습니다, 장문님!”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미 들어올 사람은 모두 군중 속에 섞여 있다는 것을 말이다.봉구안과 소욱 외에도 열무신 일행은 작은 문파로 위장하여 운산파 내부를 몰래 탐색하는 중이었다.비무대 위에서는 모두 늦게 출전할수록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첫 번째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결국 운산파가 먼저 자기 문파 제자를 내보내며, ‘벽돌을 던져 옥을 이끌겠다’고 했다.그 상대는 벽력당의 제자였다.벽력당은 암기 사용에 능숙했으나, 이번엔
봉구안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면 아래의 얼굴에도 약간의 변장을 더해 두었다.가면을 벗은 후에도 그녀는 당당했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전진파의 한 여제자가 부끄러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자기 몸에 함부로 손을 대던 운산파 제자를 밀쳐냈다.그러나 상대는 오히려 당당했다.“그건 내가 할 말이지! 당당하지 못하니까 제대로 검사를 못 받는 거 아냐?”“내가 뭐가 당당하지 못하단 거야? 분명히 네가 검사하는 척하면서 날 함부로 만졌잖아…!” 전진파의 여제자는 참을 수 없는 듯 항의했다.그러자 주변의 다른 운산파 제자들이 즉시 그녀에게 반박했다.“헛소리 마라! 우린 정당하게 신분 확인을 했을 뿐이야. 네가 마음에 찔리는 게 있으니 괜히 그러는 거겠지!”주변에 있던 다른 문파 사람들도 슬슬 모여들어 그녀들을 보며 수군거렸다.“전진파 여자들은 하나같이 고고한 척 하더니 결국은 남자들 관심 받고 싶은 거 아니야?”“그러게 말이야. 그냥 신분 검사하는 건데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몰라. 자기들이 그렇게 매력적인 줄 아나 봐!”“강호에 남녀가 따로 있나? 자기들이 속이 더러우니까 남들도 그런 줄 아는 거지. 남자 손 타기 싫으면 무림대회엔 뭐하러 나오나 몰라.”“그래 맞아, 무술 대결하면 당연히 신체 접촉은 불가피한데, 이런 여자들이랑은 싸우기도 싫다니까. 잘못하면 책임지라고 할지도 몰라, 하하!”운산파 제자들은 점점 더 우쭐해졌다.“잘 들었지? 신분 검사받기 싫으면 애초에 무림대회에 나오지 말고 절에나 들어가! 거기엔 남자 없으니까 말이야!”전진파 제자들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성미 급한 방민이 참지 못하고 나서려 하자, 차선아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했다.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순간, 그녀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튀어나가 좀 전의 운산파 제자를 단숨에 발로 차버렸다.차선아는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봉구안임을 알 수 있었다. 늘 평온
강주 관리들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곧바로 운산파에도 전해졌다.운산파 정당 안.장문과 장로들이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한 장로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장문에게 말했다. “장문,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아무래도 황제가 강주에 온 것 같습니다.”다른 장로도 급히 덧붙였다. “저도 똑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장인이 최근 유독 부산을 떨고 있으니, 분명 황제가 강주에 머무는 것이 확실합니다.”운산파 장문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육십 대 노인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죽산진 쪽 상황은 어떤가?”곧 누군가가 답했다. “아직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암살이 실패한 듯합니다.”장문이 싸늘하게 웃었다.“뻔하지 않느냐? 틀림없이 실패했겠지. 게다가 우리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아니면 그 황제 놈이 어찌 강주까지 직접 찾아왔겠느냐? 이건 분명히 우리 운산파를 겨냥한 거다!”모두가 근심스러운 눈길로 장문을 바라봤다. 장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지시했다. “제자 몇 명을 내려보내서 황제가 정말 강주에 왔는지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고, 다른 이들을 시켜 뒷산의 물건들을 서둘러 처리해라. 나머지 제자들은 움직이지 말고 이틀 뒤 있을 비무대회 준비에만 집중하도록 하여라.”장로들이 즉시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장문.”……전진파.차선아는 명상을 하려 했으나,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눈을 뜨고 앞을 응시했다. 숨소리가 약간 거칠었다.어둠이 내린 후, 봉구안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을 때 여제자 몇 명이 그녀를 에워쌌다. 새로 들어온 사매가 궁금했던 것이다.“요즘 같은 때 전진파에 들어오다니 신기하네!” “사매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왜 가면을 쓰고 있는 거죠? 같이 온 다른 사매는 하루 종일 안 보이던데… 어디에 계십니까?” “부장문님이랑 무슨 관계십니까? 어떻게 시험도 없이 바로 입문할 수 있었던 거죠?”쉴 새 없이 쏟
방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소욱은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변조하지 못해 지금껏 말을 못 하고 속만 끓이고 있었다.“그 부장문이라는 사람, 여전히 네게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구나.” 소욱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봉구안은 남녀의 연정 따위를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틀 뒤 열릴 무림대회였다.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운산파가 강호에서 가진 세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으니, 이 편이 훨씬 안전한 방법일 터였다.“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냐?” 소욱이 그녀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봉구안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운산파의 실제 실력이 어떨지, 이번 비무대회에서 승산이 얼마나 될지 계산 중입니다.”소욱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고는 귀 가까이 대고 낮게 속삭였다. “내 생각엔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 같구나.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정말 이틀 내내 여기 전진파에 있어야 하는 것이냐?”봉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뿐이니 금세 지나갈 겁니다. 괜히 왔다 갔다 하다가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요.”소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나라의 황제인데 여장을 하고 이렇게 숨어있다니 조상들께 면목이 없구나. 나중에 제대로 보상해 줘야 한다. 알겠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진지하게 말했다. “밖에 있을 땐 행동을 조심하십시오.”한편, 정원아는 새로 온 제자들을 안내하고 나오다가 선배인 방민과 마주쳤다. 방민은 작년 비무대회에서 패한 이후 더욱 부지런히 무공을 닦고 있었다.방민이 정원아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 “부장문께서 새 제자를 들였다던데, 그 사람들 자질은 좀 어떤 것 같으냐?”정원아가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도 참 급하십니다. 오늘 막 들어온 사람들의 자질을 제가 벌써 어떻게 알겠어요?”방민의 얼굴에 근심이 묻어났다. “급하지 않을 수가 없지. 이틀 뒤면 비무대회인데, 부장문께서 굳이 이때 새 제자를 받은
전진파의 부장문 차선아는 문을 등진 채 흰 옷을 입고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등은 가냘팠지만 결코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차선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맑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문패를 가져오너라.”제자는 그녀 앞으로 돌아가 두 손으로 방문패를 받들어 올렸다.방문패를 보는 순간, 차선아의 눈빛이 흔들렸다.소환? 소환이 직접 전진파에 왔단 말인가?아니면… 소환이 누군가에게 이 방문패를 주고, 그 사람이 전진파의 도움을 청하는 걸까?차선아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손님을 들여보내거라.”“예, 부장문.”제자가 막 나가려는데 차선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차선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올 터이니, 반 시진쯤 지난 후에 손님을 맞이하거라.”제자는 조금 의아했다. 부장문의 옷이 더럽지도 않은데 왜 지금 갈아입으려는 걸까?전진파는 모두 여성 제자들이었고, 일반 제자들은 열 명씩 단체로 거처를 썼지만, 장문과 부장문은 각각 독립된 방이 있었다.차선아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보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을 나서려다 문득 구리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왜 이렇게 얼굴이 이렇게 초췌하지?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나? 안 돼.’‘혹시 소환이 온 거라면, 이런 모습으로 마주할 순 없어.’차선아는 방 안에 별다른 화장품이 없었기에 눈 밑의 푸른 기운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 어이가 없다는 듯 생각했다.‘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소환이 온다 해도 내가 왜 이렇게 신경 써야 하는 거지?’‘그저 오랜 친구가 찾아온 것뿐인데. 너무 깊이 생각한 모양이야.’그 시각, 전진파 문 밖에서는 봉구안이 몇 번이나 소욱을 힐끗거렸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볼 때마다 자꾸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소욱은 얼굴이 시퍼렇게 굳어 그녀 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어젯밤 봉구안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자기도 함께 전진파에 가
강림의 이 별장은 본래 강호의 벗들을 맞이하려고 사들인 곳이라 객실이 충분했다.봉구안 일행은 각자 방을 골라 휴식을 취했다.소욱은 봉구안과 방을 함께 쓰게 되었는데, 방에 들어서자 문을 닫고 곧바로 물었다.“전진파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냐?”봉구안이 반쯤 농담조로 답했다.“‘옛 정인’을 만나 회포라도 풀까 합니다.”소욱은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가볍게 웃었다. 그는 팔을 뻗어 봉구안을 품에 끌어안고 얼굴을 맞댄 채 살며시 비볐다. 그 모습엔 황제의 위엄이라곤 조금도 없고, 오히려 평범한 낭군 같았다.“나는 소심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네가 이번 일로 위험에 처하지 않을지 걱정될 뿐이지.”“방금 동방세 앞에서는 말을 아끼던데, 지금 우리 둘뿐이니 내게는 솔직히 말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봉구안은 그의 품에서 살짝 물러나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에 그려진 가짜 흉터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엔 어딘가 애틋한 정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진파와 운산파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첫째는 두 문파가 결탁했는지 확인할 겸 정황을 살피고, 둘째는 차선아와 이번 일을 어떻게 대처할지 의논하려 합니다. 셋째로, 이번 무림대회가 운산파에서 열리니 우리가 전진파 제자로서 참가하면 자연스럽게 운산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차선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여전히 찬성하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만약 두 문파가 이미 결탁했다면, 네가 가는 순간 표적이 될 것이다. 전진파가 과연 너를 쉽게 보내주겠느냐?”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전진파 제자가 백여 명이 넘으니 모두를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차선아의 인품이라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이 말을 들으니 소욱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에 강림의 무죄를 입증할 때도 그녀는 같은 말을 했었다. 강림과 차선아라면, 그녀는 그 강호의 친구들을 참으로 신뢰하고 있었다.소욱은 그녀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결심을 굳혔다.“
봉구안은 몸을 돌려 자신의 친아버지를 바라보았다.“어머니께 아버지의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당초에 아버지께서 저지른 잘못들…”“안다! 알아!” 봉 대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그는 꽤나 흥분한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예전에 잘못한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 탓이지!”“다만 네 어미가 날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 잘하마. 정말 잘하마…”봉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자기 아내에게 잘하겠다는 게, 대단한 약속이라도 되나요?”여자는 지아비를 내조하며 살림을 돌보는데, 남자는 단지 ‘잘해 줄게’ 한마디로 여자에게 감동을 주려 하다니.이런 공허한 말을 어찌 어머니께 그대로 전할 수 있단 말인가.“차라리 정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머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세요…”봉 대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자존심이 불타오르는 듯했다.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반박했다.“지금 와서 무슨 그리 유치한 말을 하란 말이냐?”“그저 네 어미에게 내가 반성하고 있다는 것만 알리면 충분할 거야.”“게다가 내가 네 어미 없이 살 수 없다는 건 너의 생각일 뿐이지 않느냐. 오늘만 해도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단 말이다!”“네 어미처럼 사방으로 떠도는 사람은 오히려 이혼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라. 난 단지 네 어미에게 체면을 세워주는 것 뿐이란 말이다!”“이제와 이혼이 흔한 세상이지만, 다시 시집갈 수 있는 여자는 대개 젊고 아름다우며 교양 있는 여자들이지. 네 어미처럼 나이 사십, 오십에다 별다른 혼수도 없는 사람은 어디서 그런 기회를 찾겠느냐…”봉구안은 도저히 더 들을 수 없었다.보아하니,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가 하는 말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다.마치 그의 화해 제안이 어머니를 향한 동정이자 은사라도 되는 듯했다.봉구안은 봉 대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충고했다.“지금 하신 모든 말씀을 어머니께 그대로 전할 겁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까지도요. 그러
죽산진에서 일반 백성들조차 황제의 초상화를 얻어 가졌던 걸 보면, 황제의 미행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듯했다.강주에서 신분이 들킬 것을 우려한 봉구안은 소욱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가짜 흉터를 만들었고, 처음 보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 자신도 반쪽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써 알아볼 수 없게 했다.그러나 성문에서 봉 대인의 눈은 날카로웠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찍이 황제의 미행 소식을 듣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성문을 지나는 외지인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봉구안과 소욱이 나타나자 그는 금세 낯익음을 느꼈다. 하지만 즉시 달려가 인사를 올리진 않았다. 연기를 할 거라면 끝까지 완벽히 해야 했다. 그도 하루빨리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봉 대인의 모습을 본 소욱이 작은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말했다.“그대의 부친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듯하구려.”봉구안은 담담히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일단 성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두 사람이 떠난 뒤 봉 대인은 바로 수하를 불러 그들의 뒤를 쫓게 했다. 그리고 다시 인자한 미소로 백성들에게 죽을 나눠주었다.“어르신 천천히 드시지요! 모두 드립니다. 다들 나눠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백성들은 봉 대인에게 감사해하며 칭송했다.“봉 대인께선 정말 자애로우신 훌륭한 분입니다! 황후마마의 아버님이자 폐하의 장인이시니 역시 다르십니다!”소식을 재빠르게 들은 몇몇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봉 대인, 혼인을 다시 하신다 들었습니다만 제가 아는 중매쟁이가 있는데 새 부인을 소개해 드릴까요?”“저희 집 여동생도 참 괜찮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아직 혼인도 안 했고 스무 살입니다. 대인처럼 연배가 있는 분을 좋아하는데...”“잠깐만요! 저도 있잖아요. 봉 대인, 저 같은 사람도 괜찮지 않으신가요?”봉 대인은 정신이 없었고, 참견하는 사람들을 야단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했다. 지금은 분노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황성으로 돌아가려면 참아야 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