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찌푸린 얼굴로 이른바 예물이라 불리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곁에 있던 맹부인이 말했다.“선물을 보낸 사람이 특별히 말했다구나. 이건 미래의 황후에게 주는 것이라고… 며칠만 지나면 3월이 되는구나. 보아하니 폐하께서는 네가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신 모양이야…”봉구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맹건 장군 부부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스승님과 사모님께 폐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말이 끝나자 밖에서 사람이 알렸다.“부인, 누군가가 소공자를 찾으러 왔습니다.”봉구안의 마음이 흔들렸다. 마치 바람이 호수를 스치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듯이……장군부.봉구안이 보니 방문객은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그는 그녀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저는 은육이라 합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물건을 전달하러 왔습니다.”그는 즉시 긴 모양의 비단 상자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비록 그가 스스로를 소욱의 사람이라고 칭했지만, 그녀는 본래 신중한 성격이라 그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남자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상자를 한 손으로 열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었다. 기계 장치나 속임수는 없었다.비단 상자 안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봉황 비녀가 들어 있었다.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물건이었다.비녀를 본 순간, 봉구안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이 봉황 비녀는 과거 소욱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그들이 이혼한 뒤, 그녀는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남자는 상자를 닫고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심하고 받으셔도 됩니다.”봉구안은 비단 상자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밤.방 안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고, 한 남자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그의 준수한 얼굴은 등불 빛에 비춰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그때 진한길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공손히 말했다.“폐하, 북방으로 보낸 사람이 돌아왔습니다.”소욱의 시선이 손에 들고 있던 공문에서 문 밖으로
“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봉구안은 찌푸린 얼굴로 이른바 예물이라 불리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곁에 있던 맹부인이 말했다.“선물을 보낸 사람이 특별히 말했다구나. 이건 미래의 황후에게 주는 것이라고… 며칠만 지나면 3월이 되는구나. 보아하니 폐하께서는 네가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신 모양이야…”봉구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맹건 장군 부부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스승님과 사모님께 폐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말이 끝나자 밖에서 사람이 알렸다.“부인, 누군가가 소공자를 찾으러 왔습니다.”봉구안의 마음이 흔들렸다. 마치 바람이 호수를 스치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듯이……장군부.봉구안이 보니 방문객은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그는 그녀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저는 은육이라 합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물건을 전달하러 왔습니다.”그는 즉시 긴 모양의 비단 상자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비록 그가 스스로를 소욱의 사람이라고 칭했지만, 그녀는 본래 신중한 성격이라 그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남자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상자를 한 손으로 열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었다. 기계 장치나 속임수는 없었다.비단 상자 안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봉황 비녀가 들어 있었다.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물건이었다.비녀를 본 순간, 봉구안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이 봉황 비녀는 과거 소욱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그들이 이혼한 뒤, 그녀는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남자는 상자를 닫고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심하고 받으셔도 됩니다.”봉구안은 비단 상자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밤.방 안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고, 한 남자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그의 준수한 얼굴은 등불 빛에 비춰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그때 진한길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공손히 말했다.“폐하, 북방으로 보낸 사람이 돌아왔습니다.”소욱의 시선이 손에 들고 있던 공문에서 문 밖으로
송가의 정원에서 송가와 봉가의 사람들은 함께 성지를 들었다.“황제 폐하의 성지가 내려졌습니다. ‘봉장미라는 여자가 있으며, 지혜롭고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나는 그녀의 외로움을 안타까워하며, 이제 맹 소장군과 의논하여 그녀를 양녀로 삼고, ‘맹’ 성을 하사한다…’”이 조서를 들은 모든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봉 대인은 분노하며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이미 한 딸을 송가에 보냈는데, 또 다른 딸을 보낸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황제는 이전에 이혼을 명령하고 아내를 빼앗아 갔더니, 이제는 자식도 빼앗으려 하는 것인가!반면,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과 충격을 느꼈다.황제는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 그가 뒤에서 사람을 보내 이곳의 일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일까?그 생각에 봉 대인은 식은땀이 흘렀다.봉 부인은 딸이 무엇이라 불리든 상관없었다. 이제 성지가 내려졌으니, 봉장미는 명분이 확실해졌다.송가 사람들도 안심하며 기뻐했다.그들은 이제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었다.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은, 황제가 성지를 내려 이 혼인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황실의 보복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중요한 것은, 봉장미가 이제 ‘맹가의 딸’이 된 것과 같은 신분이 아니라, 황제의 조서를 통해 이 혼인에 대한 황제의 입장이 명확히 드러났다는 것이었다.객잔으로 돌아온 봉 대인은 봉구안을 한쪽으로 불러 조용히 말했다.“너와 이혼하기 전, 폐하께서는 이미 네 신분을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를 폭로하지 않고, 장미를 보호하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폐하께서 이렇게 하는 이유는 모두 너를 위해서일 것이다.”“구안아, 내가 하나만 조언하겠다. 황궁으로 돌아가서 황제 폐하와 함께 있거라.”“네가 여기서 떠도, 황후로서의 생활이 더 편하지 않겠느냐?”봉구안의 얼굴은 차가웠다.“그것은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제 일에 걱정하지 마십시오.”봉 대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송려는 사당을 나서며 여전히 꿈만 같다고 느꼈다. 봉가에서 사람들이 왔고, 부모님과 결혼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장인, 장모님을 만나기 전에, 송려는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뜰을 나서며, 문 밖에서 마치 오래 기다린 듯한 봉구안을 보았다.“소…” 그가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다.봉구안의 시선은 차갑고, 가벼운 듯이 그에게 내려앉았다. 마치 신경 쓰는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다친 것이오?”송려는 조금 놀랐다. 그녀가 사람을 걱정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녀와 봉장미는 쌍둥이지만 성격이 매우 달랐다.봉장미는 이해심이 많고, 온화하고 세심했다.하지만 소환, 즉 봉구안은 약한 사람을 싫어하고, 뒤처지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그는 그때 그들이 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이 조금만 느려졌을 뿐인데 소환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송려! 빨리 빨리 움직이지 못하겠소?”그래서 그는 그녀가 동정심이 없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개의치 않을 사람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송려는 쓴웃음을 지었다.“혹시 내 집안에 해를 끼친 건 아니겠지?”봉구안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소.”송려는 놀랐다.아직 그런 일은 아니지만, 그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그는 알지 못했다. 봉구안이 그의 혼인 문제를 위해 송 부인을 부추겨서, 송 대인이 밤새 여덟 명의 여자와 싸우게 만들었던 일을 말이다...곧 두 사람은 앞마당에 도착했다.양가 부모는 여전히 혼인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송가는 이 혼인을 승인했지만, 여전히 몇 가지 걱정했던 점들이 있었다.그들은 말했다.“대신, 이 혼인은 절대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왕실과 연관되므로, 혼인식 당일, 장미가 봉가를 떠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봉가의 딸로 간주하지 마십시오.”봉 대인과 봉 부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묘하게 찡그렸다.이 말은 결국,
밤.송가의 의관.이 시간에는 병자가 찾아오는 일이 드물었다.송 대인은 약재를 만지며 몰두하고 있었다.그러다 보니 벽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했다.쾅!순간, 그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머리가 약재 그릇 속에 처박힌 채로 정신을 잃었다.송 대인이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에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더구나, 그곳은 그의 방이었다.그는 몇 번 소리쳐 보았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이때 하인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내보내진 상태였다.끼익…문이 열렸다.드디어 누군가 들어왔다.송 대인은 목을 빳빳이 세우며 바라보았다.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였다.“부인,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요!”송 대인은 놀랐으나 동시에 안도했다.도둑이 아니라 다행이었다.그러나 송 부인은 싸늘한 표정이었다.남편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대신 그녀는 익숙하게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곧이어 그녀가 명령하자 몇몇 젊은 여자가 연이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송 대인은 그제야 한숨 돌렸던 마음이 다시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부인! 당신…”송 부인은 갑자기 남편을 돌아보았다.그 눈빛에는 젊었을 때의 동경이나 애정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어머니로서의 고뇌와 결단만이 남아 있었다.“폐비 봉씨의 말이 맞았습니다. 자손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있죠.”송 부인은 싸늘하게 말했다.“남편, 아들을 위해서 당신이 좀 고생해 줘야겠어요.”그녀는 남편이 알던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송 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부인, 설마… 아니, 안 돼!”송 부인은 서글픈 웃음을 터뜨렸다.마치 막다른 길로 몰린 사람이 모든 이성을 놓아버린 듯했다.향을 다 피운 그녀는 천천히 남편을 바라보았다.“아들을 보러 갔었습니다.”“그 몸에 난 수많은 상처… 다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죠…” “당신 아들이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무정할 수 있나요.”송 부인은 말에 힘을 주었다.“당신이 원하는 자손 문제.
송 대인과 송 부인은 동시에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이 폐비를 말이다.봉구안은 진지하게 말했다.“듣자 하니, 송 대인께서 보태 신약을 지어 태아를 안정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분께서는 틀림없이 아들을 하나 더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이 말이 떨어지자, 모두 침묵에 빠졌다.송 부인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가 창백해졌다.봉 대인은 즉시 딸을 꾸짖었다.“어디 감히 남의 집 자손 문제에까지 참견하느냐! 당장 나가거라!”송 부인은 남편을 향해 말하려다 말았다.이 모든 것이 봉구안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아무 준비 없이 이런 말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송가에 오기 전, 이미 오백에게 정보를 알아보게 했다.송 대인은 다른 취미도 없고, 오로지 의학 연구에 몰두하며 자신의 의관에서 밤낮을 보내는 사람이었다.그는 집에 거의 들르지 않았고, 아내를 방치했다.부부의 잠자리가 없으니, 자식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송 부인은 최근 몇 년간 얼굴에 기미가 짙어지고 월경도 불규칙하다는 소문이 있었다.봉구안은 확신했다. 송가에 자식이 한 명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송 대인이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였다.좌중에서 송 대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냉랭하고 딱딱했다.그는 한 마디로 단호했다.“봉 대인,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이 말은 곧 손님을 내보내겠다는 뜻이었다.봉 대인 역시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봉구안은 송 부인을 바라보았다.“부인, 아까 말씀은 당신을 모욕할 뜻이 아니었습니다.”“결론적으로 자손 문제는 해결책이 없는 게 아닙니다.”“하지만 진정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떼어놓는다면, 공자께서는 평생 고통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그건 부인께서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송 공자께서는 고집이 대단합니다. 한 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분이시죠.”송 부인의 마음 한 켠이 시큰거렸다.그녀는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아들은 사당
봉구안이 전에 편지에서 대략적으로만 말했던 것을, 이번에는 모든 일을 세세히 설명하며 봉 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그 후, 어머니와 두 딸은 송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봉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양가 부모님이 솔직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우선입니다. 어머니와 이견이 없으시다면, 제가 직접 가마를 준비하여 장주에 있는 송가를 방문하겠습니다. 성의를 보이는 것이 먼저니까요.”봉 부인은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다. 우리가 직접 송가에 가야지.”“그런데 아버지는…” 봉장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봉 부인의 얼굴에 불쾌함이 스쳤다.그가 저지른 일만 떠올려도 그녀는 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봉구안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아버지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옆방.봉 대인은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진다는 듯 봉구안에게 따졌다.“왜 우리가 장주로 가야 하는데? 송가에서 와서 우리를 뵙는 것이 도리 아니냐? 나는 안 간다! 우리 딸이 시집을 못 가서 안달이라도 난 것 같구나! 송가 따위는 필요 없다, 딸을 데려가겠다는 놈은 줄을 섰으니 말이다!”봉구안의 태도는 냉랭했다.“아버지가 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어머니 혼자 가셔도 됩니다.”“송가가 원하는 건 봉가의 성의입니다.”“가구원 중 한 명쯤은 빠져도 아무 상관없습니다.”봉 대인은 순간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이 망할 년아! 내가 가장인데, 딸이 시집가는 일은 내가 결정할 일이다!”“봉가에서는 내 말이 곧 법인 것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그날 밤.맹가 부부가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하지만 봉 대인은 삐쳐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들을 왜 만나야 한단 말이냐! 내 착한 딸을 그런 꼴로 만든 걸 감사히 여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은 홀에서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눴지만, 봉 대인은 홀로 방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 고립된 채 시간을 보냈다.누군가 자신을 부르러 오겠지 싶었지만, 맹가 부부가 떠날 때까지도 아무도 그를 부르지
다음 날, 봉구안은 장군부로 가서 맹 부인을 찾아뵙고 안부를 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장기양이 들어섰다.“사모님, 장군께서 물건을 가져오라 하셔서 왔습니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맹 부인 곁에 앉아 있는 소환을 보았다.“스승님! 저를 보러 오신 것입니까!”장기양은 봉구안이 기억하던 그보다 훨씬 키가 커졌고, 체격도 커졌으며, 더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동방세보다도 더 까맣게 보였다.사제가 다시 만났으니 기쁘게 시간을 보내야 마땅했지만, 장기양은 임무를 받고 온 터라 오래 머물 수 없었다.“스승님, 꼭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좋은 술을 묻어두었는데, 내일 반드시 찾아뵙겠습니다! 스승님, 꼭 기다려 주세요!”장기양은 떠날 때 한 걸음에 세 번 뒤돌아보며 스승이 사라질까 봐 아쉬운 눈길을 보내며 나갔다.맹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저 아이는 너와 참 닮았어. 전쟁터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던 그 모습 말이야.”이내 그녀는 앞서 나눈 대화로 돌아가 봉구안에게 말했다.“세 달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것이다. 네가 남의 일에만 몰두하다 폐하와의 약속을 잊을까 염려되는구나…”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다음 날, 장기양은 약속을 지켜 술을 가지고 왔다.“장군께 하루 휴가를 받았습니다. 스승님, 이건 제 제자로서 드리는 작은 정성입니다!”봉구안은 오랜만에 술을 마셔보았다. 정말 맛있는 술이었다. 입안에서 풍미가 가득 퍼졌고, 목넘김은 강렬했으며, 뒤끝은 길게 이어지는 여운이 있었다.장기양은 더 이상 과거의 가난했던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봉구안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스승님, 이 술은 제가 호룡부를 칠 때 그들의 주막에서 빼앗은 겁니다. 이 호룡부 사람들은 술을 잘 빚는 걸로 유명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술은 단 한 병뿐입니다. 장군께서 달라고 하셨지만 제가 드리지 않고 스승님을 위해 남겨뒀습니다!”봉구안은 그를 보며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부모를 떠올렸다.그들이 하늘에서 이 모습을
봉 대인은 그 뺨을 맞고 한동안 멍해 있었다. 눈앞의 이 여인이, 평소엔 늘 온화하고 말조차 부드럽게 하던 자신의 아내라니 믿을 수 없었다.“당신, 미쳤소?!” 밖에 하인들이 있는데 봉 대인은 몹시 화가 났다.하지만 오백은 흥미롭게 이 광경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봉 대인은 한 대로 부족해. 몇 대 더 쳐야 속이 시원할 텐데.’봉 부인은 분노와 슬픔이 한데 얽혀 거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깊은 한숨만 내쉬며 머릿속에 오직 자기 딸,‘봉장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하루라도 빨리 장미를 만나야겠어.’봉 대인은 손에 들린 편지를 흔들며 오백에게 물었다.“지금 이 아이들은 어디에 있느냐!”그녀들을 당장 잡아다가 다리를 부러뜨려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다음 날, 봉 대인은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휴가를 내고 집을 떠날 준비를 했다.어차피 자신은 별 쓸모 없는 관직에 있었고, 자신이 빠져도 나라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하지만 그 두 아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그는 집안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을 치료하러 가는 것이라며 핑계를 대었다. 집안일은 큰아들과 그의 부인에게 맡겼다.출발하는 날, 서자 봉명헌이 울며불며 그의 옷에 매달렸다.“아버지, 꼭 살아서 돌아오셔야 해요! 아버지 없으면 이 집은 망해요!”그러면서 콧물을 그의 옷에 문대는 모습에 봉 대인은 황급히 발길질하며 그를 날려버렸다.“이 놈아, 썩 꺼지지 못할까!”뒤이어 봉 대인의 첩, 임이랑이 그의 품에 안겨 흐느끼며 말했다.“서방님, 가신다면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가 서방님을 보살필게요…”봉 대인은 이미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차창을 열고는 차갑게 말했다.“언제 떠날 셈입니까? 서둘러 출발하십시오.”봉장미가 북방에서 고생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남편의 이런 작태가 기가 막혔다.봉 대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요즘 들어 이 여인이 정말 말버릇이 없어졌군!’그는 속으로 부글거렸지만 차마 말을 내뱉지
태황태후는 황제가 후궁의 수많은 미인을 두고 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즉시 영비에게 물었다.“그 남자가 누구냐!”그러면서 눈에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영비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강호 출신으로, 이름은 ‘소환’이라 합니다. 폐하께서 그를 구하려 몇 차례나 위험을 무릅쓰셨습니다.”태황태후는 얼굴이 점점 더 분노로 물들었고, 영비는 더욱 견디기 힘든 사실을 전했다.“그 소환이 제법 능력이 있어 밤에 황궁에 잠입했고, 그날 밤 자진궁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들었습니다.”순간 태황태후는 너무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듯했다.“터무니없구나! 한 나라의 군주가… 어찌 이토록 방탕할 수 있단 말이냐!”이 일을 소씨 가문의 선조들에게 어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그녀는 죽고 싶을 만큼 비통했다.영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할마마마께서는 지금 당장 폐하께 이 일을 직접 묻지 마옵소서. 폐하께서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태황태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 소환이라는 자, 내가 반드시 그 자를 죽일 것이다!”황제는 이전에는 정상적인 남자였다. 그러니 분명히 소환이 먼저 유혹했을 것이다.영비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이틀 후.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참석자는 황제와 후궁들뿐이었다.연회의 분위기는 무척 침울했으며, 마치 홍문연에 비견될 정도였다.소욱은 차가운 눈빛을 띠며, 서리 같은 표정으로 여느 때보다도 냉정한 목소리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성지가 이미 내려졌으니, 짐은 그대들을 억지로 내쫓지 않겠다. 그러나, 출궁할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다. 출궁하지 않으면, 조정이 그대들을 종신토록 부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후궁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황제의 뜻은 분명했다. 궁에 남는다 해도 더 이상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순간, 그녀들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망설였다.이때, 모용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낮추어 절하며 말했다.“신첩은 출궁을 원하옵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