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봉장미의 얼굴에는 놀라움, 흥분, 그리고 아쉬움이 연이어 스쳐 지나갔다.언니가 자신을 대신해 황제와 혼인하고, 또 황제와 이혼을 했다니!?그녀는 마치 이야기를 듣는 듯 어리둥절했다.“언니, 폐하와 이혼한 건, 폐하를 좋아하지 않아서야?”장미는 이제야 자신이 좋아하는 낭군을 찾았기에, 언니도 행복하길 바랐다.봉구안은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대답했다.“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았지…”그 순간, 바람이 구름을 몰고 와 달빛을 가렸다.황성.궁 내 어화원.영비가 궁을 떠나려는 서왕의 앞을 가로막으며 따졌다.“폐하께서는 어디 계시죠?”서왕의 온화한 눈빛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선성에서 이전에 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군량이 잘 지급되었는지 직접 확인하시러 가셨습니다. 모든 병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말입니다. 또한, 새로 부임한 관료들의 업무를 점검하셔야겠다며 이른 아침부터 떠나셨습니다.”“이 모든 것은 마마께서도 알고 계신 일이 아닙니까? 왜 저에게 묻는 거죠?”영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았다.“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선성으로 가셨나요?”서왕은 담담한 눈빛으로 대답했다.“그렇습니다.”그리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나 그녀와 거리를 두며 말했다.“마마, 몸가짐을 단정히 해 주시지요.”멀리서 호위병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서로 떨어져 각자의 길로 떠났다.영비의 시선은 더욱 서늘해졌다.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선성의 사소한 문제로 황제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즘 궁중에는 어딘가 평소와 다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특히 황제는 그녀가 이전에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불안했다.영비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떨면서 눈가에 붉은 자국이 맺혔다.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는 듯했다.“폐하, 폐하께서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그녀는 통제할 수 없는
초여름, 소욱은 검은빛과 자줏빛이 섞인 얇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햇빛이 비칠 때, 그의 모습은 맑고도 우아했다.뜰 안의 사람들은 모두 맹 장군을 따라 예를 올렸고, 맹 부인도 예를 갖추었다.봉구안도 그제야 정신이 들어 허리를 숙이며 손을 모아 인사했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그녀는 소욱이 이곳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게다가 그녀는 방금까지 양연삭과 천룡회에 관한 일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예를 생략하라.”소욱이 앞으로 다가와 직접 봉구안을 부축했다. 그녀가 몸을 바로 세우는 순간, 그는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3월이 되었다. 이제 짐에게 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알겠습니다.”맹 장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황제께서는 또 북방에 오셨단 말인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못 믿으시는 걸가?소욱은 봉구안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맹건이 다가와 정중하고 단호하게 보고했다.“폐하, 선성의 반란과 관련하여 소신의 미흡한 의견이 있습니다. 단지 병사들에게 군량을 지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듯합니다. 이에 소신이 한 편의 서책을 작성했으니, 감히 폐하와 상세히 논의하고자 합니다…”맹 부인은 황제가 이번에 공무가 아닌 개인적인 일로 왔음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녀의 둔감한 남편은 그저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려 들었다.“부군, 군영에 새 병사들은 모두 잘 배치했나요?”그러나 맹건은 부인의 말 속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의 책무에만 몰두했다.“부인, 어서 내 서재에 가서 그 정책 논문을 가져오시오.”“폐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다들 뭐 하고 있는가? 어서 차를 준비하라.”짧은 대화 속에서 맹건은 모든 준비를 순식간에 마쳤다.소욱은 떠날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상황에 놓였고, 봉구안을 보며 몇 번 눈짓을 보냈다. 그의 눈빛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맹건은 열정적으로 정책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소욱도 그의 열정을 꺾
소욱의 준수한 얼굴엔 억누른 인내와 절제가 서려 있었다.그는 화룡 설계도를 봉구안의 손에 다시 쥐여주며 말했다.“필요 없다.”“내가 너를 위해 해온 일들은 다 네 보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설령 네가 나와 혼인하지 않더라도, 자유를 위해 무엇을 내놓을 필요는 없어.”“봉구안, 너는 본래부터 자유로운 존재였지 않느냐.”봉구안은 손안의 대나무 통을 잠시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저는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몸이었습니다. 스승님과 사모님이 저를 길러주셨지요.”“그러니 제 혼수품은 제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가진 것은 모두 자유각을 사거나 장미의 혼수를 마련하는 데 썼습니다.”“지금 제 손에는 여윳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점점 더 알 수 없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그는 결코 둔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그는 대체 봉구안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렇기에 그는 이순간만큼은 직설적으로 그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폐하께서 이미 예물을 보내셨으니, 예의상 보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설계도를 제 혼수품이라 생각해주세요.”소욱의 찌푸린 미간이 단번에 펴졌다.그와 동시에 믿기 어려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혼수품이라니!이 말은… 그녀가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정상에 오를수록 더욱 신중해야 하듯, 소욱은 쉽게 확신하지 못했다.그는 다시 물었다.“그런데 왜 봉황 비녀는 받지 않은 것이냐?”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비녀를 주는 것보다 직접 꽂아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그리 현명하지 못하신 듯합니다.”소욱의 가슴이 무언가에 맞은 듯했다.그녀가 원한 것은 그가 직접
정이 깊어질 즈음, 봉구안이 소욱을 밀어내며 물었다.“그 은육이라는 자, 폐하께서 제 곁에 붙여둔 사람인가요?”소욱은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는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며 말했다.“그래. 하지만 너를 감시하려 한 건 아니다. 다만 네가 양연삭과 마주칠까 봐 보호하려 했을 뿐이다.”봉구안은 단호히 말했다.“다음부터는 미리 제게 알려주셔야 합니다.”소욱은 저항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그의 턱선은 날카로웠다. 그의 목젖은 위아래로 움직이며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억누르고 있었다.지금 그는 어떤 말이든 그녀에게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는 낮고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다시 시작해도 되겠느냐?”그의 엄지손가락은 그녀의 입술 위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었고, 그의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다.그녀를 오래도록 갈망했음을 알 수 있었다.봉구안은 크게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그럼… 음!”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욱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입술을 덮쳤다.…저녁 식사 시간.소욱은 상석에 앉아 있었다.맹 장군은 부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말을 줄이고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려 노력했다.그는 황제와 봉구안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특히 황제가 봉구안에게 반찬을 집어주었고, 봉구안은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먹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그 순간, 소욱이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맹 소장군은 나라를 지킨 공이 있다. 짐이 경을 위해 한 잔 올리도록 하마.”봉구안은 여유 있는 태도로 잔을 들며 말했다.“제가 공을 세웠다고 하기엔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남제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맹 장군과 맹 부인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황제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봉구안의 정체를 드러낸 이유가 무엇일까?소욱은 이내 맹건 장군 부부를 향해 말했다.“맹 장군, 짐은 이미 구안의 출신을 알고 있다. 그대와 부인이 그녀를 오랜 세월
팽팽한 기류 속에 맹 부인이 나서며 말했다.“폐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미도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폐하께서 불편하실까 염려됩니다.”소욱은 여전히 봉구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결국 봉구안은 입을 열었다.“스승님, 오늘 밤은 장군부에 머물겠습니다.”그제야 소욱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봉구안은 서쪽 별채에, 소욱은 동쪽 별채에 머물게 되었다.그렇게 둘은 각자의 방에서 편히 지낼 예정이었다.그러나, 봉구안이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앉아 칼을 꺼냈으나, 들어온 사람이 소욱임을 확인하곤 칼을 베개 밑으로 돌려놓았다.“폐하께서 여긴 왜 오셨습니까?”소욱은 대답 대신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너희 스승이 쓴 서책을 읽다 보니 정신이 말똥말똥해 잠들 수가 없더구나. 할 일을 하나 빠뜨렸더구나.”봉구안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 말입니까?”소욱은 갑자기 봉황 비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내 손으로 네 머리에 직접 꽂아주라 하지 않았느냐?”봉구안은 머리를 풀어놓은 상태였다. 머리를 다시 묶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답했다.“폐하께서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내일 하시지요.”그러나 소욱은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넘기며 부드럽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구안아, 정말 모르겠느냐? 비녀는 핑계일 뿐이다. 나는 그저 너를 보고 싶어 왔을 뿐이다.”말을 마치고 그는 그녀를 침대 위로 살며시 눕혔다.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보셨으니 됐습니다.”소욱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한 걸음 더 나아가도 되겠느냐?”그의 눈빛은 뜨겁고 탐욕스러웠으며, 시선만으로 그녀의 옷을 벗겨내는 듯했다.봉구안은 직설적으로 물었다.“폐하께선 혹시 맛을 보고 더 원하시는 겁니까?”소욱은 그녀의 직설에 순간 당황했으나,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네가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는구나.”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맹건은 반쯤 취한 척했지만, 분명히 깨어 있었다.그는 황제에게 봉구안이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황제가 그녀를 더 이해하도록 돕고자 했다.그러나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다.“구안이를 좋아했던 남자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하지만 그 아이는 눈치가 없고, 마치 돌처럼 단단했지요.”“예전에 무술을 배우러 온 한 남자아이가 자주 구안이의 머리카락을 살짝 당기며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습니다.”“하지만 구안이가 화를 내며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뜯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그 이후로 그 아이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았지요.”맹건은 이런 무해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도, 단 한 번도 단회욱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단회욱은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랐고, 봉구안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이었다.황제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그러나 소욱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구안이가 그렇게 둔했다면서, 어찌하여 단회욱은 좋아했단 말이냐?”맹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순간 주변의 바람마저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맹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전했다.“폐하, 단회욱은 이미 과거의 사람입니다. 폐하께서는 구안이의 부군이 아니십니까.”그러나 소욱은 자신이 단회욱보다 못한 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맹건의 회피성 대답으로는 그의 의문을 풀어줄 수 없었다.“맹 장군의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단회욱이 살아 있다면, 구안이는 누구를 선택했겠느냐?”정자의 분위기는 단숨에 무거워졌다.소욱은 사냥감을 정조준한 사자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며, 원하는 답을 얻기 전에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맹건은 성문을 지키는 장수처럼 단단히 방어를 다지며 말했다.“소신의 생각으로는, 구안이의 성격상 정말 단회욱을 잊지 못했더라면, 다른 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하, 이미 폐하께서 이기신 셈입니다.”맹건의
단정은 장막 안으로 인도되었다. 그곳에는 황제 혼자 있었다.그는 거리낌 없이 분노를 터뜨리며 외쳤다.“대체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형수님 곁을 떠나실 거죠!”소욱은 검은 눈썹을 좁히며 그를 냉랭하게 바라보았다.봉구안 앞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위압감이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분위기는 언제든 눈앞의 이 무례한 자를 처단할 것처럼 날카로웠다.단정의 격렬한 태도에 소욱은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형제는 정말이지, 성격이 하늘과 땅 차이구나.”하나는 온화하고 자애로우며, 다른 하나는 이기적이고 잔인했다.단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쳤다.“대답해주세요! 어떻게 하면 제 형수님을 잊고 궁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요!”소욱은 그의 말을 듣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표정에는 엄숙하고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넌 형을 가진 덕을 톡톡히 보고 있구나.”단정은 바로 반격했다.“저한테 손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형수님이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 자신하시나요?”소욱은 넓은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이 건방진 녀석…단정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오며 눈물을 머금은 듯 붉어진 눈으로 냉소했다.“폐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형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건 저희 형님이었다는 걸요…”“만약 형님이 죽지 않았더라면, 폐하는 형수님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을 거예요.”“자유각이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그건 형님과 형수님이 함께 살기 위해 마련한 집이었어요. 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함께 살겠다고 했던 곳이라고요.”“형수님이 형님을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나요? 폐하를 위해선 무엇을 해줬는데요?”“형수님은 그저 비어 있는 자리를 메운 것뿐이라고요!”“폐하께서도 결국 형수님에게 버려질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저는 형수님의 곁을 영원히 지킬 거고요!”소욱의 눈꺼풀이 한껏 떨렸다.그를 죽이고 싶었다.그러나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그는 비꼬듯 말했다.“날 도발해서 너를 죽이게 만들려는 것이냐?”“너도 오로지 그런 방
양연삭이 구출된 후, 남제 전역에 그를 찾는 수배령이 내려졌다.조정뿐만 아니라, 강호에서도 염추가 이끄는 무림맹과 동방세가 주축이 된 유랑 협객들이 이 범죄자를 추적하고 있었다.하지만 양연삭의 행적은 매우 기묘하여, 아무런 진전도 없는 상태였다.그러던 와중, 상황은 전환점을 맞이했다.서재 안.은육이 보고했다.“폐하, 전해 온 소식에 따르면 양연삭이 북연 국경 내에 나타났다고 합니다.”봉구안도 그 자리에 있었다.그녀는 이 말을 듣고 얼마 전 스승님과 사모님이 내린 추측을 떠올렸다.“양연삭은 이미 북연 사람들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소욱의 표정은 차갑고 심각해졌다.만약 양연삭이 북연과 관련이 없다면, 남제 측에서 사신을 보내 북연의 협조를 구해 범인을 체포할 수도 있다.그러나 봉구안의 말처럼 양연삭이 적국과 손잡았다면, 이는 남몰래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신중한 조치가 필요했다.소욱은 명령을 내렸다.“모든 군졸들에게 신중히 행동하라 전하고, 인원을 더 보태어 비밀리에 북연으로 파견해 그 자를 잡아오거라.”“명 받들겠습니다!”공적인 일이 정리된 후, 봉구안은 소욱의 부상당한 팔을 바라보며 일부러 물었다.“팔은 이제 안 아프신가요?”방금 전까지 병약한 척하더니, 대체 누구를 상대로 그런 연기를 한 건지.소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깨달았다.지금 와서 아픈 척 다시 연기하기엔 늦었다고 판단한 그는, 봉구안의 손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참 신기하지 않느냐. 네가 곁에 있으니, 전혀 아프지 않더구나.”옆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황제가 언제 이렇게 달달하고 느끼한 말을 하게 된 건지…소욱은 고육지책으로 일부러 상처를 입었지만, 공적인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팔의 부상은 별 문제가 없었기에, 그는 여전히 군영을 돌아보며 시찰에 나섰다.한편, 봉구안은 단정을 데리고 자유각으로 돌아갔다.그녀는 그에게 자숙하라고 명령하며 방 안에 가두었다.단정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방에 들어갔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