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 후, 최 상궁은 잠시 영화궁에 들렸다.최 상궁은 눈에 띄게 피곤한 모습의 연상을 보며 환심을 사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소인, 흔비마마를 뵙사옵니다!”“어젯밤 수고가 많으셨으니, 이는 제가 직접 고아온 보양탕이옵니다. 부디 몸 보하시옵소서...”최 상궁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계집아이를 내가 너무 우습게 봤구나.’‘아무리 말려도 영화궁을 떠나려 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높은 가지에 오르려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높은 가지가 되려 했구나!’최 상궁은 연상의 얼굴을 재차 훑어보았다. 그녀는 경국지색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단정하고 깨끗한 이목구비는 제법 이 황궁과 어울리는 듯했다.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만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눈길을 줄 만도 했다.최 상궁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며 말했다.“마마, 신첩은 옛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마마께서는 이제 믿을 만한 사람도 곁에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첩을 다시 곁에 두시어 모시게 하심이 어떠실지요?”그러나 연상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필요 없다!”최 상궁은 연상의 이러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며, 날카로운 말투로 은근히 그녀를 찔렀다.“마마께서는 처음의 처지를 잊으셨나이까?”“타인들이 마마를 어떻게 보는지 아시옵니까? 폐비마마께서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미 용상을 차지했다며, 주인을 배신한 노예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하옵니다.”“이 궁궐은 홀로 싸워나가는 곳이 아니옵니다. 마마 곁엔 사람이 필요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폐하께서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실 때, 영화궁은 다시 냉궁이 될 것이옵니다!”연상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모든 억울함을 꾹꾹 눌러 참았다.“당장 나가거라!”그들은 전혀 몰랐다. 황제가 폐비 봉씨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핑계로 정당하게 영화궁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또 그녀는 어젯밤 황제의 승은을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황제의 계획에 협조했을 뿐이었다.그녀의 마음속 고통은, 누구에게도 말
선성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그 원인은 장졸들이 조정에서 내린 미미한 양식과 삯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탓이었다. 이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주국공부가 화를 입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성을 빠져나왔다.이곳 선성은 남제의 중요한 길목으로, 양식을 운반하고 군대를 이동시키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였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과 민간은 큰 충격에 빠졌다.봄날의 찬란한 햇살 아래, 본디 맑고 청명해야 할 하늘은 선성 위로 겹겹이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성문 밖, 오백은 마차를 몰고 가던 중 고삐를 잡아 세웠다. 이윽고 그는 마차 안으로 들리도록 청하며 말했다.“소장군, 선성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마차 안, 봉구안은 그간의 눈병이 이미 나았으나, 며칠 동안 강한 빛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길을 돌아 동쪽으로 가자구나.”세작의 고변에 따르면, 천룡회의 잔당 일부가 방성에 숨어 있다고 하였다. 그녀의 원래 계획은 곧바로 남하하여 방성으로 쳐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전술은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천룡회의 잔당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방성의 무리를 제거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세력이 있었다. 특히 교주가 은신한 곳은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녀의 이러한 전략은 효과가 크지 않을 터였다.이에 그녀는 우선 무림맹을 찾아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천룡회 같은 집단을 소멸시키려면 무림의 동도들과 함께 논의하여 정파의 힘을 모아야만 완전한 소탕이 가능하리라 판단한 것이다.“비키시오!”밖에서 오백의 격렬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갑자기 멈춰섰다. 봉구안이 마차 커튼을 들어올리니 방금 전 마차가 어린 소녀와 부딪힐 뻔한 상황이었음을 알게 되었다.이 급작스러운 일에 오백의 가면마저 거의 떨어질 뻔하였다. 그는 불쾌한 기색으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림성을 벗어나 동남으로 향하면 동신성에 이르게 된다.무림맹의 본거지는 바로 동신성 내의 심가오에 자리 잡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시골 마을일 뿐이었으나, 그 안에는 강호의 고수들이 즐비하여 그 위세를 가늠하기 어려웠다.마을 어귀에는 큰 돌이 하나 서 있었고, 그 위엔 수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가면을 쓴 두 남자와 어린 소녀가 함께 등장하자 마을 입구의 수비병들은 즉시 길을 막아섰다.그중 한 수비병이 세 사람을 주시하며 물었다.“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정체를 밝혀라!”오백은 이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분명 암호를 요구하는 거겠지.’그러자마자 그는 주군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한 발 물러서더니, 강호의 예를 다하여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이어 중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는 길은 황천길, 돌아가는 길도 황천길! 의로 맺은 형제는 영욕을 함께하고, 강호를 손잡고 전설을 쓴다! 뵙소서! 부맹주 만세!”“풉…”오백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암호가 이렇게 촌스럽다니! 도대체 주군 같은 분이 어떻게 이런 걸 받아들이신 거야?’그의 시선이 닿은 봉구안의 표정에는 미세한 굳음이 엿보였다.‘젠장…! 이래서 내가 무림맹을 오는 것을 싫어한단 말이지.’봉구안이 암호를 마치자, 옆의 소녀 ‘소소’ 역시 흉내를 내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뵙소서! 부맹주 만세!”수비병들은 이를 듣고, 즉시 길을 내주었다.…마을 내부는 겉보기엔 여느 평범한 시골과 다를 바 없었다.무림맹의 위세를 상상했던 오백은, 막상 이러한 모습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이게 정말 강호 최강의 본거지란 말인가? 산속 깊숙한 대저택에, 위엄 있는 무자들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구안은 앞장서며 한 농가의 문을 두드렸다.문을 연 이는 덩치 큰 사내로, 그를 보자마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형제여! 너의 서신을 받고부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어서 들어와!”오백은 나중에서야 알게
한 사내가 있었다. 거칠게 만든 청색 옷과 짧은 저고리를 입고, 온몸에 흙이 묻은 채였다. 한 손으로는 닭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실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엔 풍작의 기쁨이 가득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막 씨를 뿌렸는데, 마침 날씨가 도와주는군.”그 사내는 동방세라 불리며, 준수한 외모와는 달리 검게 그을린 얼굴은 마치 학자 같아 보였으나, 별다른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오백은 막 일어나 예의로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살기를 느끼고 멈칫했다.그 순간, 무리 속에서 소환을 발견한 동방세의 눈빛이 번뜩이며 날카로워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닭을 냅다 내던졌다.그 닭은 마치 주인을 알아보듯 날개를 퍼덕이며 봉구안을 향해 날아들었다.“꼬꼬꼬!”동시에 동방세는 바구니 속 과실을 집어 들고는 마치 암기처럼 봉구안을 향해 내던졌다.오백은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서 있을 뿐,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다른 이들은 이미 방비를 갖춘 듯 모두 재빠르게 피했고, 심지어 소소조차 날렵하게 탁자 밑으로 숨어들었다.다시 보니, 소장군은 어느새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이를 방패처럼 사용하여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우산을 거둔 후에도 추호의 흠집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런 와중에 과실에 머리를 맞고 닭의 배설물까지 뒤집어쓴 오백은 속으로 탄식했다.‘결국 당하는 건 나뿐인가?’동방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이쿠, 실수했네. 다들 무사한가?”봉구안은 평온한 모습으로 우산을 옆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무사하다.”그녀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언제나 식사에 목숨을 거는 동방세가 그들을 먼저 먹게 둘 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분명 그녀의 경계를 풀게 한 후 기습을 가하려는 계략이었다.동방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에게도 권했다.“모두 앉아들 먹게. 소환이 무려 4년 10개월 12일 5시간 만에 돌아왔으니, 참으로 귀한 자리 아닌가.”
“주국공의 딸이라면, 곧 소군주, 지금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란 말인가?!”범진이 크게 놀라 외쳤다.강호의 사람들은 대개 조정, 특히 황실과 얽히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법.소군주가 이곳에서 사고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다른 이들 또한 궁금해하며 물었다.“부맹주, 그 아이가 스스로 인정하였소?”“단지 내 추측일 뿐이오.” 봉구안이 솔직히 대답했다.“그럼 어찌 알아내셨소?”이때 동방세가 나섰다.“그 아이의 옷차림은 소박하나, 신발은 바꾸는 것을 잊었소.”“황금 실로 짠 비단과 은은히 빛나는 자수… 이는 황실에서만 쓰는 특수한 신발이라오.”“아이의 발은 금세 자라기에, 이렇게 호화롭게 장만해 줄 이는 주국공밖에 없을 것이오.”그가 말을 마치고 봉구안을 바라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사실 그녀는 처음 소군주를 보았을 때부터 소녀의 눈썹과 눈매가 소욱과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범진이 자청하여 말했다.“제가 저 아이를 데려다 주겠소! 내 발은 빠르고 힘도 좋아, 충분히 아이를 업고도 뛸 수 있소.”동방세는 이를 막지 않았다.“그럼 그렇게 하겠소. 그럼 이제 적을 물리칠 방도를 의논하도록 하지.”“그나저나, 구호 몇 마디를 정해 사기를 북돋는 것이 어떻겠소?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소. ‘마귀를 베고 용을 수호하라, 무림맹의 영광이다. 바람이 일고 구름이 몰아치니, 오직 우리 무림맹이 주인이다…’”그녀는 옆에 있던 걸레를 집어 동방세의 입을 향해 던졌다.이마에 몇 가닥의 검은 선이 내려앉은 그녀는 냉랭하게 경고했다.“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소?”입구에 세운 암호 정도가 이미 그녀의 인내심 한계였다.동방세는 살짝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내 구호가 별로였소?”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억지로 다른 데를 바라보았다.좋고 나쁨을 떠나, 맹주님은 정말로 눈치가 없구나…그 촌구석에서 접선할 때마다 주고받는 암호… 우리 모두가 얼마나 오래 참아 왔는가…!
동방세는 비록 봉구안이 무림맹을 떠났던 과거를 못내 섭섭히 여겼으나, 그녀가 홀로 적진에 뛰어드는 것을 차마 묵인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마디 내뱉었다.“변했소. 예전엔 누구보다 자기 목숨을 귀히 여겼었는데... 자네 입으로도 말했지 않소. ‘나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고.”봉구안은 팔찌를 단단히 묶으며 담담히 대답했다.“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소.”동방세는 그녀를 막아서며 단호히 말했다.“그러니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시오. 자네는 성이 소씨가 아니지 않소.”봉구안은 그의 말을 무심히 흘려듣는 듯 바라보았으나, 동방세는 그녀를 향해 확고히 선언했다.“소환, 자네는 천룡회 일을 조사하는 데 전념하도록 하시오. 선성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네가 어떤 방도로 해결할 셈이오?”동방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황제로 변장하는 방책은 나도 자네 생각과 같소.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을 사람은 아무래도 나보다 적합한 이가 없겠지.”봉구안은 순간 멈칫했다. “자네가 그 일을 하겠다고?”그녀가 뭔가 말하려 했으나,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건 내가 맹주로서 해야 할 일이오. 그러니 더 이상 말리지 마시오. 이런 공훈은 내가 양보할 수 없거든...”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으나, 그의 태도는 결연했다. 봉구안은 그의 확고한 의지를 깨닫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방세는 평소 유순해 보였으나 무공 실력과 폭발력만큼은 그녀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체격상으로도 남자인 동방세가 황제와 더 흡사해 변장에도 유리했다.…보름 뒤, 조정에서 보낸 사자가 무림맹에 도착했다. 동방세는 연회를 준비해 환대했으나, 사자는 연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황제 폐하께서는 귀하들의 제안을 찬성하시어, 황제로 변장해 반군과 담판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폐하께서는 이 일에 있어 서왕 전하를 주관자로 삼으셨습니다. 전하께서 약 열흘 후 동신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반 시진 후. 서왕과 동방세는 선성 진입 계획을 협의한 뒤, 심가오에 머물기로 하였다. 범진은 그들을 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때, 서왕이 뜻밖에 봉구안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부맹주이시군요? 아까는 몰라뵈었습니다.” 봉구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때, 활발한 웃음소리를 내며 소소가 달려왔다. 그녀는 익숙한 듯 봉구안의 품에 안겨 부드럽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나 밤이 무서워요. 같이 자요…”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왕 일행을 보고는 놀란 듯 굳어버렸다. 아이답게 숨길 줄 모르는 기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서왕 오라버니?’ ‘나를 데리러 온 걸까?’ 소군주는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서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소소를 바라보았다. 소군주가 황성에 자주 가지 않아, 지난번 만난 게 3년 전이었음에도 서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게다가 얼마 전 무림맹에서 그녀를 구했다는 보고가 황제에게 들어갔으니, 서왕은 이번 동신성 방문 목적 중 하나가 소군주를 보호하는 것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서왕은 소군주와 바로 신분을 밝히고자 했지만, 그녀의 눈 속에 드러난 불안감을 보고는 즉시 눈치챘다. ‘어라? 설마 소군주가 이 무림맹 사람들이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성품이 부드러운 서왕은 그녀의 의도를 맞춰주기로 하고, 모르는 척 물었다. “이 아이는 부맹주의 여동생입니까?” 봉구안은 망설임 없이 소소를 서왕 앞으로 밀어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 아이는 주국공의 따님입니다. 서왕께서도 아는 아이일 것입니다.” 이 말에, 소군주는 깜짝 놀라며 작은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오라버니, 그… 그럼 제가…” 소군주는 자신이 황족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던가. 꿈에서조차 입을 다물고 조심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소 오라버니는 어떻게 알게 된 걸까?! 한편, 서왕은 난처한 듯 헛웃음을 터
봉구안과 소군주는 가마 안에 함께 앉아 있었다.그때 벙어리 호위무사가 무심코 몸을 숙여 차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소군주가 단호히 꾸짖었다.“네가 들어오면, 가마는 누가 모는 거야!”벙어리 호위무사는 몸을 잠시 굳혔다가, 결국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봉구안 역시 약간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소군주, 그럼 저는 바깥에서…”소군주는 그의 팔을 힘껏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제 곁에서 저를 지켜야 해요.”봉구안은 자신의 팔을 빼내며 진지하게 말했다.“소군주, 남녀유별이라 하였습니다.”소군주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수상쩍은 미소를 띠고 나직이 속삭였다.“전 알고 있어요.”가마는 덜컹거리며 흔들렸고, 소군주는 금세 졸음이 밀려와 잠들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그녀는 배가 고파 딱딱한 마른 음식을 씹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봉구안은 가마의 커튼을 젖히고 벙어리 호위무사에게 말했다.“잠시 멈추고 쉬게나. 내가 대신 가마를 몰겠소.”하지만 벙어리 호위무사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바람 소리가 너무 커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결국 봉구안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그제야 남자의 눈이 잠시 번쩍였다. 이내 가마를 천천히 멈추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그 시선은 마치 왜 자신을 쳤는지 묻고 있는 듯했다. 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내가 대신하겠소.”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표시했다.하지만 그가 이미 반나절 동안 가마를 몰고 있었으니, 체력이 소진되어 소군주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까 우려한 봉구안은 그를 강제로 마차 안으로 끌어들였다.그 순간 봉구안의 힘이 워낙 강했기에, 벙어리 호위무사는 저항할 겨를도 없이 가마 안으로 주저 앉고 말았다.곧이어 그의 눈빛은 차갑게 변하며 살기가 서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를 보지도 않고 가마를 몰러 나섰다.소군주는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마치 벙어리 호위무사를 깔보는 듯한 태도
대하국의 지원군은 초조함에 휩싸였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옥석비가 있다지만, 겨우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남제 황제가 그들의 10만 대군과 싸우려 하다니, 너무나 오만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곧 이어진 광경은 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땅이 갑자기 들썩이며 사방에서 수천의 병사가 솟아나 그들을 포위해 버렸다.대하국 선봉 지휘관은 망연자실했고, 후방 병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외쳤다.“장군님, 매복입니다!”소욱의 눈은 서늘하게 얼어붙어, 차갑기만 했다.“항복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다.”대하국 병사들은 전투용 쇠뇌를 준비하며 진영을 구축했고, 선봉 장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 남제군을 모두 쓸어 버려라!”소욱의 얼굴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멀리서 준비를 마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올렸다.같은 시각, 북부에서는 북연의 10만 대군이 남제군의 기습을 받았다.맹건은 북방군을 이끌고 어디선가 나타났고, 그의 옆에는 옥석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북연 병사들은 맹건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북방군은 이미 궤멸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맹건은 흙 언덕 위에 서서 강렬한 눈빛과 함께 살기를 뿜어냈다.남제를 공격하는 여러 나라들이 한창 공세를 펼칠 때, 그는 이미 황제와 봉구안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아두고 있었다.처음에는 북방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곧 남제가 이미 ‘거미줄’로 불리는 비밀 통로를 구축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북방군은 패한 척하며 은밀히 거미줄 통로 속에서 숨었고, 그동안 백성들을 대피시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제야말로 반격의 때가 온 것이다.맹건은 장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선조의 옥석비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남제의 국토를 침범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갇혀 있던 늑대처럼 전의를 불태우던 북방군은 순식간에 몰려들어 포효했다.“돌격하라!”북연의 주
단춘의 손이 떨렸다.“뭐라고? 죽였다고?”보고하던 병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는 무릎을 꿇으며 성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음병들이 지나간 후, 병사 수십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장군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단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그 자신도 답을 몰랐다.평생 사람과의 전투만 치러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귀신과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주국공부.시위병이 황제의 침실로 뛰어들어왔다.“폐하! 음병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북연의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말했지! 귀신이면 귀신도 베란 말이다! 당장 음병들을 모두 없애라!”황제의 광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광기가 귀신을 향해 번졌다.시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 그들은 음병입니다. 신출귀몰하며 잡으려 하면 금세 사라집니다.”“야간 경계 중인 우리 병사들이 수십 명 죽임을 당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도저히 손쓸 수가 없습니다!”북연 황제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설마, 이 선성에 진짜 귀신이 있다는 것인가?그는 고심하며 생각을 이어가다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만지더니, 문득 얼굴이 굳어졌다.“내 옥쇄가 어디 갔느냐!”시위병들은 놀라며 어리둥절해했다.황제의 옥쇄가 사라졌다니!제국의 상징이자 중요한 물건이 어째서 사라진 걸까?……다음 날, 선성 밖.남제군은 성 안에서 음병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몇몇 적군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야기는 너무도 황당해서 믿기 힘들었다.본진 안.장수들은 일제히 갑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봉구안도 차분히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머리가 빠른 자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이 황후의 계략임을 간파했다.음병들은 분명 살아 있는 병사들이었다.남제군이 비밀 통로를 통해 이동한 전례가 있는 만큼, 선성 내부에도 비밀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음병으로 적군의 사기를 꺾은 만큼, 이제 공격 명령이 내려질 것이
귀신이 출몰했다는 한 병사의 외침에, 선성을 경계하던 병사들은 순간 굳어버렸다.텅 비었던 선성 내부의 광장에 갑자기 수많은 장병들이 나타난 것이다.그들은 남제 갑옷을 입고, 천둥소리가 어우러진 밤하늘 아래 규칙적으로 걸어갔다.그들 몸에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성벽 위, 누군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음병이다! 음병이 나타났다!”음병이 길을 지나간다는 전설은 여러 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사람들은 평소 죄를 짓지 않으면 한밤중에 귀신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는 말을 흔히 하곤 했다.하지만 현실에서는 비겁한 자들뿐만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들도 귀신을 무서워했다.세상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 음병의 등장에 병사들은 모두 몸을 떨었다.그래도 그나마 용기를 내는 병사들이 장군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음병들의 창백한 얼굴만 봐도 등골이 서늘해졌던 그 순간, 단춘 장군은 바로 갑옷을 챙겨 입고 성벽으로 나왔다.그조차도 음병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남제 장병들이 기괴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보자, 단춘은 잠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병사들에게 단호히 명령했다.“고개를 돌려라! 눈을 감아라! 그들을 보지 말아라!”이는 오래된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었다.음병이 길을 지나갈 때 이를 보면, 음병들이 자신도 같은 동료로 착각해 데려간다는 것이다.여기서 데려간다는 건, 결국 목숨을 잃는다는 뜻이었다.귀신과 신령은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해야 했다.단춘 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 역시 병사들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다.천둥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이는 번개의 울림인지 음병들의 말발굽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한편, 북연의 황제는 선성의 국공부에서 자다가 바깥의 소리에 잠에서 깼다.“밖에 무슨 일이냐!”경호병이 급히 보고했다.“폐하, 음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음병?”황제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이건 틀림없이 남제의 계략이다. 무장을 갖춰라! 그 음병들이란 놈들을
성문이 잠긴 것은 자명했지만, 그 열쇠를 쥔 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명백한 것은 이 일이 연합군 내부의 소행일 리 없다는 것이다.즉, 그들 사이에 이미 남제의 첩자가 스며들었다는 뜻이었다.연합군은 차가운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놀람이 가시자마자, 각 군대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수화부 연합군은 대하국 동부 연합군을 비난하며 말했다.“첩자는 분명 당신들 안에 숨어있을 것이오! 동방군과 교전한 건 당신들밖에 없지 않소!”“우리 수화부는 남부에서 바로 온 병사들이란 말이오!”단춘은 즉각 반박했다.“북연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남제와 싸웠소!”“그리고 남부에서 왔다고 해서 첩자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오히려 이미 섞여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소!”북연 황제는 이때 상대적으로 침착한 태도로 그들의 다툼을 제지했다.“그만하라! 너희의 소리가 귀를 찌르니 멈추거라!”“첩자가 어디에 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성문이 잠겼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적도 성문을 뚫지 못하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황제의 이 말은 언뜻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단춘 같은 경험 많은 장수에게는 부족함이 있었다.단춘은 그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며 물었다.“폐하, 혹시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계신 겁니까?”“저희가 성문을 나갈 수 없다는 건, 결국 여기서 갇혀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군대는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포위된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남제군이 서두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시간을 두고 연합군의 식량을 고갈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전략임이 분명했다.……선성 밖.남제군은 자리를 잡고 주둔 중이었다.지휘소에서는 봉구안이 침착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한 장군이 허리를 굽혀 물었다.“황후마마, 병사들이 선성을 언제 공격하냐고 묻고 있습니다.”봉구안은 그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어리석은 동맹이었다.단춘은 선성의 옥석비를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정정당당히 조유관을 공략하며 남제에 진입했다.그런데 수화부 연합군은 도대체 뭘 하는가?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부 연합군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것은 아닐까?그들의 이런 태도는 단춘을 화나게 했다.그렇다고 이미 도착한 연합군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결국 단춘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들어라. 먹을 것도 쉬는 것도 뒤로 미뤄라.”“다른 나라보다 앞서 선성에 도달해야 한다!”“예!”……감주.대하국 연합군은 성 밖에서 남제 동부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남제 황후 봉구안이 이미 거미줄이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 감주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 계책에 말려든 동부 연합군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그 사이, 봉구안의 동부군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미 묵성에 도착해 있었다.그곳에서 그녀는 동방세를 만났다.동방세는 거미줄 비밀 통로의 마지막 관문을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그는 고된 작업 중에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이번 거미줄 개조를 위해 황제께서 이 장군의 10만 대군을 내게 맡기셨소.”“덕분에 난 한동안 대장처럼 군림하며 유세를 떨었네.”황제가 보낸 인력 덕분에 그는 북부와 동부의 거미줄 비밀 통로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이제 마지막 관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동방세, 남제 장병들을 대신해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하네.”“선성으로 갈 계획이오?”동방세가 웃으며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동방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작업만 끝내면 범진과 함께 선성에서 보도록 하세.”그는 선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
남강.서왕은 수화부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철수가 단순한 계략일 것이라 의심했다.하지만 밤중에 직접 확인한 결과, 그들의 철수는 패주와 다름없었다.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떠난 흔적이 역력했으며, 모닥불조차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조사를 거듭한 끝에, 수화부 연합군이 선성의 보물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서왕은 당황스러웠다.적군이 사라졌으니, 그는 계속 방어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한편, 수화부 연합군은 선성을 향해 급히 북진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병사들은 강추위를 뚫고 말을 달리며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선두에서 말을 탄 장수가 외쳤다.“장군의 명령이다! 속도를 더 내라!”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우리가 가봤자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그러게! 선성 보물 얘기를 듣자마자 진지를 철수했지만, 보물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잖아. 그 유명한 옥석비도 하나뿐인데, 그게 우리 차지가 되겠어?”“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우리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동산국 황궁.동산국 황제는 어마장에서 여전히 기력이 넘쳤다.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이어 과녁 중심을 명중시켰다.곁에 있던 신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폐하, 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공격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조유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조유관은 대하국 연합군이 최초로 돌파한 약점이었다.더 많은 연합군이 조유관으로 몰려드는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했다.그러나 그로 인해 남부 방면의 공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활을 내려놓았다.머리칼에는 은빛이 드리워졌지만,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담대연의 소식은 알아왔느냐?”“담대연은 여전히 남제에 억류되어 천옥에 갇혀 있습니다.”황제는 다시 활을 들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한 번의 발사로 과녁을 뚫자, 곁에 있던 신하가 찬사를 보냈다.“폐하, 화살로 만물을
남강.서왕의 어깨는 부상으로 아파왔고, 완부옥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부부처럼 행동하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막상 군막 안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듯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완부옥은 저녁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였다. 갑작스런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그녀를 보자, 서왕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유화! 군의를 데려오라!”그는 완부옥의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부옥은 그저 체한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내심 불안했던 그녀는 거짓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벌레가 최근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태아의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군의가 와서 진찰을 하면, 모든 게 드러날 위험이 컸다.서왕은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이는 괜찮은가?”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로 향했다. 완부옥은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가 불러도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느슨한 옷을 입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왕은 그녀의 진짜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일반적인 임산부라면 나타날 만한 불편함이 완부옥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서왕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드디어 이 남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완부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초조해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어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어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겠어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말해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완부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던 이
대하 연합군은 묵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선성을 향해 진격했다.장수들 중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 말했다.“단 장군, 지금까지의 남제 원정이 너무 순조롭습니다.”“선성에서 매복을 준비한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단춘 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동부군은 현재 감주에 주둔 중이었다.그는 전력을 선성으로 보내면서도 일부 병력을 감주로 보내 허위 공격을 감행하고, 동부군을 묶어두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만약 선성에 매복이 있다 해도, 우리의 10만 대군에 북부 연합군까지 합하면 수십만 병력인데, 선성 하나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그럼에도 신중한 장수는 여전히 망설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남제의 전략은 적을 깊이 유인하려는 술책 같습니다.”“단 장군, 처음 계획대로 동부군을 견제하며 진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단춘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을 드러냈다.“유인이라니? 남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감주를 내놓고 선성에 매복을 펼친다는 말인가?”“만약 남제가 유인책을 쓴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감주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둬라. 만약 북연이 먼저 선성에 도달해 옥석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북연의 손발 노릇을 하게 될 거야!”“북연이 동부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다 해먹으려는 술책일 뿐이다.”“기다릴 테면 기다려 봐. 하지만 대하는 그렇게 바보처럼 속지 않는다!”선성은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북연 황제 역시 선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은 남하하는 도중 남제 잔병들에게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키며 계속해서 진격했다.남제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사기는 높아졌다.그러다 어느덧 설날 전야가 되었다.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백성들은 해가 지자마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설날을 맞이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전란을 피해 숨으려는 모습이었다.황성.궁궐 안, 후궁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밤을 지새웠다.그들은 한 손에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