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세는 비록 봉구안이 무림맹을 떠났던 과거를 못내 섭섭히 여겼으나, 그녀가 홀로 적진에 뛰어드는 것을 차마 묵인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마디 내뱉었다.“변했소. 예전엔 누구보다 자기 목숨을 귀히 여겼었는데... 자네 입으로도 말했지 않소. ‘나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고.”봉구안은 팔찌를 단단히 묶으며 담담히 대답했다.“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소.”동방세는 그녀를 막아서며 단호히 말했다.“그러니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시오. 자네는 성이 소씨가 아니지 않소.”봉구안은 그의 말을 무심히 흘려듣는 듯 바라보았으나, 동방세는 그녀를 향해 확고히 선언했다.“소환, 자네는 천룡회 일을 조사하는 데 전념하도록 하시오. 선성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네가 어떤 방도로 해결할 셈이오?”동방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황제로 변장하는 방책은 나도 자네 생각과 같소.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을 사람은 아무래도 나보다 적합한 이가 없겠지.”봉구안은 순간 멈칫했다. “자네가 그 일을 하겠다고?”그녀가 뭔가 말하려 했으나,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건 내가 맹주로서 해야 할 일이오. 그러니 더 이상 말리지 마시오. 이런 공훈은 내가 양보할 수 없거든...”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으나, 그의 태도는 결연했다. 봉구안은 그의 확고한 의지를 깨닫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방세는 평소 유순해 보였으나 무공 실력과 폭발력만큼은 그녀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체격상으로도 남자인 동방세가 황제와 더 흡사해 변장에도 유리했다.…보름 뒤, 조정에서 보낸 사자가 무림맹에 도착했다. 동방세는 연회를 준비해 환대했으나, 사자는 연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황제 폐하께서는 귀하들의 제안을 찬성하시어, 황제로 변장해 반군과 담판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폐하께서는 이 일에 있어 서왕 전하를 주관자로 삼으셨습니다. 전하께서 약 열흘 후 동신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반 시진 후. 서왕과 동방세는 선성 진입 계획을 협의한 뒤, 심가오에 머물기로 하였다. 범진은 그들을 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때, 서왕이 뜻밖에 봉구안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부맹주이시군요? 아까는 몰라뵈었습니다.” 봉구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때, 활발한 웃음소리를 내며 소소가 달려왔다. 그녀는 익숙한 듯 봉구안의 품에 안겨 부드럽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나 밤이 무서워요. 같이 자요…”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왕 일행을 보고는 놀란 듯 굳어버렸다. 아이답게 숨길 줄 모르는 기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서왕 오라버니?’ ‘나를 데리러 온 걸까?’ 소군주는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서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소소를 바라보았다. 소군주가 황성에 자주 가지 않아, 지난번 만난 게 3년 전이었음에도 서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게다가 얼마 전 무림맹에서 그녀를 구했다는 보고가 황제에게 들어갔으니, 서왕은 이번 동신성 방문 목적 중 하나가 소군주를 보호하는 것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서왕은 소군주와 바로 신분을 밝히고자 했지만, 그녀의 눈 속에 드러난 불안감을 보고는 즉시 눈치챘다. ‘어라? 설마 소군주가 이 무림맹 사람들이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성품이 부드러운 서왕은 그녀의 의도를 맞춰주기로 하고, 모르는 척 물었다. “이 아이는 부맹주의 여동생입니까?” 봉구안은 망설임 없이 소소를 서왕 앞으로 밀어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 아이는 주국공의 따님입니다. 서왕께서도 아는 아이일 것입니다.” 이 말에, 소군주는 깜짝 놀라며 작은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오라버니, 그… 그럼 제가…” 소군주는 자신이 황족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던가. 꿈에서조차 입을 다물고 조심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소 오라버니는 어떻게 알게 된 걸까?! 한편, 서왕은 난처한 듯 헛웃음을 터
봉구안과 소군주는 가마 안에 함께 앉아 있었다.그때 벙어리 호위무사가 무심코 몸을 숙여 차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소군주가 단호히 꾸짖었다.“네가 들어오면, 가마는 누가 모는 거야!”벙어리 호위무사는 몸을 잠시 굳혔다가, 결국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봉구안 역시 약간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소군주, 그럼 저는 바깥에서…”소군주는 그의 팔을 힘껏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제 곁에서 저를 지켜야 해요.”봉구안은 자신의 팔을 빼내며 진지하게 말했다.“소군주, 남녀유별이라 하였습니다.”소군주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수상쩍은 미소를 띠고 나직이 속삭였다.“전 알고 있어요.”가마는 덜컹거리며 흔들렸고, 소군주는 금세 졸음이 밀려와 잠들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그녀는 배가 고파 딱딱한 마른 음식을 씹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봉구안은 가마의 커튼을 젖히고 벙어리 호위무사에게 말했다.“잠시 멈추고 쉬게나. 내가 대신 가마를 몰겠소.”하지만 벙어리 호위무사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바람 소리가 너무 커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결국 봉구안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그제야 남자의 눈이 잠시 번쩍였다. 이내 가마를 천천히 멈추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았다.그 시선은 마치 왜 자신을 쳤는지 묻고 있는 듯했다. 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내가 대신하겠소.”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표시했다.하지만 그가 이미 반나절 동안 가마를 몰고 있었으니, 체력이 소진되어 소군주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까 우려한 봉구안은 그를 강제로 마차 안으로 끌어들였다.그 순간 봉구안의 힘이 워낙 강했기에, 벙어리 호위무사는 저항할 겨를도 없이 가마 안으로 주저 앉고 말았다.곧이어 그의 눈빛은 차갑게 변하며 살기가 서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를 보지도 않고 가마를 몰러 나섰다.소군주는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마치 벙어리 호위무사를 깔보는 듯한 태도
벙어리 호위가 방으로 돌아오자, 방 대들보 위에 봉구안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방금 뭐 하고 온 거요?”봉구안은 원래 밤을 지키며 낮에 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미 그녀의 눈에 띄었지만, 그가 문밖에만 머물러 있었기에 그녀도 따로 쫓아가 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서왕의 신뢰를 받는 자였기에, 그녀로서는 나설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다.벙어리 호위는 아무렇지 않게 손짓으로 잠시 산책을 한 것 뿐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봉구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몸을 뉘였다.남자는 그녀를 한 번 흘낏 보고, 깊은 그림자를 품은 눈빛을 떨구었다.다음 날, 일행 셋은 다시 길을 떠났다. 가마 안에서 소군주는 봉구안에게 물었다.“오라버니, 어젯밤 그 괴짜랑 같이 잤어요?”두 사내가 같은 방에 있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터였다. 하지만 봉구안은 따로 해명하지 않았다. 대신 소군주의 목에 커다란 빵을 줄로 꿴 채 걸어주었다.소군주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떼어 입으로 가져가며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봉구안은 이어 또 다른 줄에 꿴 빵을 벙어리 호위에게 내밀며 말했다.“그대도 걸어두시오.”“길을 가며 배가 고프면 바로 먹을 수 있지 않겠소.”벙어리 호위의 눈에 한 줄기 싫증과 멸시가 스쳤다. 목에 빵을 단 채로 말이다. 그의 눈빛은 먹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웠다.‘선성에 도착하기 전 반드시 소환 널 죽일 거야…’한참 후, 가마는 외진 주점 앞에 멈춰 섰다. 벙어리 호위는 거칠게 가마 문을 열고 손짓으로 그녀들에게 내릴 것을 알렸다.“여기서 식사를 좀 하시오.”앞으로 도달할 곳은 곧 선성이었다. 봉구안은 소군주를 살짝 깨우려 했으나, 벙어리 호위가 먼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조용한 술집 안, 셋은 소박하게 소고기 한 대야와 술 한 병을 시켰다. 소군주는 얌전히 앉아 작은 입으로 고기를 먹었다. 벙어리 호위 역시 품위를 지키며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봉구
봉구안은 이내 선성의 반란군 세력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한쪽은 좌장군 왕수인이 이끄는 급진파로, 백성의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행동하였다.다른 한쪽은 우장군 항천이 주도하는 온건파로, 병사의 본분을 잊지 않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그러나 온화함만으로는 잔혹함을 이길 수 없었다.항천의 병사들은 이미 성내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사방의 성문을 지키는 데 투입되었고, 이로 인해 성내는 왕수인의 병사들이 장악하여 횡포를 부리며 두려움이 없는 상태였다.주국공부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봉구안은 동방세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그녀는 대의를 위해 성급히 움직여서는 안 되었고, 그날 밤은 한 백성의 집에 몸을 숨겼다.한편, 벙어리 호위무사는 소군주를 데리고 보물을 찾기 위해 성내를 돌아다녔다.이미 열두 그루의 나무를 파헤친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네가 정말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느냐!”그의 분노 어린 외침에 소군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너, 너… 벙어리가 아니었단 말이야!”자신의 정체가 드러났음을 깨달은 남자는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잘 생각해라. 정확히 어느 나무였는지.”소군주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말했다.“아마도 이 나무였던 것 같아요. 아니면 저 나무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낮에는 확실했는데 지금은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였으나, 결국 그는 다시 삽을 들어야 했다.소군주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이번엔 맞기를. 그렇지 않으면 저 무서운 사람이 또 화낼 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흐느꼈다.‘흑흑...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에취!한편, 봉구안은 밤 바람이 차 헛기침을 하였다.…다음 날, 황제가 직접 선성에 들어섰다.반란군은 요란스레 그를 맞이했으며, 많은 백성이 인질처럼 길가에 강제로 서 있었다.백성들은 크게 놀랐다. 황제가 그들을 구하러 온 것은 물론, 홀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반란군의 수장
갑자기, 한 가면을 쓴 사람이 나타나 항천 일행의 길을 가로막았다.“너는 누구냐!” 항천이 즉각 경계하며 소리쳤다.봉구안은 말없이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항천은 곧바로 따라오며 외쳤다.“자객을 잡아라!”한편, 주국공부 정청 안.왕수인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는 흰 옷을 입은 남자로, 얼굴에는 가면을 써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으나 손가락에는 커다란 반지를 끼고 있었다.왕수인은 그를 향해 몹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걱정 마십시오. 모든 것이 나으리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그때,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뭔가를 감지한 듯 손을 휘저었다. 그의 소매에서 비수가 튀어나와 날아갔다.두 사람이 뒤쫓아 나갔을 때는 이미 검은 그림자가 담장을 넘어 사라지는 모습만 보였다.왕수인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놀라워했다.“이, 이것이…”흰 옷을 입은 남자는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쫓아라!”곧이어 어둠 속에서 동일하게 흰 옷을 입은 자들이 열여섯 명이나 나타났다. 그들은 화살처럼 검은 옷의 그림자를 뒤쫓아갔다.벙어리 호위무사는 주국공부에서 도망쳐 나와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뒤에서는 추격병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이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각자의 경공이 뛰어난 고수들이었다.그는 한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벙어리 호위무사는 본능적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상대를 응시했다.그러나, 눈앞에 있는 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참으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양쪽 뒤에서는 각각 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그들은 서로 마주 본 채 잠시 멈춰 서 있었다.항천은 구석에 있는 봉구안을 보았다가 다시 흰 옷을 입은 십여 명을 쳐다보았다.흰 옷을 입은 자들은 두 가면을 쓴 사람을 보고 잠시 갈팡질팡했다. 그들이 쫓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그들이 둘 다 죽일지 고민하는 순간, 봉구안이 재빨리 외쳤다.“뭘 멍하니 서 있느냐! 항천을 죽여라!”흰 옷을 입은 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항천
문밖에서는 노파가 급히 병사들을 막아섰다.“안에는 왕 장군의 동생께서 계십니다…”병사 중 한 명이 의문을 품었다.“어찌 이렇게 조용하지?”노파가 머뭇거리며 말했다.“그게… 아마도 지쳐서 주무시는 중일 것입니다?”병사는 더욱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뭔가 이상하다! 문을 열어라!”방 안.앞뒤로 적들이 있는 상황.벙어리 호위무사가 그제야 창문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봉구안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그러더니 욕조를 가리키며 손짓을 했다.벙어리 호위무사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그녀는 자신에게 물속에 숨으라는 것인가?긴박한 상황에서 봉구안은 그의 머뭇거림을 참지 못하고,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단호히 그를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빌어먹을!”벙어리 호위무사는 물속에서 빠져나오며 가장 먼저 얼굴의 가면을 바로 잡았다.물에서 나오자마자 봉구안을 노려보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행동을 개시했다.봉구안은 방에 있던 여인을 옷장 안에 숨기고, 여성의 외투를 꺼내 급히 입었다.그런 다음, 그녀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쾅!병사들이 강제로 문을 열었다.그들이 목격한 광경은, 욕조 안에 한 여인이 등을 돌린 채 한 남성을 욕조 가장자리로 눌러 앉히고 있는 모습이었다.그 자세는 마치 두 사람이 깊은 애정 속에 빠진 듯한 장면처럼 보였다.노파가 그 광경을 확인하자 안색이 흐려졌다.그러나 곧 얼굴에 미소를 띠며 문을 닫고 병사들에게 말했다.“장군님, 보시다시피 아가씨께서 왕 대인을 잘 모시고 계신 중입니다.”항천은 얼굴에 짙은 의심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도대체 저 자객이 어디로 간 것이냐!”그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다른 곳도 수색하라!”“예, 장군!”병사들이 물러난 후, 봉구안은 남자를 눌렀던 자세를 풀고 욕조에서 빠져나왔다.그녀는 겉보기엔 그를 가까이 눌렀던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와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이었다.벙어리 호위무사는 욕조 가장자리에 눕혀진 상태로 그녀의 입술이 가면 아래서 아른거
봉구안과 그 벙어리 호위무사는 힘을 합쳐 수많은 반란군을 막아냈다.앞다투어 달려드는 반란군들은 그 둘의 빠르고 강력한 공격에 의해 날아가거나 쓰러졌다. 두 사람은 피로한 기색조차 없었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왕수인은 점점 초조해졌다.‘안 되겠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간 큰일이 나겠군!’그는 마음을 다잡고, 권속이 내린 명령을 이루기 위해 황제를 제거하려 결심했다.왕수인은 활을 들어 황제를 겨냥하며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분명 정확히 발사된 화살이 황제의 몸에 닿기 3척도 채 남지 않은 거리에서 이상하게도 멈춰 섰다.왕수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그 순간, 동방세는 그 화살을 손으로 가볍게 붙잡아낸 후, 한 손짓으로 화살을 떨어뜨렸다. 그는 이 모든 일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기계식 자물쇠를 푸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왕수인은 이를 갈며 몇 차례 더 화살을 날렸지만 결과는 동일했다.‘이럴 수가! 황제의 내공이 이토록 깊다니!’초조해진 그의 손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왔다.왕수인은 칼을 뽑아 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모두 돌격하라! 저들을 죽여라!”이에 맞서던 봉구안은 땅에 떨어져 있던 칼을 주워 들고 병사들에게 나직이 경고했다.“너희는 남제의 군사다. 조정의 병사이며 황제의 군사니라. 감히 역모를 저지르겠다는 것이냐?”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머뭇거렸다.지금까지 봉구안은 맨손으로 그들을 제압했을 뿐, 중상을 입힐지언정 생명을 앗아가지는 않았다.그러나 이번에 그녀가 무기를 들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그녀의 눈빛은 결연했고, 칼날은 그녀의 냉혹한 시선을 반사하며 번뜩였다.그 옆의 벙어리 호위무사 또한 위압적이었다. 그의 발치에는 셀 수 없는 시체가 쌓여 있었으며, 그의 차가운 눈빛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병사들이 주춤거리자, 왕수인은 폭언을 퍼부었다.“역모가 대수냐! 지금
봉구안은 결연한 표정을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강호의 원칙대로 무고한 자들은 건들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꾸나.”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날이 곧 밝을 무렵, 객잔과 십리 정도 떨어진 수림.봉구안은 한쪽 무릎을 꿇고 검 한자루에 몸을 지탱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바람이 그녀의 머리띠를 흩날리고 있었다.그녀의 주변으로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그들의 붉은 피가 수림을 물들였다.이제 남은 건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뿐.그도 중상을 입고 나무에 몸을 지탱한 채, 손으로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부여잡고 있었다. 가면은 이미 부서져서 초췌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소환은 괴물이 따로 없었다.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괴물!봉구안은 검을 짚고 몸을 일으키고는 싸늘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곧이어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챙그랑!사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눈을 감은 순간,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봉구안을 향했다.그녀는 신속히 몸을 비틀어 화살을 피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높은 지대에 흰 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가면 아래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봉구안이 남부에 있을 때 흑포와 함께 등장했던 그 사내였다.한숨을 돌린 우두머리가 그 백의청년을 향해 달려갔다.하지만 곧이어 사내의 검이 우두머리를 향했다.슉!검은 순식간에 우두머리의 가슴을 뚫어버렸다.우두머리는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설마 조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일까?하지만 교주가 아직 출관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척살령은 누가 내렸단 말인가!천용회에 그를 죽일 자격을 가진 자는 몇 없었다.털썩!우두머리는 그렇게 눈도 감지 못하고 쓰러졌다.봉구안은 몸을 솟구쳐 백의 청년에게 손을 뻗었다.사내는 그녀를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그녀는 가볍게 몸을 날려 피했다.그녀의 검이 그에게 닿던 순간,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구안아, 내 사랑.”순간 봉구안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고 검은 방향을 틀었다.곧이어 사내의 장풍이
그날 저녁 소욱 일행은 객잔에 입주했다. 봉구안은 소군주의 방 지붕 위를 지켰다.밤바람이 차가워서 추위가 느껴지자 그녀는 허리춤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 객잔에서 소욱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폐하, 서왕 전하의 밀서입니다.”진한길이 다가와서 아뢰었다.그는 황제와 지붕 위의 검은 인영을 보고 당황스러웠다.‘폐하께서 지나치게 소환을 신경 쓰는 것 같은데.’그는 소환이 사내를 좋아한다던 술 취한 동방세의 말이 떠올랐다.진한길은 신속히 고개를 저었다.소환이 그런 취향이 있다고 해도 황제는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싹틀 리 없었다.소욱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진한길의 손에서 밀서를 받아들었다.서왕은 서신에서 천용회를 언급했다.감옥에서 천용회의 기호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그렇다는 건 흑포가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천용회의 도움이 있었다는 얘기였다.소욱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일정을 앞당겨야겠군. 속히 황성으로 복귀한다.”“예!”진한길은 공손히 답했다.진작에 이랬어야 할 일이었다.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소군주가 갑자기 앓기 시작한 것이다.그녀는 그날 밤부터 고열에 시달리며 의식을 잃었다.진한길은 현지 의원을 불러왔다.의원은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고는 아연실색했다.“이건 극한의 병입니다!”밖에서 기다리던 소욱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소군주의 병증에 대해 그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사정을 아는 진한길은 의원을 보낸 후에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군주의 병을 일반 의원은 치료가 힘든 것 같습니다.”소욱은 침상으로 다가가 파리하게 질린 소군주의 입술과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소환을 불러오거라!”“예!”잠시 후, 봉구안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었기에 의원이 소군주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은 보았지만 그냥 일반 병증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소녀의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보자 그녀는 불길한 느낌이
소욱은 어두운 얼굴로 앞으로 나아갔다.마음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했다.마치 그가 무엇을 하든, 저 여인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 듯했다.단회욱이 구운 생선이 자신이 구운 것보다 맛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갑자기, 그는 뒤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폐하!”걸음을 멈추며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일이냐.”“황제 오라버니! 소환 오라버니가 폐하께 사과드리러 왔답니다!”뒤돌아보니 소군주도 함께 있었다.그녀는 봉구안의 곁에 서서 한 손에는 구운 생선을 들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검은 그을음이 한 바퀴 둘러져 있었다.또 다른 손으로 봉구안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맞죠? 오라버니? 황제 오라버니가 생선을 굽느라 얼마나 힘드셨는데요. 그런데 안 드시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그렇죠? 맞죠?”봉구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소욱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가 곧 표정을 풀며 태연하게 말했다.“짐이 그 정도로 유치한 줄 아느냐. 짐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소군주는 황제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황제 오라버니, 적당히 하셔야죠! 소환 오라버니가 이렇게 와서 사과까지 하시는데, 왜 자꾸 빼고 그러세요? 어서 가서 구운 생선을 먹으러 가요!”소욱은 여덟 살짜리 꼬마에게 훈계를 받을 줄은 몰랐다.그렇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셋이 다시 불가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생선뼈 더미와 배부른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한길이었다.진한길은 무덤덤하게 말했다.“폐하, 부맹주... 두 분이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셨으니, 신하가 보기에 이 구운 생선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먹었습니다.”소군주는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너는 정말 큰 식충이구나! 흥!”소욱 역시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그러나 봉구안은 태연히 말했다.“제가 가서 마른 양식을 가져오겠습니다.”그녀가 돌아서자, 소욱은 차갑게 진한길을 바라보며 물었다.“맛있더냐.”진한길은 진심으로
앞쪽 산체가 무너져 더는 길을 갈 수 없게 되었다.관아에서 사람을 보내 돌멩이와 나무더미를 치우고 있었으나, 시간이 걸릴 터라, 봉구안과 일행은 근처에서 잠시 쉬기로 하였다.소군주는 마음이 큰 아이인지라, 잠시 후에는 다시 활짝 웃으며 “황제 오라버니!”를 연발하였다.“황제 오라버니, 여기서 쉬어가는 건가요? 오늘 밤엔 소환 오라버니랑 함께 잘 수 있나요?”비록 소욱이 허락한다 하여도, 봉구안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근처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소군주가 물고기가 먹고 싶다 하자, 소욱은 진즉 진한길에게 가서 물고기를 잡아오라 명하였다.진한길은 솜씨가 제법 있어, 잠시 뒤 크고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왔다.봉구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불을 피워 간단한 나뭇가지로 만든 구이 틀을 설치하였다.소욱은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앉아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소군주는 그의 곁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소환 오라버니는 참 좋으십니다. 황후마마가 되신다면 더 좋을 텐데요!”소욱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의 마음엔 이미 자신이 없을뿐더러, 그녀는 황궁의 삶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그와 그녀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그는 이미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으며, 더는 억지로 붙잡지 않을 터였다.다만 지금은 그녀를 몇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단지 몇 번만이라도...마치 꿈처럼, 황궁으로 돌아가면 이 꿈은 깨어나고 말리라.소욱은 그런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그 꿈 속에 머물고 싶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구안의 곁으로 가, 함께 준비를 거들기 시작했다.그는 능숙한 손길로 나뭇가지를 물고기 몸에 꿰었다.“부맹주는 아마 물고기를 구워보신 적이 없을 터, 이 일은 짐이 하겠소.”봉구안은 실로 물고기를 구워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였고, 물고기 구이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차라리 마른 빵을 먹거나 들에서 과일을 따먹
정말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녀의 입술, 그녀의 손, 술을 마시는 그 동작, 무심코 드러내는 모든 자세, 말투의 습관까지... 그 모든 것이 익숙한 법이다.소장군… 그는 그의 황후 봉구안이었다. 그는 확신하였다.달빛 아래, 소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그를 철저히 속였다.그녀는 전장에서 적을 물리치는 맹 소장군일 뿐만 아니라, 무림을 평정한 부맹주 소환이기도 했다.그 면죄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자신을 위해 구한 것이었다.그러니 어찌 궁에 머무르길 좋아했겠는가?그녀가 보아온 세상은 광활한 북방뿐만 아니라, 끝없는 강호이기도 했다.그녀는 열세 살에 이미 강호를 누볐다.황궁은 그런 그녀에게 너무도 작았다.마치 강과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를 작은 수조에 가두는 것과 같으니, 답답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어젯밤 그녀가 심가오의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어떤 삶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가까이에 그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욱은 점점 더 혼란스럽고 괴로웠다.그는 그녀의 정체를 폭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떠나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모르는 척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는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터였다.다음 날 아침.소군주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그녀는 봉구안의 방 문을 두드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라버니, 우리 이제 황성으로 가요!”봉구안이 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어젯밤, 아마 술을 마신 탓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소욱의 그 아련한 눈빛과 자신이 그립다는 말이 떠올랐다.동방세는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봉구안은 그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났다.그리하여 일행은 심가오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봉구안은 선성의 난 이후, 천룡회가 반드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을 것이라 직감했다.그래서 더 평범한 가면을 쓰고, 말을 타는 대신 가마에 올랐다. 황제와 소군주에게 화를 불러올 위험을 줄
봉구안은 소녀들로부터 깊은 인기를 얻어 이미 술을 몇 잔이나 마신 상태였다.또 한 명의 소녀가 술잔을 건네자, 동방세가 대신 받았다.“여러분, 우리 부맹주는 아주 훌륭하지만, 우리 무림맹 안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이 많답니다!”사람들 사이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맞아요! 맹주님도 아직 장가가지 않으셨잖아요! 아가씨들, 맹주님께도 술 한잔씩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아름다운 이성의 호의를 거절하기란 어려운 법이다.동방세는 차라리 자기가 먼저 몇 잔을 자책하며 마셨다.그는 곧 봉구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일 길을 떠나야 하니, 일찍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봉구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보였다.오랜만에 이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심가오, 이곳은 무림맹의 보호 아래 존재하는 무릉도원처럼 느껴졌다.이곳에 온 후로 그녀는 전쟁의 살벌함을 잠시나마 씻어낼 수 있었다.그때 누군가 장난스럽게 외쳤다.“맹주님, 부맹주님과 춤 한 번 춰주세요!”“맞아요, 춤 한 번 춰주세요! 어차피 두 분 다 사내지 않습니까!”동방세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벌떡 일어섰다.“좋습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내 특별히…”놀이에는 경계가 있지만, 봉구안은 스스로의 선을 넘지 않았다.그녀는 동방세를 거절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거대한 그림자가 앞을 가렸다.고개를 들어 보니,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욱이었다.소욱은 봉구안 앞에 서서 동방세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맹주는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서인가?”동방세는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저... 저...”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그 큰 남자가 그렇게 울면서 뛰쳐나가다니 소욱은 동방세의 예상 밖의 행동에 적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그는 고개를 돌려보니, 주변 모든 사람이 책임을 묻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봉구안은 북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맹주는 젊었을 적 아내를 잃은 적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맹
황성에서와 달리, 무림맹에 도착한 후로 오백은 줄곧 가면을 쓰고 다녔다.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오늘 황제가 무림맹에 온다는 소식에 그는 더욱 모습을 숨겼다.게다가 소장군이 황제와 소군주를 호송해 황성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그는 어쩐지 난스러웠다.봉구안은 차분히 말했다.“너는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니지 않는 게 좋겠다. 먼저 방성으로 가라.”오백은 명령을 받들며 말했다.“알겠습니다!”…남제의 외진 곳.부하의 보고를 듣고 나서 방 안의 법사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왕수인이 감히 황제를 죽이려고 한다니? 누가 그렇게 몰아가라 하였는가?”이때, 하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장막 안쪽의 사람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왕수인을 만났을 때 그는 황제를 죽일 계획 따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궁지에 몰린 탓일 것입니다.”장막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분명히 말했을 텐데. 군량을 요구한다는 명목은 핑계일 뿐, 진짜 목적은 선성의 보물이다. 왕수인이 그런 짓을 벌이다니, 제멋대로 일을 그르쳤구나.”흰옷을 입은 이는 냉정하게 말했다.“왕수인은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법사님, 이제 어떻게 교주님께 보고할지 생각해 보셔야겠군요.”“조정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천룡회를 조사하게 된다면, 교주께서도 불쾌해하실 겁니다.”“교주께서는 아직 조정과의 정면 충돌을 원치 않으십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그 말을 남기고 흰옷을 입은 이는 방을 나갔다.장막 안쪽의 좌호법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부하에게 물었다.“보물 지도를 찾지 못했나?”부하가 대답했다.“법사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문에 따르면, 보물 지도는 이미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법사님, 황제를 노릴 계획을 세울까요? 지금 황제 곁에는 호위병도 얼마 없습니다.”쾅!장막 안쪽에서 좌호법사가 손을 내려치자 부하는 깜짝 놀랐다.좌호법사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백룡왕의 말을 못 들었느냐? 지금은 조정을
“나더러 그들을 황성까지 호송하라니?”봉구안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동방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방에 우리 둘뿐이니 솔직히 말해보시오. 폐비 봉씨가 그렇게 떠들썩하게 이혼한 것이 그대와 관련이 있으시오?”소환과 오랜 세월 함께한 동방세는, 그가 어린 혈기왕성한 소년에서 풍채 좋은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소환은 언제나 많은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규방에 갇혀 자란 아가씨들에게는 그의 자유로운 성격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동방세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황제가 소환에게 보여주는 특별한 관심을 간파했다.더구나 황제가 굳이 폐비 봉씨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니, 황제가 소환을 견제하는 이유가 폐비 봉씨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은 그 모든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아니. 나와 폐비 봉씨는 그 어떤 사사로운 관계도 없소.”동방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연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그렇다면 황제와 잘 이야기해보시오.”“남자라면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약 황제가 네가 폐비 봉씨와 엮였다고 의심한다면, 아마 널 죽이려할 지도 모르니 말이오.”“겉으로는 호위를 명하지만, 가는 길에 자네를 묻어버릴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봉구안이 눈을 들어 올리자 동방세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그는 어쩐지 그녀가 황제에게 미움받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봉구안은 그의 손길을 밀치고 나지막이 말했다.“알겠소. 내 직접 황제와 이야기하겠소.”어쩌면 동방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그래서인지 황제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날카롭고 의심스러운 것 같았다.…황제와 군주는 간이 농가에 머물고 있었다.마당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소욱은 방 안에서 황성에서 온 밀서를 읽고 있었고, 진한길은 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적막 속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똑똑.“폐하, 신 소환입니다. 안에 계십니까?”소욱은 서신을
다음 날.역관 밖.일행은 짐을 정리하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가마는 하나뿐이었고, 이는 당연히 황제의 것이었다.봉구안과 동방세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주국공은 배웅하러 나와 있었고, 소욱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봉구안은 가마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려 했는데, 갑자기 가마 커튼 사이로 머리가 하나 튀어나왔다.소군주가 가마 안에 앉아있던 것이다.그녀는 분홍빛 보따리를 안고 있었고, 봉구안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오라버니! 나 황제 오라버니랑 황성에 잠시 머물기로 했어요! 같이 가마에 타요!”봉구안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소군주, 자고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그녀가 물러서자, 바로 뒤에 서 있던 소욱과 부딪힐 뻔했다.그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괜찮다. 소군주가 자넬 벗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소군주의 명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지.”소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오라버니…”그러나 봉구안은 태연히 손을 빼내어 뒤로 감췄다.“저는 말을 타는 것이 더 편합니다.”“알겠어요…”소군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얌전히 물러섰다.이때, 주국공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소소야, 정말 나도 없이 괜찮겠느냐? 길이 멀고 험한데 시녀가 없으면 어찌하겠느냐.”소군주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저 벌써 여덟 살이에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사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오라버니처럼 협객이 되고 싶었다.협객 곁에 시녀가 있다니, 그것만큼 창피한 일은 없었다.주국공은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말했다.“간간히 편지 쓰는 것 잊지 말거라.”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문을 닫았다.그의 잔소리를 듣기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그와 동시에, 소욱은 봉구안을 스치듯 흘겨본 뒤 가마에 올라탔다.그 곁에는 진한길 한 명의 호위무사만 있었다.선성을 떠난 뒤, 앞에는 갈림길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