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가 김낭자의 손에서 금화를 받아 자세히 관찰했고 황후가 진술한 것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산적이 받은 금화와 김낭자의 금화는 출처가 같았다.조검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발악을 했다.“출처가 같다고 하여 뭔가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침 우연히 소인에게 그 금화가 있었고 소인이 그것을 사용했다면요.”봉구안은 그의 말을 자르고 침착하게 말했다.“재물을 사랑하는 산적은 금화를 애지중지하지요. 은표로 교환하지 않고 바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조검은 산적을 매수하기 위해 많은 금화를 지출해야 했을 겁니다. 가지고 다니는 금은 조각으로는 당연히 부족했을 거고 그 많은 금화를 지니고 출궁할 수도 없었을 테니 은표를 지니고 궁 밖에 있는 전장에 가서 금화로 교환하였을 것입니다.”“전장에서 한꺼번에 그 많은 금화를 꺼냈으니 일련번호도 당연히 연결된 번호겠지요.”태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황후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금화가 전부 전장에서 인출하여 사용되었다는 말이 아니더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어마마마.”조검은 눈알을 부라리며 반박했다.“하지만 소인은 단지 그 전장에서 금화 한 개만 인출하였습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많은 금화를 네가 인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냐?”조검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풍융전장 주인을 데려오너라!”순간 조검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분명 나가기 전에 변장을 하고 나갔고 5개월이나 지난 일인데 황후가 어떻게 전장까지 조사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하지만 주인장을 데려와도 매일 출입하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의 모습을 기억할 것 같지는 않았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전장 주인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황귀비가 비웃는듯 말했다.“너도 조 태감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주인장은 고개를 숙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전장은 매일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니 당연히 얼굴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다
“황후, 짐의 결정에 의심을 품는 것이냐!”소욱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봉구안 역시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사람이 바로 그녀를 비롯한 천만 병사들이 충성을 맹세한 군왕이란 말인가!회의감이 들었다.그는 폭군일 뿐만 아니라 우매한 군왕이었다!그녀는 정색해서 말했다.“조검이 지은 죄는 산적을 사주해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한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또 뭐가 있지?”태후가 다급히 물었다.봉구안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신첩이 조금 전에 조검에게 물었을 때 그는 확신에 차서 10월10일 궁중에서 당직을 섰다고 고하였습니다. 일지를 확인하였을 때도 아무런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렇다는 것은….”봉구안은 손가락으로 황귀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황귀비는 금인장을 갖고 후궁을 관리하였지만 그 와중에 궁중에 출입 기록을 조작한 상황이 드러났으니 이는 명백한 직무 유기입니다!”“평소에 폐하를 매혹하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하니 이게 요부가 아니고 뭡니까!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황귀비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그녀는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지금 나한테 요부라고?’태후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봉구안이 대신 해주자 기분이 좋아졌다.“황상, 황후 말에 틀린 것이 없어요. 조검이 자유롭게 궁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황귀비의 실책입니다.”황귀비는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소욱을 바라보았다.“폐하, 신첩은… 신첩이 잘못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소욱은 자신이 총애하는 귀비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는 말했다.“황귀비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영소전에서 반성하도록 한다!”연상은 황제의 편협한 판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황후는 애초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일년 녹봉을 몰수하고 금족령까지 내려졌었다.황귀비는 직무 유기라는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반성에 불과
제왕의 분노에 봉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신첩이 무례하다 하셨나이까.”“폐하, 신첩은 납치당하였다가 구조되어 돌아온 후로 아무도 신첩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주변 사람들마저 신첩에게 입을 다물라고, 소문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지요. 소문은 지나가면 사람들은 이 일을 잊을 거라고요.”“하지만 과연 그럴까요?”“신첩은 매일 고통과 두려움 속에 살면서 스스로 자신의 결백을 의심하게 되겠지요. 여자의 결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없이 납치 당하고 명성마저 잃은 신첩이 분명 피해자인데 사람들은 방탕한 요부라고 신첩을 비난하고 있습니다!”“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이미 그 유언비어에 숨이 막혀 죽었을 것입니다. 감히 황후의 예복을 입고 황궁으로 시집오지도 못했겠지요.”“신첩이 조금만 덜 뻔뻔했더라면 폐하께 먼저 진실을 밝혀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이렇게 뻔뻔하고 무례한 저를 폐후로 만들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무례한 짓을 저지르겠습니다. 이 사건의 진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신첩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게 해주세요!”소욱은 그녀의 구구절절한 말을 들으며 생모를 떠올렸다.하지만 곧이어 조금이나마 흔들렸던 마음은 차게 식었다.이렇게 날카로운 여자는 처음이었다.아니, 한 명 더 있었다. 그날 만났던 여자객이 그랬다.그들 중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객기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폐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짐이 황귀비를 엄벌하기를 바라는 거겠지.”제왕인 그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할 리 없었다.봉구안은 부인하지 않았다.“조검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진짜 주모자가 누군지 폐하께서 정말 모르실 리 없지요.”소욱은 부인하지 않고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얼마전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주모자도 영소전에서 나왔습니다. 산적을 사주한 조검도 영소전 사람이지요.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성지 납시오! 황귀비는 명을 받으시오!”춘화는 황귀비를 부축해서 외전으로 가서 예를 취했다.곧이어 궁인이 성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조검이 궁중 재물을 횡령한 증거가 확실한 바, 이는 황귀비의 불찰로 판단하여 금일부터 금인장을 제출하고 황후마마께서 후궁을 관리할 것을….”황귀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황제가 그녀에게 금인장을 제출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궁인이 계속해서 낭독했다.“그리하여 황귀비를 귀비로 좌천한다!”능소전 궁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조검이 잘못을 하였는데 황귀비가 이렇게 엄한 벌을 받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황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날부터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춘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귀비를 부축했다.능연은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손발이 저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신첩, 명을 받들겠습니다.”성지를 낭독하러 온 궁인이 떠난 후, 능연은 공허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 모습을 본 춘화도 말없이 궁인들을 물렸다.능연의 예쁜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봉장미 이 간사한 년! 대체 폐하께 뭐라고 했길래 폐하께서 나한테 이런 명을 내린단 말이냐!”“마마, 고정하세요. 그래도 폐하께서 마마를 아끼는 마음은….”“꺼져! 다 꺼지라고!”능연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당장 봉장미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녀가 입궁한 뒤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자녕궁.태후는 화가 나서 차도 목에 안 넘어가고 자포자기에 빠졌다.“내가 황상께 대체 뭘 그렇게 잘못을 했다고.”“능연 걔가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이 정도로 편애하시는 거지?”“조검이 누구 사주를 받았는지 눈이 있으면 다 아는 일 아니더냐!”“이렇게 여색에 빠져 시비조차 가리지 않을 줄이야! 남제의 강산은 결국엔….”계 상궁은 다급히 태후를 말렸다.“마마, 듣는 귀가 많습니다.”이때, 태감 한 명이 들어와서 보고했다.“마마, 능소전 쪽에서 새로운 소
한편 영화궁.목욕을 마친 봉구안은 침상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창밖에서 탁탁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창가로 다가갔다.문을 열자 검은색 비둘기 한 마리가 짜증스럽게 창문을 부리로 치고 있었다.봉구안은 비둘기 다리에서 편지를 꺼내 펼쳤다.[쥐새끼는 굴에 잡아넣었습니다.]쥐새끼란 산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봉구안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그들은 손목 발목 관절과 혀가 잘린 채로 남자 기생집에 팔려갔다.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나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산적들을 응징했지만 봉구안은 전혀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봉장미는 처참한 부상을 입고 인생을 망쳤는데 산적들을 어떻게 괴롭혀도 이 분노를 풀기에는 부족했다.게다가 모든 일의 주모자인 능연은 여전히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연상도 분노에 치를 떨었다.“주모자는 여전히 잘 살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네요! 귀비를 향한 폐하의 신뢰가 이 정도로 두터웠던 걸까요?”미색에 빠졌든 다른 원인이 있든, 소욱은 황제가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그년을 죽이고 괴롭히는 것으로 장미가 당한 모든 것을 갚아주는 건 쉬워.”“하지만 이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야. 그냥 분풀이일 뿐이지. 진짜 피해자인 장미에게도 의미가 없는 짓이고.”말을 마친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짐했다.무조건 이 일을 만 천하에 알리고 아무도 능연을 지켜줄 수 없게 만들 것이다.어쩌면 그때가 되면 봉장미도 유언비어에 시달릴지 모른다.하지만 상관없었다.어차피 장미는 자유로운 삶을 원하고 있으니 그녀를 데리고 속세를 떠나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다.그 시각, 영소전.춘화를 포함한 모든 궁인들이 방밖으로 쫓겨났다.방에는 황제와 귀비 두 사람만 남았다. 밤이 다 지나가고 있었지만 목욕물을 준비하라는 명령은 들려오지 않았다.능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병풍 뒤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날이 다 밝아올 때쯤에 병풍이 열리고 청색 비단옷을 입은 제왕이
영화궁.황제가 처음으로 아침 식사하러 방문했기에 주방 일꾼들은 평소보다 더 섬세하게 요리했다.식사는 매우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소욱이 말이 없으니 봉구안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반찬을 챙겨준다는가 하는 행동은 당연히 없었다.연상은 몇번이나 눈치를 주었지만 황후는 아예 못 본 척했다.한참 말이 없던 황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녀는 자신을 기대에 찬 눈을 바라보는 연상에게 담담히 말했다.“밥 한 공기 더 가져오너라.”봉구안은 무공을 하는 사람이기에 여느 여자들보다는 식사량이 많았다.군영에 있을 때는 남자들과 같이 있었기에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하지만 궁중에서 보니 무척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그녀가 세 번째로 밥을 추가했을 때, 소욱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다른 비빈들 궁에 가서 식사할 때, 그녀들은 거의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직접 그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는 비빈들이 대부분이었다.그리고 거의 다 얼마 먹지도 않고 배부르다며 수저를 놓았다.하지만 황후는 남달랐다.마치 그가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 온 것처럼 빠르게 음식을 해치우고 있었다.탁!소욱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다 나가보거라.”하인들이 나간 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황후에게 말했다.“수저 내려놔. 물어볼 게 있다.”봉구안은 담담히 수저를 내려놓고 공손히 답했다.“말씀하시지요.”“산적들과 증거들 언제 다 수집한 것이냐.”“사건이 있고 신첩의 아버지는 매일 수색을 나갔습니다.”소욱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짐이 한 달의 기한을 주었을 때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군. 이미 모든 조사는 끝난 뒤였으니까.”“황후, 이건 황제인 나를 기만한 죄야!”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폐하를 기만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사 진전을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폐하도 물어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소욱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찌됐건 이 일은 여기서
연상이 말했다.“마마, 서왕께서 말씀하시길 폐하는 말을 잘 타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합니다.”“마구 시합을 조직하는 이유도 다른 비빈들이 폐하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가요?”봉구안은 담담히 대꾸했다.“항제가 좋아하는 건 말을 잘 타는 영비야. 아무나 말을 탄다고 좋아하진 않아.”“마마, 소인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왜 이걸 조직하는 건가요?”“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거지.”봉구안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연상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것 역시 귀비를 괴롭히기 위함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었다.영소전.황제가 황후궁에서 아침을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귀비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간사한 년!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폐하께서 나를 벌하시고 자기 궁에 폐하를 불러들이기까지 한 거야!”춘화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황후를 진정시키기 위함인 것 같아요. 황후가 조검의 일로 또 마마를 압박하면 큰일이니까요.”“폐하께서 가장 신경 쓰시는 분은 마마밖에 없어요.”하지만 귀비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산적 사건을 밝혀내면 내가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지?”“금인장? 난 언제든 다시 회수해 올 수 있어.”“그럼요, 마마.”춘화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황후는 금인장을 가져갔지만 그걸 사용하는 법을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금인장으로 마구 시합 같은 이상한 걸 조직하죠.”귀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겠지!’자녕궁.태후는 화분 곁가지들을 자르며 속으로 불만을 삭혔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황상은 능연을 처벌하고 안쓰러워서 그날로 영소전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가셨잖아. 이런 처벌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그렇게 하루도 못 참아? 황당하긴!”계 상궁은 안쓰러운 얼굴로 태후를 위로했다.“마마, 이 일로 화를 내실 건 없어요. 폐하께서 어제 영소전에 머무르시긴 했지만 아침에 영화궁을 방문하여 황후마마와 식사
영화궁봉구안의 금족령이 풀렸지만 아침 문안을 오지 않는 비빈들은 여전히 많았다.아프다는 건 핑계고 귀비 사람들인 것은 분명했다.내실에서 연상은 봉구안의 머리를 다듬어주며 불만을 터뜨렸다.“마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빈마저 아프다고 출석하지 않다니. 설마 벌써 마마의 은혜를 잊은 걸까요?”“전에는 마마를 대신해서 궁중 법규를 베끼겠다고 하더니 한순간의 변덕일 줄은 몰랐네요!”봉구안은 후궁 장부를 들여다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이익을 따라가는 건 사람의 본능이야.”대청.봉구안이 상석에 앉고 몇몇 비빈들이 양측에 앉아 있었다.그들은 일제이 일어서서 황후에게 문안을 올렸다.“만수무강하십시오, 황후마마.”“다들 앉거라.”봉구안은 조용히 그들을 관찰했다.엄격한 선별을 거쳐 후궁의 자리를 꿰찬 여인들이라 하나같이 용모가 출중했다.안타깝게도 황제는 귀비에게만 눈이 멀어 이 많은 여인들이 독수공방하게 만들었으니 후궁에 원망의 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마구 시합을 할까 하는데 같이 할 사람은 손을 들어보거라.”봉구안의 말이 끝나자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와의 시선을 피했다.한참 후, 현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는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에둘러 말했다.“신첩은 워낙 몸이 허약하여 약을 장기간 복용하다 보니 격한 운동은 못할 것 같습니다. 몸만 건강했어도 참여하고 싶은데 안타깝네요.”현비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사람들은 황후가 당연히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봉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말을 타는 운동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연상아, 현비의 이름을 기입하거라.”현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봤고 피식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봉구안은 웃음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녕비였다.자리에서 일어선 녕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마마, 신첩은 빼주세요. 신첩은 어릴 때부터 자고로 여자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검을 휘두르고 말 위에서 공놀이를 하는 건 사내들
영비는 서왕에게 목을 졸렸지만,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비록 전하께서... 저에게 이렇게 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전하를 용서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폐하께 전하께서 저를 궁에서 데리고 나갔고, 이렇게 오랜 세월 저를 가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이지 않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전하는 저를 정말로 해칠 수 없으십니다.”결국 서왕은 손을 풀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용란,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야.”영비는 여전히 여린 모습을 보였다.“그 말은 제가 전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저희는 모두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까?”“어떤 수단을 쓰느냐는 그저 저희의 선택일 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서왕의 앞에 다가가 그의 허리띠에서 옥패를 살짝 빼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기억하십니까? 저희 셋은 서로를 지키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까.”서왕은 갑자기 기분 나쁜 한기를 느끼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모용란, 너는 정말 구제불능이야.”그는 단호히 말을 마친 후, 거침없이 돌담을 빠져나갔다.영비는 어두운 바위 속에 혼자 남아, 서왕의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속삭였다.“나는 널 용서했어, 정말로.”…자녕궁.영비가 궁에 돌아온 이후, 태후는 한 번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영비가 궁으로 돌아온 그날, 태후에게 와서는 여러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그중에는 과거의 행동을 용서할 것이며, 황제가 태후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태후는 영비의 말 속에서, 언젠가 복수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태후마마, 약을 드셔야 하옵니다. 어의께서 말씀하시길, 약을 드시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으실 거라 하였사옵니다.”태후는 깊은 갈색 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약을 밀쳐내며 말했다.“아
검은 옷을 입은 자는 감옥에 갇혀 철저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혀를 깨물어 자결하거나 독을 먹어 목숨을 끊을까 염려해, 그의 입에는 철제 입막이가 씌워져 있었다.봉구안이 감옥에 들어서자, 검은 옷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웃고 있는 듯 보였다.입막이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가면이 벗겨진 그의 얼굴이 봉구안의 눈에 들어왔다.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두 눈은 끝이 위로 치켜올라가 날카롭고 사납게 보였다.봉구안은 머릿속으로 무수히 그려보았던 원수의 얼굴을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그녀는 옥졸에게 명령했다.“그 입막이를 벗겨라.”쇠사슬이 풀리자, 검은 옷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장군, 요즘은 평안한가?”그는 마치 죄인이 아닌 듯,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듯 가벼운 어조였다.감옥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봉구안은 서두르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단회욱은 대체 어떻게 죽였지?”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검은 옷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이미 알고 있지 않소? 그는 그대에게 날아든 천수지독을 대신 막아내고, 독이 퍼져 죽었소.”봉구안의 눈빛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다.“왜 그가 내 목숨으로 5년을 바꾸었다고 말한 거지?”검은 옷은 일부러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눈을 위로 굴렸다.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그런 일이 있었나? 대체 어디서 들은 이야기요?”봉구안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그의 얼굴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며 단호히 외쳤다.“당장 말하거라!”검은 옷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태연히 답했다.“북대영의 전신의 손에 죽는다면, 영광일 뿐이오.”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봉구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네가 죽음을 원한다면, 내가 네 바람을 절대 들어줄 리 없다.”검은 옷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가 천옥이란 걸 알고 있소. 심문이든 고문이든, 하고
궁중에는 영비와 비슷한 모습의 여인들이 많았다.이 순간, 소욱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봉구안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다른 비빈들에게는 늘 냉담했던 그의 눈에, 눈앞의 여인을 향한 복잡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영비…”소욱의 미간에는 깊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그 순간, 그 여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다.“폐하, 소첩입니다. 소첩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소첩이 돌아왔나이다!”옆에 있던 녕비는 이를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반면, 현비는 품위 있게 말을 보탰다.“폐하께서 대승을 거두셨고, 영비마마께서도 돌아오셨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소욱은 어색한 듯 품에 안긴 여인을 살짝 밀쳐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곁에 서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영비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황후를 바라보며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의식한 듯했다.“황후마마.”봉구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꾸했다.“예를 생략하거라.”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본디 불가능한 일이었다.이로 보아 영비의 죽음에는 분명 감춰진 진실이 있는 듯했다.하지만, 봉구안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관한 일이었다.영비보다 그녀가 더 마음에 두고 있는 이는 바로 그 검은 옷을 입은 독인이었다.그녀는 반드시 단회욱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영화궁.봉구안이 돌아오자마자, 최 상궁은 급히 그녀를 따라와 영비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마마, 오늘 영비마마를 보셨사옵니까?”“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며칠 전부터 영비마마의 소식으로 궁중이 온통 뒤집혔다 하옵니다.”“듣자 하니, 그녀께서 과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태황태후마마의 비밀스러운 보살핌을 받아왔고, 이제야 완쾌되어 돌아오셨다 하옵니다….”봉구안은 마음에 짙은 불쾌함이 스쳤다.“물러가라.”연상은 그녀의 심중을 눈치챘으나, 감히 더 묻
쾅!봉구안의 주먹이 날아들자, 소욱의 턱이 빠져버리고 말았다.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그는 다음 날 밤, 또다시 장막을 버려두고 봉구안의 곁으로 몰래 들어왔다.이번에는 행동을 조심하여 그녀에게 손을 대거나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누워만 있었다.그 덕에 봉구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묵인하였다.하지만, 이내 그의 본성이 또 드러나고 말았다.며칠 뒤, 그들이 묵은 역참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밖에서는 두 사람이 화목한 부부처럼 보였으나, 문이 닫히자 봉구안은 바로 바닥에 자리를 깔기 시작했다.그러나 소욱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다.“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너는 침상에서 자거라.”봉구안은 단호히 거절했다.“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황제이십니다. 당연히 침상에서 주무셔야 합니다.”그러자 소욱은 느긋하게 반박하였다.“황제와 황후라면 본디 같은 침상을 쓰는 것이 맞지 않느냐. 이후 이 나라를 위해 힘을 써야되겠구나…”이 말에 봉구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러자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그러하오면, 이 바닥은 폐하께 양보하겠나이다.”소욱은 잠시 벽 쪽을 보더니 천천히 바닥에 누웠다.그는 조용히 누웠으나, 몸을 옆으로 돌려 침상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침상에 올라가자, 곧바로 비단 장막이 내려졌다.밤이 깊었고, 봉구안은 편히 잠들었다.그러나 한밤중, 그녀는 누군가 곁에 있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그곳에 누워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소욱이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밀쳤으나, 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닥에 쥐가 있어, 침상에서 자는 것이 안전하겠다.”봉구안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쥐라니요? 이는 분명 폐하께서 지어낸 거짓말이옵니다!”소욱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정말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쥐가 있더라도, 폐하께서 그것을 무서워하실 리가 없사옵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무섭
황성.진왕이 군량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증거가 명백했으므로, 서왕은 황제의 밀명을 받아 진왕을 감옥에 가두었다.진왕은 억울함을 외치며, 서왕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 주장했다.이 일은 태황태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하지만 태황태후가 나서도 서왕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한편, 황제가 이끄는 대군은 반송길에 접어들었고, 사수성을 나선 후 여정이 험해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군은 야영을 선택했다.봉구안은 말했다.“소첩은 마차 안에서 지내겠사옵니다.”같은 자리에서 소욱과 함께 지내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요며칠 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니 매우 불편했다.소욱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지치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들 부부의 냉랭한 분위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요 며칠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자주 다투시는 듯하네.”“그러게. 얼마 전까지는 화목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그중 한 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내가 들은 게 있네.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잘못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서 말해 보게.”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어제 말에 물을 먹이러 갔는데, 마차 안에서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사과하는 소리를 들었지.”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거짓말 말게나.”병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진짜라니까!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아직도 화났느냐? 어서 이리 와서 네 작은 손을…’”“닥치게!” 다른 병사가 발로 찼다.농담이라며 대꾸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그 병사는 엉덩이를 만지며 헤헤 웃었다.사실 그들 간의 대화는 그 병사가 지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황제가 황후에게 사과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였다.…마차 안.봉구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한밤중, 누군가 마차에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긴장하며 몸을
남대영.대군들은 황성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손덕방은 속으로 하늘에 감사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폐하께서 군영에서 무사히 돌아가시니, 하늘이 도우셨사옵니다!”그는 격하게 경례하며 소리쳤다.“장수 손덕방, 폐하와 황후마마의 출발을 배웅하겠습니다!”소욱은 올 때는 말을 탔으나,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기로 했다.마차 안에서 그는 손수 귤 하나를 까서 반으로 나눠 봉구안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이리 좀 먹어보거라.”봉구안은 아무런 표정 없이 얼굴을 돌리며 답했다.“먹고싶지 않사옵니다.”소욱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그래, 짐도 사실 귤 따위는 좋아하지 않지. 시큼한 것은 줄곧 입맛에 맞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황후와 짐의 입맛이 참으로…”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봉구안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인 귤을 집어들더니 한 입에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신과 맞서려 한다는 걸 알고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흥미를 느낀 듯, 미소를 지었다.최소한 어젯밤처럼 냉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때, 마차 밖에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급히 전해드릴 밀서가 있사옵니다!”소욱은 손을 내밀어 밀서를 받아들었다.그러면서 봉구안을 힐끗 바라보며 밀서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네가 먼저 보겠느냐?”봉구안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런 농은 그만두십시오. 어찌 중요한 정무를 두고 저와 농을 하는 것입니까?”소욱은 밀서를 열어 훑어본 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그는 곧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 짐이 네게 약조했던 큰 선물, 이미 준비해 두었다.”봉구안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그런 건 필요 없사옵니다.”소욱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녀를 제 앞으로 잡아끌더니, 허리를 가로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짐의 사람들이 독을 쓴 그 검은 옷을 붙잡았는데, 이 선물도 필요 없다 하겠느냐?”봉구안은 순간 놀라며 되물었다.“정말이십니까?”“짐이 거짓을 말하
소욱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의 귀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너, 왜 날 밀어내지 않는 거지? 혹시 내가… 죽을까 봐 그러는 것이냐?”봉구안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다면, 영원히 날 밀어내지 말거라. 아니면, 정말로 죽어버릴 테니 말이다.”그가 그녀 허리 뒤에 둔 손으로 그녀를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몸에 닿는 무언가를 느낀 봉구안은 깜짝 놀라 크게 몸부림쳤다.잔잔하던 수면이 순식간에 요동쳤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소욱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내가 맞은 화살, 그건 너를 위해 받은 것이다.”그가 말을 마치자, 품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소욱은 조금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장군, 너는 이렇게 정에 얽매이면 안 되는 사람이야.”…한편, 진한길은 항상 장막 밖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인의 억누른 신음소리…이 조용한 밤에 그 소리는 유난히 들썩였다.황제와 황후의 명이 없으니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다. 혹여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다.그래서,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들었다.장막 밖으로 새어나온, 마치 악마의 낮은 탄식 같은 그 소리를.“단회욱은 이미 죽었어. 내가 네 남편이고, 네 남자야.”“하지만, 왜 나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도 싫은 것이냐?”약 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장막 밖으로 나왔다.그러나 진한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제가 황후를 품에 안고 나온 모습이었다.진한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몸은 황제의 외투로 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며, 미약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반면 황제는 중의만 걸친 차림이었다.
진한길은 차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는 곁에 찬 패도를 풀어 봉구안에게 넘기고는, 단호히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봉구안은 대신 장막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잠시 후, 장막 안에서 살의가 어린 굵직한 목소리로 물러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봉구안은 즉시 안으로 들어갔고,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진한길이 물속에서 무릎 꿇은 채, 소욱의 허리띠를 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단호히 외쳤다.“멈추거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진한길은 대장부임에도 마치 큰 치욕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서 분명… 폐하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내가 말한 것은 그저 폐하 곁을 지키라는 뜻이었지, 손대거나 다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진한길은 이 말을 듣고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곧장 뒤로 물러나며 다급히 말했다.“그저 지키라는 말씀이셨군요…”알고 보니 그는 방금, 그 일을 마친 후 자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진한길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설명이 불분명했던 탓임을 깨달았다.그러니 진한길이 들어갈 때,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했던 것이다.그 순간, 소욱은 진한길에게 받은 충격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빠진 채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했다.봉구안은 즉각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에 들어가 그를 부축했다.진한길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황후마마, 차라리 신은 밖에서 지키겠사옵니다.”봉구안은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소욱이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보았다.그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마치 서서히 양기를 빼앗기는 사람처럼 온몸이 잔뜩 경직된 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하지만 아까와 같은 무력감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봉구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남대영.눈먼 무의가 장막 안으로 이끌려 들어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단을 내렸다.“과연 독입니다. 이는 확실히 고독이 맞습니다!”소욱은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통증을 참기 힘들 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봉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봉구안은 오로지 무의를 주시하며 물었다.“그대가 독을 진단했으니, 해독할 방도가 있겠는가?”무의는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비록 고독이 맞으나, 이는 제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독이라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이 말을 듣자 곁에 있던 진한길은 분노에 차 외쳤다.“고독이라면 남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는 소욱에게 청을 올렸다.“신하가 즉시 군을 이끌고…”“물러가라.” 봉구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진한길은 황제를 걱정하는 마음에 자제력을 잃은 것이었다.“신이 밖을 지키겠습니다.”무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뭔가 들으려는 듯했다.그는 자신이 지금 남제의 군영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봉구안은 이어 물었다.“그대가 고치지 못한다면, 다른 무의들은 고칠 수 있겠는가?”무의는 대답했다.“제가 해독할 수 없는 고독이라면, 남강 전체를 둘러보아도 이를 해독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봉구안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깊이 숙고하는 듯했다.잠시 뒤, 그녀는 오백을 불러들여 쉰 듯한 목소리로 명했다.“무의를 남강으로 돌려보내거라.”오백은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눈먼 무의는 나이가 많아 걸음이 더뎠다.장막 밖으로 거의 나갔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제가 감히 추측하건대 이는 음고입니다.”“부인, 남편 분께서 밤을 버티어 내고 내일 아침 해를 본다면, 희미하나마 생명의 불씨가 있을지 모릅니다.”봉구안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진한길에게 명령했다.“뜨거운 물을 데우라! 많이 데우도록 하라!”진한길은 이 시점에 이르러 황후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다.한 시진 뒤, 봉구안은 소욱을 데리고 임시로 마련한 수조로 향했다.거기엔 임시 장막이 쳐져 있었고,